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니꼬데모와의 대화(3:1-12)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실 때에 된 일로서 중요한 내용을 포함한 담화이다. 이 일은 첫 파스카를 지내실 때에 된 일이다. 니꼬데모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시는 어느날 밤에 예수께 찾아와서 물었다. 그는 유명한 학자였으나, 예수께는 아이와 같이 이끌려서 쩔쩔맨다. 예수께서는 농부나 어부들에게는 신비에 관한 것을 어렵게 말씀하시므로 그들이 알아 듣기 어려워 쩔쩔맸다.
1절 : 니꼬데모는 산헤드리움 회원이었다. 70명밖에 없는 최고 재판소의 배심원으로 결정권을 가진 사람 중 한사람이다. 이 이름은 희랍적 이름으로 그 뜻은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란 뜻을 가진 사람이다. 물론 다른 어원을 찾는 사람도 없지 않다.
2절 : 그가 밤에 갔다는 사실은 낮에는 꺼려서, 그의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데다, 나이가 많고하여 젊은이를 찾아가는 것이 체면에 걸리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체면 때문이라고 이렇게 평해 보기보다는, 남이 보지 않고 조용한 시간에 이야기를 주고 받기 위한 것임을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떻든지 그는 믿고서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에 협력하여 장사지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예수께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천주께로 좇아 오신 스승인 줄을 아오니, 대저 당신이 행하시는 바 이 영적은 천주 한가지로 아니 계시면 아무도 능히 행치 못하겠나이다.]이렇게 그는 하느님께서 하는 일을 보고서 하늘로부터 오신 스승, 적어도 예언자로 인정하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니꼬데모 같은 큰 학자가 예수께 랍비라 하시며 하늘로부터 온 선생이라 하는 것은 보통 랍비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완전한 신덕을 갖고 있다고는 하기 어렵고 다만 존경심을 가지고 배우려고 왔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제자로서 겸손되어 온 이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르시기를,
3절 : [나 진실히 너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만일 다시 나지 않으면 천주의 나라를 얻어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은 기대하던 바이나 높은데로부터 난다. ? 그래서 니꼬데모가 알아 듣고 다시난다는 의미를 반문하다. 높은 데로부터 다시 난다는 것은 자연 방법이 아님을 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말을 가지고도 달리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여기서 높은 데서부터 다시 나야 하느님의 나라를 본다고 [진실히, 진실히]라고 거듭 말씀하신다. 니꼬데모는 자연으로 나는 것을 생각하여 자신이 늙었는데 어떻게 모친의 태중에 들어갔다가 태어나겠는가 하고 질문한다.
4절 : 다시 난다는 것, 불가능하고 될 수 없다는 반문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니꼬데모가 이렇게 얕은 곳에서 이야기 하는데서 한층 올라서 이르시기를 :
5절 : [나 진실히 진실히 네게 이르노니, 아무라도 만일 물과 성신으로 다시 나지 않으면 능히 천주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느니라]고 하신다. 물을 생각하는 것은 당시에 세를 주고 때를 씻는 것을 생각하는데 그저 잘못하는 것을 사함을 받으면 된다는 식으로 그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신의 힘으로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때를 씻는 것이 아니고 성신에 의해서 태어나는 새로운 생명에 관한 것이다. Con-natura 새로운 탄생을 말한다. 요한 서문에 있는대로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성한 생명에 관한 것을 말씀하신다. 천주성신이 물위에 임하시는 것, 알을 품듯이 물위를 품어서 생명을 준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으나 그것은 잘 맞지 않는다. 어떻든지 물과 싱신에 의존해서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영신생명에 있어서도, 물과 성신으로 돋아나도록 자연 생명과 초자연 생명과의 상징이 있다. 물이 없으면 역시 생명도 없다. 생물의 대부분이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성세성사를 세우는데서 성신의 힘으로 새로나게 하시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알아 듣지 못하는 니꼬데모에게
6절 : [육신에서 좇아 난 것은 육신이요, 신으로 좇아 난 것은 신이니라.]하신다. 니꼬데모가 말하는데로 태중에서 다시난다해야 육체밖에 아니니, 성신으로 태어나야 신이 된다는 것이다. 천국은 영신이 가야 한다는 것 즉 영신적 사람이 천당에 갈 자격을 얻는다는 것을 들어내시는 것이다. 여기서 성신의 작용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7절 : [나 네게 이른바 너희가 마땋히 다시 나야 하겠다 한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여기서 이상히 생각치 말라고 한다. 8절 : 표는 있으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들어서 그 표를 아나, 그 자체로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같이 영신으로 난 사람은 이렇다는 것이다. 결과를 보아서는 뚜렷이 사람이 변하여 행동, 사상으로 나타나니 그 자체는 신비에 속하는 것이므로 이러니 저러니 할 수는 없다. 이 모든 것을 똑똑히 알 수는 없다. 여기서 창세 2:7에 나오는 서광(aurora)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것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 aurora에서 하느님과 접촉해서 같이 친하게 지내던 시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죄를 범한 후에 소리가 나는 것이 도리어 겁이 나서 사이로 숨어 들어 가는 것, 미풍을 하느님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에 대해서 니꼬데모는 역시 알아 들을 수 없으므로 니꼬데모는 다시 예수께 질문한다. 9절 : [이 일이 어떻게 능히 될 수 있나이까?]
10-11절 : 예수께서는 책망하시며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스승이 되어 이것을 모르는가? 아시는 것을 말하고, 보시는 것을 증거하거늘 이 증거를 사람들은 받으들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도 알지 못하는 자에게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도하신다. 몰라도 믿게 되는 것은 증거 때문이다. 천주 성자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인데 그것을 알아 듣지 못한다 하여 믿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하느님의 증언은 사람의 증언보다 더한 것이다. 자기가 보지 못했더라도 초자연한 것을 말씀하시는 성자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는 신덕이 중요함을 말한다. 물과 성신과 신덕, 이 세가지가 우리를 하느님의 의자가 되는 길이라고 하신다. 이래야만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12절 : 지상에 것을 말하여도 믿지 아니한 자들에게 천상것을 말하면 믿겠는가? 물, 바람같은 예를 들지도 않고 순전히 성삼의 생활, 신비, 강생에 관한 것을 가르쳐 주면 어떻게 알아 듣겠냐고 반문하신다. 이렇게 쩔쩔매는 니꼬데모에게 :
13절 : [하늘로 좇아 내려오고, 또 하늘이 있는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가 본 자 아무도 없음이로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늘에서 오신 것이다. 내려 오신 것은 다른 이들을 데리고 올라가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당신의 원천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고 증거한다는 것이 세상에서 눈으로 보신 그것이 아니라 영신안에서 천상에 관련시켜서 말씀하시며 신덕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하여 받아들이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것을 생각한다. 이것도 그는 잘못 알아 들었을 것이고 더욱이 다른 것을 예수님은 말ㅆ므하신다.
14-15절 : 십자가에 돌아가실때에 관한 말씀이다. 물, 성신, 신앙의 원천은 당신의 구속을 위하여 돌아 가시게 되는 것이다. 뱀은 창세가 3장에서 사람을 죄로 유인하였다. 지서 2:24에서는 죄로 인해서 세상에 죽음이 왔다는 뱀의 전설에서 알 수 있다. 모이세의 뱀이야기는 민수기 21:8에도 나온다. 사막에 불뱀이 있었다. 이 뱀에 물린 사람은 사막에서 물이 없다고 원망하여 벌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뱀에 물려서 죽는 것을 면하기 위하여 모이세를 시켜서 하신 것을 구리뱀을 만들어 가지고 높이 달아서 멀리 있는 사람이 바라다 보면 낫도록 되있다. 이것은 나중시대에 우상화하는 위험이 있어 에세키아스 임금때에 없애 버렸다. 이러한 신비, 사람을 물게 하여서 죽게하던 것이 다시 사람을 살리는 뱀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천주께서는 항상 같은 것을 가지고 반대의 효과를 나타내게 하시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선악과 나무에서 죽도록 된 것을 반대로 이용하여 나무로써 (십자가 나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뱀이 우리를 유인해서 죄로 인도하여 죽게한 것을 뱀으로 인해서 살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뱀이 아니고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시는데 관한 것이다. 영신의 구원에 관한 것이다. 그 뱀처럼 당신이 높이 달리면 된다.
16절 : 하느님은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당신 독생성자를 주시기까지 하사 당신을 믿는자로 하여금 멸망치 아니하고 오직 영생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살리는 묘기를 보이시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은 도저히 여기에 미칠 수가 없다. 자연의 인각 관계를 볼 때 산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죽은 사람을 살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살리신 것이다. 그 십자가는 무능한 것이 아니라, 지혜이고 생명이고, 힘인 묘기를 보이신 것이다. 십자가의 힘에 대해서 뒷바침하고 있다. (16절은 요한사도의 말씀으로 보는 이도 있다. )이 신비에 관한 걸명을 하시기 위해서, 참된 원인은 성부께서 당신 아들을 위해서 돌아가시게 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들어낸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인다. 그리하여 당신 아들을 보내사 돌아가시게 까지하여 영생을 갖게 한다. 우리를 살리게 하신 참된 사랑의 비극, 이것은 정의에 입각하여 대표적으로 벌을 받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속죄하려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희생이 되신 것이다. 죄는 말할 것 없이 더 큰 사랑으로 갚아야 하는 것이다. 벌 받은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한 것을 큰 사랑으로 책망하신다고 보는 것이다.
17 : 세상을 판단하기 위해서 보내신 것이 아니고 구원되기 위해서 보내자 죽기까지 하신 것이다. 사랑의 연극을 본다. 사랑을 느끼는 것이 사도 바오로의 서간과 요한 서간에도 나온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대로 처음에는 영신으로 태어나는 것이 성신으로 된다는 것을 말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성자께서 되는 것이니 성신과 성자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성부께서 원리로써 주동하심을 말하며 결정적 요인은 사랑에 있다는 것을 들어내서 삼위일체를 우리 영신 생활에서도 구현해 주시는데 협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조는 공동업인 것: 인간을 조성하시는 데 있어서나 우리의 영신 생활에도 성삼이 참여 하신다는 삼위일체 도리가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과 니꼬데모와의 대화에서 매우 높으신 경지를 들어내고 계신 것이다.
18절 : 이 구절은 구원에 관한 것이다. 판단을 받는다는 것은 유죄판결에 관한 것이다. 말씀의 내용을 믿는 사람은 유죄판결을 받니 않고 믿지않는 사람은 벌써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결정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의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따르고 안따름은 우리 자유에 달린 것이다. 믿지 아니하는 자는 판단을 받는다. 그러므로 신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신덕을 도외시하는 합리주의자, 무신론자들이 있다. 절대적으로 증언하시는 하느님의 아들 독생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결정적인 유죄판결의 요인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을 믿지 않게 되는 까닭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천당으로 가는 길, 진리로 오신 것) 오셨으나 진리의 신앙으로 답하지 않게 된다면 우리는 판단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그 길은 듣는자와 믿는 자의 정신적 의무를 들어낸다.
19절 : 빛을 싫어하는 까닭은 악의로써 암흑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빛을 비추어 환히 보이게 하는 것은 좋으나 나쁜 것을 들어내는 것이므로 악한 사람은 항상 어두운 곳으로 찾아간다.
20 : 그들은 잘못에 대한 책망이 듣기 싫으므로 빛으로 오지 않는다. 솔직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는자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나쁜일을 하려하고 있다. 빛과 선, 어두움과 악을 이러데서 알 수 있다.
21절 : 하느님안에서 된 사실은 좋은 것이므로 들어나기 위해서 빛으로 온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진리를 준행하는 것이다. 진리를 실천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우리행동의 원인이 된다. 다만 수학, 물리학처럼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실천 생활의 원칙으로 삼는자는 하느님께 온다는 것이다. 마음이 착한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즉시 믿게되며 반응이 속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깨끗치 않는 자는 우선 믿지 않고 반대하고 불신한다. 그런 사람에게 표시로써 기적을 보이면 마음을 바꾸어 믿게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표시를 보고서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결정적으로 악에 기울어진 사람들이다. 각성시키는 표를 보고서도 믿지 아니하는 잠에 든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고집이 세고, 주관이 센자들은 기적에도 동요되지 않고 기적을 보고서도 그것을 달리 해석하고 있다. 마음을 단순히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을 자세를 갖는다면 신덕이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신덕이란 은혜를 주시는 것이므로 이러한 신덕을 저버리는 세대는 너무도 슬픈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우리보다 낮고, 지혜롭고 능하시다는 것을 알도록 힘서야 한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유물론자들처럼 물건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물건은 인간이 세상에서 필용에 따라 쓰다가 버리고 간다는 원칙을 알아 듣지 못하고, 강아지들이 동물의 뼈를 보고 서로 싸우는 그러한 세상을 너무도 슬퍼한다.
바오로께서 디도에게 보내신 서간에서도 재생에 관한 말씀을 한다. (디도 3:5)사도요한은 새로 난 것 (nova creatura)을 말한다. 하느님의 Natura(本性)에 참여하는 것을 신적 탄생에 관련 시키고 있다. 부패한 본성이 세로워진다는 그 이상의 원인을 따져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로나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 1서 1:8) 이것은 세례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성신의 힘이 절대적이다. 그러나 참된 원천은 십자가의 현의에 달린 것이고,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니꼬데모와의 대화안에 대단히 중요하고 기초되는 도리가 들어있다. 당시의 위대한 학자였던 그도 이러한 신비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어리둥절해 한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모자라는 점을 발견하여 새로운데로 이끌어 올라가는, 즉 상대를 안내하여 점차 차원을 높여서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껴 질문을 하게 된다.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이끄는 그리스도의 교육방법도 알 수 있다. 보통 우리는 문제를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줄도 모르는 상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모른다고 하면 그에게 먼저 질문한 다음에 알도록 설명하고 계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