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 찬미가, 요한복음 1,1-18

 

1. 서론1,1-18


이 서문은 복음전체의 테마와 같다. 주요사상을 간결하고도 깊게 표현하고 있으며, 광범위한 것을 종합하고 있어서 집의 지붕과 같다고 하겠다. 사상이 광범위할 뿐 아니라 그 배후에 더 많은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 서문을 먼저 보고 다음에 본문의 내용을 보기로 하자. 여기 나타나는 아름다운 말들은 그 말들이 포함하는 내용과 비교한다면 어휘가 빈약하다고 하겠고 연계사로 이러가는 것도 매우 단순하다. 사상이 깊을수록 간단한 말과 단순한 연계사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넘쳐흐르는 터득의 발로라 하겠다. 이렇게 단순하게 구사할 수 없는 사람은 이렇다시 깊은 사상을 스스로 가질 수 없다. 이러한 문장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당신의 완전성과 단순성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요한 복음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Evangelium Sancti Joannis lectura」란 표제의 Marietti판이 있다. 여기에 사도 요한의 서문에 관하여 길게 설명해 주고 있다. 「La Sancte Bible」의 요한 복음에 관한 주석서도 또한 훌륭한다. 본 실뱅학자는 이 책을 놓이 평가 하였다. Lagarange의 「L’Evangele du sain Jean」이 또한 유명하다. 서문만 200페이지에 달하며, 본문도 500페이지에 달하여 주해하고 있다.




1.말씀


   1. 1절


「비롯음에 말씀이 계시고, 말씀이 또 천주께 계시니 말씀이 곧 천주시리라」


일절은 매우 간단하다.




2. 선구자의 말씀과 출현


말씀이 강생하여 오실 때에는 말씀을 증거할 선각자가 필요하므로 먼저 사자를 보내신다. 위력을 들어내시는 하느님으로서의 세상에 오시는 것이 아니고 인자한 모습, 연약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시므로 그를 소개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구약에서 오실때에는 선구자가 나타나리라는 말라키아 예언서의 말씀이 이루어 진다.


6절 천주의 보내신 사람이 있으니 그 이름은 요한이라




3. 말씀의 강생과 그 결과(14-18)


14절 “이에 말씀이 강생하여 사람이 되사 우리 사이에 거처하신지라 우리가 그 영광을 보매 곧 성부의 독생성자의 당연한 영광이요”




13절에서 Sed ex Deo nati sunt 로 불가타는 말하고 있으니 이상 설명은 Sed ex Deo natus sunt로 보았다. 오신분은 하느님의 친아들 이심을 들어내기 위하여 단수로 natus로 하였다. 하느님으로부터 나셨다는 이상 3절에 이어서 말씀이 강생하셨다(et verbum caro factum est)로 연결된다. 하느님께로 태어 나셨다는 것은 이 세상에 사람이 오신다는 것과 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셨다고 번역도 하겠다.


우리 사이에 거처하신지라. 우리와 같이 거하셨다 일반사람처럼 오사 사회 생활을 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매」에서 「우리」가 보았다고 복수로 사용 한 것은 요한 홀로가 아니라 다른 이들도 보았다. 「그의 영광」이란 예수께서 행하신 거대한 일에 관한 것이다. 즉 하느님의 현존(Praesentia)를 말한다.


거처하다(habitavit, εσκηνωσεν). 이것은 천막을 치고 산다는 형용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사이에 거하신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예전에 장막(tabernaculum, foederis)에 거하시는 정신을 말한다. 이것을 「쉬끼나」라 했다. 다른 예언서에서도 그러한 정신으로 계속 나온다. (요엘 4,7-21 나는 천막을 치고 시온에 사는 너희 하느님 야훼인줄 너희는 안다) 그 시온은 나의 거룩한 산이다. 이렇게 산에오사 머무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쉬끼나」란 「하느님께서 우리사이에 거하신다」는 동사로 사용한 것이다. 자카리아 2,14에서도 「시온의 딸아 기뻐하라」한다. 왜냐하면 에가 너희 가운데 살기 위하여 온다. 여기서도 천막을 친다는 동사를 쓴 것이다. 전도서 24,8에도 우주의 창조주에 관해서 「나를 반드시 하느님께서 나의 천막에 쉬러오신다」고 한다. 묵시록 21,3에도 나온다. 하느님이 계신곳 천막에 관한 말을 「쉬끼나」와 같이 통한다. 사람과 더불어 사시는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을 말한다. 그들과 같이 사시니 그의 백성이 된다. 이 말은 같이 거행사신다는 데서 아주 깊은 뜻을 가진 말씀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구약에 있어서의 장막에서 처럼 신약에 있어서의 새로운 장막으로 생각한다. 하느님이 계시는 곳, 물론 삼위일체로서 위격 관련하여 인성이 성자 안에 계시는 것이다. 확실히 성자께서 육신 안에 계신다. natura를 연결 도구로 갖고 계시는 것이다. 위격의 상통이다. 천주 성자 위안에 계신다.


영광(gloria) – 하느님의 영원한 모습을 말할 필요는 없겠다. 테오파니아에 관련되는 말로 볼때에 예수께서 현성용하신 것을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것이므로 그런 것 뿐아니라 행하시는 모든 일로써 당신을 들어내는 것이라고 본다. 하느님의 능력을 들어내는 것을 본 것이다. 갈릴에아의 가나에서 물이 술이되게 한 영적을 행하신 사실을 요한 사도가 말하면서 「당신의 영광」을 들어 내셨다고 말하고 있다(요한 2,11)그리하여 사람들이 믿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영광을 들어내는 것은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사람이 그리스도의 natura를 알고 믿게 되는 것이다. 나자로를 부활 시킬때에도 예수께서는 말다에게 말씀하셨다. 그가 죽는 것은 네가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서 믿기 위해서라고 말한다.(11,40) 여기서 기적에 관련되는 말이다. 그리고 그 「영광」이란 보통 말한 것이 아니고 외아들에 관하여 말하였다. 여기서 quasi는 utpote(…로서)란 말이다. 즉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말한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사람과도 공동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한 영광, 아들로서의 합당한 영광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하느님의 약속은 뉘우칠줄 모르시는 emet을 가지고 계시는데 유데아 사람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한다. 한번 약속하신 은총은 거두시지 않으시며 끝까지 이루어 주시는 정신을 말한다. 불신한 유데아 사람들이 돌아오도록 심리적으로 이용하신다. 질투심을 조장하여서라도 다시 돌아오도록 하신다.


그 영광은 외아들로서 마땅한 영광을 받으신다. 그리고 가득한 성총과 진리를 받으신다. 그리스도께 대해서 그 진리가 신의 이상으로서 진리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높은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속성으로서의 진리의 성총이 두 가지가 신약의 다른 부분에 있어서 어떻게 적용이 되는 가 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다음에 자비에 관하여 보기로 한다.


이교인에 대해서는 자기들은 약속받은 것도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스라엘 안에서 같이 참여하도록 약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이 하느님의 자비를 더욱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찬미하게 된다. 이런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속성이 잘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헤브레아 2,17에서 그리스도는 대사제로서 하느님 앞에 항상 중재하시는 분이다. 신자들이 진실하시고 충실하신 뜻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같은 것이 항상 그리스도와 더불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가득한 성총과 진리가 잘 설명된다 이같이 그리스도께 대해서 말씀하신 다음에 복음사가 요한 사도는 15절부터 세자 요한의 증거에 대한 말을 하고 계시다.




15절 “요한이 저를 증거하며 소리질러 이르되 「이는 나말한 바 내 뒤에 오실자 나보다 먼저 계신고로 나에게 초월하신 자리라.」”




1,16에 보면 천주의 보내신 사람이 있으니 그 이름은 요한이라 한다. 그의 빛을 증거하러 왔으며 자기는 빛이 아니라는 말을 한다. 그분이 실제로 증언하는 말을 15절은 인용한다.


이는 나 말한바(Hic erat quem dixi) 그 분이라고 세를 준 다음에 당신 뒤에 오실 것을 예언한 것을 사도요한은 여기서 말하고 있다. 그 분이 내뒤에 오시나 나보다 먼저 계신분이다. 여기서 나오는 나보다 먼저 계시다는 말은 εμ-προυθεν μον(ante me)를 말하고 두 번째에는 πρωτος μου ην(prior me erat)이라고 말한다. πρωτος란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제일 먼저라는 것이다. 비교하여 나보다 먼저라 말한다. 선재하심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ante me(나보다 먼저)란 품위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내 뒤에(post me = οπισω μου)란 것은 장소적으로 쓰는 부사를 시간적으로 쓴 것이며, 나 다음에 온다는 것은 사람 앞에 나서는 데 있어서 후에 나서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이 나보다 먼저란 것은 품위적으로 더 높고 더 훌륭하다. 세자 요한은 그 분은 커지시고 자기는 줄어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다.


3,30에 그리하여 그리스도 당신은 자기보다 윗자리에 계심을 말하고 있다. 「저는 마땅히 흥왕하시고 나는 마땅히 쇠미로다」(3,30)에 ην란 것을 써서 영원한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 예수께서는 암브라함보다도 먼저 계시다는 말이다. 이러한 식으로 시간의 초월성, 보통사람처럼, 시간적으로 앞서는 그러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초월한 분이심을 말하고 있다.




16절 또 우리 모든이가 그 충만함으로조차 은혜 위에 은혜를 받았으니


우리 모든이가 그 충만함에서 조차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14절에서 「성총과 진리가 충만하더라」란 말에서 은총과 진리가 풍부하신 외아드님이신 그분이신데 거기서 충만한데서 우리 모든 이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진 것이 없이 남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항상 원인이 결과보다 나아야 한다. 여기 말씀은 모든 선의 원천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다 받은 것이니 우리의 영신적 은혜도 그분에게서 받아야 한다. 창조주이신 말씀인 그분이 강생하셨으므로 모든 것이 다 그분께 달린 것이다.


은혜 위에 은혜(gratiam pro gratiam) 이것은 알아듣기 어려운 구절이다. 여기 pro(αγυτι)란 말은 어떤이는 gratia super abunduns를 생각하기 때문에 gratia 위에 또 gratia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보태지도 않았는데 점점 더 올라가는 것이다. 구약을 생각하여 구약의 은혜 위에서 신약의 은혜를 생각하는 자도 있다(오리게네스, 알렉산드리아 치릴루스, 요한 그리소스토무스). 구약의 은혜 대신에 신약을 대치한다. 신약은 더 큰 은혜라는 것을 말한다. 첫째, 성총이 구약의 법이며 17절에 나오는 대로 진리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된 것이다고 말한다. 이러한 성총을 말함에 있어 그것은 더 풍부한 성총이므로 그 앞에 법도 모세를 통하여 하느님이 주신 것인데 이것보다는 더 큰 은혜로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 전진이 있는 것이다.


「은혜 위에 은혜」에서 전자는 그리스도의 은혜이고, 후자는 우리가 받은 은혜로 보아 그리스도 안에 풍부한 은혜에서 우리의 은혜가 나오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은혜와 조화를 이루는 그런 은혜를 말하는 이도 있다.


αγυτ(pro)란 희랍말은 알아듣기 어려운 천치사이므로 여기에 대해서 무어라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떻든지 앞뒤를 볼때에 「풍부함」이란 성자에게 대한 말이 있고 그것이 뒤에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안에 이루어 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자는 하느님께로부터 그리스도께 풍부함(col 2:9-10)에서 흘러나온 은혜로서 우리안에 이루어지는 작은 은혜 즉 창조된 은혜로서 참여하는 것이다. 크게 될 수 없고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은혜는 원천으로서의 은혜이고 뒤 은혜는 우리가 받은 은혜로서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모든 뜻이 잘 맞으나 실제로 pro(위에)가 어떤 뜻을 가지고 썻는지는 사도 요한에게 가서 물어 보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비오 12세께서는 성서에는 어려운 것이 많다. 이것은 우리가 열심히 연구하여 알아 듣도록 하기 위해서 천주께서 마련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17절 대개 교법은 모이세로 말미암아 받고 성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음이니라.




은혜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 모이세와 그리스도를 때조시켜서 구약시대에 그것과는 월등하게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교법(Lex)이란 이 복음에서는 처음으로 나오고 있다. 구약의 율법은 계약을 맺을 때에 주신 조건이다. 계약의 법전(출애 34,6; 10,32)이 석판에 새겨서 나오고 있다. 구약의 체계하에서는 계약(foedus)이 법으로서 특징지어지고 있다. 이 계약이 신약에서는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죄의 용서는 바로 이 사랑으로 된다. 여기서는 구약의 법으로서 사람의 생활을 규정하는 최저선을 거 놓았다. 물론 사랑에 대한 계명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적이었다. 현대는 그 이상이 실천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의 계명이라고 강조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최저 없이 최상만 생각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기초없이 건물을 세울 수 없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신비, 약속한 멧시아로서 오사 그 모든 것을 다 실천하신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 진다. 그러므로 facta est라 하였다. 된다(facta est)는 것은 우리 안에 은혜로서 참여한다는 뜻으로 알아 듣는다. 왜냐하면 은혜(gratia fidelitas)는 구약에 있어서도 사람사이에 되는 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24,49; 47,29 오세아 4,1; 6,4-6에서도 사람사이에 이루어지는 pietas fidelitas를 말하고 있다. 항상 신용이 있고, 공정해야 하고, 애국심, 효도심, 우정들이 pietas로 통한다. 하느님께 대해서도 pietas(효심)을 갖어야 한다. 이리하여 우리가 실제로 하느님의 생활을 입어서 하느님의 생활에 참여함을 그리스도로 인해서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재창조이며 초자연적이다. 이것은 영신으로 새로나는 재생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충족한 분으로 천주성을 가득히 가지신 분으로서 우리를 조성할뿐 아니라 우리 은총의 머리이며, 우월을 갖고 계시다는데 대한 것은 Col 2,9-10에서 볼 수 있다.


18절 아무도 천주를 보지 못하였으되 성부의 품에 계신 동생 성자는 친히 설명하시니라.


아무도 성부(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다. 즉 그리스도 이외에 세상 사람으로 성부를 본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예외가 뒤에 따른다. 즉 독생성자이다(uninigenitus filius). 어떤 Codex는 uninigenitus Deus(독생천주)란 것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천주라고도 하였으므로 이렇게 부치려 했는지 아니면 처음에 uninigenitus만 있는 것이 Filius(성자)로 된 줄로 믿는 것이다. 어떻든지 외아들로서 다른이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아들을 하나이상 낳는다면 첫아들은 불완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닮아 버리면 완전한 것은 하나이상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외아들 그분은 하나님의 품에 계신다.  그러니 품을 떠나서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그 품안에 계시며 체(體)는 하나이고 위(位)가 다를 뿐이다. 「친히 설명 하시니라(ipse enarravit)」 이것은 그 분이 말씀하여 알게 된다는 것이며 계시에 관한 것이다. 이상으로 다시 앞의 것으로 돌아갔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성부께 대해서 하시는 계시에 관련된 구절이다. 천지의 관계와 계시가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자연적으로 천주생활에 직접 참여 할 수 없다. 하느님안의 비밀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며 그것을 아는 이는 성자밖에 없다. 성부 성자가 같이 계시기 때문이다. 당신이 보사 말씀하신다는 구절은 6:46, 10:15 루까 10:22에 있다. 그리스도께 대해서 외아드님보다 품안에 있다는 것은 아들에 관한 말을 할 때에 많이 쓴다. 그 표현은 사랑과 무한(infinitas) 그 안에 많이 계시다는 것이다. 한번에 둘을 나눌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생각한다. 이상 말한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 건축에 관한 것을 잘 알기 위해서는 이러한 내용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말씀」에 대한 모든 말씀은 구약에 있어서 지혜에 대한 것과 같다. 구약에서 神的지혜에 관한 것을 논 할 때에 여기서 나오는 구절을 일일이 설명하겠다. 여기서는 다만 그 절만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이겠다. 지혜서 9:9-12, 잠언 8:22-26, 30. 31 또한 생명에 관한 것과 연결되는 것은 8:32, 9:6, 집회서 24:5, 31 지혜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요한 복음에 적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神的지혜로서 그때에 이미 Personificatio의 정도에 임한 것이다. 계시가 아직까지 성자로 나타나지 않지만 거의 Persona 비슷한 Personificatio에 이른 것이다. 이런 것이 신약에서는 똑똑히 언급되고 있다. 사도 요한 만이 지혜를 말씀이란 표현으로 말하였다.


다음에 건축에 있어서 꾸며가는 방식을 포함하는 식으로 가서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이 맨 뒤에 나오는 식으로 나가고 있다. 전진해 나가는 것은 병행론(parallelismus)을 통해서 나가는데 여러 구절로 자꾸나누어 나간다. 즉 한번에 하나를 완전히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하여 말하는 표현이 있다. 포함하는 식으로 되려면 대차대구법(chiasmus)를 겸하게 된다. 왜냐하면 맨 처음에 나온 것이 맨 나중에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곳에도 많이 나오고 있다.


예 성영 3:8-9(요한 1서 3:22-24, 오세아 5:1-6:5, 요한 1서 2:18-28, 4:7-16, 요한 18:19-32) 요한 복음의 예를 설명하면 1:1-2 「비롯음에 말씀이 계시고, 천주께」이고 1:18에서는 「성부의 몸에 계신 독생 성자는 친히 설명하시니라」고 한다. 3절에는 창조물에 관련되고 있다. 17절은 성신의 은혜를 말한다. 이것은 더똑똑히 나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과 오신후에 있어서의 역할이 전진해 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가 은혜와 진리에 관계하며, 더 올라가서 우리안에 관련되므로 창조와 관련된다.


4,5절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데 관한 말씀이며 이것은 생명과 빛에 관한 말씀이다. 그런 16절에서 나오는 말씀은 그의 풍부함에서 은총위에 은총을 받았다고 말하며 선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생명과 빛이 은총으로 나타났는데 은총이 여기서는 진리 은혜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스도가 생명이고, 빛이사 은혜를 발도록,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을 중간에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이 있으면 이것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의자되는 자격을 받는다. 빛에 인도되어 생명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6절, 8절은 15절과 맞는다. 6,8절은 세자 요한의 증거에 관한 말을 하였는데 15절에도 증거에 관한 것을 말한다. 그는 나보다 후에 오시나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심을 말한다. 그리하여 보통 사람이 아님을 증언하고 있다.


9-11 까지의 말은 빛으로 오사 비추시나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대해서도 다 나오고 있다. 11절은 강생에 대한 말을 하고 있다. 「본 땅에 오시되」는 이 세상에 오신분을 말한다.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14절에서 말하고 있다.


12-13절은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느님의 의자가 된다고 한다. 그분은 보통사람으로 태어난 분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태어난 것이 위와도 연결이 될 수 있도록 중간을 이루고 있다. 뒤에 외아들로서 성부의 품에 계신 그분,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계시는 분, 중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조직적으로 꾸미는 것은 현대에와서 조직적으로 꾸민 것이 아니라 이러한 셈족에게서 자연적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붓이 생각을 따라서 표현되는 것이 종합적으로 완전한 것을 이루는 것처럼 이러한 모양으로 나오는 테마라고 할 사정이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라는 중요한 사상을 말하고 있고, 또한 받은 은총, 빛, 생명이란 중요한 말이 나왔는데, 이것이 전 복음을 통해서 여러 가지 역사환경을 따라서 자꾸 나오고 있다. 이것은 역사 사실에서 풀어나가므로 아름다운 것이며, 성서의 문학성이 여기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4. λογος란 말의 유래


다음은 logos(말씀 Verbum)이란 말이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많은 것을 보아야 할 것이나 여기서는 그러한 연구 것을 연구 과제로 한다. logos에 관한 것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스토아 철학에 나 오는 것도 연구하고, 필로가 말하는 logos에 대한 것도 연구하여 이러한 logos 사상과 요한의 logos 사상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생각해야 한다.


logos는 구약을 통해서 정통이 신약까지 내려오는데 그 내용은 어디까지나 성서에서 같은 말로 표현하고 더 깊은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logos가 persona(位格)로 나타나는 것은 요한복음 1:1과 1:14에 나오고 있다. 그 외에 요한 1서 1:1에 「생명의 말씀」으로도 나온다. 「천주의 말씀」은 묵시록 19:13에서 나온다. 이것은 하느님의 보호를 이루는 의미로 나온다. 묵시록 19:16에 「만군의 군이시라(Dominus dominantium)」이란 것도 형용되고 있다. 말씀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마지막에 사탄과 최종「말씀」은 결정에 이룰 때 하는 형용인 것이다.


이상에서 말씀(logos, Verbum)에 대한 출처를 보기 시작하였다. persona(位格)로서 주 예수를 가리키는 용어는 요한 사도만이 사용하고 있고, 복음에 있어서는 그 말 하나로 표현되지만,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오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즉 한 곳은 하느님의 말씀(Verbum Dei)이라고 나온다. 이것은 位格을 가리키며, 그리스도께서 말을 타고 세말때에 처벌하러 오심을 들어낸다. 사람과 대결하여 승리하시는 메시아의 입에서 나오는 칼로서 날카롭게 모든 것을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없고 무효한 것이 아니다. 주위에 말을 보아서 구약에서 인용되는 포도즙을 내서 원수 갚는 면을 보았다. (이사63:1-6, 묵시14:7-20, 19:15) 이러한 모든 형용이 그리스도께 적용된다.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로써 나타나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와 합치하고 있다. (헤브1:1-2) 그리스도께서는 진실하시다는 것에 대해서 (묵시록3:14) 아멘(진실하다는 뜻)이라고 나오고 모든 계시의 목적(로마10:4) 그 분이 오심으로 인해서 완전한 때가 충만하시다는 것이 모두 이와 관련되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요약된다는 형옹이라든가 하는 것은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형용이 그리스도께 맞아들어감으로 인해서 logos는 人格으로서의 그리스도 나타나며, 하느님의 位格으로 나타난다. 둘째로 요한 1서 1:1에서는 생명의 말씀으로 나오고 있다. 이말은 이미 사도 베드로께서 성체성사를 약속하신후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 그 믿지 않는 사람들이 떠나간 후에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도 떠나가지 않겠는가? 하신 질문에 베드로의 답변으로 나온 말이다. 베드로는 당신에게 생명의 말씀이 있으니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답변은 진리를 소유한다는 그런 뜻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생명으로도 통하는 것이고, 합쳐서 ‘Ο ΑΟΓΟΣ로 나오기도 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이 바로 생명이라고 하신 구절에서 볼때도 명확하다. 생명의 빵을 준다는 말씀, 당신은 생명이시며, 부활이시라는 말씀도 있다. 요한 복음에 있어서는 뒤에 아무런 말을 부치지 않고서 그대로 [말씀]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어디로부터 시작한 것이며 어떤한 과정을 거친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항목들은 여러 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항목을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을 위하여 참고서를 소개하면 예루살렘 성서 대학 교수로서 요한 연구의 권위자이신 [봐흐말]의 저서 [Le prologue de saint jean]을 참고하기 바란다. 이 책의 내용에 의하면 이 [말씀]이 하느님안에 있는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느님, 조성하시는 하느님등 갖가지 견해를 말하고 있다. 그는 성부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며 말씀하셨고 또한 창조하시고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정의가 말씀안에 들어 있으므로 그런 모든 배경이 구약에 들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구약에서 하느님은 말씀으로서 모든 것을 조성하신다.


창조때에 하느님께서 말씀으로써 조성하셨다는 것을 성영29(28)에서 야훼의 소리로 나타내고 있다. [소리(vox)]란 말이 7번 나온다. 하느님의 능력을 들어내고 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고 있다. 천둥번개 뿐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하신 힘을 나타내는 말씀 그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짐을 생각한다. 이사야 48:13, 40:26에서는 하느님께서 만물을 불러내어 다 이루어 지도록 하신 것을 말씀하신다. 능력에 관한 말씀도 있다. 하느님은 시작이시고 마침이시다. 당신의 오른손이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는 능력에 관한 말씀을 하시고 내가 그들을 부르니까 모든 것이 함께 나왔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Dixit(…하시니)과 통하는 말씀이다. 성영 33:9에서 온 세상이 하느님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으로 그것이 이루어졌고 명하시므로 그런 것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성영 147:15-18에도 같은 사상이 나오고 창세기에도 말할나위없이 같은 사상이 나오고 있다.


다음 이러한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지서 9:1에 당신의 말씀으로 온 우주를 조성하셨다고 한다. 말씀하나로 온 우주를 조성하셨다는 표현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는 이 말씀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에 이것을 부칠 수 있던 것이다. 말씀을 位格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다음에 또 언급하겠다.


다음 이 세상이 하느님의 모상이고, 또 하느님의 완전을 들어내므로 하느님 안에 아이디어 모양으로 표양인 (Causa exemplaris)으로 부를 수 있어서 표본과 같은 것이며, 세상은 이를 닮아서 조성된 것을 생각한다. 구약에서는 이에 대하여 지혜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온다. 하느님의 지혜는 속성으로 뿐만 아니라 점차 위격화(Personificatio)되어 가는 관정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과정도 앞으로 볼 것이다. 지서 13:1에 보면 하느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말한다. 즉 만물을 보고 하느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유사를 말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 뿐만 아니라 이것을 보고 저것을 알 수 있다는 연계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오로께서 로마인에 보내신 서간에서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 논증으로서 세상 사물을 보고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로마 1:19-21) 이것을 모르는 것은 바보이며 불효로 본다. 이렇게 건너갈 수 있는 사다리가 있다. 자연에 있어서도 이것은 한 진료로서 계시에 속하지 아닌 것이 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것 만큼은 알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을 모르는 것은 마련한 자이다. 계시는 그 이상의 것이다. 참된 신비는 계시 없이는 알 수 없는 것이나 우리 이성으로 알 수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미 자연계시로 나타나는 사실로 일깨워 주고 계신 것이다. 이상 창조에 대하여 말하며 세상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말하였다.


다음은 참된 계시로 즉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람에게 들어 내시는 말씀으로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십계명이다. (출애굽기 34:27이하) 너희는 이것을 지켜라. 이 말씀으로써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는다. 계약의 내용이 곧 10계명이다. 이렇게 석판에 10가지 말씀을 새겨주신 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그 의사가 글로써 씌어진 것이다. 그 하느늼의 말씀을 여러 모양으로 개념을 바꾸어 가면서 성영119(118) (가장긴 성영임 200절이나 됨)에서는 Lex Mosaica가 하느님의 말씀을 대표적으로 드는데서 빛, 계명등의 말이 많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의 의사를 알과 우리가 섬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람을 구속하러 오사 그 구속하시는 멧세지를 말씀으로서 들어 내신다. 구원하시는 하느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을 밝히시는 그 외에 모든 법 (종교, 사회법, 예절등)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나타난다. 출애굽기 23:20에 보면 내말을 들으라 항거하지 말라. 왜냐하면 내 이름이 거기에 있다. 당신이 천사를 앞에 보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물론 모이세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 천사는 야훼의 한 표현으로 보고 있다. 이는 구세주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人格을 성부로써 생각 하실때에는 항상 일치해 왔으나 어떤 구별을 두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너희가 그 말을 듣고 내가 말한 것을 시행한다면,, 나는 너희 원수들의 원수가 될 것이며 너희 천사가 걸어가 너희 모든 원수를 물리치겠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언제나 [말을 들으라]는 데에 힘을 두고 계시다.


후기 예언자들 시대에 와서 다위에 관련하여 보아도 (사무후 23:2)다위가 예언자의 행세를 하고 있다. 야훼의 [얼]이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다고 하신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ㅆ므을 듣고 전할 수 있는 예언자와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 사람인 모세를 중개로 두고서 하시듯이 ?다른 예언자가 오는데도 같은 것을 우리가 본다. 예레미아 ?직관(Visio) 성소 (Vocatio)가 나타난다. (예레1:9) [내 말을 너희 입술에 둔다.] 아모스서 9:7-8에서도 말한다. 오세아 6:4-5에서는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표현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위대한 힘의 표현을 말씀하신다.


예언자로서 너희를 쪼갠다는 엄포의 말뿐아니라 위로, 희망, 구원의 말로 나온다. 이사이아 45:8, 성영 107:19-20에도 당신의 말ㅆ므을 보내서 병을 고쳐 주신다는 말씀이 나온다. 이같이 당신의 의사를 들어 내시는 말씀이 있다. 요한 사도는 [말ㅆ므]이 사람이 되사 우리 사이에 거쳐 하셨으며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 그 말씀함으로써 그 분의 位格과 연관지어 계시와 연관시킨다. ?하느님의 길을 가르치러 오신다. 이렇게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말ㅆ므을 두고서 사람으로서 오신 그리스도께 대해 어떻게 알아 들을 것인가? 헤브레아서 1:1에 보면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조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아드님인 예수 그리스도인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분으로 들어내고 있다. 이 구절과 1:18과 일치한다.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하느님의 와아들이 오사 우리에게 열어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예전 예언자들은 들은대로 단편적으로 말하였으나 모든 것을 완전히 아시는 예수께서는 말씀 하실 수 있는 모두를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성부께서 당신 아들을 보내사 당신의 사랑을 전달하신다. 공관복음에 지시하는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의 빵을 주신다. 하느님의 섭리 하심에 대해서도 하늘에 계신 성부께서 우리를 기르시니 새보다 낫다는 하느님의 섭리를 알게 된다. (마태오 6:26) 그외에 여러 비유에 관한 말씀도 있으나 일일히 여기서 다 피력치 못하고 다만 그에게만 간단히 말하겠다.(루까 15:3 망자의 비유, 15:11, 요한 15:19 하느님의 사랑의 전달자, 요한 17:26 당신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신자들 안에) 이렇게 구세주로서 하느님의 사랑을 계시 하심을 말한다. 구약에 있어서 하느님의 모든 계시가 그리스도로 인해서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작용을 말함)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말씀 뿐만 아니라 생활과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하신다. 그의 모든 행적이 우리의 교훈이 된 것이다. 요한 1서 4:9-10은 구원에 관한 말씀과 생명의 말씀을 하신다. 겟세마니에서의 기도, 성부께서 당신께 주시는 잔이 어려움을 말씀하시나 달게 받으시고 십자가 밑에 있는 요한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신다. 요한 사도는 다른 어느 사가 보다도 사랑을 더 느꼈기 때문에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표현을 쓰신다. (요한 1서 4:8,6) 또한 사랑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사도 바오로께서 쓰시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이다. (로마 8,35-39)


이렇게 신약은 사랑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 진다는 것은 잘 아는 것이므로 계명도 사랑에 관한 계명을 주심은 주지의 사실이다. (마태오 22:34-40) 이것은 신명기나 레위기에 나오는 말씀이지만 새로운 빛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주시기 때문에 당신의 독특한 명임을 말씀하신다. 요한 13:34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을 주신다. 신약의 내용이 바로 이 사람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표현은 요한이나 바오로에서 보든가 그는 (하느님)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 까지도 희생시킨다. 우리 위한 사랑의 극치로 나차난다. 죽음이 바로 사랑의 표시가 되도록 하신 것이다.


피를 흘리사 계약을 이루시는 데 있어서도 사랑이 중심으로 된다. 물론 espiratio와 죄의 구속이 겸해 있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일치를 이루시는 것이다. 사랑과 계시에서 계시의 마지막은 사랑이고 생명이다. 빛이 생명으로 간다는 것을 여기서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외아들이 성부의 품에서 나시고 位(persona)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요한 사도께서는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요한 사도는 성신께서 약속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하여 성신이 항상 예수님의 말씀을 더 확실히 알아듣게 해주고 완전한 진리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요한 16:12-13). 그는 평생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성하여 참된 식착 모양으로 모든 내용을 [말씀]이란 한 마디로써 표현하신데 큰 뜻이 있다.


이상은 [말씀]의 내용에 대해서 말했으나 표현으로서 그리스도께 인도되어 位格까지 가도록 한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도 여러 사상이 들어간다. 랍비들이 법에 대해서 位格化되는 정도로 보아 종교의 본질 모양으로 생각하도록 하여 하느님도 법을 공부하시는 분 모양으로 절대적인 무슨 법을 생각하는데 이르는 것이다. 法은 하느님의 의사의 표시로 나타나는 것이나 法을 공경의 대상으로 보아 법이 하느님과 우리사이에 중대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Torah(法)은 세상이 있기 전부터 조성된 것이라고 말하는데 어떤 사람은 햇수까지 규정하여 974대 (generatio)이전에 법이 생겼다고 주장하나 이는 단순한 환상에 지날 뿐이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때 만들었다고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法은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고 하느님의 무릎위에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화느님의 딸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실 때에 한가지 건축 설계 모양으로 일을 한 것이 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떤 랍비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에 생각하여 토라에 따라서 만드셨다는 것이다. 볼 수 없는 세상(mundus invisibilis)이 볼 수 있는 세상(mundus visibilis)의 표본이 된다는 개념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창세기 1:1에 [태초(in principio)]라 한 principium은 그들의 해석에 의하면 토라(Torah)라고 한다. 그러므로 토라는 이스라엘에게 빛과 생명이 된다는 여러 설명을 한다. 요한 사도께서 [말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바와 토라에 대해서 한 말이 같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명백히 께시하는 [말씀]을 位格化하는 말로 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이런면에 있어서 요한 사도의 입장은 법이 모이세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본다. [말씀이 강생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말로 그 말씀을 위격화 했다. 말씀이 法과 직접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유태아 인의 法해석에 관한 것뿐 아니라 구약의 지혜에 나오는 말씀이 역시 연관을 가진다. 지서 18:14-16에 나오는 말씀은 (성탄 전야에 우리가 낭독하는 것)만상이 고요하고 제상이 빨리 돌아가는 때에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는 밤을 생각한다. 하늘 높은 것에서 전능하신 당신의 말씀이 왕좌에서 내려오사 마치 힘센 장사와 같이 세상 가운데 내려오사 사람을 벌하는데 관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vindex(복수)에 관련된다. 이 형용은 묵시록 19:13-15까지의 천주의 [말씀]을 그대로 형용한 것이고 바로 이분이 세말때 원수 마귀를 결정차로 완패시킨다는 것과 관련된다. 그 분은 당신의 돌이킬 수 없는 그러한 명령으로서 양날이선 칼을 가지고 오사 온 세상을 죽음의 바다로 삼는다. 그리하여 하늘에까지 닿고 땅을 밟게 된다. 이렇게 굉장히 센 위력을 가지신 하느님의 말씀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형용은 位格에 관련하여 하시는 말씀이라고 보게 된다. 어좌에서 세상에 오사 요한 묵시록에서는 위력으로 다리를 놓고서 나온다.


이사이아 55:10을 보면 하늘에서 비나 구름이 와서 땅을 적시고 돌아간다고 형용하고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도 효과없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보내신 사명을 모두 이루시게 되는 것임을 말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효과있는 말씀에서 당신이 나왔다고 여러번 말씀하시는데 이와 연결시켜 사도 요한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오신 말씀으로 생각하고 았다. (요한 8:42, 17:8) 당신은 사명을 받고 세상에 오셨다가 다시 하느님께로 올라 가셨다. 내가 하느님께로부터 나서 세상에 왔으나 세상을 버리고 돌아간다고 말씀하신다. (16:28)그러므로 [말씀]은 하늘로부터 보내진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항상 보냄을 받는 분이심을 천명하시며 성부는 당신을 보내신 분으로 말씀하셨다. 나오고 보내시어 효과를 보는 구약의 정신을 살린다. 위격에 결부시킨다. 물론 개념이 없으면 이것이 살아날리 만무하다. 그러나 예수께로부터 듣고 살고 한 거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말씀을 당신께 적용하시는 바를 보고서 지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러한 형용으로 말ㅆ므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와 접촉함으로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루어 진다는 것을 볼때에, 그리스도를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씀하시고 당신이 산발의 주인이시고, 모이세법을 완전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시고 모든 사람, 원수까지도 감탄할만한 지혜를 가지고 가르치신다든가 하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의 지혜를 소유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당신은 성부께서 보내셨고 성부께로 돌아가신다는 형용을 하시는 젊은이 라든가 이 모든 것이 사도 요한에게는 성부께로 나오신 지혜로 [말씀]이란 형용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란 말은 라틴어의 문법상으로 여성으로 생각하기 쉬우므로 이 말보다는 남성인 logos(말씀verbum)이란 말로 표현했다고 본다. (Sapientia, ae, f).


위에서 말한 logos에 대하여 부언한다. 이것은 구약의 바탕을 가지고, 구약에 있어서 연구하는 랍비니들의 태도, 예수께서 오사하신 말씀이듡, 이러한 것을 묵상한 결과 logos란 표현을 취하셨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logos란 말은 요한 사도만이 사용한 것이 아니고, 필로(philo), 플라토(plato), 스토아 학파들이 사용한 단어이다. 그리하여 그 말이 같으니 사상으로서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닌가? 란 반문의 학자들이 있다. 물론 사도요한께서 이러한 사람들의 것을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언어는 당시 유행하던 말이므로 그 용어를 사용했으나 개념은 전혀 다르므로 필로, 플리토, 스토아 학파에서 사상이 왔다고 할 수는 없다. 얼마나 그 차이성이 있는가에 대해서 학자간에 완전히 같을 수는 없으나 역시 헬레니즘에서 오는 logos는 우리가 범신론적으로 생각하여 우주론(anima mundi)모양으로, 또 이상세계 모양으로 하느님의 이성 모양으로 생각하고, 세상과 물질과의 중간상태인 대조물로 생각하고 있다. 그 주장은 하느님은 높으시므로 직접 세상과 접촉시킬 수 없다. 그래서 다른 개체를 놓아야 한다. 에논, 데뮤르구스 등은 층계를 놓아야 하는 둘 중에 하나로 생각한다.


필로에 있어서는 다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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