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무덤 이야기 (20장 1-10절), 부활

 



빈 무덤 이야기 (20장 1-10절)


빈 무덤 발견에 관한 이야기는 부활 신앙의 첫 번째 서광이 비치는 내용을 전해주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신비하게도 부활 주일의 전례를 보면 매년 요한 20,1-10을 읽는다. 부활이라는 당위, 그때에는 바로 이 빈 무덤 발견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데, 이미 부활하신 사실을 기쁜 소식으로 선포해야 될 그 시점에서 교회는 무슨 이유로 이 빈 무덤 발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는가 하는 점이 좀 의아스러운데 이점은 나중에 규명해 보기로 한다.




가. Text의 특수성과 한계


빈 무덤 발견에 관한 이야기는 루가 24,22-24 즉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의 사건을 서술체 형식으로 다시 회상시켜주는 이야기라고 보겠다. 즉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에게 한 말을 풀어서 요한 복음 저자는 다시 빈 무덤 발견에 관한 이야기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러면 첫 번째로 우리가 요한 복음이 전해주고 있는 빈 무덤 발견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주고 있는 특수성, 그리고 어디까지 한계를 설정해야 할 것인가 하는 두 가지 문제를 보도록 하겠다.




1. 특수성


요한 복음서에서 전해주는 이 이야기는 루가복음에서 묘사하고 있는 내용과 비교해 볼 때 두말할나위없이 요한적 특수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몇 가지 특수성을 지니고 있는 모습을 지적해 보면


①요한 20,1-2에서 보면 막달라 여자 마리아만이 이 장면에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루가 24,22-24에서 보면 몇몇 여자들 즉 다수의 여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②다음으로 요한이 전해주는 빈 무덤 발견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의 환시를 전혀 전해주지 않는다. 요한 복음에서는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이 천사의 발현은 제자들이 무덤을 방문한 후인 20,13이하에 가서 비로소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반해서 공관복음에서는 여인들이 무덤을 방문한 사건을 전해주는 바로 그 장면에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의 발현을 전해주고 있다.


③제자들이 무덤을 방문하게 되는 것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을 접한 후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루가 24장은 12절 이하에서 보면 여인들이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한데 뒤이어서 제자들이 무덤을 방문하게 된다.


④루가복음서에서는 베드로만이 무덤 방문 이야기 속에 현존하고 있는 반면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가 베드로를 동행하고 있는 그러한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2. 한계


이렇게 4가지 점에서 공관복음에서 전해주는 내용과 요한 복음이 전해주는 내용이 차이점을 지니고 있고 요한적 특수성이 여기서 보여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부활주일의 전례에서는 1절에서 10절까지 읽는 것이 아니고 1절에서 9절까지만 읽는다. 그러나 우리는 10절까지를 한 단락으로 보고 무덤을 방문하는 이 이야기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ꡐ무덤에 가다ꡑ, ꡐ집으로 가다ꡑ 등에서 ερχομαι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이 1-10절에서 11번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장면인 20,11-18 즉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발현하시는 이 내용 역시도 주간 첫날 새벽에 무덤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그 장면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20,1-18을 연계해서 봐야하지 않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20,11이하에서 묘사되고 있는 행위는 20,1-10에서 묘사된 행위와 더이상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내용으로서 20,11이하에서는 천사들의 발현과 부활하신 분 자체의 발현에 관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다. 천사들의 발현, 부활하신 분의 발현, 이것은 현존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20,1-11, 빈 무덤 발견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현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부활하신 분의 부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 맥락적 이해


우선 내용을 상세하게 살펴보기 전에 요한 20,1-10이 본문전승 과정에서 어떤 특별한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그래서 맥락적인 차원에서 20,1-10이 어떻게 이 자리에 배열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맥락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 빈 무덤 발견에 관한 이야기는 파스카 체험의 첫 번째 시기이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20,1-10이 전해주는 사건들을 염두에 두고 20장 전체를 4부분으로 나눈다. 빈 무덤을 발견하는 20,1-10 그 뒤를 이어서 세번의 발현, 내지는 그리스도의 현현에 관한 이야기. 첫 번째 발현 내지 그리스도의 현현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이루어지고 있다(20,11-18). 나머지 두번은 제자들에게 즉 한번은 20,19-23 또 한번은 토마에게 발현하신 20,24-29. 이렇게 4장면으로 나누어지는데 일부 학자들은 문학적 순서를 알려주는 내용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4개의 장르로 나누어지는 그 배후에 각 장면이 서로 상응하는 주제들이나 문장형식으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서 흔히 교차대여법적인 구조 속에서, 또는 교환 반복적인 구조 속에서 이 이야기가 형성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4가지 내용이 서로 상응하는 주제들로서 연결되었다.


A. 1- 10  무덤에 찾아간 두 제자


       8절  보고 믿었다


    B. 11-18  막달라 마리아에게 발현


       18절  나는 주님을 보았다


    B’ 19-25  토마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에게 발현


       25절  우리는 주님을 뵈었다


A’ 26-29  토마가 보는 앞에서 제자에게 발현하심


   29절  보고 믿었다





















행위


마리아


제자들


방문


1a


3-4


발견


1b


5-9


떠남


2


10


이것은 문학적인 지표에 근거해서 본 것이고 다른 판단기준에 근거해서 보면 다르게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20,1-10에서 우리는 두시기에 걸쳐서 무덤을 방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선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을 방문하고(1-2절), 두 번째 단계에서는 제자들이 무덤을 방문한다(3-7절). 이때에는 제자들이 예수를 찾아서, 즉 예수를 향해서 무덤을 가는 것이고 그 뒤를 이어서 두시기에 걸쳐서 발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발현하시고(11-18절), 두 번째 단계에서는 제자들에게 발현하신다(19-29절). 이 경우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나아가신다. 그러니까 첫 번째 빈 무덤 발견의 이야기에서는 주체가 제자들이 되는 것이고 11절 이하에서는 주체가 예수가 된다.


어쨌든 요한 20,1-10 이 내용은 파스카 체험의 첫 번째 시기처럼 소개되고 있다. 이 장면은 20,28에서 ꡒ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ꡓ이라고 예수를 고백한 토마의 이야기를 소개해주는 20장이 마지막 종착지라고 할 때 신앙적인 상태에서 일종의 제로상태를 묘사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ꡒ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ꡓ은 요한 복음이 지향하고 있는 예수께 대한 신앙고백의 최고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요한 복음이 종결된다고 본다면 빈 무덤은 신앙적으로 제로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활의 첫 번째 파스카 체험의 첫 번째 시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20,1-10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구조적으로 병행하는 그런 형태로 4개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병행적인 구조에 따르는 동일한 요소들이 두번에 걸쳐서 우선,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의 관계, 그리고 두 제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이야기는 서로에 의해서 체험된, 무덤을 향한 발걸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무덤을 방문하고 그 다음은 무덤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리고 무덤을 떠난다. 그래서 그런 행위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마리아의 행위와 제자들의 행위가 상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전례에서는 20,1-9만을 읽지만 우리는 20,1에서 10절까지를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덤을 방문하기 위해서 발걸음을 내딛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제자들의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서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내용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무덤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하는 점에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제자들의 경우가 동일한데 그 동일한 모습들을 표명하기 위해서 ꡐ보다ꡑ라는 동사를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무덤을 떠나는 행위로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제자들의 경우가 동일하게 묘사되지만 그 동작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용어들도 동일하게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도표를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은 빈 무덤 발견에 관한 이야기는 무덤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무덤(μνημειον)이라는 명사가 빈 무덤 발견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7번이나 되풀이 사용되고 ερχομαι(가다)라는 동사가 11번 사용되는데 결국 ꡐ가다ꡑ라는 동사가 무덤과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으므로 무덤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행위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가하면 무덤을 중심으로 해서 행위들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 내용의 중심적인 부분은 그 무덤 안에서 무언가를 확인한 두 번째 장면, 즉 발견에 관한 장면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이야기 전체 내용은 상당히 함축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무덤 방문이라고 하는 첫 번째 부분(1a,3-4절)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겠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가 2절에서 ꡒ달음질쳐서 다른 제자들에게 갔다ꡓ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러한 마리아의 보고에 의해서 제자들은 무덤을 방문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자들은 무덤에서 무언가를 보게 된다.


또한 무덤에서의 발견에 관한 내용은 무언가는 보았지만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본 것과 제자들이 본 것 사이에는 상당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발견되었다는 점에서는 지속성을 띠지만 내용적인 면에서 보면 제자들이 본 것이 마리아가 본 것보다 훨씬 더 진전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부활의 표징으로서 무엇인가를 보았다고 하는 이것은 3단계를 거쳐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선 1b에서 보면 마리아는 밖에서 열려진 무덤으로 들어온다. 두 번째로 5절에서 보면 사랑 받는 제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처럼 역시 밖에서 마리아가 본 것 외에 염포를 하나 더 보고 있다. 세 번째로 베드로는 급기야 6-7절에서 보면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개켜져 있던 염포와 수건을 본다. 이렇게 세 단계에 걸쳐서 본 것에 대한 결과는 8절에서 ꡒ보고 믿었다ꡓ라고 하는 이 사랑 받던 제자의 말속에서(제자가 인지한 그 내용 속에서) 절정을 이룬다. 현재 소개되고 있는 상태에서 볼 때 이 이야기는 전체가 이런 관점 즉 ꡒ보고 믿었다ꡓ라고 하는 최종적인 관점을 향해서 나아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다. 전승과 편집


그러면 이제 전승과 편집에 관한 점을 잠시 살펴보겠다. 이미 말했지만 요한 복음이 전해주는 빈 무덤 발견에 관한 이야기는 부활 사건을 전해주는 공관복음의 이야기들과 비교해 볼 때 일련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20장 1절


우선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을 방문하는 모습을 기술해주고 있는 20,1은 여인들이 무덤을 방문하는 공관복음의 이야기들과 관련을 맺고 있다(마태 28,1-2; 마르 16,1-4; 루가 24,1-2). 그래서 무덤을 방문하는 모습을 중심으로 해서 요한 복음과 공관복음을 비교해 볼 때 공통된 요소들은 이렇다. 우선 시간적 상황이 묘사된다는 것이 하나의 공통된 시간으로 나타난다. ꡒ아직 어두운 새벽ꡓ, 그리고 ꡒ주간 첫날밤ꡓ. 그리고 인물들, 인물들 중에서도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공관복음서, 세 복음서 전체 안에, 그리고 요한 복음 안에서도 나타난다. 그 다음에 여인이(즉 막달라 여자 마리아) 무덤을 방문했다는 것과 무덤을 막았던 돌이 굴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이 내용이 요한 이야기와 공관 이야기가 동일한 모습으로 전해주고 있다. 더 나아가서 요한 복음서가 전해주는 이야기는 공관복음서가 전해주는 이야기 속에서 사용한 용어들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다: ꡐ주간 첫날ꡑ이라는 표현(요한 20,1; 루가 24,1; 마르 16,2), ꡐερχομαι : (무덤으로) 가다ꡑ(요한 20,1; 마르 16,2; 루가 24,1), ꡐεις το μνημειον : 무덤을 향해서, 무덤으로ꡑ(요한 20,1; 마르 16,2), ꡐβλεπει : 보다ꡑ(요한 20,1; 마르 16,4), ꡐ돌이 치워져 있었다ꡑ(요한 20,1; 루가 24,2)


이렇게 무덤방문 이야기에서 공관적 이야기들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내용들이 적지 않다는 점, 그리고 요한 복음에서 무덤방문을 묘사해주는 이 내용 속에서 사용된 용어들이 공관복음 안에서 그대로 발견된다는 점, 이러한 사실은 빈 무덤 발견 이야기 전체에 숨겨져 있는 하나의 원천에 요한 복음서나 공관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든지, 아니면 요한 복음서와 공관복음서가 상호 종속되어 있다는, 이와 같은 사실에 의해서만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 빈 무덤 발견에 관한 이야기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들은 어떤 하나의 원천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원천에 요한 복음서와 공관복음서가 같이 종속되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요한 복음서와 공관복음서가 상호 종속되어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사실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20,1에서 주간 첫날 여인들이 예수의 무덤을 방문한 것을 묘사해주는 그러한 옛 전승이 바로 이 내용 속에 반영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보는 견해이다(예: 레이몽 브라운, 쉬나켄부르그, 쉴쯔). 그러니까 옛 전승은 매우 간결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서 빈 무덤에다가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여인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을 부여하는 천사의 발현 내용은 내포하고 있지 않았던, 아주 간략한 전승이었을 것이다.




2. 20장 2절


일부 학자들은 2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복수 1인칭, ꡐ우리ꡑ라는 표현을 굉장히 높이,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표현이 요한 20,1에서처럼 막달라 여자 마리아 이 여인만이 무덤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공관복음서 속에서 묘사해주고 있는 것처럼 일련의 부인들이 무덤을 찾아왔다고 하는 전승을 요한 복음서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주고 있는 하나의 표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복수 형태로 사용했다고 해서 꼭 공관복음의 전승을 자동적으로 갖다 썼다고는 볼 수 없다. 요한의 편집과정 속에서도 복수 1인칭을 얼마든지 갖다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냐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1절에서, 특히 2절에서 요한의 편집자국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ꡒ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로 갔다ꡓ라는 표현에서 ꡐ누구누구에게로 가다ꡑ라고 하는 이 동사는 요한 복음에서 35번이나 사용되고 있고 또 시몬 베드로라는 호칭 자체는 마르코에서 2번, 마태오, 루가에서는 각각 1번씩 사용되지만 요한 복음서에서는 17번이나 사용된다. 그리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는 표현은 요한 복음서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ꡒ치워져 있었다ꡓ라는 동사, ꡒ보았다ꡓ, (어디다 옮겨 놓았는지)ꡒ알지 못한다ꡓ-이런 동사는 요한이 아주 즐겨 사용하는 동사들이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복수 1인칭으로 썼다해도 이것이 요한의 편집작업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공관복음전승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요한 20,2 역시도 복음서 저자의 편집 작업에 의해서 재구성되고 보완된 옛 전승을 반영시켜주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3. 20장 3-10절


그러면 나머지 부분인 20,3-10은 어떻겠는가. 이 부분 자체도 공관복음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겠지만 루가 24,12의 내용과 공통된 요소들을 상당수 많이 가지고 있다. 베드로가 무덤을 찾아 왔다든지 무덤 안에서 염포를 발견했다든지 그리고 무덤에서 떠났다든지 하는 이런 내용들은 요한 복음이나 루가복음 여기에서 동일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 그것뿐만이 아니고 루가 24,12에서 사용되고 있는 21개의 단어들 가운데서 반 이상이 요한 20,3-10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니까 상호종속이라는 관점에서만 이러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무덤이랄지, 무덤으로 들어가서 염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든지 자기들의 집으로 물러갔다든지 이런 것들이다.


그래서 요한 20,3-10 역시도 1-2절과 마찬가지로 아주 간결한 내용으로 되어 있던 옛 전승을 반영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역시 루가복음에서도 그 전승을 반영시켜주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 간결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옛 전승은 신앙적인 반응,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신앙적인 반응은 전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빈 무덤을 발견한 이후에 베드로 혼자, 아니면 막달라 여자 마리아나 다른 제자들과 함께 하면서 베드로가 당황하는 그러한 모습만을 전해주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초기 전승에다가 사랑 받는 제자의 믿음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복음서저자에 의해서 이 내용이 재구성되거나 손질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초기전승과 지금 나타난 내용과의 비교를 통해서 편집과정에 대해서 생각해 본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이 이야기에서 보면 전혀 기대치 않았다는 의미에서 예수 부활이 지니고 있는 놀라운 성격,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통해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무엇을 전달해주고자 하였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면 편집을 통해서 이루어내고자 했던 그 의미가 분명하게 파악이 될 것 같다.


이제 이 이야기의 전개 순서에 따라서 몇 가지 내용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라. 내용 분석


1. 20,1-2 (무덤에서의 마리아)


무덤을 방문한 막달라 여자 마리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내용이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을 방문한 이러한 사실을 전해주는 이 첫 번째 구절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조차 매우 간결하고 간략하게 소개되고 있다. 마리아는 무덤에 와서 무덤이 열려져 있는 것을 보고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매우 단순한 결론을 내린다. 이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천사들을 통해서, 부활하신 분을 통해서 부활사실에 대해서 주석 하는 그 어떤 흔적도 남겨주지 않고 있다. 그래서 마리아가 무덤을 방문하는 이 사건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어두움에 관한 문제이다. 20,1에서 보면 ꡒ주간 첫날, 아직 어두운 새벽에ꡓ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미 ꡒ아직도 어두운 새벽ꡓ이라는 표현은 주석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어두운 새벽이다 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희미한 어두움이 아니고 칠흙같은 어두움을 문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희랍어의 ꡐσκοτιαꡑ가 지니고 있는 의미는 요한 복음서에 있어서는 칠흙같은 어두움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아주 이른 시간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면 요한은 주간 첫날이라는 것에다가 아직도 어두운 새벽이라는 이 주석적인 표현을 왜 첨가했겠는가? 첨가했다고 한다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복음서저자는 아직도 어두운 새벽이라는 말속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겠는가? 이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요한 복음서 저자가 아직도 어두운 새벽이라는 표현을 주석적으로 달아 놓으면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고 하는 그러한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ꡐσκοτιαꡑ라는 용어는 요한 복음에서 7번 나오는데 6,17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와 반대 용어인 ꡐφωςꡑ 즉, ꡐ빛ꡑ이라는 용어는 요한 복음 안에서 23번 사용되는데 한번도 예외 없이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용어 차원에서 본 것이다. 그 다음 12,46에서 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 ꡒ나는 빛으로써 세상에 왔습니다. 그리하여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두움 속에 머물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ꡓ 이것은 어두움의 상징주의가 인격화되어 있는 그러한 장면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어두움은 예수께 대한 불 신앙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20,1-10 특히 이 가운데 2절과 9절을 보면 ꡐ누군가가 무덤에서 주님을 빼돌렸다ꡑ하는 이야기, 그리고 9절에서 보면 제자들의 상황을 전해주면서 ꡐ아직도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ꡑ라는 이 표현을 통해서 보면 막달라 여자 마리아나 제자들이 아직 부활 신앙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부활 신앙에 이르지 못한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제자들의 상황은 어두움의 시기이다. 모든 것은 아직 무덤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고 관심은 죽음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 빠스카 신앙의 조명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 다음 또 하나의 논거 자료로서는 요한 복음서 다른 곳에서 보면 상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유사한 다른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간 것이 대낮이 아니고 밤이었다.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 속에서 핵심은 신앙의 문제였다. 그리고 3,19에서 빛과 어두움에 관한 주제가 나오는 데 이것은 두말할 여지없이 신앙과 불 신앙을 의미한다. 3,19에서 보면 ꡒ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였다.ꡓ이다. 여기서 빛과 어두움은 신앙과 불 신앙이다. 또 13,30에서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기 위해서 떠난 시간이 어두운 밤이었다. 즉 불 신앙의 구체적인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이런 근거들을 통해서 보면 요한은 분명 ꡐ아직 어두운 새벽ꡑ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역사성이 배제된 것은 아니다. ꡐ아직 어두운 새벽ꡑ이라는 이 표현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의미에다가 상징적인 의미를 하나 더 부여했다. 그러니까 이중적인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부활 신앙의 빛이 그 모습을 발하는 그때까지 죽음의 분위기가 아직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첫 순간부터 지적을 하면서 이 이야기를 전해준다. 


두 번째로 2절, 무덤에서 누군가가 주님을 빼돌렸다는 것. 무덤에 도착한 마리아는 무덤이 열려져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열려져 있는 무덤을 확인한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더이상 무엇인가를 확인해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돌이 굴려져 있었다고 하는 그와 같은 사실 때문에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을 훔치러 온 사람들에 의해서만 그렇게 될 수 있었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자연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입증이 된다. 19세기 나자렛에서 발견된 빈 무덤을 통해서 보면 무덤을 파헤치는 일이 1세기 팔레스틴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그래서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도굴하는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서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사형까지도 벌하는 준엄한 명령을 내리기도 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리아로서는 누군가가 주님을 훔쳐갔다고 하는 자연적인 해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직은 신앙적인 차원에서 보면 어두움의 시간이다. 신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이 아니다. 육체도 영성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러한 시간이다.




2. 20장 3-10절(무덤에서의 제자)


무덤을 방문한 제자들의 모습을 전해주는 3-10절을 보면, 마리아가 무덤을 방문한 이야기하고 제자들이 무덤을 방문한 이야기가 원초적인 전승 속에 이미 합쳐져 있었는지, 아니면 편집자가 그 두 이야기를 합쳐 놓았는지를 구분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확실하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재상태에서도 두 이야기가 기가 막히게 잘 연계되고 있고 20,1-10 전체가 일관성을 놀라울 정도로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서 20,3-10 여기에서 묘사되고 있는 제자들의 무덤을 향한 발걸음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행보와 동일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마리아는 무덤을 보러 갔고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무덤을 보러 간다. 모든 것은 세단계로 이루어진다. 우선 두 제자들이 함께 무덤을 방문하는 데(3절) 4절에 보면 무덤에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사랑 받던 제자이다. 그리고 6절에 가서 베드로가 도착한다. 그러나 제자들이 무덤을 방문하게 되는 것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행보와는 동일하지만 체험적인 차원에서 보면 상당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무덤으로 갔다. 두 제자들의 경우에는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에르코마이’와 ‘에이스에르코마이’. 이 ‘들어가다’(에이스에르코마이)라는 동사가 제자들의 행동을 지칭하면서 세번 사용되고 있다. 5절에서는 사랑 받는 제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무덤에 들어가지 않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6절에서는 베드로가 그 뒤를 따라가서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8절에서 보면 마지막으로 사랑 받는 제자가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경우는 극히 자연적으로 무덤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자연적인 해석을 했다. 여기서는 자연적인 설명은 재고되어야 하는 것, 즉 자연적인 설명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그러한 상태를 알아볼 수 있다. 빈 무덤 발견은 점진적인 세단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선 마리아는 바깥에서 돌이 치워져 있다는 사실만을 2절을 통해서 확인했다. 사랑 받던 제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보다 한 걸음 더 앞서간다. 즉 역시 밖에 있긴 하지만 그러나 몸을 안으로 기울여 봄으로써 염포가 놓여져 있는 것을 본다. 베드로는 사랑 받던 제자보다 한 걸음 더 앞서 간다. 즉 6절을 통해서 보면 무덤으로 들어가서 염포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이야기 자체가 상당히 다이내믹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신비를 향해서 가는 길 자체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보겠다. 바로 요한 복음은 끊임없이 신앙의 성숙은 단계적인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주창했는데 신비에 접근하는 방식도 단계적인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 6절과 7절을 통해서 베드로가 빈 무덤에서 본 것을 상세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전해주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도 그를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염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또한 그분의 머리를 덮었던 수건은 염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 수건이나 염포가 놓여져 있던 위치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는가. 우리 본문에서는 염포나 수건이라고 하는 이 사물들이 그 상태 그대로 놓여져 있다고 강조해주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생각한 것처럼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이런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생각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예수의 시신을 누군가가 들어와서 훔쳐갔다고 한다면 예수를 싸고 있었던 염포나 수건은 재상태, 제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본문은 원상태의 빈 무덤을 보고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전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들은 20,6-7을 통해 묘사된 내용을 통해서 더이상 자연적으로 설명을 해야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럼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가? 분명히 예수는 묻혔다. 그런데 수건과 염포가 개켜져서 제자리에 놓여져 있었다. 누군가 훔쳐간 흔적이 전혀 없었다. 자연적으로 설명할 길이 더이상 없다. 오직 믿음, 신앙에서 유래하는 설명, 내지는 주석, 이것만을 위해서 문은 개방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두 번째로 20,8에서 “그제야 무덤에 왔던 다른 제자들도 들어와서 보고 믿었다”라고 이야기한다. 무덤에 왔던 두 제자 가운데 예수께로부터 사랑 받던 다른 제자는 신비를 느낀 첫 번째 사람이다. 바로 이 제자와 더불어 빠스카 신앙의 희미한 빛이 발산되기 시작한다. 20,1-7  이 내용은 점증적인 세단계를 통해서 신비를 향해서 걸어가는 그 도정에 대해서 묘사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20장의 나머지 계속되는 이야기 역시 점증적인 세단계를 통해서 그 제자가 인지한 것을 묘사해준다.


우선 8절에서 사용된 ‘보다’라는 동사. 사랑 받던 제자의 빈 무덤의 발견에 관한 것으로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제자들의 깨달음을 지칭하기 위해서 두번 더 사용될 그런 동사이다(20,18과 20,25). ‘나는 뵈었습니다’, ‘우리는 뵈었습니다’, 이런 표현 속에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제자들이 죽음으로부터 다시 사신 분, 부활하신 바로 그분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 받던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본 것이 아니고 빈 무덤만을 보았고 그리고 주님을 믿었다. 바로 이점이 사랑받던 제자와 주님의 부활을 본(직접 체험한) 막달라 여자 마리아, 다른 제자들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점이다. 그러니까 사랑 받던 제자가 이처럼 부활하신 분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 빈 무덤만을 보고 믿었다고 하는 것이 복음서저자의 눈으로 볼 때 하나의 신앙의 표본적 행위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랑 받던 제자가 보여준 이러한 태도는 부활신앙의 문을 연 첫 번째 사람으로써 9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셔야 한다고 하는 성서 말씀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예수의 지적 말씀을 생각할 때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공관복음서 속에서 보면 어떤 인간적 증인들도 부활의 관점에 문을 열지 못했다. 오직 천사가 설명한 내용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독히 예수께로부터 사랑을 받던 제자는 천사의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그리고 부활하신 분의 발현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도 부활신앙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다. 그 제자는 아직은 그가 인지하고 있는 신앙을 증언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첫 번째 믿었던 그러한 사람의 자격으로서의 증인이다. 그에 반해서 마리아와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희미한 어두움의 시간이라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부활절날 이 본문을 읽는 것은 바로 부활 신앙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보지 않고 주님을 믿는 그런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 주면서 믿음의 증인으로서의 삶이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형성되고 이루어져야 될 지를 신앙인 들에게 생각하게 해주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마. 신학적 반성


사실 가톨릭 전례가 부활주일 전례때 매번 요한 20,1-9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약간은 의아스럽다. 오히려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 연대기적인 순서를 보면 부활 전야에 이것을 읽고 부활 당일 날에는 부활에 관한 첫 번째 복음선포의 내용을 전해주는 공관복음서의 이야기(마르 16,1-8; 마태 28,1-10 등)를 읽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와 곁들여서 이 내용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한 번 찾아보겠다.


요한의 본문에서 실제적으로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은 다른 공관복음서들의 것들과는 달리 실망과 당혹감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견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빈 무덤 발견에 관한 이야기는 부활의 복음선포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전해주지 않고 있다. 이미 언급한대로 이 이야기는 부활하신 분의 현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무덤에 묻히신 분의 부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설명을 해주는 천사들에 대해서, 또 신앙에로 초대하거나 기쁜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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