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 울 로 의 구 원 론

 

바 울 로 의   구 원 론


로마서 3장 21-26절  에서 본 δικαιοσύνη Τού θεού 중심으로




Ⅰ.  서      론




    로마서의 바울로사상의 전개에서 본문이 가지는 위치와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서 바울로는 적극적이고 적절한 방법으로 그의 복음과 서언의 주제를 논술한다. 3장21절에서 시작된 그의 의화에 대한 가르침은 4,25까지 계속되며, 그 사이의 4,1-24은 믿음에 의한 의화에 대한 역사적 실증을 제시한다.




  3,21-26은 믿음에 의한 의화에 관한 바울로의 가르침의 중심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義의 계시의 필요성은 1,16에서 나타내고 3,21은 하느님의 義의 계시의 본질과 의미를 밝힌다. 5,1에서는  바울로의 사상의 새로운 전환을 가져오면서 5-8장이 분리된 단위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3,21-26이 이미 5-8장이 포함하는 주장을 위한 가설을 준비한다. 그리고 5,1-11에서 바울로는 3,21-26에서 진술된 그의 주장을 되풀이 하면서 하느님의 義의 계시로부터 결과 되어진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생활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9-11장에서는 하느님의 義를 취급하고 있다.1)




  라. 본문의 분석


  a) 로마서 3장 21절 – 24절


  바울로가 1,18-3,20의 논쟁에서 정의로운 세계 심판자 하느님 앞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똑같이 진노의 대상이며 똑같이 유죄하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율법의 행위로 義를 얻을 수 없다면 마지막 심판 때 생명의 판결을 주는 義를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3,21이하는 시작된다.


“그러나 이제”(νυνί δέ)는 하느님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도움없이 믿는 자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2) 다시말해서 율법외에 하느님에 의한 義가 나타났으므로 율법 아래서의 생활 즉 죄의 세력 아래서의 생활은 마감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義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율법과 예언자들에 의해 증언된 하느님의 義를 말한다. “율법과 예언자”는 구약전체를 가리키며 율법은 엄격한 의미에서 토라로서의 모세오경을 의미한다고 볼수있다. 본래의 율법의 역할은 구원에 대한 증인으로서 의도 되었으나 유대인들은 업적의 요구로 오해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인해 이 율법은 하느님의 본래의 뜻인 선물로서의 특성을 회복하게 하였다.3)


  v.22의 δε는 v.21의 주어인 “δικαιοσύνη τον θεού”를 한정하고 있으므로 v. 21과 v.22은 한덩어리로 된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4)   하느님 앞에서 필요한 義는 율법의 도움없이 예언자를 통해 증거된 하느님에 의해 계시된 義이며 하느님 자신에 의해 인도되는 義이다.5) 여기에서도 우리는 원시교회의 전승(2고린 5,21)에서 사용된 “하느님의 義”개념을 바울로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본다. 즉 그것은 하느님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열려지고 신앙으로 자신의 것으로 얻는 구원의 획득을 의미한다.6) 


  “διά πίστεως  Ίησού Χρηστού” ‘율법과는 별도로’ 나타난 하느님의 義는 인간을 의인이 되게하기 위하여 다른 방법으로 표현 되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하여 오는 방법이다(로마서 3,20). 여기에서 ‘믿음(πιστεως)’을 포함하는 귀절  “διά πίστεως Ίησού Χρηστούς”는 헬라어 번역에 논란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πίστεως’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πίστεως’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διά와 함께 번역상의 문제에서 나타나는 질문이다.7) “διά πίστεως  Ίησού Χρηστού” 문자적으로는 “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통해서”라는말로 해석되나 여기에서 속격을 목적격으로 보아야 할것이다(로마서 3,26). 왜냐하면 바울로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충실성을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모델로서 그리스도의 충실성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이 계시는 오직 신앙의 눈을 가진 자에 의해서만 이해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8)


  v.21절은 1,16-17과 긴밀한 관계를 보여준다. 22절의 είς πάντας τους πιστεύοντας  는 1,16의 παντί τώ πιστεύοντι와 같으며 1,17 의 έκ πίστως는  22절의 διά πίστεως  Ίησού Χρηστού보다 상세히 정의 된다. 그것은 바울로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준다. 바울로에게 “하느님의 義”를 얻을수 있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의지해서가 아니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며, 이 義를 획득하는 데 참여 할수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라는 것이다.9) 바울로에게 있어서 종말론적 하느님의 義는 믿음으로 말미암아(διά πίστεως) 인간에게 오는 선물이다.10) 여기에서 믿음은 인간의 수동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순종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11)  바울로의 두번째 강조점인 παντας는 선물의 보편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1,18-3,20의 보편적 타락과 대조적으로 제시된다.12)


  바울로의 이러한 강조는 독자적인 신앙 경험(다마스크스에서의체험)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바울로는 이러한 자신의 신앙의 경험에서 율법 순종에 전적으로 봉헌하고 바리사이적 표준에 따라  비난받을 것이 없는 의로운 사람인 경건한 유대인도 구출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하느님의 원수와 대적자로 만들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13)  바울로의 이러한 신학적 인식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서 모든 사람에게’라는 바울의 강조점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義”는 바울로에게 본질적으로 신앙의 義이다.14)


3,21 이하에서 바울로는 죄인들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을 “신앙의 義”로 제시하고 나서(구원의 보편성 1,16 이하의 발전) 1,18-3,20의 상황전체를 되돌아 보면서 v.23에서 죄인들의 타락상태(1,18-3,20의 보편적 타락)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즉 v.21에서 믿는 모든 자에게 열려있는 구원의 보편성이 강조되어 있다면(1,16이하) v.23에서는 1,18-3,20의 보편적 타락이 대조적으로 제시되고 있다고 본다.15)


δόξα와 δικαιοσύνη τού θεού는 문맥상의 대조법으로 보아 동의어로 사용 되었다고 볼 수 있다.16)  따라서 타락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잃어 버린 δόξα τον θεού는 “하느님의 義”와 함께 되돌려 받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17)  모든 사람들이 잃어버린 원초적 영광스런 義는 하느님의 의지에  의해 새롭게 획득되어져야 한다. 이 일은 하느님에 의해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신 구원사건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v.23과의 문맥에서 v.24 은 원초적 영광의 義는 하느님에 의해서 값없이 은총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획득 되어진다. 타락 후 상실된 이 원초적 영광의 義는 곧 신앙의  義와 동일시 된다.18)


  άπολύτρωσις는 성서희랍어에서 몸값을 치르고 노예 혹은 전쟁포로들을 자유케하는 것을 의미하나 여기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해석보다는 어떤 형태의 악이나 억압으로부터의 구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동사는 유대주의 희랍어에서 하느님께서 자기백성을 구출하시는 전능하신 행위에(예컨데 단 로마 7,8과 사행 51,11)사용된다.19) 명사 άπολύτρωσις는 고대 법률관례인 원수로 부터의 구원으로 해석되기도 한다.20) 그러나 명사 άπολύτρωσις 가  칠십인역(LXX) 에서는 ‘죄로부터의 구원’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근거해서  v.24에서도 ‘죄로 부터의 구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신약시대에서 유대교에서 구원표상이 일반적이었을 뿐 아니라 칠십인역에서조차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1고린 1,30;골로 1,4에서 표제어 άπολύτρωσις가 사용되고 있는 점과 일치하며 유대 그리스도교 언어 법인 히브 9,5에 의해서도 증명된다고 볼 수 있다.21)


  죄로부터 구원해 내시기 위한 하느님의 구원행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일어난다. 그것을 믿음으로 구원행동의 성과는 나의 것이 된다. 곧 원초적 義를 새롭게 획득하게 된다. 즉 새롭게 창조된 새 피조물로 존재하게 된다. 여기에서 δικαιούμενοι는 ‘의롭다고 선언되다’라기 보다는 의롭게 만들어지다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22) ‘신앙의 義’ 와 동일시 되는 이 원초적 ‘하느님 영광의 義’의 새로운 획득은 새 창조의 차원을 갖기 때문이다.23)


  v.24에서는 v.21,22이 말하는 ‘신앙의 義’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기초를 언급하고 있다고 본다. 하느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신 구원사건이  주는 효력때문이다.24)


  άπολυτρώσεως τής έν Χριστώ Ίησού는 우리에게 계속 그 은혜의 효력이 적용되도록 단번에 이루어진 구체적 구원행동을 의미 한다고 볼 수 있다.25)


b) 로마서 3장 25절 – 26절


  하느님은 그분을  세워 그분의 피를 통해서  신앙으로 얻는 속죄 제물로 삼으셨으니 그것은 과거에 저질러진 죄들을 너그럽게 보아 넘기심으로써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시대에 당신이 의로우시고 예수께 대한 신앙으로 사는 이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습니다(αύτον δίκαιον και δικαιούντα τον έκ πίστεως Ίησού(로마 3,25-26).


  여기에서 ‘καίʾ는 상이한 두 본질의 단순한 연결을 나타내지 않고 더 강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가, 즉 하느님의 δίκαιον의 의지가 곧 하느님의 義를 포기함을 의미하고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거기에서 하느님 義가 나타난다.26) 왜냐하면 하느님의 義는 하느님이 자기의 자유로운 은총에서 죄인을 용납 하시고 그를 의롭다고 인정 하신다는 형식에서 계시되어지기 때문이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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