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아우구스투스
44년에 체살이 피살되지 체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Caius Julius Octavianus Augustus)는 안토니우스와 레비두스와 함께 삼두체제(삼두体制)를 수립하여 42년에 마케도니아 빌리버 도시에서(사도16, 12) 공화주의자들을 격파했다.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그리스 서쪽)해전에서 로마공화국의 동부지역을 다스리던 안토니우스에 승리를 함으로써 패전에 장악한 그는 양분의 우기에 놓였던 공화국을 통일시켜 31년부터 27년까지 국가를 재조직하려고 한다.
27년 정월에 드디어 완전 통일된 공화국의 영토권을 원로원에 돌렸으나 원로원의 의원들은 몇몇 속주의 재치권을 옥타비아누스에게 맡기는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그에게 내린다. 이때부터 그는 최고의 권위(Auctoritas)를 누림과 동시에, 전통적인 관직이었던 집정관직(Consulatus)를 맡음으로서 실제로는 통치권을 한 손에 장악한 셈이다.
그는 기실 정치에 능한 자로서 원로원의 권위와 면목상 공화정을 한동안 유지해 갔다. 그러나 그는 주전 23년 헌법의 개정으로 집정관직을 포기하고 소위 말하는 “前執政官의 최고 명령권(Imperium Proconsular)을 장악하고 이어서 護民官(Tribunus)직을, 12년에는 최고 사제직을 장악했다. 이렇게 하여 제일 시민권(Principatus)이라는 새로운 체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제 민사, 군사, 종교까지 한 손에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권을 상실한 원로원들이 무마하기 위하여 귀족 계급과 기사계급의 인재를 골라 정무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로마 대도시의 행정관을 임명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속주(屬州)를 황제 직할주와 원로원 직할주로 구분했다. 그는 자신의 직할주는 총독들을(Legati) 통하여 다스린 반면, 원로원 직할주는 원로원에서 파견된 전집정관이나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관할되었다. 그러나 원로원 직할주는 황제가 보낸 판무관의 감시를 받았고 세금은 황제의 손에 돌아갔다.
새로운 행정 체제를 확립한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의 일치를 전총적인 종교예식을 통하여 유지하려 했다. 이때 비로서 내란에 시달리던 로마는 평화를 되찾게 되었으며,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기 보다는 새로이 공고하게 조직된 행정기관을 통하여 유지 보호함으로써 로마 제국은 번영을 누리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사위인 디베리우스(Tiberius Julius Caesar)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주후 14년에 사망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의 황제로서(루가 2, 12) 교회와 관계되는 인물이며, 유대교의 상황을 살펴 볼 때(제3장) 아우구스투스와 헤로데 대왕의 관계를 상세히 논하게 되겠다.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에게 부여한 ‘아우구스투스’란 호칭은 다른 황제들도 즐겨 썼던 호칭이기 때문에 서로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사도 25, 21 원문 참조)
옥타비아누스는 체살(Caius Julius Caesar)의 종손(從孫)이었지만 체살의 양자가 되었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를 비롯하여 티베리우스, 갈리구라, 글라디오, 네로 황제까지 ‘율리오 글라디오’ 가문을 이룬다. 원래 체살이란 이름은 율리이(Julii)가문의 별명이었으나 후에는 ‘황제’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 버렸다. 예를 들면 사도 25, 21에 나오는 “카이사르”라는 말은 라틴어 체살의 희랍어식 표기이며 이때 이 말은 네로 황제(Tiberius Clasudius Nero)를 가르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