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다 (13,6-20)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다 (13,6-20)


가. 개관


1. 전반적인 이해


13장에서부터 2부가 시작되는데, 여기서 바로 공관복음에서 볼 때 최후만찬의 관한 이야기가 서술되는 베다니아가 요한 복음에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이야기가 사목자들에게 중요한 이야기이다. 제자들이 걸어가야 될 신앙의 여정, 선교적 선물을 수행하는 자들로써의 자세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 부분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책임져야 될 사람들이다.


우리는 라자로를 죽음에서 되살린 예수의 공적인 직무의 마지막 사건을 보았다. 예수의 공적인 직무는 죽음으로부터 한 인간의 생명을 다시 되살린 라자로의 부활 속에서 최고 절정에 이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느님의 광채는 바로 이 표징을 통해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바로 공생활 시작 즉,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고 역시 라자로를 죽음으로부터 소생시킨 이 사건 안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늘 똑같이 예수의 표징 앞에서 의도적으로 자신들의 눈을 감는 모습으로 나오고 있다.


바로 라자로를 죽음으로부터 소생시킨 이 사건 안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음에 처한 결단을 내리게 된, 바로 유대인이 드러낸 결단의 후속결과가 12장에서 바로 나타난다. 즉 12장에서 보면 베다니아의 향유 사건이 바로 예수의 발에 뿌려진 이 향유는 바로 죽음에 대한 표상이다. 그리고 즉시 이어서 12,12이하에서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내용이 나오고 있다. 그 예루살렘 입성에서 구약성서의 여러 가지 내용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뒷받침 해주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영광스럽게 개선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간직해 온 메시아적 의미가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즉 예수의 죽음에 대한 예표와 메시아적 기대의 성취, 이 두개가 합쳐져서 12장 안에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표징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을 향한 예수의 설교는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12,37참조- 그들 앞에서 표징 행하셨으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을 향한 예수의 선교는 실패였다. 그렇다면 예수의 유대인 향한 선교가 실패하였고 선택된 민족이라고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왜 자기들에게 메시아로 파견된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초기 교회 공동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이는 매우 난해한 문제였다.


바로 요한 복음서 저자는 초기 교회인 들을 어렵게 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전통적인 응답을 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언자가 예고한 말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해서 38절에서 예언자가 이스라엘에게 한 말이 이루어졌다.(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케 하시고, 이는 그들이 눈으로 알아보고 마음으로 알아들어 돌아오는 일이 없도록 해서 그리하여 내가 그들을 낫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로다. 이사야1,9이하의 내용)


이런 전통적 내용을 근거로 해서 초기그리스도교공동체 신자들을 괴롭혔던 바로 예수의 유다인에 대한 실패, 그리고 메시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유다인들이 태도, 이것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한 문제, 즉 초기교회 공동체 신자들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중요한 문제였는가 ? 이것은 동시에 희망의 장을 열어 보이는 출발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 해결을 통해서 하느님의 왕국이 메시지가 이스라엘이라는 한정된 국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 국경을 넘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된다는 출발점이 예수의 수난의 모습이다. 다시 말해 유다인들에 대한 예수의 선포가 실패로 끝났다는 것은 결국 유대인들이 그 빛을 완전히 꺼버렸다 하는 의미와 상통한다. 이 빛을 꺼버렸다고 하는 순간 그 빛은 이미 온 세상을 비추기 시작하는 이런 어떤 역설적인 이야기가 여기서 보여진다. 이는 이미 요한 복음 서론에서 언급된 이야기가 확인되는 것이다. (요한 1,5이하 내용 참조)


즉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고 있고 그래서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의 선교가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순간이 온 세상에 빛을 발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관복음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는 스스로 당신의 말씀처럼 한 알의 썩어 가는 밀알처럼 당신의 생명을 내어놓는다. 예수의 이런 죽음의 결과는 이방인 출신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들어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제부터는 1부(표징)를 마감하면서 44절에서 50절에 나오는 예수가 큰소리로 말씀하셨다는 예수의 말씀만을 청중 없이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즉 신학적인 형태로써 예수께서 당신이 행하신 선교를 요약하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니까 대중 앞에서 행하신 당신의 설교는 궁극적으로 외적 모습으로는 실패이다. 44-50절까지의 내용에서 신학적 규정의 내용은 2부에 연결되고 있다.


이제 13장에서 시작되고 있는 ‘때’에 관한 책 제 2부에서는 그야말로 내적인 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대중적으로 행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선교, 이는 37절 2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실패했다. 이렇게 유대인들에 대한 선교를 실패한 예수께서는 당시의 당신이 파견된 자로서의 삶을 어떻게 제대로 보여줄 것인가? 즉, 당신 삶의 의미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 당신이 선택한 제자들 안에 머물면서 다만 그들에게 당신 삶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바로 최후 만찬에서의 고별담화문, 이것이 바로 예수의 삶의 구원적 의미를 말해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혹자는 2부를 ‘고별에 관한 책이다’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2부 전체를 보면 이 ‘고별에 관한 책’에 관한 의미는 너무 의미 축소의 경향이 있고 어쨌든 최후만찬에서의 고별담화문은 당신이 사랑하시던 제자들과만 함께 하시면서 당신 삶의 의미를 전해준 근본적 메시지를 전해주는 아주 소중한 장이라고 볼 수 있다.




2. 성 격


요한 13,1-2는 제 2부를 열면서 우리는 2부의 아주 특별한 성격을 묘사해준다.


“해방절 축제 전날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야 할 당신의 시간이 온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당신의 사람들을 사랑해 오신 그분은 이제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13,1)


이 세상으로부터 아버지를 향하여 가기 위한 “시간”, 이때는 어떤 때인가? 즉 성부께 돌아갈 때, 이 때는 세상에서 아버지께 돌아갈 길로서 지상에서 공적인 직무를 수행하신 예수께서 영광으로 돌아가시는 무한한 사랑의 때이다. 이 때에 예수는 유일하게 당신 제자들과만 함께 머물면서 그들에게 담화문을 발표하신다.


이러한 신비의 때에 특별히 역할을 하게 되는 그 제자들의 모습이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13-17장’ 이를 흔히들 ‘고별 담화문’이라 하는데 요한 복음서에서 보면 αγαω, αγαπη 가 전체에서 40번 나오는데, 13장에서만 2/3에 해당하는 32번이 나온다. 즉 마지막 고별 담화문은 “사랑”이라는 표징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때에 관한 책의 구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이야기’,‘최후의 만찬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혼합되어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공관복음 안에서 최후만찬은 중요한 위치, 중요한 수난의 위치로써 나타나고 여기서는 아주 간략히 나타나고, 공관복음서의 최후 만찬의 이야기가 여기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이야기’로 나타나고 있다. 표징의 책에서 볼 때 예수의 행위가 먼저 선행되고 그 선행을 근거로 담화문이 발표되는 경우를 우리는 6장의 예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예수의 행위가 바탕이 되어 나타나고, 그 다음에 고별 담화문이 나타난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담화문이다. 이것이 17장에까지 이어진다. 즉 13장의 내용이 근본이 되어 17장까지 나타난다. 이제 18장에서부터 수난의 본격적 모습이 나타나는데 체포되는 예수의 모습(18,1-2),여기서부터 예수의 수난이 시작된다. 이것은 공관복음에서 전해주는 예수 수난의 이야기와 거의 맥을 함께 한다. 물론 세부적 내용에서는 요한적 특성이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나 줄거리 자체에서는 공관복음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20장에 나오는 발현 이야기(빈 무덤에서 부활)가 나오는데 이 발현에  대한 것이 주간 첫째 날에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테마이다. 요한적 관점은 이것으로 내용이 종결된다.


그런데 2부 전체의 내용은 분간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2부 첫 출발에서 제자의 발을 씻겨주는 행위가 토대가 되고 있다는 것, 즉 예수의 담화문의 직접적인 근거는 예수의 행위가 토대가 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13,1-20절까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행위 (성목요일의 복음-요한의 내용만이 나타난다. 이는 아주 풍부한 신학적 상징의 내용이다.)




나. 본문의 위치와 한계


13장 1절~20절까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선, 13장 1절에서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 건너가야 할 당신의 시간이 온 것을 아시고”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니까 『때』에 관한 책, 하느님께서 당신의 증언을 완성하기 위해서 설정하신 그런 결정적인 순간이 시작되는 부분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에 관한 책은 αγαπη라는 표징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19장 30절에 가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신다. 즉 당신의 목숨을 모든 이를 위해서 내 놓으심으로써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어떤 구원역사가 성취되었다고 하는, 다시 말해서 아가페적인 행위를 통해 서 모든 것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때』에 관한 책은 아가페적인 표징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이것을 파스카 신비의 신학적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 건너가야 한다’라는 것이 파스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가페라는 이 표징 하에서 『때』에 관한 결정적인 순간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거기에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행위가 소개가 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역설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 본문에서는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켜야 될 것이 두 가지 점이 있는데, 첫 번째는 어떻게 예수와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예수와의 관계성 설정 문제) 또 하나는 스승이신 예수께서 보여 주신 것을 어떻게 따를 수 있겠는가? 바로 이 두 가지 점이라고 할 수 있다




1. 본문의 분석


R. Brown이 분류하는 것처럼 6절~11절, 그리고 12절~20절.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사실 제자들의 발을 씻긴 신 내용이 공관복음에서는 최후만찬을 하시는 내용이 소개되는 자리이다. 어쨌든 6절~11절, 12절~20절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내용상으로 상호 병행하고 있다. 병행하는 내용은 7절과 12절, 7절에서 보면 “나중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안다’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고, 12절에 가서는 “알겠습니까?”라는 말이 나온다.


그 다음에는 8절과 15절이 병행한다. 이 내용의 핵심부분이라고 하는 8절에서 보면 “내가 당신을 씻지 않는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몫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와 관계 설정을 하기 위해서 예수로께로부터 씻김을 받아야 한다는 어떤 당위성내지 필연성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15절에 가서는 “내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 준 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행한 대로 여러분도 그렇게 행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라는 것은 제자들이 행해야될 행동을 미리 모범으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 다음에는 10절과 17절이 병행하고 있다. 10절에서 보면 “목욕을 한 사람은 발 외에는 더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즉 ‘온전히 깨끗하다’라는 것이고, 17절에서 보면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여러분은 복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병행하는 것은 10b~11절(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과 18절(여러분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이 병행한다.


그래서 서로 상응하는 이 두 가지 내용은 실제적으로 보면 12절과 7절의 경우에는 예수께서 발을 씻어 주시는 행위에 대한 이해의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8절과 15절은 예수께서 발을 씻겨 주시는 행위가 어떤 중요성을 가지고 있느냐? 즉 관계 설정의 전제 조건이고, 그것은 제자들이 본받아야 될 표범으로써 제시되고 있다. 그 다음에 10절과 17절은 그러한 행위가 제자들에게 어떤 구원적인 효과를 가져다주겠느냐? 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11절과 18절은 제자들 모두에게 예수가 발을 씻겨주는 행위가 관련된 것은 아니다. 예외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문제를 놓고 학자들마다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R. Brown같은 경우는 6절~11절이 원래 텍스트에 속한 것이고, 12절~17절은 나중에 첨가된 것이다. 이것은 윤리적인 주석이다. 예수께서 발을 씻겨주는 행위에 대한 윤리적인 주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원초적으로는 6절~11절이 그리스도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고, 12절~17절은 부차적인 내용으로써 성서론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원래 요한 복음 자체가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윤리론적이고, 성사론적인 것보다 앞서가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6절~11절이 오래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라는 주장들을 많이 하고 있다. 어쨋든간에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행위의 중요성과 그 해석이 이 부분을 통해서 소개가 되고 있고, 그 자체가 윤리적인 표본으로써 제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행위는 타인에 구원을 위한 겸손한 모습 속에서 예수의 죽음을 상징화한 예언자적인 행위처럼 소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도 그렇고 주석하는 차원에서는 학자들마다 견해를 정말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단순하게 이것은 겸손의 예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라고 주석 하는 그런 학자들도 있고, 불트만 같은 경우에는 제자들이 정화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행위로 보아야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예수의 행위 자체가 구원론적인 관점보다는 윤리적인 관점에서만 보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예수의 행위를 성사론적인 관점에서 주석할려는 학자들도 있다. 부허 마르나 레이몽드 같은 경우에는 세례 성사의 상징이다. 또 고겔같은 학자는 성체성사에 대한 상징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 TEXT 연구


1. 13,6-11


우선 6절~11절에서는 예수와 관계설정을 하기 위해서 예수에 의해서 어떤 씻김을 받아야 한다는  필연성이 제기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종으로써 해야될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당신이 겪게 될 수난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야훼의 종으로써 당신이 겪게 될 수난을 감사하고 있음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한다. 발을 씻어 주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종들이 해야될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언자들의 행위를 살펴볼 수 있는데,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선포한 메시지를 더 강조해 주기 위해서 메시지가 담고 있는 내용들을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서 직접 몸으로 체험으로 보여주는 것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에제키엘이나 이사야 같은 경우이다. 예수께서는 단순히 말씀으로 뿐만 아니라 야훼의 종으로써의 행위를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심으로써 이제부터 결정적인 구원의 순간에 당신이 선포하신 메시지의 의미를 강조해 주고자 하는 예언자적인 행위를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서론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 행위의 특징에 의해서 예수께서는 이제 본질적으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즉 세상 안에서 영구히 메시지를 책임져야될 제자들에게 그 본질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주시는 것이다. 그 메시지의 의미를 강조해 주기 위해서, 메시지의 힘을 더하기 위해서 이렇게 종으로써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취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는 옷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있다. 13장 4절을 보면 “겉옷을 벗어 놓고”로 되어 있으며 그리고 12절에 가서는 “당신의 겉옷을 걸치신 다음”이라고 되어 있다. 사실 일상적인 행동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동작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평범한 행동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평범한 사실을 복음저자가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느냐? 옷이라는 것 자체가 예수 수난에 있어서는 상징적인 효과를 하고 있다. 19장 2절을 보면 “자색 겉옷을 둘러 걸치게 했다”라고 되어 있다. 자색 겉옷을 둘러 걸치게 함으로써 수난이 결정적으로 시작되는 내용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19장 23절에서는 찢겨져서는 안되는 속옷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옷을 벗어 놓고 다시 걸치기 위한 동작을 지칭하기 위해서는 τιθημι(벗다) 또는 λαμβανω(걸친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그런데 10장 11절에서 보면 “어진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때 위의 동사를 사용한다. 이렇게 『옷을 벗는다』라는 것은 예수께서 자기의 사람들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주님으로써 자기의 생명을 다시 취하기 이전에 자신의 생명을 선물로 베풀어주시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베드로는 “제 발만은 절대로 못 씻으십니다”(13,8)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공관복음에서 보면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에 뒤이어서 베드로가 보여준 반응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첫 번째 수난에 대한 예고가 있은 후에 바로 나타난다. 마르꼬 8장 31절 이하에서 베드로의 관점은 우리가 주님이라고 따랐는데, 주님이신 예수께서 돌아가신다면 자신들을 무엇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극히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부분들이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에서 베드로의 반응을 통해서 표명이 되고 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예수와의 관계를 설정해 나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씻김을 받아야 한다는 그런 당위성을 이야기하고 있고, 직접적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행위를 보여주심으로써 예언자적인 행동을 취하신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예언자적인 행위는 제자들로 하여금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이 반드시 수난을 겪어야 한다는 필연성을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8절에서 보면 “내가 당신을 씻지 않는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몫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씻김을 받는다라는 것을 공관복음과 같이 연계에서 해서 볼 때 예수의 수난에 어떤 필연성이 구원에 동참하게 하는 전제 조건임을 분명하게 한다. 예수 자신이 걸어가야 될 운명이라는 것이 수난의 길이라는 것, 그것을 통해서 베드로가 대표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가 예수의 종말론적인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점을 여기서 강조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실재적인, 역사적인 그런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해 질 수 있다. 바로 이런 신앙이 다원주의의 요구로부터 우리의 신앙을 지켜갈 수 있는 근간이 되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수난에 대한 세 번에 걸친 예고를 통해서 당신이 걸어가야 될 운명, 즉 그 운명이 제자들의 구원에 직결되어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하지만, 요한 복음에서는 이처럼 야훼의 종으로써 종이 해야될 마땅한 행위, 즉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행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신다. 결국 공관복음에서의 의미는 말하는 예수께서 돌아가시는 수난의 삶에 연결이 되어 있고, 그것을 제자들의 구원이라는 것, 구원이라는 결과를 창출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실재적으로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예수의 수난에 대한 의미를 현실적으로 깨달을 수 없었다. 그들이 기다렸던 개선하는 영광스러운 메시아의 개념이 수난이라는 개념 속에서 찾아질 수 없었던 것이기에 바로 하느님의 구원계획, 구원역사라는 것이 중요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제자들이 걸어가야 될 삶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명시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요한 복음을 통해 우리가 깨달은 것은 수난을 통해서 영광이 이루어진다는 점이 제자들을 위시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걸어가야 될 변질될 수 없는 하나의 여정이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행되어야 한다. 희망과 동시에 중압감을 가져다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길이 아니고는 영광에 이르는 길이 없다는 점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13장 7절에서 보면 “내가 하는 일을 당신이 지금은 알지를 못하지만 나중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교회의 시대와 예수의 시대와의 어떤 상반성을 표명해 주는 부분이다. 요한이 전해주는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성취하신 종으로써 발을 씻겨주는 이런 표징을 상기시켜주는 목적이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재화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더욱 현명하게 밝혀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이 사용하는 용어들을 통해서 그 용어 속에 내포된 그런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볼 때 비로소 오늘 교회 시대 안에서 그리스도 현존의 의미를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여기서 보면 “씻기다”라는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깨끗하다, 순수하다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는 서간에서 보면 모두가 다 세례성사와 직결된다. 그러면 세례 성사 즉, 씻김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수난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한 걸음 나가서 보면 그르노 같은 신부는 이 7절을 근거로 목욕, 발을 씻긴다는 표현 등을 통해서 공동체적 어떤 참회에 대해서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는 주장도 제시 하지만, 실제로 어떤 참회예절에 대한 표현보다는 근원적으로 여기서 사용되는 용어들의 차원에서 보면 세례성사에 대해서 암시하고 있는 내용이 훨씬 더 강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교회시대는 이 세례성사를 통해서 정화되고, 그 정화의 근저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해서, 물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정화된다는 의미가 이 부분에 아주 강력하게 삽입된 내용이고, 결국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이런 행위는 교회 안에서 이 행위를 본받아야 될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기 위한 필연적인 행위로써 세례성사를 교회론적인 차원에서 주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 12절~20절까지는 예수의 주님성이 지니고 있는 역설적인 성격과 제자들이 수행해야 될 선교의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고 보겠다. 물론 윤리적이다, 교훈적이다, 성사적 이다라고 다양한 제목을 붙일 수는 있겠지만, 12절~20절 자체를 종합적으로 요약해 줄 수 있는 용어는 될 수 없다.


루가 전승과 요한 전승이 상당히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루가복음 22장 24절~30절을 보면 제자들 중에서 더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니까? 예수께서는 25절의 말씀을 하신 후 30절에 가서 “여러분은 내 나라, 내 식탁에서 먹고 마실 것이며 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다라는 내용과 요한 복음 13장 12절~20절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요한이 전해주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라는 언약을 하신다. 여기서 심판한다는 것은 통치한다는 강력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종말론적인 심판에 열 두 제자가 참여하게 될 것이다. 종말론적인 심판이 있을 때 예수는 왕으로 등극하시는 것이다. 그런 의미가 루가 복음에서 전해지고 있다. 또한 마태복음에서도 보면 제자들이 종말론적인 심판에 참여하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심판에 참여하기 전에 제자들이 수행해야 될 직무는 식탁에서 봉사하는 자로 행동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열 두 지파의 종말론적인 심판에 참여하게 될 제자들에게 대한 언약은 전제조건이 성취될 때 가능한데, 이 전제조건은 식탁에서 봉사하는 자로서 먼저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으로써의 예수님께서도 권력을 행사하시는 분으로써가 아니라 야훼의 종으로써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역설적인 그런 모습을 보여주신 분이기에 제자들의 삶도 그렇게 해야 된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처형되신 분이 종말론적인 심판에 왕으로 등극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바로 제자들의 성공을 이렇게 된다.


결과적으로 예수에게 사용되는 칭호를 보면 주님으로써, 랍비로써의 본질을 지니고 계신 분인데, 그분이 행하시는 행동을 보면 종이 하는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역설적인 모습이며, 사목자들이 가져야 되는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며,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으로 예수님이 생활하신 삶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할 것은 유다의 배반에 대한 것이 갑자기 끼여 들어와 있다. 예수를 κυριος, διδασκαλος라고 하는 것은 예수에 대해서 최고의 존엄성을 지닌 호칭인데, 이런 분 밑에 유다라고 하는 사람이 열 두 사람 중에 하나로 삽입되어 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위대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는 예수의 존엄성을 해칠 수 있는 자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것이 아가페라는 관점 하에서 소개가 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유다의 배반은 예수의 존엄성을 깎아 내리는 것 같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이면에는 예수께서 지니고 계시는 사랑의 관대함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을 배반할 사람에게까지 당신의 신뢰를 거두지 않고 제자로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이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의 이런 역설적인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면, 제자들은 자기들의 전 삶에 새로움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당신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셨다(13,15)라는 것은 단순히 발을 씻겨 주셨다는 것만이 아니라, 당신을 팔아 넘길 유다라는 사람마저도 당신의 제자 그룹에 선택해 주실 만큼 지엽적인 제한적인 사랑이 아니라 보다 완전한 관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유다까지도 포용하고 당신의 제자로 선택해 주실 수 있을 만큼,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실 수 있을 만큼의 이런 위대한 역설적인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으로부터 불리움을 받고, 그분의 선교를 책임져야 될 우리로서는 모범을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는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지를 분명하게 13장이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준 것은”(13,15)이라는 것은 단순히 당신이 선택한 열 두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즉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 준 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행한 대로 여러분도 그렇게 행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13,15)라는 권고의 말씀은 특별히 예수께서 파견하시고 공동체 안에서 직무를 맡겨준 사람들에게 특별한 양식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이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특별한 부르심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로서 이 말씀이 우리의 삶에 지표가 되고 근간이 된다는 점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교 직무는 파스카 신비에 연결되어 있다. 즉 승리가 보장되어 있고, 언약이 보장되어 있으며, 열 두 지파의 종말론적인 심판에 참여하게 될 언약이 보장되어 있다는 신비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구원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죽음을 통해서 승리를 이루신 그리스도의 그 영광에 동참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수행해야 될 직무는 굉장히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여정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길은 스승께서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길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이런 길을 거치지 않고서 파스카 신비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은 대전제로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여러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안의 문제는 평신도들보다는 특별한 직무를 수행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주님으로써 그러나 종으로써의 모습을 따르지 못하기에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도출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양떼는 이미 세례성사를 받고 구원공동체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누구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예외될 수는 없다. 그래서 종으로써의 모습으로써 사목자가 걸어가야 될 길을 묵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 복음의 성령에 대해서는 박성욱 신부의 논문을 참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신약성경이야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