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머리말 (1,1-3)
3절의 “그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다”라는 표현 때문에 묵시록이 마치 종말론에 관한 암시 내지는 종말을 준비할 수 있는 어떤 도움이 내용들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들을 많이 하지만, 때가 가까웠다는 표현은 묵시록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수 없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묵시록이라는 이 문학 속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징적인 표현들과 때가 가까웠다는 것이 맞물려 들면서 마치 종말론적인 열쇠를 묵시록에서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도 보면 때가 가까웠다는 것은 복음을 선포하면서 끊임없이 이루어졌던 이야기이다. 그 다음에 종말을 묘사하는 공관복음의 내용을 보면 늘 상징적인 표현을 갖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의 내용을 하나씩 분석을 해 보면 묵시록이 가고 있는 방향이 분명하고 자명하게 드러난다.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할 때 이 αποκαλυψις가 70인역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현현을 지칭하기도 했으며, 또는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계획과 하느님의 정의와 구원을 지칭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αποκαλυψις는 벗겨낸다. 즉, 감추어진 것을 벗겨내는 것이다.
하느님 자체가 비가시적인 분이다. 하느님의 계획은 더구나 감추어진 것이기에 이것을 들추어내어야 하는데, 이것을 누가 들추어내는가 하면 인간 편에서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계시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벗겨주지 않으면 인간 편에서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αποκαλυψις이다.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습도 당신이 스스로 보여주지 않으면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감추어진 것을 벗겨내는 것이 αποκαλυψις이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하면서 소유격을 쓰고 있다. 마르꼬 복음에서도 보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하면서 우리말로 번역하기 어려워서 소유격 그대로 『~의』를 그냥 쓰고 있다. 그러나 희랍어 소유격은 두 가지 용법을 가지고 있다. 즉 주체 소유격과 객체 소유격이다. 그러니까 주체 소유격일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는 계시』라는 것이다. 계시를 전하는 주체가 예수이다. 그러나 객체 소유격일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하면서 주체 소유격과 객체 소유격이 다 사용되었기에 결국에는 성서적인 개념과 맞물려 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 복음에서 했던 것인 예수의 자기 계시라는 것이다. 결국 계시를 하시는 분도 예수님 자신이고, 그분이 하시는 계시의 내용도 예수님 자신이다라는 것이다. 마르꼬복음 1장1절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할 때 복음을 전하시는 분도 예수님 자신이고, 복음의 내용도 예수님 자신이시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이신 예수님 자신이 당신 자신을 전해주지 않으면 인간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하시는 분도 자신이고 전해주시는 내용도 당신 자신이다.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하느님께서 “나는 야훼다”라고 할 때, 전해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고, 그 계시의 내용은 바로 하느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αποκαλυψις이다. 결국 요한 묵시록에서 현시를 통해서 요한이 전해주고자 하는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전달된 그런 계시로 그 내용자체도 예수님 자신이다. 왜냐하면 요한 묵시록은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시의 주된 원천은 하느님이다. 이것이 요한 복음에서 끊임없이 나타났던 개념이다. 요한 복음에서 “나는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만을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품안에 계셨던 외아들 그분이 들려주신 것이라는 표현이 늘 나온다. 항상 계시의 원천은 하느님이다. 하느님 안에서만 신비는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이제부터 하느님께서 밝혀주게 될 비밀이 대상은, 비밀의 내용은 그분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알도록 깨우쳐준 그런 사람들만이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강생을 통해서 아버지께로부터 들은 것만을 말하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만 하시는 분으로 다름 아닌 아버지께서 주시는 계시의 첫 번째 수혜자이시기에 필연적으로 그 계시를 전해주시는 중재자인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직접적으로 전해 받은 계시의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일어나야만 할 일들’이다. 여기서는 ‘곧 일어나야만 할 일들’이지만 묵시록에서 보면 ‘곧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곧 일어나야만 될’이라는 것이다. 필연성에 관한 것이다. 유다인적인 개념으로 보면 하느님은 영원으로부터 인간 역사에 대해서 나름대로 구상하신 계획들을 가지고 계신다. 이 계획들은 역사 안에서 필연적으로 구현된다는 것이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계획은 필연적으로 구현될 수밖에 없다. 하느님의 말씀은 즉시 창조된 능력으로 나타난다. 하느님의 계획도 역사 안에서 필연적으로 구현된다. 그런데 선견자들은 이런 하느님 계획에 대해서 계시를 갖고 있기에 세상 역사 안에서 자신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것이 유다인 묵시적인 관점이다. 요한 묵시록에서도 이런 점을 볼 수 있겠느냐? 많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주석을 해 왔다. 그래서 집요한 호기심을 갖고 과거 역사와 다가올 사건들에 대한 열쇠를 바로 요한 묵시록 안에서 찾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다. 과연 요한 묵시록이 그런 목적으로 저술되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종결사인 22,6에서는 1,1의 표현을 다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22,7을 보면 ‘내가 곧 가겠다’. 그러니까 선과 종결문 여기서 보면 ‘곧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라는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종결문에 가서는 즉시 ‘내가 곧 가겠다’라는 표현이 삽입되어 있다. 그러니까 마치 예고된 하느님의 계획이 성취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처럼 종결사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 ‘곧 이루어져야 할 일들’은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고한다. 이렇게 종결사와 머리말을 비교해 보면 요한 묵시록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고하고, 그 도래로부터 유래하는 격려의 내용을 환시를 통해서 전해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계시를 들어야 되고 순종과 동참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삶 속에서 취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묵시록을 대하는 많은 독자들은 묵시록에서 다가오는 사건에 대한 신비로운 예고의 내용을 찾으려는 호기심 어린 태도를 버려야 한다. 미래와 종말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출중한 역할을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 역사에서 열쇠가 예수라는 그분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럴 때 묵시록은 모든 독자들에게 현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퍼낼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다. 그러니까 계시는 그리스도의 역사를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아주 독자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곧 이루어져야만 될 일들’이란 표현은 그리스도의 도래를 지칭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종결사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사실 요한 묵시록 안에서는 일곱 편지,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형태를 통해서 계시의 내용이 전달되고 있다. 또 육체적으로, 윤리적으로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고 무질서의 처참한 상황을 체험하고 있는 인간과 세상의 모습을 기술해 주면서 그 해결책을 묵시록에서 제시해주고 있다. 그 해결책이란 무엇이냐 하면 하느님의 신비가 구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신비가 구현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더불어 하느님의 신비가 구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곧 이루어져야만 할 일들’이란 하느님의 구현의 신비가 구현되는 것으로 그분의 구원계획이 결정적이고도 총체적인 방식으로 구현되게 하는 유기된 그리스도의 죽음이라고 볼 수있다.
요한 묵시록의 본문 속에 표명된 절대적 당위성의 특성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이런 하느님의 계획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능력을 표명해 주는 것이지, 세상의 파국이나 멸망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하느님 신비의 실현이 분명 예수가 가져다 준 속량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곧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란 그러한 죽음에 앞서는 상황 즉 기다림과 언약의 상황에 관계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곧』이라는 말은 어떤 장애물도 하느님의 역사의 손길을 정지시키거나 늦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신속성과 순간성을 지니는 것으로 어느 것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는다. 하느님의 신비가 성취될 날을 기다리는 그런 기다림의 상황을 전해주는 요한 묵시록의 본문의 맥락 속에서 『곧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라는 표현은 위로와 희망을 전해주기 위해 시간이 촉박하게 다가오고 있다는 뉘앙스적인 의미를 전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그리스도의 도래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의 신비가 구현된다는 점에서 위로와 희망을 전해주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도래의 시간이 가까워졌다. 즉,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졌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편지의 내용을 보면, 곧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어떻게 성취되고, 어떤 방법으로 성취되는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뉘앙스로 알아들을 수 있다. 즉 『곧』이라는 표현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어떤 장애물도 하느님의 계획을 늦추거나 정지시킬 수 없는 신속성과 순간성을 지닌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라는 것과 또 다른 것은 「불시에」라고 하는 사고를 내포하고 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도둑처럼 오신다, 즉 불시에 오신다(마태 24,43; 루가 12,39).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도래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눈앞에 현존하고 다가와 있다는 것을 순간 느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현된 하느님의 구원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약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이미 구원이 성취되었음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미 역사에서 한 번 이루어졌고,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는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전례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리스도, 일상의 삶 안에서 다가오시는 그리스도는 매 순간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고, 맞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주님에 대한 자세이다. 이럴 때 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세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절박한 선택 앞에 놓여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희망 속에 살아가면서 매 순간 절박한 상황 앞에 놓여 있는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행자의 모습으로 당신을 보여주셨지만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스승의 죽음에 대한 실망과 고통이 너무나 크게 엄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어떤 마음의 공백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리스도도 필연적으로 구원을 살아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위와 같은 내용을 머리말에서 분명하게 발표하는 묵시록 저자의 의도를 생각해보면서 한 구절 한 구절 그 내용을 볼 필요가 있다.
1. 당신 종들에게(1,1)
여기서 보면 “당신 종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려고 그분에게 이 계시를 주셨다”(1,1)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누가 했는가? 하면 하느님께서 하신다. 그러므로 계시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의 종들이다. 이 「종」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누구에게 예속되고, 종속되어 있는 비관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종」이라는 원래 개념은 하느님의 종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 하느님을 위해서 전적인 투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하느님을 위해서 송두리째 받쳐진 그런 실존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느님의 종이다.
예수가 ‘야훼의 종’이라고 불리는데 이 종은 절대적으로 종속된 자기 비하의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위해서 송두리째 내 던져진 투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칭하는 것이고, 바로 여기서 요한 복음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전달하고, 하느님에게서 보고 들은 것만을 전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바로 야훼의 종으로서의 모습을 표명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그런 하느님의 존재, 즉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고 하느님을 위해서 투신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종이다. 구약성서에서 「종」이라는 표현은 특별히 하느님의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직책을 수행하도록 불림을 받은 예언자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제2이사야서에 와서 「야훼의 종」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메시아적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고, 신약성서에서는 이 표현이 예수에게 적용되고 있다.
묵시록에서는 하느님의 종이라는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써 살아가기를 갈망하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표현이다. 그래서 묵시록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종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전해 주시는 계시는 교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신앙인들이 야훼의 종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그들의 실존을 살아가기 위해서 신앙인 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계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생명의 실존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또 다시 묵시록은 복음으로써 생명의 말씀이다.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주셨다.
천사는 중재로서 묘사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어떠한 계획을 갖고 계시고, 어떻게 세상을 완성하실 것인지에 대해서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주신 계시는 한 천사의 중재를 통해서 요한이라는 역사적인 구체적인 인물에게 전달이 되고 있다. 여기서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은 계시의 원천이고, 그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해지고, 그 다음에 신앙인 들에게 전달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신앙인 들에게 전달되는 그 과정 속에서 천사와 요한이라는 두 인물이 중재자로서 대비되고 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에서 소개되고 있는 환시들은 거의 모두가 그 환시의 내용을 설명해 주는 천사와 같은 인물들과 요한과의 관계 속에서 전개가 되고 있다.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유보시켜 놓고 있는 직무(종들에게 나타내 보이는 일)가 묵시록에서 전체 안에서는 천사들에게 맡겨져 있다.
요한이라는 사람은 묵시록 머리말에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묵시록 내용에서도 계시의 내용을 전달해 주는 사람으로 일관되게 소개되고 있다. 그래서 요한은 계시를 전달하는 사람의 자격으로 “써서 보내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데, 요한이 이렇게 메시지를, 즉 계시를 전달해야 되는 직무를 수행해야 될 사람으로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가 수행해야 될 직무가 계시를 전달해야 된다는 점에서 예언자 범주에 속해 있고, 예언자적인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언자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는데 두 개의 다른 상황 속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천사의 종속된 상황 속에서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있다. 이 경우는 천사가 전해주는 메시지를 그대로, 천사가 설명해 주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서 전달해주는 것이다. 두 번째 상황은 요한이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로부터 계시를 받는 것이다. 바로 인자에 관한 환시의 중요한 부분은 인자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계시는 천사의 중재를 통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요한이 천사보다 높은 위치에서 계시를 전달받은 것이다. 천사와 대등한 입장이거나 천사보다 상급 위치에서 계시를 전달해주는 것이다.
바로 요한이 직면해 있던 다른 두 개의 예언자적인 상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본질적인 두 단계를 반영해 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본질적인 두 단계란, 천사들이 중재자가 되어서 계시를 전달해 주었던 옛 구원 경륜의 단계, 즉 구약의 단계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구현되었고, 신앙인 공동체들 안에서 그분의 현존을 통해 계시가 지속적으로 이어져가는 단계, 즉 신약의 시대이다. 요한이 천사의 중재를 통해 전달받는 계시는 물론 예언자적인 직무를 수행하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지만, 천사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즉 늘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데 있어서 천사가 중재해주고 있는 구약시대을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본질적인 계시의 첫 번째 단계는 바로 구약의 단계를 표상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두 번째 단계는 신약의 단계를 표상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우리는 요한을 통해서 인간의 상황이 두 단계로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연역해 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요한은 분명 예언의 영으로 가득차 있는 예언자였지만, 여기서 요한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는 없었다. 천사의 소리를 통해서 계시를 전해 받는다. 두 번째 단계에서도 첫 번째 단계에서처럼 요한은 예언의 영으로 가득차 있는 예언자였지만, 이제부터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천사이든, 예언자이든, 신앙인 이든 간에 동등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천사들의 중재 없이 공동체 한가운데 직접 전달된다.
이런 두 개의 서로 다른 예언자적인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무슨 이유로 두 번에 걸쳐서, 즉 2절과 9절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여기서 하느님의 말씀은 구약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는 신약의 시대를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도래 이전과 이후의 상황을 표명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는 신약 시대에, 즉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인간이 되시어 인간의 역사 안으로 오신 이후에는 예외적인 그런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정상적인 직무로써 하나의 봉사로써 남아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이다. 증거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을 의미한다. 순종은 예속되고 그래서 비하되는 개념이 아니고, 그 뜻에 전적으로 동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들」을 요한은 자신의 인격 안에 수립해 놓고 있지만, 9절에 가서 보면 “여러분의 형제이며 예수 안에서 같은 시련과 나라와 인내의 동참자인 나 요한은”이라고 하면서 공동체 일원의 자격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이 예언자적인 직무를 수행하는데 두 단계를 거침에 있어서 신비의 두 단계를 우리가 볼 수 있고,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신․구약이 절묘하게 연계된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을 통해서 하느님의 개입이 하느님의 계시가 전달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다음 구절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2.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1,2)
요한이 본 모든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이야기한다. 문학적인 유사한 표현이 묵시록 여러 군데에도 소개되어 있고, 여기에도 나타나있다. 그런데 묵시 1․6․12․20장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복음의 이름 때문에 당해야 하는 순교가 문제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는 것은 예수의 증거에 동참하는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실천적인 삶의 어떤 형태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에 동참하는 것은 하느님이 원하는 것이며 또 그것이 하느님 말씀을 완전하게 표현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묵시록에서 증언(μαρτυρια)은 공관복음이나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항상 순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가장 완전한 증언은 목숨을 내버리면서 증언하는 바로 그 순간으로 묵시록은 이해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상이 나오는 것은 1, 5에서 극치를 이룬다. “충실한 증인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며,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실존을 표명해 주는 것인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신 분, 땅 위의 왕들의 지배자’는 그리스도께서 누리는 영광을 표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충실한 증인’이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그분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내놓으심으로써 아버지께 대한 충실성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 아버지를 충실하게 증언하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충실한 증인에는 속량의 개념이 강하게 들어가 있다. 바로 당신을 팔아서 몸값으로 내 놓으신 십자가 사건. 바로 이것은 인류를 구원하고 상실된 인간성을 온전하게 회복시킨다는 하느님 구원 계획의 핵심이다. 하느님 구원 계획에 충실히 따르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모습은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가 아버지 하느님의 충실한 증인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가식적인 표지가 된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충실하게 증언하는 지고의 순간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티파스’ 는 묵시록 2,13에서 “너는 내 이름을 굳게 지켜 왔고, 또 사탄이 살고 있는 너희 도시에서 죽임을 당한 나의 충실한 증인 안티파스 때에도 너는 내게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라고 언급하면서 안티파스를 충실한 증인이라고 표명하는 것은 이처럼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그리스도께 대한 충실성을 간직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실한 증인이 되는 것, 완전한 증인이 되는 것은 이처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까지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이런 모습을 보여줄 때 이런 호칭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자기가 본 모든 것
이것은 환시에 대한 것을 지칭한다. 환시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성서 안에서 비쳐진 하느님은 말씀하시는 하느님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늘 창조되는 것으로, 말씀 자체가 실재가 되는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말씀을 하시는 분이다. 이에 대해 신앙인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 그래서 전례라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말하는 것과 듣는다는 것은 서로 상응하는 동사이다. 성서에서 이 두 개의 동사들은 특별한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발언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창조하고, 선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효과가 즉시 드러나는 그런 의미이다. 창세기에서 보면 창조가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듣는다라는 것은 단지 귀만을 빌려주는 것으로 의미 축소 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한 인격의 육체적인 행위와 내 실존 전체가 그 말씀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의미에서의 듣는다는 개념이다. 그래서 듣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의미로서 들려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그런 편협한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듣는다’라는 동사는 말씀을 주석 한다는 의미를 제쳐놓고서라도, 자신이 주석한 말씀을 삶과 행위들 속에 구체적인 표현을 통해서 실천해야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말씀하신다는 것을 듣는다는 것은 하느님께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의 글은 하느님 말씀의 특별한 외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라져 버릴 말씀을 글로써 고정시킨다는 것이 성서가 아니고 변경시킬 수 없는 영원한 말씀으로서의 글이 되게 한다는 것이요 말씀이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려는 것이다. 이스라엘 안에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은 당신의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고, 당신의 메시지를 덧없는 시간으로부터 지켜주시는 성서의 저자이시다. 이처럼 말씀의 유일한 저자는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이 당신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원천에 자리하고 계시는 것이다. 영원성을 지닌 하느님,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이 전해주시는 메시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 변질되지 않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대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얼굴을 대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무이한 가시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인간의 시선에 잡히지 않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보기를 열망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최종적 희망이었지만, 그 희망이 성취되는 순간은 죽는 순간이었다. 죽기 전에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누구도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죽기 전에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하나의 조건인 것이다.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순간은 한계성을 지닌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성서는 전해 준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하게 마음속에 되새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삶에 구체적인 의미로 표명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기쁨을 사는 것이고, 하느님께 순종을 하는 행위이다. 순종을 한다는 것은 명령하는 사람의 뜻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말씀의 거울로서의 성서의 글들은 늘 우리의 삶에서 가까이 있어야 되는 것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첫 번째 가시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인간이 희망하는 최종 실제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다는 것, 즉, 하느님 메시지를 접하게 되는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최종적인 행복이 바로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볼 수 있는 그런 실존이 되셨다. 말씀이 육이 되었다는 새로운 창조를 전해 주는 요한 복음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 예수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했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뵙고자 하는 열정을 구현하려는 지상의 인간들에게 최종적으로 보여지신 하느님 그분 자체이시다. 바로 여기서 이제 부활하신 분의 모습이 복음서에 따라서 다양하게 드러나게 된다. 토마에게 발현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네가 직접 손을 넣어 보고서 바로 네 앞에 서 있는 내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도록 하라고 당부한다. 바로 이것은 불신에 가득차 있는 인간의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과 부활하신 분이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행위이다. 그러나 거룩한 변모 이야기 속에서 미리 앞당겨 보여진 영광에 참여한 그리스도의 모습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였지만 제자들이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본성상 달라지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부활의 두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라자로를 죽음에서 살렸지만 또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이라면,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부활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두 단계를 통해서 즉, 십자가에 처형된 그러한 모습을 가졌던 예수가 부활한 그분과 동일한 분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부활 발현의 첫 번째 의미와 인간의 최종적인 염원이 영원한 생명에 동참할 수 있다는 모습으로써 본성이 드러나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모습이 두 번째 단계이다. 우리가 최종적인 목적은 바로 영광의 상태이다. 여기서는 누가 누구를 알아볼 수 있는 지상적 조건의 삶의 연장이 아니다.
요한 묵시록은 감추어지신 하느님, 그러나 글이라는 고정된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말씀과 성서 그리고 환시는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서 당신 자신을 보도록 내어 주시는 하느님 목소리의 또 다른 형태의 메시지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묵시록 전체에 대한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증언이라고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인 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증언, 즉 증언의 형태는 말씀과 행위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의 완전한 표현을 찾아내도록 초대받고 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에서 비롯되는 후속 결과의 내용들이 묵시록 안에서 소개되고 있다. 이것이 2장에서 계속해서 소개되고 있는 내용이다. 따라서 묵시록 저자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본문을 통해서 점차 구체화될 것이다. 그러니까 묵시록을 대하면서 첫 순간부터 우리가 인식해야 될 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실존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초대하고 있다는 이 점을 늘 염두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3. 복되어라, 이 예언의 말씀을…(1, 3)
환시를 통해서 전달된 예언의 말씀을 담고 있는 묵시록은 읽혀지고 그래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공적인 독서의 의미가 표명되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메시지로서의 성서의 글은 공개적으로 읽혀져야 한다(골로 4,16; 1데살 5, 27). 여기서 공개적이라는 것은 보편주의적인 사상을 담겨져 있는데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이에게 들려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전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메시지 전달이라는 것은 비밀스럽게 몇 사람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신비주의 종교에서 메시지 전달은 특별한 몇 사람을 통해서 전달되는데 요한 묵시록에서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메시지는 공개적으로 선포되어져야 한다.
‘복되어라’ 즉 지복에 관한 내용이 묵시록에서는 여기서 처음 언급되나, 묵시록 안에서 7번이나 언급된다. 묵시록 전체가 행복을 지향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적인 행복을 위해서 전달된 그러한 메시지라는 사실을 우리는 7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확인을 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묵시록은 인간에게 완전한 행복의 길을 제시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요한이 구체적으로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역사적인 교회이면서 7이라는 상징을 바탕으로 해서 전 교회 공동체에 보내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까 묵시록을 읽고 듣는다는 것은 행복의 원천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요한계 문헌 속에서는 그리스도의 심판은 그리스도 자신이 인간의 행업에 대해서 즉시 판단하시는 것만이 아니고, 그 분을 중심점으로 놓고서 그 분 앞에 서 있는 인간이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서 스스로 심판한다는 의미도 있다.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묵시록이라는 것이 종말을 지향하고 있다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고 있다. 「곧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라는 필연성의 사고와 때가 가까웠다는 사고 때문에 공관 복음과의 연계 속에서 어떤 종말이 다가오는 것을 전해 주는 책이라고 보통 말을 하나, 여기서 때가 가까웠다는 것은 그리스도는 이미 현존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때에 관계되는 것이지 먼 훗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말론적인 의미가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은 담겨져 있지만, 현재성을 지닌 종말론적인 의미이다. 행복의 순간, 행복의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우리의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이다.
즉, 때라는 것은 ‘Χρονος’라는 바탕 위에서 ‘καιρος’적인 하느님의 개입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καιρος가 계약의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시점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Χρονος는 인간 실재를 의미해 준다. 그런데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이 그분 안에서 구체적으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의 καιρος는 이미 이 자리에 그리고 우리 안에 현존하고 있지만, 이 καιρος은 인간의 고통스러운 Χρονος 속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요한 묵시록은 고통스런 역사의 순간 순간을 즉, Χρονος적인 시간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라고 촉구하면서, 그러한 삶이 행복과 위안을 가져다주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언명한다. 그러므로 행복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이다. 그런데 읽고 듣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읽고 들은 예언의 말씀을 삶의 현장 속에서 구체화시켜야 한다. 그러면 실행에 옮겨져야만 하는 예언의 말씀이란 어떤 것인가? 우선 요한은 예언의 말씀을 들어야 된다는 표현을 통해서 매우 중요한 주장을 하고 있다. 즉 저자는 자신을 구약성서의 가장 위대한 인물들에 의해 시작된, 예언자들의 대열에 끼워 넣고 있다. 예언자들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신약성서를 통해서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자기네들의 예언자들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바오로는 수 차례에 걸쳐 그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루가는 예수의 유년 이야기를 통해서 신약성서의 위대한 예언자 중에서 특별히 몇몇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행한 예언의 말을 표본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런데 즈가리야, 시므온, 안나 등은 옛 예언들이 어떻게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는가를 노래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요한 묵시록은 더할 나위 없이 예언의 말씀이다. 묵시록은 영감을 받아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구약성서를 새롭게 읽고 있다. 그러니까 구약성서를 그리스도론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성취된 옛 구약성서의 내용들 위에 내리신 것과 같은 성령의 조명을 온전히 받고 있기 때문에, 옛 예언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권위와 동일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래서 묵시록의 저자는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다’(19,10)라고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성서들의 내용들이 수없이 많이 묵시록 안에서 인용되고 있는데, 그 인용된 구약성서는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근거들이다. 그러니까 옛 예언들이 어떻게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는가? 따라서 요한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는 이 체험된 말씀은, 새로운 시대를 개막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1,3의 내용은 지복관에 관계되며, 22,7에서도 문학적으로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1,3만을 읽게 되면 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으로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경우 지복관은 절박한 권고의 의미를 지닌다.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그 행복을 찾을 수 없다라는 절박한 권고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22,7에서는 ‘내가 곧 가겠다’라는 말이 전제되고 있으므로, 묵시록의 지복관은 절박한 권고라기보다는 행복에 대한 언약으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리스도의 현존 자체를 얼마만큼 받아들 이냐에 행복이 달려있다. 물론 예수의 현존 자체가 행복을 언약해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지복관의 기원은 두말할 나위 없이 예수의 말씀 속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은 복됩니다”라는 예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지키는 사람일 수밖에 없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증거 안에서 표명될 수밖에 없다.
이 머리말 부분(1,1-3)은 전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며, 모든 것의 저자이시다. 구원역사의 저자이시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되는 신앙인들은 그 말씀에 대해서 아멘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례라고 하는 것은 원탁에서 회의하는 그런 형태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말씀을 듣는 자리이다. 그래서 역사 안에서 펼치신 구원의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해서 감사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례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공동체의 감사의 기도이다. 그래서 감사의 행위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성체성사가 거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자세가 필요하다. 바로 성령의 역사 하심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에게 행복의 길로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그리스도교 신자의 삶이 전례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행복이라는 것이 하느님 말씀 안에서만 찾을 수 있고, 그 말씀의 표현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신자의 삶은 다분히 전례적인 삶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