1. 묵시록 개관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내용들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늘 있게 마련이다.
문학이라는 형태 자체가 하느님의 메시지를, 하느님의 계시를 인간들에게 전해주는 하나의 테두리 역할을 한다. 구체적인 민족에게, 구체적인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당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당신의 계획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성서 문학이라는 것은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하나의 매체로 교체되지만, 문자를 통해서 전달된 이 계시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문자가 창출되던 그 시대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바탕 위에서 객관적인 의미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고, 객관적인 의미 위에서 주관적인 재해석이 이루어질 때 신앙적 의미로써 메시지들이 자기에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개념들이다.
우리는 묵시록이 전해주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요약한다고 볼 수 있는 서론 부분의 인사말 부분과 머리말 부분, 그리고 인자에 관한 환시를 다루겠다. 이것을 통해서 묵시록 전체의 흐름을 잡아보고, 묵시록에 대해서 갖고 있던 기존적인 관념에 차이가 있으면 그것을 수정해 나가는 시간을 갖기로 하겠다.
여하튼 정확하게 인식하고 문학이라는 구조 속에서 전달된 그리고 시대적인 구체적 상황 속에서 전달된 이것을 오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주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대전제 속에서 묵시록이 쓰여진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고, 머리말, 인자에 관한 환시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 묵시록의 역사적 배경
환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며, 200주년 성서에서는 현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또 묵시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여러 가지가 있는데, 환시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조금은 경박한 것 같기도 하고, 현시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무게가 있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하지만,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관계가 없다.
정상적인 인간으로써 살아가면서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을 벗어나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전달된 메시지를 지금 받고 그것을 직접 보고 그것을 글로 쓴다는 것에서 환시내지 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현시 또는 환시가 현실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어떤 의미를 주기 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라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방식을 전달된 메시지는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전달된 방식의 의미가 드러난다.
여기서 보면 환시를 통해서 전체 내용이 소개가 되는데, 여기서 전달되는 환시는 늘 현실과 직결되는 즉, 현재의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메시지가 전해지고 있고, 하느님의 계획이 선포되고 있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표명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극히 실존적인 의미로 소개가 되고 있다. 바로 이 밑바탕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 의미는 깊어진다고 할 수 있다.
묵시록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한 마디로 한다면 그것은 순교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런데도 전반적인 내용을 보면은 마치 신앙 때문에 죽음을 눈 앞에든 사람들에게 죽음을 기꺼이 맞이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간직해 나가도록 권고하고, 격려하기 위한 그런 목적에서 쓰여진 것처럼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순교자들에 대해서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 묵시록에서 이처럼 순교자들에 대해서 수 없이 많은 표현들을 하고 있고, 순교자들을 특별한 위치에 올려놓고,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이런 글을 상당히 많이 적고 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렇게 많은 순교자들을 양산하게 한 그런 박해는 어떤 것이겠느냐? 어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하겠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제기해야 되는 질문이다.
사실 신약성서 시대에 즉,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형성되던 시대는 정치적으로 로마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시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로마제국은 방대한 영토를 자기 휘하에 집어넣으면서 당면한 문제로서는 황제의 절대권력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이것이 식민지화된 방대한 영토를 통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종교의식이라는 것이 등장하게 된다. 경신례라는 것이다. 이것은 원칙적으로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표명해 주는 매체였다. 그러니까 성서적 인간과 이방계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들의 관계는 어떤 사람들이 보던 간에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 매체는 늘 종교의식이라는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인간 편에서는 하느님께 제물을 바침으로써 신의 노여움을 푸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혜택을 입자는 것이다. 즉, 자기의 이익을 충족시키자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의식이다.
절대자를 하느님으로 놓고 볼 때 의식을 통해서 하느님의 노여움을 풀어주고 그래서 평온한 상태에서 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성서적 인간의 경우는 다르다. 하느님은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입장에서 거기에 대한 감사의 행위로 우리가 의식을 바치는 것이다. 그래서 감사의 행위이다. 경신례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행위이다.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달라고 빌고, 하느님께 대한 노여움을 풀고, 그래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는 매체가 아니다. 경신례는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행위로 당신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실존을 재확인하는 의미에서 바치는 관계의 실존이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잘못 인식을 해서 이방인들의 그런 요소를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의식, 경신례라는 것은 늘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것을 로마황제는 자기의 절대적인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갖다 도용한 것이다. 신의 점유물을 갖다가 쓴 것이다. 절대권력을 부가하려면 신성시할 필요가 있다. 살아있는 인간을 즉, 대등한 입장에 있는 인간을, 비록 왕이라는 하는 절대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인간의 본성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하느님 앞에서는 동등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신에게 바치는 종교의식을 빌어다 씀으로써 인간과 동등한 위치가 하느님의 위치로 올라감을 뜻한다. 神性時하는 것이다.
로마황제가 자기가 점령한 이 속국을 모두 하나로 묶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것은 절대권력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의식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박해를 받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로마의 어떤 황제 시대에 과연 이런 황제의식이 보편화되었느냐? 그리고 강요되었느냐?
네로 황제가 로마 시를 불질렀던 사건에 백성들의 원성을 들으면서 그것을 모면하기 위한 방편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방화의 진범으로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여기서 네로 황제가 가했던 박해는 지엽적인 박해이다. 즉 로마라는 지역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이다.
또 하나 들 수 있는 것은 도미시아누스 황제의 탄압 정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도미시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할 수 있는 새로운 법령을 제정해서 조직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다는 근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로마법에서 보면 상원의 허가 없이 어떤 식으로도 새로운 종교를 시작할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종교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에게만 주권과 영예와 권능과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권력 즉 모든 것의 출발점이 하느님에게 있기에 하느님에게만 경배를 드릴 수가 있다. 바로 이런 관점 하에서 살았다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결국 로마제국에서 구축하고자 했던 로마황제의 절대권력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로운 종교로서 그리스도교는 그 자체로서 새로운 종교를 시작했다는 자체로써 박해를 받을 수 있는 근거를 스스로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본질적인 이유는 로마황제의 황제의식을 바쳐야만 되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하느님에게만 주권이 있기에 하느님에게만 경신례를 바쳐야 된다는 행위가 로마황제의 권력을 거부하는 것이고,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것은 박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법적으로 뒷받침이 되어서 어떤 종교의식 또는 경신례라는 매체를 황제의 절대권력을 구축하는데 이용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것을 신적인 전용을 빌어다 썼다는 점에서 누구도 여기로부터 예외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절대적인 선택 앞에 놓여진 것이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 것이다. 하느님이냐? 아니면 로마황제냐? 하는 것이다. 황제에게 강압에 의해서 예를 바침으로써 사회 안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을 보장받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로마황제의 절대적인 권력을 드러내는 이 의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이다. 그 사회로부터 스스로 도태되는 것을 자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로마 시민으로서, 로마의 속국에 속해 있는 시민으로서의 적법성을 확인받을수 있는 유일한 길은 황제의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로마 시민으로서 비록 속국이지만 로마 황제가 권력을 행사하는 그 울타리 안에서 정상적인 시민으로서 살기 위한 적법성은 황제의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이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의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신앙인들의 경우에는 절대절명의 선택 앞에 놓여지게 되는 것이다. 황제의식을 거행하면서 정상적인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하느님께만 경신례를 드릴 수 있다라는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 속에서 죽음까지도 각오하면서 로마에 실정법을 어길 것이냐? 라는 절대절명의 선택 앞에 놓여져 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과연 용기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사실 요한 묵시록에서 나타나는 이 전례적인 내용들을 보면 권력의 권한과 한계를 초월해서 무제한적으로 권력을 합법화하고 정당화시켜 나가는 전제주의에 대해서 집요하게 항거하는 저항의 일침이요, 신앙의 절규인 것이다. 황제의 절대권력은 충만하다. 성서적인 개념으로 본다면 권력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세상 편에서 본다면 권력은 백성들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시된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권력이 지닌 한계와 권한을 초월해서 무제한적으로 권력을 합법화시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대항하는 저항의 외침이 바로 묵시록에서는 전례적인 내용으로써 그대로 담겨져 있고, 그러한 전제들을 통해서 항거할 수 있는 절규가 담겨져 있다. 그러기 때문에 묵시록의 메시지를 접하는 우리로써는 초세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강요받았던 절대절명의 선택 앞에서 겪어야만 했던 인간적 갈등과 고뇌의 상황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예수님 자신도 하느님을 섬길 것이냐? 아니면 만물을 섬길 것이냐? 라고 하시면서 둘 중의 하나를 분명하게 선택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평상적인 삶 속에서 이 선택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어떤 큰 효과가 직접적으로 나에게 미치지 않은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에 그 선택의 시급성이나, 선택의 중요성에 대해서 별로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다. 준엄하게 경고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매 순간 듣고 있지만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내 삶에 직접적으로 어떤 결과가 드러나지 않는 다는 점에서 그저 준엄한 목소리는 그런 목소리로만 들려질 뿐 내 삶 속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의 신앙인의 경우이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삶과 죽음이냐는 절대절명의 상황으로 선택에 따라서 죽음을 겪어야만 하는 최후의 순간을 맞을 수도 있다.
복음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현재성을 띠고 있다. 초세기의 상황을 반영해 주는 것으로 끝나는 묵시록의 메시지가 아니고, 여러 가지 선택 앞에서 신앙적, 여러 가지 현재 상황 속에서 신앙적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우리 역시도 복음적 메시지 앞에서 매 순간 철저한 결단 있는 선택을 해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현실과 묵시록의 상황을 같이 비교해 볼 때 묵시록의 메시지가 생명력 있는 메시지로 다루어질 수 있다.
사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보면 그리스도교 신자의 직무는 세상 끝나는 날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 세상 안에서 담대하게 증언해야만 한다. 그러나 묵시록 관점에서 온전한 증언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순교의 순간으로 나타난다. 순교자가 될 때 비로소 그 증언이 완전한 완성된다는 것이다.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 묵시록에서는 「순교자」라는 개념과 「증언자」라는 개념은 다 같은 개념이다. 그리고 용어 자체도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순교자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목숨을 흔쾌히 내놓으면서까지 자신이 믿고 고백하는 복음을, 진리를 증언하는 것이다. 바로 증언의 행위 속에는 진리를 위한 피흘림이라는 구체적인 행위가 수반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묵시록은 혁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혁명적’이라는 이 용어 속에는 최선을 다해서 인간이 자신 안에 자리하고 있는 근원적인 자유 곧 하느님께서 주신 영의 자유를 수호해야만 한다는 의지의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면, 묵시록은 분명 혁명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로마제국의 막강한 권력에 대항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무기력한 저항이 외적으로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은 이렇게 외적으로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저항의 외침과 신앙의 절규가 종국에 가서는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권력을 눌러 이기고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초세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절박한 선택 앞에서 죽음까지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세속의 권력자였던 빌라도 앞에서 당당하게 증언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에 동참하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믿고 고백하는 주님의 뒤를 따라갈 수 있다는 인식이 죽음의 공포를 벗어버리고 황제 의식을 거부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이들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또한 승리에 동참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승리에 동참한다는 것은 이와 같이 변질될 수 없는 과정이 있기에 이들은 선택 앞에서 과감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택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상황이 묵시록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묵시록은 끊임없는 희망을 창출해주고 희망을 부여해 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시대에서 상당히 많은 갈등 속에서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희망의 메시지는 이 안에서 무궁 무궁하게 찾을 수 있다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서 묵시록에서 주님이신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항시 역사 안에 현존하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 함께 동참하시는 분으로 강조되고 있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그분의 승리에도 참여하게 된다는 이러한 믿음 속에서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고 이것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연대성에 관한 문제이다.
바오로 사도가 끊임없이 서간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신앙인들에게 요한 묵시록은 그야말로 “묵시”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 날이 되면 즉, 하느님께서 세상을 완성하실 그 날이 되면 결과적으로 선택을 통해서 죽음을 감수해야만 했던 이런 사람들에게 최종적인 승리가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신앙인들은 믿었던 것이고, 이러한 점에서 묵시록에서 전달된 예언의 메시지는 하나의 『묵시』가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완성되는 날 승리자로서 그들을 들어올리시게 될 그런 희망을 부여해주는 메시지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인들은 경신례 중 특별히 성체성사, 세례성사를 거행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현존하고 계시다는 것과 그런 경신례를 통해서 주님과 온전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한다. 이때 묵시록은『전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묵시록에서는 묵시와 전례라는 문학 유형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전례라는 것은 세상이 완성될 때, 즉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성취될 때 누리게 될 모든 것을 앞당겨 체험하게 하는 현장이다. 전례는 능동적으로 세상에서 용기 있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원동력이다. 신앙인 들에게 최종적인 승리가 확실하게 보증되어 있다면 신앙인 들은 이 승리가 완성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그 에너지가 전례이다. 전례는 에너지가 공급되는 그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현존의 체험을 이 순간 이루어 가는 만남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전례는 외적인 하나의 의식이 아니라, 이 전례는 묵시를 현실화하는 장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생명력으로 충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요, 하느님의 어린양이요,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그런 점에서 예수께서 이루신 업적은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출애굽을 보여주는 행위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구원역사를 완성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시는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와 더불어 살아가는 신앙인 들의 삶은 죽음을 통해서 생명에로 건너가는 출애굽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의 연장선상에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삶이라는 사막을 횡단하는 신앙인 들을 양육하시고, 언약의 땅인 낙원에로 그들을 이끌어 가신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은 오늘, 이 시점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현존하고 계신 분으로 묵시록에서는 소개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전례와 묵시가 기묘하게 합해져 있는 묵시록 안에서 우리는 현재성을 띤 복음의 심오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고, 우리는 여기서 희망을 퍼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절명의 선택 앞에 놓여 있는 신앙인 들에게 이런 현재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될 때 바로 그 사실은 선택을 강요받던 신앙인 들에게 용기 있게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성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었고, 하나의 힘이 될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