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목자의 비유(10장)

 

Ⅱ. 착한 목자의 비유(10장)


가. 개관


이제 우리가 살펴보게 되는 것은 요한 복음서 안에서 유일하게 단 하나 소개되고 있는 착한 목자의 비유이다. 공관복음에서는 비유의 형태로 된 담화문이 굉장히 많이 발견되는데, 요한 복음에서는 목자와 양떼라는 비유로 해서 단 한 번 나온다.




1. 문학적인 구성


문학적인 차원에서 보면 착한 목자의 비유는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을 치유해 주신 이 사건에 연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0장 1절에서부터 시작되는 내용을 보게되면 장소, 시간, 청중들에 대한 변화의 모습이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10장 1절-18절의 내용에 뒤이어서 10장 21절에서 소경을 치유해 주신 내용이 상기되고 있다. 이런 것으로 해서 10장이 9장에 연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9장에 연계되어 있다면 의도적인 소경에 관한 바리사이들을 단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10장에서 어떻게 착한 목자, 악한 목자로 연계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착한 목자에 관한 비유 이야기는 공관복음과는 병행하지 않는 이야기로 요한 복음에만 나오는 고유한 내용이다. 그렇지만 착한 목자 이야기가 내포하고 있는 일련의 주제는 공관복음 안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양, 문, 품삯꾼, 도둑, 외국인 등은 공관복음에서 쉽게 찾아 볼 수 모습이며, 목자에 관한 것은 마르꼬나 마태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양과 양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용 자체로 병행하는 것은 공관복음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지만, 주제적인 면에서는 공관복음에서 다 나타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 착한 목자의 비유 이야기는 성직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길을 가고자하는 우리들이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 착한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목자라는 개념은 빨리 이해되어졌다. 그러나 목자라는 개념이 우리에게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러나 이 착한 목자의 비유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굉장히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착한 목자의 비유 이야기에서 이 풍부한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 복음 전체의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하면 또 목자에 대한 개념이 구약성서 안에서 풍부하게 전해지므로 구약 성서적인 배경 하에서 이 부분을 이해해야 한다. 즉, 구약과 신약의 연계대상에서 이 부분을 살펴보아야 한다.




2. 전체적인 관점(착한 목자의 비유: 10,1-18)


우선 구조적인 차원에서만 본다면 공관복음에 나오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거의 동일한 형태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 4장 3절부터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것을 구분해서 보면 다음과 같다.





















 


요한


마르꼬


비유


10,1~5


4,3~9


청중들의 몰이해


10,6


4,10~12


비유 설명


10,7~18


4,13~20




이와 같이 구조적인 차원에서만 본다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이야기가 공통적인 모습으로 보여진다. 다시 말해서 고유한 의미에서 비유 이야기가 예수에 의해서 전달이 되는데, 백성들이 알아듣지 못하자 다시 비유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는 형태로 되어 있다. 이것은 유일하게 요한 복음 안에서 비유 이야기가 10장에 단 하나 나오는데, 공관복음서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유를 해설해 주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보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이야기와 착한 목자의 비유 이야기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이야기에서는 비유 이야기에서 언급된 내용을 그대로 갖다가 사용하면서 설명을 해 준다. 그러나 착한 목자의 비유 이야기에서는 비유 이야기에서 설명한 내용뿐만 아니라 다른 내용도 첨가하면서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고, 또 다른 차원에서도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이 착한 목자의 비유 이야기를 분석을 해 보면,


첫 번째 부분인 10,1~5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비유로 3인칭으로 설명이 되고 있다. 이 부분은 특별히 두 부분으로 분리가 되는데 10,1~3a까지는 『목자와 도둑』에 관해서, 10,3b~5까지는 『목자와 낯선 사람』에 대해서 설명이 되어지고 있다. 분류에서 볼 수 있듯이 본질적인 질문 내용은 과연 누가 양들의 목자이냐에 있다고 할 수 있고, 이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응답이 동시에 주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10,1~3에서 보면 도둑과 목자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우선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도둑이고 강도다. 그와 반대로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목자이다라고 하면서 목자의 성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10장 5절을 보면 양들의 차원에서 목자가 아닌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두 번째는 설명부분으로 10,7-18을 살펴보면 이 부분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진다. 우선 7~10절은 『문』에 대해서, 그리고 11~18절은 『목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어지고 있다. 이 부분은 1인칭으로 되어 있다. 비유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야기하지만, 설명할 때에는 1인칭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비유를 통해서 예수께서 자기 계시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문』에 대한 설명 7~10절을 보면 내가 문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사람은 다 도둑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문』이기 때문에 양들이 들어간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도둑은 양들을 죽여서 없애려하지만 나는 생명을 얻게 해 주기 위해서 왔다는 예수의 자기 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다음에 11~18절에서는 목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나는 착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양 떼를 버리고 도망가는 삯꾼을 제시하고 있다.


왜 착한 목자냐? 목숨을 바치기 때문이다. 양들을 버리지 않고 어떤 위협에서도 양들을 지키려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착한 목자이다. 또 두 번째로 왜 착한 목자이냐? 양들과 목자가 서로 잘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양들도 데리고 와야 한다는 것은 선교적 관점일 것이다. 그리고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그 목자의 모습을 통해서 아버지 사랑의 드러나는 것이다라고 하여 아버지가 또 한 번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으로 이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이런 구조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보면 비유 이야기 즉, 3인칭 부분인 10,1~5는 문으로서 자신을 소개하고, 양들의 목자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 1인칭 부분에서 비유 이야기가 설명이 되고 있다. 3인칭부분에 이어서 1인칭부분이 나타난다는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이야기를 전해주는 공관복음에서는 비유이야기나 설명 부분 모두가 다 객관적으로 3인칭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1인칭으로 바뀌어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7~18절의 1인칭 부분에 나오는 내용들 중 적지 않은 내용이 3인칭부분인 ‘비유’부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예를 들어 12절에 나오는 ‘삯꾼, 이리, 우리 안에 들어있지 않은 다른 양들’이라는 내용들은 비유 이야기 속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이와는 반대로 3인칭 부분에 나오는 내용들이 설명부분에서 다시 반복되지 않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문지기의 역할(3절), 낯선 사람의 역할(5절)등이다. 바로 이런 점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이야기와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여준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이야기는 비유 부분에서 언급된 내용을 그대로 갔다가 사용하면서 설명이 이루어지는데, 착한 목자의 비유 이야기에서는 비유 이야기에 나오지 않은 내용들이 설명부분에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비유 이야기에 나온 이야기 자체도 다시 설명부분에서 사용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것은 아주 특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3. 구성


그런가하면 더 나아가서 3인칭부분 10,1~5절의 상당수의 내용들이 설명 부분에서는 다른 각도에서 숙고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0,2에서 「문」은 목자가 들어가는 문으로 되어 있는데, 10,9에서 「문」은 양들이 드나드는 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10,2에서 보면 강도나 도둑은 정식적으로 문을 통해 들어가지 않는 사람인데, 설명부분인 10,8.10에서 강도나 도둑은 양들이 말을 듣지 않으며, 양들을 훔쳐다가 죽이고 파괴하기 위해서 온 사람으로 설명부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또 10,1에서 목자에 반대되는 개념이 ’도둑, 낯선 사람들‘(4절)인데, 설명 부분인 10,12에서 목자에 반대되는 사람은 삯꾼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10,3에서 목자는 양들이 그 목소리를 아는 그리고 양들을 울타리 밖으로 끌고 나가는 사람임에 반해서, 설명 부분에서 나온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똑같은 용어를, 인물을 갖다 쓰면서도 해석하는데 있어서, 성격 규정하는데 있어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3인칭의 비유 이야기 부분을 상세하게 살펴보면 상이한 인물들에 의해서 이런저런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 묘사되고 있다. 그러니까 1절 같은 경우는 목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는 강도와 도둑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결국 양우리에 들어가느냐 즉, 정식적인 문을 통해서 들어가느냐 아니면 다른 곳으로 넘어서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성격이 규정되고 있다. 그리고 3b에서 목자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양들 하나 하나를 불러서 데리고 나가는 그런 사람, 그리고 양들이 그 음성을 알아듣는 모습으로 목자의 성격이 규정이 되지만, 5절에 가서 보면 낯선 사람은 양들이 음성에 익숙하지 않아서 따르지 않는 그런 사람으로 성격 규정이 되고 있다. 이렇게 상이한 인물들에의 해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이루어진 활동을 묘사해 주고 있는 이 비유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목동들의 일상적인 삶을 묘사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해가 밝아오면 문지기가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다른 양들과 함께 밤을 지새운 양들을 주인들이 찾아간다. 그래서 양우리로 들어간다. 그래서 양들은 밖으로 불러내어서 데리고 가는 주인들의 음성을 양들은 알아듣는다. 목동들은 양들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서 그 우리로부터 끌고 나가는 것이다. 양요리에서 양들을 끌고 나와서 풀을 먹이는 것은 목동이 해야 될 고유한 활동 중의 하나이다. 즉 목동은 문을 통해서 양우리로 들어가는 것이고, 다른 곳을 통해서 들어가는 강도와 도둑과 근본적으로 구분이 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관습을 우리가 어느 정도 이해해야 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의 상황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되어서 풍부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거의 가난한 삶을 살았고, 더욱이 목동의 삶은 하층 계층의 삶으로써 자기 집마다 양들이 잘 수 있도록 양우리를 갖춘 집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마을마다 양우리가 있어서 여러 집의 양들이 한 곳에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다음 날에 목동이 와서 자기 양들을 끌고 나와서 풀을 먹이는 것이었다. 이처럼 양들은 자신의 목동의 음성을 알고 있었고, 목동은 정식으로 문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양과 주인과의 관계 즉 목자의 비유라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강력한 이미지를 주는 것이다. 이는 그들의 삶의 형태가 유목민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상당히 호소력이 있고, 설득력이 있는 비유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는 별로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이야기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백성의 유목민으로써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라 할지 구약 성서적인 배경을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알지 않는 한 피부에 와 닿기는 부분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어쨌든 목동의 일상적인 삶이 예수의 자기 계시를 위한 하나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그만큼 이 비유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매체라고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1~3a는 도둑과 강도와는 반대되는 인물로서의 목자의 적법성이 문제시되고 있다. 그 다음에는 낯선 사람과는 반대되는 사실을 통해서 목자와 양들 사이에 상호친밀성(3b~5)이 문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적법성과 친밀성에 관한 문제가 비유 이야기에서 가장 표면에 부각되고 있는 내용으로 소개가 되고 있고, 이것은 그대로 이어서 해설부분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게 적용하시면서 당신에 대한 계시를 행하고 계심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래서 1인칭부분(10,7~18)에 대한 설명을 보면 3인칭 부분과 마찬가지로 두 부분으로 나뉘어짐을 보았다. 그런데 두 부분(7~10절과 11~18절) 모두가 이야기의 시작을 “εγω ειμι”의 형태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1) 첫 번째 부분(1인칭 : 7-18절)


첫 번째 부분인 7~10절은 “ἐγώ εἰμι ὴ θύρα τών προβάτων(나는 양들의 문이다)”라고 되어 있고, 11절도 똑같이 “나는 착한 목자이다”라고 되어 있다. 요한 복음에서 εγω ειμι는 예수의 지고의 자기 계시 형태임을 지적할 수 있다.


우선 10절을 과연 첫 번째 부분에서 즉, 7절 이후에 이루어지는 내용에 연계를 시켜야 하느냐 아니면 11절 이후에 일어나는 일에 연계를 시켜야 되느냐하는 문제가 있다. 그럼 10절이 무엇인가 하면 “도둑이 온 것은 다만 도둑질하고 잡아(죽이고) 망치려는 것이지만 내가 온 것은 그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라는 내용이다. 물론 우리는 10절을 뒷부분이 아니라 앞부분에 연결시켰다. 왜냐하면 11절에서부터는 목자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삯꾼이 표면에 부각되고 있지 도둑이 문제시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도둑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10절은 7~9절에 연결시키는 것이 훨씬 낫겠다. 더욱이 10장 10절에서 보면 양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자로서의 목자로에 대한 정체성이 문제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의미로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그런 목자의 정체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10절을 앞부분에 연결시키는 것이 낫겠다. 어쨋든간에 여기서 보면 목자와 도둑과 강도, 낯선 사람등 대조되는 인물로써 소개되면서 착한 목자 즉, 양들이 다니는 문으로써의 예수의 자기 계시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볼 수 있는데, 도둑은 자기의 고유한 이익만을 추구하는데 반해서 목자로써의 그리스도는 자기 이익은 멀리하고 양들에 대한 염려, 걱정만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이 인물 즉, 목자와 도둑이 상반되는 인물이라는 것은 ‘없애다’라는 동사와 ‘영원한 생명을 준다’라는 동사로서 구분이 되고 있다. 그런데 첫 번째 설명부분인 7~10절은 비유 이야기의 첫 번째 부분인 1~3a의 내용을 그대로 취하고 있다. 그러나 동일한 각도에서 취한 것이 아니라 10,1에서 「문」은 목자가 양우리로 들어가는 문이지만 9절에서의 「문」은 양들이 들어가는 문이다라고 하면서 「문」에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둑과 강도들은 그 문을 통해서 들어가지 않는 사람임에 반해서 8절,10절에서 보면 도둑과 강도들은 양들을 훔쳐다가 죽이기 위해서 들어가는 사람들로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 도둑은 다른 길을 통해서 들어가는 사람으로써 비유 이야기에서는 공간적 차원에서 그리스도와 대치되는 것이다. 그러나 설명부분에 와서는 공간적인 차원이 아니라 시간적인 차원에서 상관되는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양들의 문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추상명사인 ὴ θὐρα는 그리스도와 동일시되고 있다. 그렇다면 강도와 도둑은 과연 누구이겠느냐? 그리고 이들이 “왔다” 즉, ‘강도와 도둑이 훔치기 위해서 왔다’라는 것이 Aorist동사로 쓰이고 있는 점을 본다면 과거의 구체적인 실존 인물들을 연상케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라는 질문들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2) 두 번째 부분 (11-15절과 16-18절)


두 번째로 11~18절을 살펴보면 이 부분은 세분하면 또 두 부분으로 나뉘어질 수 있는데 ⓐ 11~15. ⓑ 16~18이다.


11~15절은 목자의 역할이 목자와 삯꾼이라는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서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16~18절은 10장에서 이 이야기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반대명제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새로운 요소가 이 두 번째 부분인 16~18절에 가미가 되고 있다. 이것 때문에 세분해서  두 부분으로 나눈 것이다.


그래서 11~15절에서 15절을 보면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양들을 위해서 내 목숨을 내놓습니다.”라고 되어 있고, 16~18절에서도 『아버지』라고 하는 개념이 이 두 부분 속에 삽입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국 아버지라고 하는 이 개념은 얼핏보며는 이 비유 이야기 속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언급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16~18절에서 두 번에 걸쳐 아버지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이 이야기가 아버지 없이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해 준다.


이러한 일반적인 본문의 분석 설명에 이어서 본문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착한 목자 비유 이야기에 선행하는 내용과 후 맥락과의 관계를 보도록 하겠다.


나. 본문


1. 본문의 상황


1) 전 맥락과의 관계


9장 즉, 소경을 치유해 주시는 것과 착한 목자의 이야기인 10장 사이에는 어떤 근본적인 단절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장에서 다루는 주제와 10장에서 다루는 주제 사이에 서로 유사성을 띠고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9장에서는 빛과 어두움이 반대되는 개념으로 소경의 치유 이야기를 통해서 부각되고 있지만, 10장에서는 비유 이야기를 통해서 두 부류의 목동 즉, 생명을 가져다주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목자와 강도와 도둑으로 표상 되는 양들의 죽음을 초래하는 목자가 상반되는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악한 목자 즉, 강도와 도둑, 낯선 사람, 삯꾼으로 표상 되는 이 악한 목자에 대해서 제기되는 논제는 9장에서 보여지는 바리사이에 대한 단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양을 밖으로 끌어낸다는 것은 성전에서 추방되는 위협 앞에서도 기꺼이 그리스도를 증언했던 소경의 모습과 연결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점에서 본다면 9장과 10장은 직결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2) 후 맥락과의 관계


10장 1-5절의 고유한 의미에서 비유 이야기에 관한 내용들이 10장 27-29절에서 다시 나온다.


(10,27-29 :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들은 영원불멸할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내게 맡겨 주신 나의 아버지께서는 만유보다도 크시며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비유 이야기에 나오는 핵심적인 주제가 뒷부분 27-29절에서 다시 사용되고 있다. 또 10장 2절에서 보면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절 축제를 지내고  있었다”라고 하면서 성전봉헌절에 관한 언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 10장 1-18절은 어디에 연결된다고 볼 수 있겠는가?


이 비유 이야기 10장 1-18절은 7장 이후에서 언급되고 있는 장막축일이 내포하고 있는 주제, 또는 10장 24절. 34절. 38절에서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계시와 더불어서 봉헌절 축제가 내포하고 있는 주제와 연결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질 수가 있다. 그렇게 볼 때 순서 자체가 상당히 뒤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10장 21절「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것은 귀신들린 사람의 말이 아니오. 귀신이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단 말이오?”하였다」에서 소경에 대해서 암시하는 이 내용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이 요한 복음 현재의 본문의 순서를 이렇게 정의한다. 우선 《 9장 → 10장 19-29절 → 10장 1-18절 → 10장 30절 이하》의 내용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수사본의 증언들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본문의 순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러면 이 연대기적인 사실이나 주제적인 사실에서의 불일치한 상태에서 편집되고 있는 이 요한 복음의 구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엄격한 의미에서의 연대기적인 순서나 그 결과보다는 주제의 유사성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사실로부터 논리적인 일관성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지 않겠느냐?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착한 목자로서의 직무 속에서 예수의 계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10장의 일관된 사상을 어떤 면에서 단절시키고 있는 22절의 봉헌절축제를 의미 없는 삽입구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 요즘 학자들의 견해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성에 이한 측면에서 본다면 다른 공관복음서보다 요한 복음은 목격증인에 의한 증언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그 점을 밝혀주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이 이루어진 그 시점에 대해서도 역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역사적인 순서가 주제의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대표 학자들의 이야기처럼 《9장 → 10장19-29절  → 10장 1-18절 → 10장39절 이하》처럼 하는 것이 훨씬 부드러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사본에서 이런 순서를 선호하고 있다는 것은 요한 복음이 주제의 일관성에 더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사실을 근거로 해서 역사성을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생각을 한다.




2. 본문의 내용


세 번째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착한 목자의 비유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성서를 보아야 한다. 구약성서는 목자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왜냐하면 이것이 이스라엘이 유목민으로서의 삶을 살던 민족이었기 때문이며, 구약성서에 이 목자에 관한 내용들이 굉장히 많이 언급되고 있으며, 이 목자라는 개념을 통해서 예수께서 자기 계시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구약성서의 내용을 배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 목자


목자의 모습은 구약성서 안에서도 정말 자주 사용되던 그런 모습이다. 특별히 메시아적 목자에 상치되는 이스라엘의 악한 목자들은 불충한 왕들을 언급한다. 이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예언서 본문들 속에서 목자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언급되고 있다. 사실 다윗으로부터 이어지는 이스라엘백성의 역사 안에서의 이 왕권이라는 개념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에 왕들의 고유한 직무는 하느님에게 봉사하는데 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 백성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연결시키면서 백성으로 하여금 하느님께 충실한 그런 삶을 살게 하는데 왕권이 행사되고 있다. 그러나 솔로몬 이후 933년에 이스라엘이 남․북 왕조로 갈라진 다음부터 북조 왕국의 불충한 왕들은 이 왕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서로 살해하는 아무 거리낌없이 자행해왔다. 그 결과는 결과적으로 왕권에 대한 도전이고, 하느님께 대해 불충한 모습이고, 이렇게 해서 왕권을 획득한 사람들은 하느님보다 이방신들에 대한 여백을 남겨 두어서 패망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솔로몬 시대 이후부터 예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외세의 침입 속에서 수없이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 즉, 기원전 8세기에서부터 기원전 4세기에 이르는 시기를 예언자의 시대라고 하는데 바로 이 예언자들은 이런 역경 속에서도 끊임없는 희망을 부여해주는데 그것은 단순히 희망만을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가차없는 질책과 힐책을 행하는데, 이 예언자들이 행하는 질책의 대부분은 악한 목자들에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구약성서에서는 목자라고 하지 않고 ‘목자라고 하는 것들’이라고 한다. 그만큼 백성을 이끌어가야 되는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함으로써 백성 전체가 불충한 삶을 살수밖에 없는 상황을 고발하는 장면 속에서 악한 목자들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가져다주는 메시지로써 악한 목자들, 불충한 왕들의 대치되는 개념으로 착한 목자에 대한 희망을 주고 있다. 바로 이 착한 목자가 다름 아닌 메시아적인 목자이다. 메시아가 이룩하시게 될 평화를 희망으로 제시해 줄 때 이 착한 목자의 개념을 많이 쓰고 있는데, 주로 예언서 텍스트 속에서 그런 모습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착한 목자에 대한 구약성서의 예언자적인 글을 참조할 수가 있을 것이다. 예레미아서, 에제키엘서, 즈가리야서, 제2이사야서 등이다. 이 모든 것은 실제로 야훼 하느님께서 착한 목자를 통해서 당신 백성을 다시 태동하게 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부여해 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착한 목자 즉, 메시아적 목자의 출현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의미하는 내용으로 이스라엘의 희망을 뒷받침 해주는 그런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것을 바탕 위에서 목자로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는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가 한 가지 규명을 할 것이 있는데 5절에서 보면 낯선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즉, ‘양들은 낯선 이를 따라가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고,  또 도둑과 강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낯선 사람, 도둑, 강도 등 이런 사람들이 용어를 달리하지만 12절에서 보면 삯꾼으로 규명이 된다. 즉, 이리가 나타나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가는 삯꾼으로 규명이 된다. 삯꾼으로 규정되고 있는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목자로써 당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Aorist동사를 통해서 이미 역사적 실재를 연상케 하는 이 삯꾼들은 과연 누구이겠느냐? 물론 이리라는 동물은 위험스러운 적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하는 그런 용어이다. 그런데 이리라는 모습만을 가지고 목자에 반대되는 삯꾼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나름대로 바리사이들이 혹시 그들이 아니겠는가? 또는 대사제들이 그들이 아니겠는가? 또는 열혈당원들이 그들이 아니겠는가? 라는 역사적 실재에 바탕을 두고 가정을 세워왔었다. 물론 바리사이들을 삯꾼으로 보는 이유는 9장 때문이다. 9장에서 바리사이들이 보여준 의도적 소경의 모습, 그리고 치유된 소경을 대하는 바리사이들의 이러한 태도 사실 이 바리사이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지 못하도록 이 소경을 막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도둑질하고 잡아 죽이고 도망치려는 이런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지나치지 않은가?


그래서 두 번째로 대사제들을 두 번째 선상에 올려놓게 되는데, 여기서 대사제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귀족계층에 속하는 대사제들을 말한다. 예레미야스가 쓴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이라는 책에서 보면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가 이루어지기 직전 예루살렘에서 책임자로 봉직했던 이 대사제들과 지방의 사제들 사이에 치열한 투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제단에 봉헌된 제물을 놓고 그것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문제로 인해서 대사제들과 지역 사제들 간에 투쟁이 격해졌다고 전해지는데, 예루살렘 대사제들은 지역 사제들이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에 11조를 봉헌해야 하는데, 11조를 봉헌하지 못하던 지방 사제들이 꽤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스가 쓴 그 책에서 볼 것 같으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는 추호의 양보도 없었던 이런 대사제들이 타락한 모습을 전해준다. 바로 이렇게 대사제들이 갖고 있었던 정신을 도둑과 강도에 연결시켜 보는 것이 걸맞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역사가였던 플라비우스 요셉이 전해주는 『유다인 역사』라는 책에서 보면은 지방의 사제들은 끼니를 이을 것조차 없는 경우가 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귀족계층에 속했던 이 대사제들은 그들에게서 11조를 받기 위해서 집다기까지 파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다음에 요한 복음 안에서 보면 사두가이파에 속하는 대사제들이야말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그런 죄명을 씌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런 점에서 불충한 이스라엘의 왕들과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삯꾼으로 규정될 수 있는 사람들은 대사제들이 아닌가라고 추론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열혈당원으로 보는 견해도 없지 않다. 여기에는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봉헌절 축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 봉헌절는 하느님께 대한 열정으로 충만된 마카베오 사람들의 고유한 사건 즉, 자기 목숨까지도 버려가면서 유다이즘을 지켜가야 겠다는 이런 사람들의 사상을 이어가는 그런 개념이 봉헌절 축제 속에 내포되어 있는데, 열혈당원들은 성전을 지켜야만 되었던 대사제들이 오히려 로마 점령군들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서 자기들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고, 그래서 성전을 정화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생각에 가득차 있었고, 오히려 열혈당원들이 과격한 사람들이기에 이런 사람들을 삯꾼에 비교해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라고 추론을 하지만, 이 열혈당원들을 삯꾼으로 보는 것은 성서의 내용이나 역사적인 사례로 볼 때 거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비폭력적인 방식을 취하시는 반면에 열혈당원들은 폭력적인 방법을 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남미의 해방신학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초세기의 비교한다면 열혈당원의 모습과 유사하다. 무력, 폭력을 사용하면서까지라도 그 순수성을 지키려는 열혈당원의 일관된 사상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항시 비폭력적인 모습을 택하시기에 그런 것과 견주어 볼 때 오히려 삯꾼에 해당하지 않느냐라고 하지만 여기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그럼 삯꾼에 해당하는 사람이 누구이겠느냐? 라고 여러 가지로 추론을 세울 수는 있지만 정확하게 누구라고 규명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다. 본문의 신학


1. 예수에 대한 메시아적 계시


우선적으로 예수에 대한 메시아적 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라고 볼 수 있다.


예수라는 분에 대해서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양들을 밖으로 끌고 나갈 수 있도록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는 합법적인 목자로서의 예수의 모습이 여기서 표출되고 있다. 특별히 예수는 18절에서 보면 아버지의 명령에 항시 따르고 있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 내용은 이미 30절에서 나타나는 내용을 준비시키는 내용이다. 즉, 예수와 아버지와의 일체성에 관한 주장을 준비시켜 주는 일이다.


바로 예수께서는 εγω ειμι라는 이런 장엄한 계시의 형태,  현현에 관한 형태를 통해서 당신이 어떤 분임을 분명하게 해 주고 있다. 물론 εγω ειμι라는 이 형태는 출애굽기 3,14의 근본사상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요한복음 속에서도 모세와 예수라는 인물을 비교해서 쓰고 있는 것은 즉, 로고스로서의 예수, 하느님을 향해 있었고, 하느님이었고, 아버지 품안에 있었던 분이고 아버지를 알게 하신 분이라는 점. 다시 말해서 이미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만남이 있었던 분이고 진정한 교환이 있었던 그런 분이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εγω ειμι가 각론적으로 쓰여졌을 때의 이야기이고, εγω ειμι가 속사를 동반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구이다’라는 것이다. . 여기서 속사로 쓰이는 경우는 대부분이 추상적이거나 신비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빛이다”라는 표현인데, 어떻게 한 인격체가 물질이 될 수 있겠는가?


『양들의 문이다. 착한 목자이다, 나는 부활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표현이 굉장히 많은데 이것 자체를 그 자체로 알아듣는 것은 굉장히 어렵지만, 요한 복음 안에서 이런 표현이 나올 때는 항시 그 이전에 표징에 의해서 상징적인 가치를 지니게 하고 있다.


요한 복음 안에서의 예수는 인간들에게 다가오는 하나의 실재로서, 인간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하나의 실재이다. 그런데 메시아로서의 예수는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들에게 주어진 그런 일들뿐만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인간들에게 베풀어주신 가장 풍요로운 선물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는 자기 계시를 하고 있는 분이다. 메시아로서의 예수는 말씀하시는 분 자신이고, 내어주시는 분 자신이다. 즉, 하느님만이 하는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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