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르나움 회당에서의 강연 (6:22-66)

 



<가파르나움 회당에서의 강연 (6:22-66)>


사람들이 예수께 질문한다. 어느때에 여기 오셨습니까하고 예수께서는 물위로 걸어 오셨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치 않으시고 속으로 대답을 하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찾느냐? 찾는 이유는 기적을 보았으니 찾는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그들은 떡이나 먹으면 된다는 물질에만 눈이 어두웠던 것으로 참된 신덕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므로 위와 같은 평을 가하게 된다.


22절에서 요한은 다음날 동해만에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El-Bateha에서 야영하며 여전히 남아 있던 군중들은 다만 한척의 배만이 저녁전에 남아 있었고 예수께서는 그배로 가지 않으셨음을 알고 있었다.


23절 티베리아에서 다른 배들이 주님의 사례로 기적이 이루어진 근처로 왔다.


24절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고 아무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아 배에 올라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예수를 찾고 있었다.


25절 마침내 그들은 예수를 찾았다. 요한은 언제, 어디라고 말하고 있지 않으나 분명히 같은 날 저녁에 가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인 것이다(59-60). 예수께서 언제 오셨는가 하는 질문에서 그들은 분명히 어떻게 (quamodo) 오셨는가하는 것도 알고 싶었다.


26-27절: 여기서는 영원한 생명의 빵을 당신께서 주시겠다고 하시고 있다. 이렇게 생명의 빵을 약속하신다. 여기서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와 같이 빵을 달라고 하지 않으신다. 썩을 빵 말고 먹고 영원히 죽지 않는 빵을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기적으로서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보낸사람이란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기적으로서 예수가 참된 멧시아이심을 들어내셨으므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분의 말씀을 모든이가 들어야 하고 믿어야 함을 들어 내고 계신 것이다. 이런 분이 주시는 생명의 빵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성부의 보장하에서 움직이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참된 표, 인(印)을 친 것으로 생각하는 증명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28절 유태인들의 질문 [우리는 무엇을 하여서 천주의 일을 행하리이까?] 그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그 일이란 하느님께서 명하신 바인 것이다.


29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란 하느님께서 보낸자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항상 어떤 일로 생각했다. 그들의 전통으로는 무엇을 하여 하느님께 대등한 보수를 받는 것을 생각하나 여기서 말하는 신덕은 그것이 아니다. 신덕은 자신을 온전히 송두리째 바치고 거기에 의존하여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이므로 하느님께 온전히 들어가는 것이다. 서로 맞서서 다만 일로서 교환하는 것이 아니다. 당대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생각지 않고 성총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때문에 예수의 말씀, 기적도 믿지 낳고, 모이세 율법만 고집하며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예수를 십자가에 몰아 죽인 것이다. 예수는 신덕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신덕이란 다만 알고 승인하는 머리의 행동만이 아니고, 마음과 몸, 즉 전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때문에 거기에 요구되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바오로에게서 나타나는 영성생활, 선행으로 나타난다. 이런 것과 로마서에서 볼때 opus legis만을 생각하는 것과는 구별해야 한다. 이렇게 신덕을 말씀하실 때에 그들의 요구는 다음과 같다.


30-31절 그들은 보고야 믿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예를 드는 것이 40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만나를 먹고 살았다. (출애굽기 16:13) 이것이 큰 기적이다. 예수께서는 이만한 기적을 행치 못하셨으니 그만한 기적을 좀 보여 달라는 것이다. 만나는 하늘에서 왔으므로 굉장한 것이고 또 많은 사람을 오랫동안 먹였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몇천명을 한 번 밖에 먹이지 못했으므로 그것만 가지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보다 더 큰 묘를 보이라는 것이다. 32절-40절: 예수의 대답


32절: 예전에 먹은 빵은 모이세가 준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지 준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참된 빵(알래티노스)을 천상에로 조차 주시겠다는 것이다. 기적으로 주신 빵에서 만나로 갔다가 오주 예수 친히 우리의 생명의 빵이 된다는 것에로 비약하여 올라가고 있다. 아직 까지는 영신 생명의 참된 이유가 되신다는 것을 들어내고 있다. 물질의 빵이 아닌 영신의 빵을 성부께서 친히 주시는데 대한 말씀을 하신다.


33절: 하느님께서 주시는 떡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그 빵은 세상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빵이 된다. 아직 성체성사를 직접 말씀하시기 보다는 약소겡 그친다.


34절: 사람이 항상 이 떡을 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빵이 아니므로 여기 있다 하고 내어줄 수는 없는 신덕으로서 되는 것이며 신덕을 거쳐야만 생명을 얻는 것임을 말한다.


35절: 당신께와서 당신을 믿는 것이 빵을 먹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빵이시기 때문이다.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께 와서 믿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신다는 것이다. 풍부한 은총(풍부한 물=성신의 은총)을 그리스도로 인해서 받는다. 그러나 신덕이 조건임을 들어내고 있다.


36절: 이것은 무엇을 똑똑하게 말하는지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뒷 문맥을 보아서 보고서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들이 생명의 빵을 달라 하였다. 그 빵은 예수를 믿는 것이 거니와 그들이 보고서도 믿지 아니하므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37절: 당신께 오는자는 당신이 물리치지 않으신다고 하신다. 그러면 당신께 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은혜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신덕은 하느님의 은혜라는 것을 설명 하신다. 은혜를 받아서 오는 사람에 대해서는 성자께서 모든 것을 다 해 주신다는 것이다.


38절: 당신은 당신을 보내신 성부의 의향을 이행하러 오셨다. 그러한 사명을 받아 오셨으므로 당신 생명까지라도 내놓고 끝까지 이행하신다는 것을 알게 한다.


39절: 성부의 의행이란 성부께서 당신에게 주신 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마지막에 다시 살리신다는 것은 육신에 관한 것도 구하신다는 것으로 영혼뿐 아니라 육신까지도 구하시는 참된 마지막 구원을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명은 세상에서의 은총 뿐 아니라 마지막에 사는 것까지 포함하여 완전한 구원과 은총과 결합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40절: 또한 성부의 의향이란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고 믿게 하며 누구에게나 영원한 생명을 갖도록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39절과 같은 말씀을 되풀이 한다. 당신은 사람에게 완전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전력을 다 하실 것은 물론이다.


41절-42절: 생명의 빵은 마지막 구원의 前表(praesignum)라는 말로 시작한다.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이 원망하는 내용이다. 그리하여 그는 현실적으로 눈으로 보고만 있는 예수를 요셉의 아들이며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믿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활한 빵이란 말씀을 믿지 않고서 요셉의 아들 지상에서 난 사람이니 하늘에서 왔다고 기껏해야 예언자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태도이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에서 어디서 그의 지혜가 왔는가를 말하면서도 믿지 아니하므로 다른데서 보다 영적을 행하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선지자가 본향에서 대접을 못 받는다는 말씀으로서 엘리아 시대에 과부가 많았으나 사렙다 북쪽 페니키아 지방에 가서 한 과부에게서 잡수시고 아들을 구해주신다. 또한 당시 엘리세오에는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고쳐주지 않고 다마스꼬의 어떤 환자를 고쳐 주셨다. 이렇게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잇던 것은 신덕대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감정을 상하시어 본향을 떠나신 것을 알 수 있다. 눈으로 보는 것, 신덕에 장애가 되는 것, 즉 눈으로 들어오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므로


43절: 예수께서는 원망하는 태도로 말하지 말라고 하신다. 불평을 말하는 자들은 불신을 들어내고 있고 하느님의 은총의 거부를 들어내고 있다. 신앙은 神的인 매력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며 인간의 자유를 부서뜨리는 강제로 일하지 아니한다. 누구든지 효과적으로 끌린자는 예수께서 그를 마지막 날에 부활시키실 것이다.


44절: 성부께서 인도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께 가지 못한다. 신앙은 예언자들이 말한 하느님의 내적인 작용이다. (이샤 4:13 예레미아 31:33이하) 신앙은 한 영혼을 예수께 데려오는 성부께로부터 받는 내적인 청취요 수업이다. 듣는다는 것은 感知고, 배운다는 것은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부를 직접적으로 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부터 받는다. 은총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니 만큼 은총을 많이 베푸신다. 그런데 예수께 가게 되는 것은 은총의 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마음이 선하므로 장애가 없이 저절로 끌린다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은혜이므로 따로 주셔야 한다. 이렇게 해서 오는자는 마지막에 부활시킨다고 하신다. 하느님게서 먼저 마음을 움직여서 하느님께 도달하게 하신다는 구약의 여러 예언자들이 있다 바로 위에 말한 예레미아 31:33 에제키엘 11:19에서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이니시아티므로 은총을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샤이아 54:13에서도 볼 수 있는 은총의 필요성을 말한다.


45절: 여기에 나오는 말씀은 양순함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이샤53:13)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른다는 것은 하느님은 진실하시니 그 말씀을 믿어야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완전한 진리로서 믿어야 하는 가장 근원이 되는 것이다. 성부의 말씀을 듣고서 배우는 자는 예수께로 오게 도어 있다. 그러므로 진리를 듣고서 믿을 수 있는 사람 그는 성총에 장애를 두지 않은 사람이다. 마음이 구부러지지 않는 사람이 성총을 받을 때에 쉽게 믿을 수 있다. 그러나 호기심으로 분간없이 믿는 것과는 다르다. 하느님께 믿고 배운 사람이 그리스도께 오게되는 내적 은총이 필요하다. 귀로 듣고 마음으로 움직임을 받아서 오게하는 것이다. 말만 가지고는 믿지 못하고 기적을 보아야 한다는 것은 부족한 사람이며 그들은 자신을 ㅠㅛ준으로 두고서 무엇을 요구하는 상태이다. 그러나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고 증명도 없고, 수리로 경험하여 고집하는 자들은 믿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자기안에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있는 자들인 것이다. 향락주의에 빠진 자는 하느님 말씀을 따르기 싫어한다. 이론적으로 긍정해도 실천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등의 종류가 있다.


46절-47절: 누구나 성부를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성부로부터 오신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당신은 생명의 빵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 생명을 받기 위해서는 믿어야 하며 직접 성부를 대할 수는 없고 계시의 중계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사다리가 없기 때문에 연결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항상 은총이 필요하다. 또한 신덕이 필요하다고 하신다. 이것을 통해서 생명을 주는 빵으로 오셨으므로 그리스도께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이 되는 것이다.


48절: 41절에서 말한 것으로 보아 당신이 생명의 빵이심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같은 식으로 반복하시며 말씀하신다.


49절: 물리적인 음식인 만나를 먹은자들은 죽었으나 당신은 생명을 주시는 빵이시라는 것이다. 예전엔 만나도 생명의 빵이 되지 못했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먹어도 죽었으니 당신은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50절-52절: 당신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활한 빵이라고 당신의 본성에 대한 설명을 계속하신다. 이러한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활한 빵은 사람이 먹고 죽지 아니하는 빵이다. 생명을 주는 영신적 음식은 영원하고 음식의 어떤 제한된 효과 때문에 끊이지 아니한다. 다만 영신적인 자멸을 통해서만 그친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을 수 없다. 생명나무의 열매이다. 이것은 소극적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다음 구절에서 생명의 빵이란 생활한 빵으로 강조하여 부르고 있고 먹고 나 효과는 영원히 살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서 말하는 놀랄만한 강조의 말씀은 “내가 물과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살이라”고 한다. 이것은 27절에 우리에게 준비한 인자에 의해 미래에 주실 것이다. 그것은 강생한 아들이라고 32절에서 말하는대로 성부의 은총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빵은 먹기 위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살과 그 빵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 예수님의 살이란 당신의 인간 육신이며 그것은 세상의 전 인류의 생명을 위해서 주시는 것이다. 그 구절에 희생적 성격이 거의 확실한 듯하고 비카톨릭 학자들에 의해서 시인되어 오고 있다. 여기서 생명이란 神的생명에 관련되는 것이고 이 세상 생명의 연장이 아니다. 아무리 오래 가더라도 인간생명이다. 참된 생명은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소도를 통해서 성부께서 주신 생명이며 초자연한 생명이다.


51절: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활한 떡이로다.


52절: 이 빵을 먹는자는 영원히 산다. 당신이 주실 바 빵이란 당신의 육체, 살을 가리킨다. 이것은 세상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말을 듣고서 유태인들이 쟁론한다. 피가 철철 흐르는 살로 생각했던 때문에 쟁론을 일으킨다.


53절: 이들이 생각하는 살은 피가 철철 흐르는 것으로 생각하여 영신적으로 알아 듣지 못하고 있다.


54절: 살을 먹지 않고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똑똑히 말씀하신다. 여기서는 부정적으로 하시는 말씀이다.


55절: 적극적으로 말씀하신다. 즉 먹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먹어야만 사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성사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과 연결이 되고 영생의 원인도 말씀하신다. 또한 그 마지막 생명은 영혼만 누리는 것이 아니고 육신까지 함께 다 누려야 하므로 마지막 날에 보활시키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영생과 부활을 3번 거듭 언급하고 계시다. 안티오키아의 서 이냐시오의 말에 의하면 [성체성사를 불멸의 약,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야 하는 해독제]라고 불렀다. 여기서 이렇게 같은 말슴을 강조하시는 것은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이다.


56절: 참된 음식이며 참된 음료이다. 살과 피를 음료, 음식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이다.


57절: 여기에 나오는 말은 일치의 성사에 관련되는 말이다. 음식을 먹으면 살이 되므로 一體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화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우리가 먹으므로 그리스도가 우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화하는 것이다. 물론 位格이 바뀌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본성은 그대로 있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당신 안에도 인성과 천주성이 있어서 신비를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데서 따라오는 결과는 상호 생활한 內在性(immanens)을 이룬다. 성체성사는 천주성 안에서 우의의 성사이며, 애덕의 성사이다.


58절: 살아계시는 성부께서 당신을 보내셨다. [말미암아(proter)] δια는 보통 원인(이유)를 가리킨다. 즉 [누구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라는 것이다. δια는 이유뿐 아니라 목적도 들어내고 있으므로 그렇게 본다. 성 아오스딩은 두가지 뜻이 있으므로 두가지가 서로 통한다고 보고 있다. 당신 생명, 성부를 위해 사시듯이 당신을 먹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로 살도록 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것을 받고 그리스도께로 간다. 성부 성자사이, 성자와 우리사이에 꼭 같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중계자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데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그는 동기와 원인 둘로 보고 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똑같이 알아 들으셨다. δια는 두가지 뜻을 가졌으나 우리 말로는 서로 다른 것을 표현할 수 없음이 맹점이다. 그래서 성부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사시듯이 그리스도를 먹는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고 한다. 생명의 초점은 그리스도께 있고 생명의 연장이 그리스도께 있고 자기도 그리스도화 하고 남도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끌어 들이려는 현대 사고방식과는 다르다. 진리의 표준은 우리보다 위에 있고, 우리는 거기로 끌려 가야하고 거기에 동조해야 하는 것이다. 59절은 위에 말을 되풀이 하고 있다. 위에서 여러말을 하고 포함하여 결론 모양으로 다시 돌아 온다. 만나는 먹어도 죽었으나 당신이 주시는 빵, 당신의 살과 피를 먹는 사람은 산다는 것이다. 이 빵을 먹는 (τρωγων 희랍본 54, 56, 57절=불가타 55, 57, 58절)자는 영원히 살리라.


60절: 이 말씀을 하신 때는 파스카 전이고, 또한 말씀하신 장소가 가파르나움 회당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61-62절: 이상과 같은 말씀을 하신 후에 들을 수 없는 어려움, 믿을 수 없는 말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들이 신덕이 없는 것을 볼 수 없는 말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들이 신덕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63절: 이러한 말을 한다고 믿지 못할 바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시는 성자를 볼때도 역시 믿지 아니 하겠는가 하는 식으로 영신적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아무리 예수께서 살이 많다 하더라도 살로 배불리실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먹는 법을 영신적으로 되는 것이고 육체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64절: 당신이 영신적인 중재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육신이 먹어서 소화할 고기라고 칠때에 자꾸 먹어도 또 배고프므로 그것은 참된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모양으로 그리스도께서 음식을 주시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다. 당신의 말씀은 진리와 생명이다.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이 육체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약속만 하시는 것이다. 이 약속이 어떤 식으로 될 것인지는 후에 나타난다.


65절: 어떤 사람은 믿지 아니한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다음에 계속 자기 살을 주시고 또한 부활하시기 만찬시에 주시는 것은 예수님의 살 그대로 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현존에 관한 것은 교리 신학의 성체성사에 관한 장에서 배울 것이다. 예수께서는 믿지 아니하는 자가 누구이며 누가 당신을 잡아 줄 자인줄을 미리 아시고 계시다.


66절: 비록 육체적으로 가까이서 말씀을 들어도 영신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역시 가까이 오는 것이 못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일치할 수 없는 것이다. 신덕은 필요 불가결의 것이다. 당신의 말씀은 진리이며, 이것을 믿어야 한다. 이 진리를 통해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이다. 천주께 대한 믿음없이는 생명을 받지 못한다. 신덕과 생명과를 연결시키고 계시다.


67절: 많은 제자들이 물러갔으며 예수와 함께 다니지 않는다. 이러한 중요한 도리에0 관해서 예수께서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러가는 사람은 말할것도 없이 남은 12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신다. 그들이 떠나간 것은 예수께서 잘못하신 것도 아니고 성체성사에 어떤 탓을 부여할 수도 없던 것이다.


68절: 예수께서는 열두제자들에게 너희도 가고 싶으냐 믿지 않으려거든 가라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계신다. 진리를 양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중대한 도리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사도들의 고백을 듣고 싶으신 것이다.


69절: 베드로의 고백, 당신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시니 어디로 가겠느냐고 하면서


70절: 「주는 그리스도이시고 천주성자이심을 우리들이 이미 믿어 알았나이다.」라고 한다. 본문에 보면 Sanctus Dei란 식으로 나온다. 여기서 마지막 근원을 따지고 있다. 자기가 처음부터 믿는 대상인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Sanctus이시다는 것이다. 여기서 거룩하다(sanctus)는 것은 구약에서도 하느님께 자기를 봉헌했다는 뜻이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께 대해 나온다. (요한 1서 2:20, 묵시록 3:7, 사행 3:14) 이것은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축성하여 보내신 분이란 뜻이다. 멧시아께서는 이 세상에 파견되실 때 전권을 가지고 오신 것이지 보통 사람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귀중하고 기름을 발리신 상태이다. 「하기오스」란 말은 축성된 자(Consecratus)란 말과 통한다. 그분은 사제이시고 예언자이시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제사를 지내사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참된 제관이 되심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다스리러 오신 하느님의 전권대사이시다. 이렇게 그분은 거룩하시고 축성되신 분이라고 하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참으로 뜻이 깊다. 영생에 대한 말씀에서 그 말씀을 우리가 믿어야 한다. 영신적으로 알아 들어야 한다. 육신적인 판단은 옳지 않다.(8:15) 영신이 통한다는 것은 신덕의 은혜인 것이다. 신앙의 정신 없이는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71절: 여기서는 유다스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72절)


72절: 요한복음 사가의 말이다. 65절도 복음사가의 말이다. 신덕이 있어야 그리스도께 오는 것이다. 그는 12사도 중에 하나이나 그리스도를 잡아줄 사람 그에 대해 악마란 표현을 하셨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시고 믿음의 고백을 베드로에게서 얻으신 것이다.


이상 설명을 어떻게 알아들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고찰해야 하겠다. 오해를 풀기 위해서 성 아우구스띠누스는 표상적으로 말을 하여 육신적으로 알아 들을 것이 아니고 영신적으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전 신앙을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에 한마디 말만 가지고 성 아우구스띠누스께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없었다고 결론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루터, 갈빈은 참된 예수님의 현존을 믿지 않던 것이다. 다만 징표이고 표상으로 생각하여 기념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현대 합리주의자들은 베드로의 고백도 믿지 아니하고 있다. 카톨릭의 카제타누스도 조금 잘못 생각한 것을 알 수 있다. 반드시 두가지를 영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하기 위해서 말한다. 두가지에 모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성사보다는 제사에 관련된다. 죽음을 신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피와 살이 갈려야 한다. 그러므로 성체를 축성한 다음에는 양쪽에 다 그리스도께서 계시므로 하나만 영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사이니 만큼 두 종류로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 Consecrasio Corporis만 하고서 미사가 중단될 수는 없고 포도주(피)도 축성해야 미사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실체적 존재는 또 다른 문제이다. 면병(몸)만 축성해도 온전한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그리스도 온전히 다 계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살과 피가 다 있고 다시 분류할 수 없는 상태이다. 51-58까지에서 참된 성체성사에 관하여 말씀하시며 앞의 것은 이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니 믿으라는 것은 카톨릭의 정신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26절부터 직접 성체성사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각자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다.


음식, 세상의 빛, 착한 목자, 참됨의 모든 것을 당신께 적용시키고 있다. 당신이 항상 우리에게 먹을 물을 대주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총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고, 세상의 빛이란 말씀도 권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기 위한 신앙의 대상을 말한다. 이러한 모든 형용과 더불어 생명의 빵을 생각할 수 있다. 빵의 기적부터 성체성사와 연결되는 형용이다. 6장 4절에서 파스카가 가까웠다고 하시며 파스카와 연결하고 있고 빵을 사례하신 후 이를 제자들에게 주셨다(6:11)는 것이 성체(Eucharistia)란 말이다. 23절에 빵을 주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강복하신 것은 성체성사(Eucharistia)에 관계되고, 쪼겠다는 말(2:42)은 미사의 성체를 나누어 주는 것과 통한다.(6:12) 항상 성체를 연상케 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처음부터 이러한 것과 단결 시켰다고 본다.


교리에 관해서 caro라고 하시고 corpus라 하지 않은 것도 중대하다. caro는 사람이 됬다는 것과 당신 살을 주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이 당신의 살을 주시고 사람의 극치를 말하며 일치를 말하고, 생명의 근원이고, 생명의 목적이란 깊은 뜻을 가진다. 하느님과 우리와는 natura에 있어서 참여하는 것이므로 귀중한 것은 사람으로 오시는 것이다. 사랑의 성사, 일치의 성사 모든 것이 성체성사에 관련되며 신덕을 기어코 요구하시는 것으로 보아 우리의 자연 이성이 쉽게 알아들을 것이 아니며 신앙의 신비로서 가장 큰 신덕을 요하고 있다.


트리덴틴 공의회는 성체성사안에 모든 사람이 함께 모이고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모든 이가 믿고 공경하여야 한다. 조금도 흔들려서는 안된다. 자주하여 성체성사가 우리에게 영혼의 생명, 정신의 고향에 이를 수 있도록 하라고 하며 그안에 실지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있다고 밝혔다. 우리는 베드로와 함께 영원한 생명의 말씀에 머물러야 한다. (D.B 881-882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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