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수난 이야기(18장~19장)
가. 개관
공관 전승이나 요한 전승을 불문하고 신약성서에서 수난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두말할 나위 없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요한의 수난 이야기는 특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요한 복음의 수난 이야기는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파스카 신비 십자가이다」라는 관점에서 소개되고 있다. 영광과 십자가의 두 개념은 같이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큰 테두리 속에서는 수난 이야기 자체가 공관복음과 요한 복음이 크게 다르지 않다. 특별히 루가가 전해주는 수난 이야기와 요한 복음의 수난 이야기가 전승상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요한이 전해주는 수난 이야기는 요한의 고유한 독창성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요한 복음의 수난 이야기를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가 있다.
나. 구성
첫 번째 부분은 18장 1절~27절로 겟세마니에서 예수께서 체포 당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베드로의 배반과 더불어 나타나는 안나와 가야파 앞에서의 심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은 18장 28절~19장 16절로 핵심 부분으로 빌라도의 심문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세 번째 부분은 19잘 17절~42절로 여기서는 짤막짤막한 에피소드들이 모아져서 소개되고 있는 부분이다.
다. 도식에 의한 고찰
여기서 우리는 집중적으로 두 번째 부분인 18장 28절~19장 16절 부분을 살펴보겠지만, 그 이전에 총괄적인 차원에서 총론적으로 수난 이야기를 보면 요한은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에서 수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해서, 수난이 지니고 있는 특성, 그리고 왕으로써 재판관으로써의 그리스도가 지니고 있는 역설적인 정체성이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에서 요한에 의해서 숙고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로서의 수난 이야기를 전해줄 뿐만 아니라, 이 속에는 교회론적인 관점에서 수난 이야기를 바라보는 것이 적지 않게 삽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지만, 군인들이 찢지 않고 제비 뽑아서 갖게된 통으로 짠 옷은 상징적으로 교회 구성원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구현해 나가야 될 교회의 일치를 표명해 준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고별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19장 25절~27절에서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전형으로 나타나는 신앙 공동체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로 표상 되는 교회와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묘사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창으로 찔려서 옆구리에서 쏟아진 흘려 나온 물과 피에 관한 이야기(19,34)도 성사론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단순히 역사적인 차원에서만 이 수난 이야기를 믿어서는 안될 것이다. 여기서는 편집자에 의해서 신학적인 의도가 삽입된 상태에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고, 이것은 요한의 독창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확인할 수 있다.
일단, 이 세 가지 부분으로 나뉘어진 이 수난 이야기 가운데서 가장 중추적인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18장 28절~19장 16절까지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수난이 지니고 있는 드라마틱한 성격은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당하시는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로고스 찬미가에서 보면 말씀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다운 빛이었다고 소개하였다(1,9). 그리고 그 말씀이 자기 나라에 왔지만 그 백성들이 말씀을 맞아주지 않았다고 하였다(1,11). 결국 백성들로부터 거부된 로고스. 그런데 그리스도의 왕권은 백성들의 거부를 통해서 어두움이 예수를 삼켜버렸다고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빛을 바라게 된다. 바로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서 왕이 된 인자다. 요한이 그런 분을 묵상하고 독자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왕이 된 인자에는 역사성과 신학이 다 내포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18장 28절~19장 16절에서 빌라도 면전에서 심문 받으시는 분이라는 내용을 구조화시켜 보면 굉장히 간단하다. 법정을 중심으로 해서 법정에 들어갔다, 나왔다하는 빌라도의 행위를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 법정 밖에서 제일 먼저 이루어진 것으로서 29절~32절에서는 유다인들이 예수의 죽음을 요구한다.
b. 그 다음에 빌라도가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33절~38a절에서는 심문을 받는 내용이 나온다. 엄격한 의미에서 심문인데, 쉽게 말하자면 첫 번째로 빌라도와 예수가 나눈 대화의 내용이 나온다. “당신이 왕이냐?”라는 질문에 예수의 응답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 왔다”라고 하시면서, 진리에 대한 개념이 나타나고 있다. 진리의 증언자로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내용이다.
c. 다시 빌라도가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38b~40절에서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면서 “바라빠냐? 아니면 예수냐?”라고 말하면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백성들에게 강요한다.
d.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19장 1절~3절이다. 여기에서 군인들에 의해서 태형이 가해지게 되고 가시관이 씌어지게 된다.
c’. 다시 밖으로 나온다. 4절~8절로 다시 한 번 빌라도는 예수에게서는 아무런 죄목도 찾을 수 없다고 無罪선언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ecce homo라는 말을 하게 된다.
b’. 두 번째 심문내용으로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9절~11절로 심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신은 어디서 왔소?”(19,9)라고 물으면서 기원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a’. 밖으로 나오는 12절~16절이다. 당신이 만일 이 자를 풀어주게 되면 당신은 황제의 적이 된다고 말하는 유다인들 때문에 예수를 넘겨주게 된다(19,12 참조).
이렇게 상응하는 내용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 핵심부분은 b와 b’이다.
이 드라마의 구조 자체를 보더라도 빌라도가 상당히 당황해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법정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를 통해서 보면 이것이 법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요한은 예수의 수난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있어서 유다인들이 예수를 고발하고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수난 이야기 속에서는 그다지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의 수난은 이미 유다인 지도자들에 의해서 의도되어 왔었기 때문에 수난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구태여 그것에 대해서 다시 강조해 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11,47이하의 내용에서처럼 바리사이들과 대제관들이 의회를 소집하여 이것을 그대로 놓아두었다가는 모두가 이를 믿을 것이고, 로마가 와서 우리를 약탈할 것이니까?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로마의 지방 행정 지역으로서 팔레스티나를 통치하던 총독은 온전한 자유의지 속에서 심문권을 행사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누가 누구를 고발하게 되면 총독은 과연 그 사람이 잘못을 하였는가에 대해서 조사를 하게되고, 그래서 법정에 내세울 것인지, 안 내세울 것인지 규정을 하게 된다. 그런 단계가 여기에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예수의 유죄 판결에 관한 날짜를 보면, 18잘 28절의 내용처럼 “해방절 전야”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과월절 전야라는 것이다. 바로 요한 복음에서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고 있는 과월절 전야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유다인 전승에 의해서 확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유다인 전승에 따르면 ‘과월절 전날 밤에 사람들이 예수를 처형했다’라고 되어 있다. 마법을 행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혹하고,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폭동을 일으키도록 하였기 때문에 처형을 당했다라고 유다인 전승에서 입증을 해 주고 있다는 것에 바탕을 두고 볼 때, 요한이 전해주고 있는 유죄 판결 날짜에 관해서는 요한 복음 전승이 정확하게 전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가하면 18장 31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다인들은 사람을 죽일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生死권의 권한은 그 당시 총독들에게 유보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의회의 결정은 신앙적인 윤리적인 것에 대해서만 결정을 내릴 수 있었지, 생사권에 대한 결정은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우리는 아무도 죽여서는 안됩니다”(18,31)라는 것은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 시대의 상황을 보면 예루살렘 의회의 결정은 로마에 의해서 수용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로마가 팔레스티나를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유다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쳤던 예루살렘 의회의 결정을 로마가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로마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발이 얼마나 심할 것인지를 이미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로서는 어쩔 수 없이 이들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법적인 맥락에서는 유다인들로써 율법의 이름이라 하더라도 생사권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빌라도가 예수를 풀어 줄 것이냐? 아니면 바라빠를 풀어 줄 것이냐? 즉 과월절을 지내기 위해서 사면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에 상당히 많은 논란이 제기되었었다. 역사가인 플라비우스 요셉이 파스카 사면에 대해서 전혀 언급해 주고 있지 않다라는 점에서 파스카 사면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의문을 제기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월절 의식 거행에 관한 내용을 전해주는 랍비 텍스트들을 보면, 과월절을 거행하기 전에 사면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이 입증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면은 정치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었다.
마르꼬 복음 15장에서 보면 6절~15절을 보면 “바라빠라는 사람이 구속되어 있었다”라고 하면서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해 가면서 이 바라빠에 관한 에피소드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굉장히 짧게 전해주고 있다. 마르꼬 복음에서 이 바라빠에 관한 것은 에피소드는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이 바라빠는 상당수의 동조자를 가지고 있었던 열혈당원 총수 중의 하나였다. 이런 그 시대의 상황을 이해한다면 총독 빌라도가 폭도대신에 예수와 같이 별로 위험하지 않은 죄수를 풀어주기를 더 원했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물론 마르꼬 복음에서는 두 형태의 메시아니즘의 어떤 관계가 묘사되고 있지만, 요한 복음에서는 그런 것이 언급되지 않는다. 단지 해방절에 죄수를 풀어주던 관례에 따라서 바라빠를 풀어 줄 것이냐? 아니면 예수를 풀어 줄 것이냐?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예수를 풀어 주는 것이 훨씬 더 문제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 세력에 대항해서 유다인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던 열혈당 사람들은 로마에 굉장히 위협적인 사람들이었는데, 거기에 총수를 풀어준다는 것은 상당히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견할 수밖에 없었고, 예수를 풀어주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을 듯 하다라는 빌라도의 생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로마법에 따르면 로마에 대항해서 봉기를 선동하는 사람, 백성들로 하여금 로마에 저항하도록 도모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였는가에 따라서 십자가형에 처형시키거나, 짐승에게 잡혀 먹게 하거나, 고립된 섬으로 유배시킬 수가 있었다. 그 중에 극형이 십자가에 처형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로마법에 근거해서 보면 예수는 백성을 선동한 사람, 로마제국에 대항하도록 앞에서 백성을 이끌고 간 사람으로, 그런 일을 한 죄목으로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역사적인 배경을 통해서 볼 때 예수는 정치범이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단순하게 전해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은 저자는 이 내용 이면에 자신의 깊은 신학적인 관점을 삽입시켜 놓았다. 우리는 이 점을 깨달아야 한다.
빌라도 면전에 출정하고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시는 내용이 갖고 있는 신학적인 의미를 찾아보면 이 이야기가 전해주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게 밝혀질 것이다.
우선 예수의 왕권, 그리고 예수가 왕이라고 하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 저자의 중요한 관점이다. 예수는 수난을 통해서 왕으로써 당신 모습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예수가 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세상에 진리를 가져오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세속적 개념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의 왕권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예수의 왕권과 진리를 증언하실 분으로써의 예수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요한적인 전망에 비추어서 볼 것인데, 우선 왕권 부분에서 보면 요한복음 안에서 왕이라는 호칭이 16번 사용된다. 그 가운데 12번이 18장, 19장 속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12,13. 15절을 보면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이스라엘의 임금님”하면서 환호하였다. 백성들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불렀던 그 의미보다도 강한 왕권의 의미가 여기에 소개되고 있다.
그럼 어떤 형태로 예수께서 왕권을 행사하실 것인가? 공관복음에서는 수난에 대한 예고가 세번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요한 복음에서는 그렇게 세 번에 걸쳐서 수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수난에 대해서 예고하는 내용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전해주고 있지 공관복음에서처럼 모아서 3중 예고를 하고 있지 않는다. 그래서 요한 복음에서 특별히 “들어올리다”라는 동사를 여러 번에 걸쳐서 사용하는데, 이 「들어올리다」라는 동사는 「십자가에 못 박히다」라는 것과 「현양하다」라는 것의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3,14에서처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렸던 것처럼 인자도 그렇게 인자도 들어올려져야 합니다“. 또 8,28을 보면 ”당신들이 인자를 높이 들어올리게 될 때 그제야 당신들은 내가 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예수가 누군 인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들어올려져야 한다. 12장 32절~34절을 보면 ”내가 땅에서부터 들어올려지게 되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올 것입니다“는 어둠의 왕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표명해 주는 부분이다. 여기서 세상의 심판의 때라는 것은 예수께서 들어올려지는 그런 순간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요한 복음 안에서 부활이라는 것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똑바로 잡아주기 위해서 개입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건이 아니고, 십자가는 오히려 부활의 영광 속에서 묵상되는 그런 십자가로서 나타나고 있다. 부활과 십자가는 늘 같이 가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관점이다. 부활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요한은 빈 무덤 발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공관복음에는 없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의 왕권이 어떤 모습으로 이 이야기 속에서 표명되고 있는가?
우선, 18장 33절을 보면 “당신이 유다인들의 왕이오?”라고 되어 있다. 유다인들의 왕이라는 호칭이 내포하고 있는 유다 민족의 왕이라는 제한적인 성격과 그런 호칭이 야기시킬지도 모르는 정치적인 의혹. 왜냐하면 로마의 황제만이 유일한 왕인데, 유다인의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상당한 모험을 안고 있는 표현이다. 이런 제한적인 성격과 정치적인 위험에도 불구하고, 20장 32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빌라도의 입을 통해서 ‘유다인들의 왕’이라는 표현을 구체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이미 배웠지만 4,22에서 구원은 유다인에게서 온다. 유다인이 비록 그들 민족 안에 보내진 메시아 왕을 거부했다고 치더라도 예수는 바로 그 민족에게 보내진 그런 왕이다. 이것이 구원역사의 연계성이다. 바로 요한은 구원역사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를 이해하고 있다. 예수는 인간의 자격으로 또 하나는 19장 7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유다인의 고발 내용 속에 자기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유다인의 왕, 유다인 왕이라는 표현이 빌라도의 입을 통해서 표명되었다. 왕의 자격을 가진 예수는 인간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다.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서의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빌라도는 이런 예수를 내세우면서 19장 5절에서 “ecce homo”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두 가지 관점을 보아야 한다. 즉 인간의 자격으로 하느님의 아들로써 이 두 가지 자격을 지닌 유다인의 왕으로서의 예수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우선 인간의 자격을 지닌 분은 빌라도의 입을 통해서 “보시오, 이 사람이오”(19,5)라고 또 다시 표명된다. 이것을 두 가지 의미로 알아 들어야한다. 우선, 빌라도가 무죄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원성에 못 이겨서 백성들 앞에 예수를 내놓게 되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동정 어린 표현으로 소개될 수 있고, 또 하나는 계시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19,13에서 보면 법정에서 모든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법정에서 공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빌라도의 모습이 표명되고 있고, 이런 모습을 중심으로 해서 예수에 관한 내용들이 이야기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빌라도는 재판석에 앉아서 심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결과적으로 십자가에 처형이 된다. 그런데 이것을 통해서 요한 복음 저자는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왕자가 쫓겨 나가는 순간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12장 31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공적인 심판에 의해서 십자가에 들어올려지는 순간은 결과적으로 세상이 심판 받는 순간이고, 세상의 왕자가 쫓겨 나가는 순간이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사람들은 “ecce homo”라고 빌라도가 내세웠던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에 따라서,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승낙하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된다. 심판은 현재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심판의 기준점이 바로 “ecce homo”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요한 복음에서 심판에 대한 개념은 늘 현재성을 갖고 있다. 종말에 하느님 앞에 가서 공개적으로 받아야 될 심판의 개념보다도 매 순간 우리 앞에 현존하고 계시는 그리스도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 그리고 그분이 보여주신 행위 속에 담겨져 있는 하느님 사랑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에 따라서 심판은 항구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ecce homo”는 심판의 기준점이 된다.
그 다음에 이분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유다인들의 왕이신 분이다. 10, 33은 예수님과 성전에서 유다인들과의 대 논쟁을 상기시키시는 부분으로, 여기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크게 부각이 되고 있다. 사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내세웠다는 사실이 유다이즘으로부터 배척 당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요한 복음 19장에서도 예수를 실제로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유다인들이 빌라도에게 가는 이야기의 핵심부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유다인들과 예수와의 어떤 논쟁은 신적 부자성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요한 복음서는 20장 31절에서 예수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했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처형이 되었지만, 바로 그런 모습을 통해서 요한 복음 저자는 바로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높이 들어올려지게 될 때 모든 사람을 이끌어 오실 분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처형되는 그 순간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렇게 심문에 내용 속에서 나타나는 표현들 속에서 요한 복음 저자는 예수의 왕권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설명을 해주고 있다. 그런 인간의 자격으로 하느님의 아들로서 유다인의 왕이신 예수의 왕권은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진리를 증언하기 위한 왕권이다.
요한 복음에서 μαρτυρεω와 μαρτυρια는 요한 신학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그런데 5,31~39를 보면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서 증언하고 있는 사람을 인용을 하고 있다. 그러나 특별히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아버지를 증언하는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3,11이하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17,6을 보면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입증해 주신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일 먼저 보이신 행위들은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게 하기 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의 삶은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써 부각시키는 것이며, 그래서 유일한 길인 이 아버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고 14장 6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무엇을 증언하시는 분인가? 진리를 증언하시는 분이다. 후기 유다이즘이나 꿈란 텍스트들 속에서 보면 진리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요한 복음에서 진리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들었던 그리고 세사에 선포한 아버지의 말씀이다. 8장이나 17장을 참조할 수 있다. 그래서 진리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선포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한다. 그런데 예수의 메시지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나와야 되고 진리 면에서 보아야 된다고 요한 복음에서 말한다. 이는 자기의 실존이 아버지에게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 즉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삶.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진리로부터 나온 사람이다. 진리라는 개념은 엄청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지금 진리를 증언하시는 분으로써 당신 자신을 소개하시는 예수의 말씀 속에 담겨진 진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아버지를 알려 주는 의미로써의 진리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다. 빌라도는 두번에 걸쳐서 무죄를 선언하였다. 정치적인 권력을 지니고 생사권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서 더 이상 예수에게서 죄목을 찾아 낼 수가 없었다. 황제의 이름으로 예수의 무죄를 선언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 2번에 걸쳐서 “난 이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죄목을 찾아내지 못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군중들의 원성에 못 이겨서 예수를 넘겨준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증언하시기 위해서 끝까지 당신 자신을 내 놓으신다. 그래서 들어올려지신다. 빌라도는 무죄임을 알면서도 자기의 기득권을 확보해 가기 위해서 백성들의 원성에 자기의 확신을 포기한다. 권력자가 진리를 하나의 규범으로 삼지 않을 때 권력은 어떠한 비극을 초래하는지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그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그것에 하나의 규범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고통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에까지 당신 자신을 내 놓으셨다. 빌라도는 무죄임을 알면서도, 그것이 확신하고 하나에 분명함을 알면서도 그것을 규범으로 삼지 않고 백성들에게 양보함으로써 자기의 기득권을 확보하고자 했고, 그래서 무죄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이 시대 속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진리를 사회적 규범으로 삼지 않음으로써 엄청난 비극을 겪어 왔다. 진리는 어떤 경우에도 양보될 수 없는 규범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바로 진리 편에 선 사람의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 우리는 빌라도의 모습을 통해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진리가 규범이기를 포기하게 되면 권력은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진리를 하나의 규범으로 사수하면서 살아갈 때 그것은 곧 구원의 결실을 맺게 된다.
말씀에 근거한 변질되지 않는 삶의 자세는 어떤 경우에도 견지되어야 된다는 것을 예수의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빌라도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