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이사야에 대하여…

 

1. 예언자 이사야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은 주로 그들이 짊어진 삶과 신분 및 사명을 기술적으로 종합한 것이거나 그들이 지나온 주요 상황들을 반영한다. 때로는 이름과 인물의 관계가 강조되기도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사실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도 한다. 그렇다고 양자의 관계를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은 이사야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실 히브리어 여샤야후는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는 의미로서 그 안에 이미 하느님의 이름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사야는 이 구원을 위하여 기원전 740년경부터 그 세기말까지에 이르는 40년 남짓 하느님의 사자로서 활동한다.




이사야의 가족


그의 아버지 이름 아모스를 구약성서의 예언자 아모스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두 이름의 히브리어 철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여예언자로 언급되는데, 이는 아마도 그녀가 마헤르 샬랄-하스 바스(재빠른 약탈, 긴박한 멸망)와 스알 야숩(남은 자가 돌아오리라. 또는 회개하리라; 이사7,3)이라는 상징적 이름을 지닌 두 아들의 어머니라는 사실에서 기인할 것이다. 이 두 이름이 뜻하는 바는 분명하다. 전자는 흉조에 대한 위협을, 후자는 이로에 대한 약속을 포함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예언자의 가족은 구체적으로 다음 두 가지 때를 지나는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준엄한 심판의 때요, 둘째가 아버지의 자애로운 도우심의 때이다.




이사야의 신분


랍비 문학의 전승에 따르면 이사야는 왕족의 피를 이어받은 귀족이었다. 아하즈 왕을 대할 때 드러나는 그 자유스러운 처신이라든지(7,11.13),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조언을 청하는 히즈키야 왕과의 친숙한 관계(37,2;39,3), 그리고 자기 권력을 과시하는 궁정의 사람들을 비교하여 거침없이 시험하는 대담한 행동 등이 그러하다.


사실 이사야가 세도가들과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는 왕실로부터 어느 정도의 견고한 지지를 받아내야 했다. 유다 사회의 귀족계급들이 예측되는 복수로부터 그를 보호할 리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더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사야를 보호해 줄 수 있었던 쪽은 그보다 상층부의 사람들, 즉 왕족뿐이었음을 우리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활동무대


이사야의 주요 활동 무대는 예루살렘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곳곳을 환히 꿰뚫고 있었고(7,3;22,9;29,7) 성전과 그 의식(6,1-3) 및  집회에 친숙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결코 이롭다 하지 못할 환영과 이교적인 타락으로부터 위협당하고 있음을 보았다(1,10-15). 나아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상황을 도외시한 부자와 망명가들의 폭음폭식도 잘 알고 있었다(5,11-15).




죽음


이사야는 기원전 701년 이후에도 생존하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관한 그 어떤 확증도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유다교의 위경 이사야의 순교에 따르면, 이사야는 폭군 므나쎄(기원전 693-639)의 치하에서 수교를 당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므나쎄가 여러 예언자를 죽였다고 언급하고 있는 2열왕 21,16의 내용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또 다른 위경 이사야의 승천에 따르면 예루살렘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한(1,10) 이사야의 방만함을 응징하고자 임금 므나쎄가 그를 톱으로 잘라 죽였다고 한다.




이 글은 카테고리: 구약성경이야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