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자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요한11장 1절~46절 )

 



Ⅲ. 11장 1절~46절


가. 개 관


예수의 공적인 임무의 마지막 부분이라고 할 수 있고, 중추적인 부분인 라자로를 살리신 11장을 할 것이다.


그럼 전체적인 관점에서 요한 복음 11장은 여러 가지 면에서 소경을 치유해 주신 9장과 흡사한 모습을 보여진다. 11장과 9장을 통해서 전해주는 사건들은 구체적으로 11장 37절에서 다시 한번 언급됨으로써 연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1장에서 전해주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이 기적이라고 하는 사실자체에 대해서 묘사해주고 있는 한 역시 9장에서처럼 극히 적은 분량으로 내용을 전해준다. 다시 말해서 43절과 44절, 두 구절에만 요약이 되어 있고, 그것이 기적 사실 자체에 대한 내용을 서술해 주는 부분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9장이나 11장은 보통 엄격한 증인들의 반응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분량을 서술하고 있다. 이 9장과 11장을 비교해보면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도 상호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부분에 있어서, 9장 3절이나 11장 4절에서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여야만 할 이런 상황이 아버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점을 예수께서 분명하게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또 낮과 빛의 이미지를 통해서 드러나게 될 기적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앞당겨 드러내 보여주는 내용으로 9장 4절과 11장 9절에서 보여지고 있다.


그런가하면 소경이 치유를 받은 직후에도(9장13절) 그러했지만 라자로가 소생된 이후에도 이런 사실들은 바리사이들에게 전달되고 있다(11장36절). 이런 외면적인 사실 외에도 차이점을 간과할 수 없을 만큼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서 9장에서 예수의 기적들은 사건 초기에 그리고 사건 끝, 이 두 부분에서만 나타나는데 11장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의 현존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9장에서는 기적이라는 사건자체를 묘사해주고 나서 이에 대한 반응을 전해주고 있는데 반해서, 11장은 이것과는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가하면 9장에서는 치유된 소경이 자신이 걸어가야 될 길이 어떤 길인지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음에 반해서 11장에서는 기적의 수혜자인 라자로가 수동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요한적 관점에서 볼 때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 지니고 있는 이야기들은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바로 요한이 표징들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파할 수 있게 해준 하나의 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라자로를 죽음에서부터 소생시킨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어디까지를 이 사건의 이야기로 보아야하는지에 대한 텍스트의 경계를 정해야 할 것이다.




나. 본문구조


1. 본문구분 (전체적인 관점에서 텍스트를 구분할 것인지:


             텍스트의 경계 )


1). 첫 번째, 행위와 인물을 감안해서 볼 때,


11, 1에서 “어떤 이가 병들어 앓고 있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이야기를 도입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나서 장소, 인물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으로 분명히 11,1절에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어디서 끝을 맺고 있는가에 대해서 경계를 설정하기가 어렵다. 기적자체는 43절과 44절에서 묘사되고 있다. 이 기적 사실이 이루어진 이후에 즉시 상반되는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45절에서는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대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라는 긍정적인 반응과 46절에서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일러바쳤다.”라고 해서 기적 사실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11장 전체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45절에서부터는 새로운 인물들이 소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를 이어서, 즉 46절을 이어서 의회가 소집되고 예수를 죽음에 처하는 해결 방법이 모색되고 있다는 점. 이렇게 행위나 인물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실제적으로 47절-53절까지는 엄격한 의미에서는 기적이야기에서 분리된 새로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45절에서 46절을 어떻게 될 것이나이다. 45절과 46절이 지니고 있는 내용을 보면 예수께서 라자로를 죽음에서 소생시킨 표징에 관한 증인들로서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47절 이하의 내용은 바로 잡을 수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46절까지는 라자로를 죽음에서 소생시킨 이야기 속에 삽입시키는 것이 논리적인 근거 속에서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45절에서 묘사되고 있는 긍정적인 표현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첫 번째로 예수께서 표징을 행하신 이후에 제자들이 보여주었던 모습과 동일한 형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가나에서 처음으로 표징을 행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그분을 믿었다”(2,11). 11,45에서는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 11장에서도 2장에서처럼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의 믿음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기적 이야기 자체에 삽입시키는 것이 더 타당성 있는 일이라고 본다. 사실상 표징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이 믿음을 통해서 주어지고 있다는 사상을 여러 번에 걸쳐서 표명해 주고 있다. 그래서 기적이 이루어지고 난 이후에 일어난 결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삽입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더욱이 요한 복음 안에서 기적 이야기들이 그 무엇에 우선해서 증인들의 반응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 45절의 내용을 기적이야기, 즉 11장에 삽입시킨다고 한다면, 46절은 이와 대조적인 모습으로서 부정적인 태도를 묘사해주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46절에서도 기적의 증인들의 보여준 반응을 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기적 이야기에 삽입시키는 것도 옳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11장 1절에서 46절까지를 라자로를 죽음에서 소생시킨 이 사건의 이야기로 보고 이 이야기를 보겠다.




2). 두 번째, 맥락적으로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


11장 16절에서 보면 토마는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고 하는데, 토마가 한 말이 정확하게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후에 가서 이야기를 하겠지만, 최소한 이 말을 들으면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굉장히 절박한 상황, 이런 상황 속에서 라자로를 소생시킨 사건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소경을 치유해 주시는 9장의 사건은 긴장의 분위기 속에서 그리고 초막절 축제를 지내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도착하면서 예수께서 맞부딪쳐야만 했던 배척의 분위기 속에 이미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미 9장에서부터 비롯된 긴장감은 갈수록 더해 가는 것이다. 바로 10장 끝부분인 10장 22절에서 39절을 보면 이 봉헌절 축제라는 테두리 속에서 예수를 소송하는 그런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결국 예수를 소송에 붙이는 것은 예수가 의회에 출정하게 되는 공관복음의 내용을 연상케해주고, 예수는 이 소송을 통해서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 이와 같이 11장에서 전해주는 이야기들은 위협적이고 협박적인 이야기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10,31에서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를 치려고 다시 돌을 집어들었다”라는 표현이 있다. 또 11장 7-8절을 보면 『그런 뒤에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로 갑시다”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그분에게 “랍비,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랍비를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고 가시렵니까?” 하고 여쭈었다.』 바로 이 분위기가 얼마나 협박적이고 위협적인 분위기였는지를 알 수 있다.


라자로를 죽음으로부터 소생시킨 사건은 예수께서 공적인 직무 속에서 마지막으로 드러내 보이시는 표징이고, 예수께서는 7장 이후부터 누적되어 온 팽팽한 긴장을 수난을 통해서 마감하게 될 것이다. 라자로가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이 바리사이들에게 전해지자마자 46절에서 보면 의회가 소집되고 여기에서 예수를 죽음에 처형할 해결 방안이 마련됩니다. 그래서 53절을 보면 “그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결의하였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복음 관점에서 이 베다니아에서 벌어지는 표징은 위협적이고 협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죽음에서 라자로를 소생시키는 종말에 비극적인 사건들을 눌러 이기게 될 그런 표징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표징의 충격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임을 요한 복음 저자는 12장 10절, 17-19절에서 두 번에 걸쳐서 언급하고 있다. 라자로를 죽음에서 소생시킨 사건이 처해있는 맥락이 상당히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종말의 비극적인 사건을 눌러 이기게 될 하나의 표징으로서 보여주려고 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3). 세 번째, 텍스트의 구분


이 장면(11, 1-46)을 구분을 해보면 여러 장면으로 나눌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인위적으로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서는 안된다. 본문 자체가 제공해주는 구체적인 자료를 토대로 해서 구분하고자 하는 장면들의 당위성이 입증이 되어야 한다. 이 이야기를 여러 장면으로 나눌 수 있는 근거들을 제공해 주는 요소들은 첫 번째 여섯 개의 구절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여섯 개의 구절들 속에는 계속해서 소개될 행위들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해주는 원초적인 상황과 주변환경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우선 이 서문에서는 특별한 두개의 요소를 화면에 부각시켜 준다. 이 서문에서 한편으로 등장인물들을 소개한다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그리고 그들이 예수와 맺고 있는 관계(1절, 2절, 5절)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구분이 되고 있다.


또 하나는 라자로가 병들었다는 상황에 대한 소개와 이런 상황으로부터 야기되는 어떤 프로그램이 구체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3절에서 보면 “주님, 보살펴 주소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 예수에게 전달된 이런 메시지를 닮은 3절을 통해서 우리는 라자로의 두 자매가 예수께서 그들의 오빠인 라자로가 있는 곳으로 가시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4절에 나타난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그 일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라는 예수의 응답은 바로 두 자매가 기대했던 것처럼 예수께서 라자로가 있는 곳으로 가실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분의 개입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될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해주고 있다. 그런데 6절에 가서 보면  촌각을 다투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그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다라고 되어 있다. 아직까지 예수가 출발하지 않았다는 것, 그 출발하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 라자로가 있는 곳으로 가시게 되는 이 이야기의 중추적인 행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예견해 볼 수 있고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래서 이야기를 구분하는데 있어서 서문에 즉 여섯 개의 구절 속에 나오는 내용들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앞서 언급하였는데, 이 서문 속에서 인물과 그 인물들의 행위를 기점으로 해서, 중심축으로해서 이 이야기를 구조 도식화하여야 할 것이다. 이 구조 도식화를 통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 이 이야기가 전해주고자 하는 것을 간파할 수가 있다.




① 첫 번째 축으로서의 행위


행위를 중심으로 해석할 때 이 텍스트는 네 개의 부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a) 7-16절 : 예수의 베다니아에서의 기적으로 예수께서 라자로가 있는 곳으로 가시기로 결심하시는 장면이다. 예수의 움직임을 라자로를 향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 다면은 우리는 7절에서 첫 번째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다시 유대로 갑시다” 6절에서 보면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다”라고 되어있음으로 계시던 곳에 머물러 있던 예수는 처음으로 떠날 생각을 7절에서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6절에서 “유대로 갑시다”라고 할 때 사용되는 「가다」라고 하는 동사는 16절까지 세 번에 걸쳐서 나타난다. 8절에서 “ … 가시렵니까?”, 15절에서 “… 그에게로 갑시다”, 16절에서 “ … 죽으러 갑시다”에서 사용된 동사는 αγω υπαγω로 세번 사용된다. 여기에다가 11절에서는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습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습니다”라는 구절은 일종의 계획을 표명하는 그런 내용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이 첫 번째 시기 속에서 예수께서는 아직 길을 떠나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는 당신의 의지를 표명해 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b) 두 번째는 17-27절이다. 여기서는 베다니아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동작의 행위 중심이기에 이제는 가시는 것이다. 17절에서 보면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진다. “예수께서 가시어 보시니”(17절)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께서 실제적으로 길을 나시는 것이다. 바로 가다(ερκομαι)라는 동사를 통해서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23절에서 보면 “당신 동기는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마르타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데, 결국 예수님께서 행동을 하고 계신다는 것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가 이 23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사실상 11절에서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습니다”라고 이미 표명하신 계획을 다른 말로 바꾸어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움직임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c) 세 번째는 28-37절이다. 여기서는 가시던 길을 멈추시는 예수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8절에서 보면 『이렇게 말한 다음 마르타는 물러가서 자기 동기 마리아를 불러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른 신다” 하고 남몰래 불렀다. 마리아는 (이 말을) 듣자 얼른 일어나 예수께로 나갔다』 여기에서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다시 말해서 라자로를 깨우기 위해서 가시겠다고 하시던 예수의 의지 표명과 직접적인 행동이 아직 라자로에 도착되기 이전 단계에서 중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른 신다”(28절), 그리고 라자로를 향해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신다. 30절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않고 마르타가 마중했던 곳에  계셨다”(30절).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베다니아로 향하는 길 어디에선가 실제적으로 멈추어 서 계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4절에서 보면 “그를 어디에 묻었습니까?”라고 예수께서 묻는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잠시 멈추셨다는 것과 한편으로 예수께서 무덤으로 가고자 하시는 의향을 지니고 계시다는 점을 동시에 표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11절에서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습니다”라는 계획은 계속적으로 수행이 되고 있는 것이다.


d) 네 번째 마지막 장면이 38-46절이다. 예수께서는 다시 속으로 격앙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38절). 무덤으로 가시는 예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전해줌으로써 11절에서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습니다”라는 계획이 성취된다. 행동은 완료가 된다. 무덤까지 가셨기 때문이다.




② 축으로서 행위자(인물)를 중심으로 구분


다음에 두 번째로는 인물을 중심으로 즉 행위를 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예수의 행위가 지니고 있는 중요성이나 이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동적이고 다이내믹한 관점은 이 이야기를 네 부분으로 나눔에 있어서 정당성을 제시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보게 될 인물 중심으로 한 분석 내용 역시 행위 중심으로 나눈 네 단락의 구분을 정당화 시켜 준다. 에수님께서는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 한가운데 현존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물들은 정확하게 말해서 서문에서 관심을 기울인바 있었던 바로 그 장본인들이다. 5절에서 보면 “예수께서는 마르타와 그 동기와 라자로를 사랑하고 계셨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어지는 내용 속에서 즉, 행위 중심의 첫 번째 장면인 7절에서 1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다라고 되어 있다. 두 번째 장면인 17절에서 27절에서는 마르타와 함께 계시고, 세 번째 장면인 28절에서 37절에서는 그의 동기와 함께 계시고, 네 번째 장면인 38절에서 46절에서는 라자로와 함께 계신다. 우리가 서문에서 언급된 인물들과 행위 중심으로 펼쳐진 각각의 인물들과 관련을 맺으면서 현존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네 부분으로 나눈 각 장면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면, 각 장면 속에 동일한 요소들이 삽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각 장면 속에는 네 개의 요소가 소개되고 있는데,


첫 번째는 라자로가 분명히 죽었다는 것이다. 즉 단언적으로 라자로의 죽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라자로는 분명히 죽었고, 그 죽음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이미 때가 늦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라자로의 부활관은 계시적인 예고이다.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방식으로 당신이 라자로에게 가실 의도가 있음을 표명하셨고, 그 의도 속에서 펼치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의도가 무엇인지를 간파하도록 하셨다.


세 번째로, 그러나 청중들은 이것을 알아 듣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와 대화를 나누게 될 사람들, 이 사람들은 예수께서 예고해주신 밝혀주신 목적의 의미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네 번째로, 당신이 펼치시게 될 기적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나타나는데, 세 번째 장면을 제외한 나머지 장면들은 예수께서 보이시게될 기적의 신학적 의미들을 담고 있는 내용들은 전해주고 있다.


좀 더 다시 한 번 분석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행위 중심 또는 인물 중심이 동일하게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앞서 입증을 했다.



























장면


행위


중심인물


첫 번째 : 7-16절


라자로가 있는 곳으로 가시겠다는 예수의 결심


예수와 제자들. 이것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은 본문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본문 속에는 앞서 언급한 네 가지에 다 들어있다. 


두 번째 : 17-27절


베다니아로 가시는 예수. 즉 행동을 옮기시는 예수


예수와 마르타. 역시 두 번째 부분의 텍스트 안에서도 이 네 가지 요소들은 다 나타나고 있다.


세 번째 : 28-37절


잠시 지체하심.


예수와 마리아. 이 본문 속에서도 네 가지 요소 중 네 번째 기적이 지니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만 여기서 언급이 되지 않고 나머지는 다 언급이 되고 있다. 


네 번째 : 38-46절


예수께서 무덤에 가시는 것이다. 무덤에 당도함


예수와 라자로. 이 네 번째 부분에서도 이 네 가지 요소는 다 나타나고 있다.




이런 구조의 토대 위에서 과연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혼합해서 만든 이야기가 아닌가하는 점을 밝혀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요한 복음 11장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 또는 주석서 들은 라자로의 소생에 관한 요한적 이야기가 형성됨에 있어서 과연 원초적 전승으로부터 전해진 원초적인 이야기가 무엇이었겠느냐 하는 것을  재구성 해보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해 왔었다. 또 여기서 더 나가서 일부 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원천을 규명하려는 시도에 만족하지 않고, 편집 과정의 상이한 단계들을 추적하려는 노력도 계속해 왔다. 이 본문에 나타난 다양한 내용들이 그런 가정들을 긍정적으로 보게 해주는 데, 우선 편집 단계의 문제에 있어서 예로서 보면 다음과 같다.


1) 11, 16에서 토마가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로 갑시다”라고 하는 내용이 소개가 되고 있다. 그리고,  8절에서 “랍비, 바로 얼마 전에 유대인들이 랍비를 돌로 치려고 하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그러니까 예수께서 감내하셔야만 되는 협박의 내용이 8절에서 언급이 되고 있는데 이 내용을 감안한다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로 갑시다”(16절)라는 내용 속에서 바로 예수님을 연상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는 이미 『주님』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원문에서는 인칭대명사가 사용되고 있다. 그러니까 잘못 해석하면 「그와 함께 죽으로 갑시다」라고 했을 때 이것을「라자로와 죽으로 갑시다」라고 할 수가 있고, 아니면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실제로 14절에서 “라자로는 죽었습니다. 당신들이 믿도록 하기 위해서는 내가 오히려 거기에 없었던 것을 당신들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에게로 갑시다”하니까 뒤를 이어서 토마가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마치 본문의 직접적인 영향하에서 보면 「라자로와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8절의 내용을 염두해 두고 본다면 그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는 라자로가 아니라 주님, 즉 『예수』라는 것을 연상할 수 있다.


2) 또 16절을 중심으로 해서 라자로가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17절에서도 “예수께서 가시어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었다”는 것은 분명히 해석된 번역된 것이기에 그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지만,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예수께서 무덤에 가시어 그를 보셨다는 것은 라자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 15절에서 “그에게로 갑시다”에서 「그」는 라자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17절에서도 라자로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 가운데 16절이 들어가 있으므로 해서 결국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갑시다”라는 표현이 라자로를 연상케 해주는 내용이라는 것을 내면적인 관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편집상의 어떤 문제가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17절 자체의 표현은 예수께서 이미 라자로의 무덤이 있는 베다니아로 오셨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가시어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었다”(17절). 그러나 실제적으로 예수께서 베다니아에 당도하신 것은 38절에 가서 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17절과 38절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연계시켜도 별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즉 “가시어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었다(17절). 예수께서는 다시 속으로 격앙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38절) 라고 연결해도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예수와 마르타, 예수와 마리아의 만남을 묘사해 주고 있는 17절에서 38절 사이의 내용들이 복음서 저자에 의해서 삽입된 내용으로 볼 수는 없겠느냐?


바로 이와 같은 사실들이 복음서 저자가 제공해 주는 보다 단순하고도 도식적인 원천은 편집자들이 사용하면서 이 이야기들에 나름대로 살을 붙였을 것이다라는 가정을 하게끔한다. 11장에서 보면 공관전승에서 이미 우리가 보고 있는 기적 이야기의 전형적인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라자로의 경우에 병자나 고통의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중재를 요청하고 있으며 그래서 예수가 개입을 하고, 예수의 개입으로 해서 야기된 결과, 그리고 증인들 사이에 일어난 반응들은 공관복음에서 볼 때 기적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전형적인 도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체로 서술했던, 서술체로 표명되었던 간에 11장에 소개되고 있는 내용들이 요한이 주로 사용하고 있는 요한의 문체, 요한의 신학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다. 그저 단순히 공관복음이 전해주는 전형적인 기적 이야기의 도식을 그대로 따 와서 이것을 만든 것은 아니다. 명백한 문학적인 지표를 통해서 다시 한번 언급해 보면 19절에서 “많은 유다인들”이라는 표현은 요한 복음 안에서는 자주 사용되고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오다”라는 동사인 ερκομαι는 그저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무엇을 하기 위해서 오는 동사이다. 또 λεγω προς(누구누구에게 향해서 나가다, 누구에게 나가다)라는 동사도 요한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유다인들, 많은 유다인들 ⇒ 4,39; 6,60. 65; 11,45; 12,42. 그 다음에 「오다」(ινα ερκομαι)라는 어떤 목적을 지닌 동사는 1, 7.21; 4,8; 9,39; 10,10; 12,9.47; 13,1; 16,2.32; 18,28,37.


그러니까 용어적인 차원에 있어서도 요한적 특징들이 지니고 있는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고, 11절에서 13절, 23절에서 24절을 통해서 요한의 특징적인 방식이 부각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라자로가 잠들어 있습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습니다”(11절)라고 하니까 “주님, 그가 잠들어 있다면 곧 낫겠습니다”(12절). 그 다음에 23절에서 “당신 동기는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하니까 24절에서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압니다” 라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제자들이나, 다른 청중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거나 곡해하는 형태가 여기서 발생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처음에서부터 끝가지 예수께서 곧 이루셔야 될 기적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선포하시는 내용들이 요한 복음서의 전형적인 신학적 형태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있다. 이런 것들을 빼고 나머지 것들은 편집적 개입의 결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11장 2절의 내용과 11장 8절의 내용은 이야기를 복음적 맥락에 연결시키는 중재역할을 하고 있는 내용으로서 어느 사건에 대한 서술을 하기보다는 하나의 이야기 전체를 이어가게 해주는 중개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짚어본 이런 내용들을 근거로 해서 보면 이 이야기 속에 숨어져 있는 어떤 원천을 정확하게 재구성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더 나아가서 편집적인 다양한 관계들을 재구성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다. 다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본문을 보면서 요한의 문체, 방식, 요한의 신학이 이 이야기의  처음에서 끝까지 이 본문 속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편집자 또는 편집자들이 하나의 원천을 사용하였다 하더라도 원천을 글자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고 확정하기에는 사실상 어렵다. 전체적인 요한적 일관성 속에서 이 작품이 이루어졌다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단일론적이냐라고 규명하기도 어렵고, 다양한 편집적인 장면을 통해서 형성되었다면 그 단계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가라고 규정하기가 사실상 어렵다. 다만 요한적 일관성 속에서 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용어나 문체, 각 부분에서 드러나고자 하는 신학적인 의미의 일관성의 토대 위에서 확증되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그저 요한의 이야기로 볼 수 있는 것뿐이지 재구성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 본문이 지니고 있는 의미


1. 서문(11장 1절-6절)


우선 서문(11,1-6)에서 이 부분이 어떤 의미를 전해주고자 하는가? 여기서 중추적인 내용이라고 한다면 4절에서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라는 것이다. 공적인 직무를 수행하시는 동안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표징으로서의 라자로의 소생과 첫 번째 표징으로서의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는 유사성을 상당히 많이 지니고 있다. 우선 두 자매를 통해서 예수에게 전해진 메시지, 즉 3절의 “주님의 사랑하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것은 2장 3절에서 “그들에게 포도주가 없구나”라는 예수의 어머니의 말씀에 비교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경우에 분명하게 엄표된 내용들이 라자로의 경우에는 슬픔과 고통의 상황, 가나의 혼인 잔치 경우에는 난처한 상황을 알려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 두 경우에 있어서 결국 표면적으로 볼 때 예수의 어머니가 한 말씀이나, 두 자매가 예수에게 전달한 메시지에는 예수로부터의 어떤 개입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간접적으로나마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별히 11장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이 두 자매가 차례차례 취하게 될 그런 이야기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21절과 31절에서 마리아도 그렇고 마르타도 그렇고 “주님이 여기 계셨다면 제 동기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가나에서도 그렇게 하셨지만 이 베다니아에서도 이 자매들의 요청에 직접적으로 응답하시지는 않는다. 11장 6절에서 “그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서 이들을 더 머무셨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에 대해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제 시간이 오지 않았습니다”(2,4)라는 응답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예수께서는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라자로를 살리시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기셔야만 헀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고 라자로가 병으로 인해서 죽게 되어서 당신의 일을 하게되는 시간을 남겨두기 위해서 이틀간을 더 기다리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3절과 5절에서는 라자로와 그 두 누이동생과 예수님이 갖고 계시는 우정의 감정을 묘사해 주고 있다. 이렇게 깊은 우정의 관계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라자로가 죽을병에 걸렸다면은 즉각적으로 달려갔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틀을 더 기다리셨다. 그러면서도 예수께서는 마르타와 그의 동기와 라자로를 사랑하셨다(5절). 그러면 이틀을 더 머무신 것과 그들을 사랑하셨다는 것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겠는가?  이미 우리가 2장에서 보았지만 예수의 어머니의 요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제 시간이 오지 않았습니다”(2,4)라고 말씀하시는 응답을 통해서 우리는 오직 신앙에만 개방된 실제 질서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런 질서 속에서는 혈연 공동체 안에서의 어떤 누구도 특별한 특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을 그의 어머니에게 분명히 전달했었다는 사실을 지적했었다. 11장의 경우도 그와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께 전달된 메시지는 분명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전달되고 있고, 이런 메시지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특별한 한 존재에 관계가 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개입하실 것이라는 의사를 4절을 통해서 분명하게 전하고 계시지만, 이틀이라는 시간을 남겨 두심으로 해서 인간적인 순수한 우정이 요구하는 것과는 반대 방향의 행동을 하고 계신다. 결국 하느님의 계명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모습으로 방향 전환이 되고 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 속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믿음으로 불리움을 받은 그런 여인으로써의 마리아가 되었다. 베다니아에서 예수의 두 친구였던 마리아와 마르타는 신앙 안에서 성장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신앙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실 11장 4절에서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께서 라자로의 죽음에 중재 하시려는 의미는 믿음에 조회할 때만 이해 가능한 것으로 한정되어 있다. 사실상 4절은 하느님의 영광과 아들의 영광스럽게 되는 것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표명해 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라자로의 죽음은 하느님께는 역사를 하시는 기회를 제공해 주게 되는 것이고, 그분의 능력을 현실화시키는 기회가 될 것이고, 당신이 누구이신 지를 알게 해 주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는데 라자로의 죽음이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요한 복음서에서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은 그의 죽음과 부활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예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실 경우 그 이유 때문에 그분은 유다인들에게 고발을 당하고 의회의 결정에 따라 죽음에 처형되게 될 것이고, 그분은 자신을 죽음과 부활로 이끌어 가게 될 수난의 고통스러운 순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바로 복음 저자가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하는 점이 바로 이점이 아닌가 한다. 가나의 이야기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의 영광에 대해서 언급을 한 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결과적으로 예수께서 행하시는 마지막 표징은 첫 번째 표징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으로서 그것은 예수의 영광을 계시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서 능력을 갖고 역사 하시게 될, 그리고 죽음과 부활이 온전하게 그 모습을 드러나게 해 줄 아들이 과연 누구인지를 계시하는 것이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표징을 하고 난 이후에 그 뒤를 이어서가 아니라 표징 자체 안에서, 표징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예수의 정체성을 깨닫게 될 사람들의 믿음을 통해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2. 첫 번째 장면(11장 7절~16절)


행위 중심으로 본다면 첫 번째 장면이고, 인물 중심으로 본다면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내용은 11절~13절의 내용이다. 11절과 13절을 중심으로 해서 전․ 후 내용들이 서로 상응하는 내용이거나 서로 보완적인  내용으로 편성이 되어 있다. 그래서 우선, 중심이 되는 11절~13절의 내용을 보고, 그 다음에 전․후 맥락에 형성되어 있는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 11절-13절


11절~13절의 내용은 예수께서 라자로의 죽음에 개입하시겠다는 것을 예고하는 내용이다. 6절에서 라자로에게 가시겠다는 의지를 이전에 밝히셨고, 그리고 그리로 가시기 전에 잠시 이틀을 더 머무신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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