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
가. 개요 : 다윗과 솔로몬 같은 위대한 왕이 이스라엘에 군림하였으므로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은 이웃 여러 나라에서 위세를 당당히 떨친다. 그러나 솔로몬의 죽음 뒤에 이스라엘의 통일된 왕국은 에브라임과 유다로 분단되어 비운을 맞게 된다. 이 두 왕국은 에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두 완충지대에 자리하였으므로 이 때부터 팔레스티나는 근동 강대국의 각축전에 휘말린다. 사마리아 궁정의 공식 서기관은 왕정의 연대기 보관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가 함락됨으로써 이 왕국 연대기는 거의 유실된다. 이 와중에서도 열왕기의 편집자들은 그 연대기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는 문헌을 이용하여 엘리야, 엘리사 전기를 북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그들의 전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 왕조실록이 있었고 이 왕조실록을 신명기계 역사가가 자신들의 신학을 중심으로 손질하여 오늘날의 열왕기가 되었다.
이미 언급한대로 다윗 왕위 계승사는 사무엘 하 9장-20장, 열왕上1-2장에 나타난다. 이 열왕上1-2장은 왕위 계승의 첫번째 후계자로 지목됬던 아도니아대신에 솔로몬이 왕위계승된 경위를 보도한다. 이에 의하면 솔로몬이 왕이 된 것도 사울, 다윗처럼 Charisma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단지 솔로몬이 왕세자 중의 한 사람 이었다는 신분과 그를 정치적으로 지원하던 동조자들의 영향력 때문임을 전한다.
열왕기上2,4b에 보도처럼 솔로몬은 고대 막강한 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카리스마적 영도력은 이때부터 왕에게서 떠나간다. 판관 오드니엘(판관 3,7-11)의 이야기에서는 ‘야훼의 영’의 개념이 중요하다. 이 ‘야훼의 영’은 사울과 다윗에게까지 계속되어 오다가 솔로몬이 막강한 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왕위를 찬탈하였으므로 카리스마적 영도력은 이제 예언자에게 국한된다. 따라서 후대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에게서의 야훼 영이 어느 왕에게 내리게 될 것인가 하는 메시아 시대를 염원하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메시아 사상”이 서서히 싹트게 된다.
1. 열왕기의 명칭, 구분
2. 열왕기의 자료와 형성과정
3. 신명기적 편집 방향
4. 역사적 가치
5. 열왕기 시대의 국제 정세는 이홍기 신부님의 「전기예언서」 P.109 – 118 참조할 것(반드시)
나. 열왕기 上.下의 내용 구분(크게 4부분으로)
가) 솔로몬의 왕위 계승(열왕기 상 1-2장)
다윗 생존시의 왕위 쟁탈전의 내용 수록
나) 솔로몬의 왕권(열왕기 상 3-11장)
솔로몬의 역사 다루고 있다. 이 중 성전 신축 기사가 주를 이룬다(6-8장). 여기서는 왕국 건축 기사(7,1-12,8)를 상당히 짧게 기술하는 반면, 왕궁의 한 부분인 성전 신축 기사는 이상할 정도로 상세히, 중요하게 다룬다. 이는 아마도 후대에 갖게된 성전의 의의와 중요성 때문인 것 같다. 「성서입문」 P128-129참조
①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열왕기 상 3,1-15;5장;6,1-9,9)
②유명한 왕 솔로몬 (열왕기 상 3,16-4,34;9,10-10,29)
③솔로몬에게 항거한 자들 (열왕기 상 11장)
여기서 강조된 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다른 왕에게서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칭찬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느님에게 복종하는 마음과 이해력 있는 마음(지혜로운 마음)을 요구했다. 그러나 1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솔로몬에 관한 부분이 다가오는 재난에 대한 예고로 끝난다. 권세와 영화를 한 손에 쥔 솔로몬이 아내들을 위해 예루살렘 인근 높은 지대에 이교제단을 세웠기 때문에 평화는 솔로몬 생존기간에만 계속되었고, 내부의 원수(여로보암)와 외부의 원수(에돔의 하닷, 다마스커스의 르신)에 의해 솔로몬 왕국은 서서히 병들어 갔다.
다) 분열왕국의 역사(열왕기 상 12장 – 열왕기 하 17장)
이 부분은 북쪽 지파들이 북이스라엘의 왕국을 수립하는데서 시작하여(열왕기 상 12장),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그리고 이 기간을 결론지어 주는 역사가의 메시지(교훈)로 끝이 난다(열.하 17장). 여기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 즉 ‘왕들에게 속한 문제’와 ‘예언자들에게 속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 당시 예언자들은 정치 및 왕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1) 諸王들
여로보암을 북쪽지파가 세켐에서 왕으로 추대하는 이야기(열․상 12장-14,20)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베델과 단에 모셨다. 그러나 그는 우상숭배라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야훼”를 금송아지로 나타내어 오히려 야훼를 섬기려고 했다. 그러나 신명기계 역사가의 눈에는 이것이 우상숭배였고, 파멸의 이유로 보였다(열․하 17,7-23).
남북 왕조들의 명단 : 열 上.下의 여러부분에 산재되어 나타난다.
A. 신명기계 역사가는 이스라엘과 유다왕에 관한 기록을 남길 때는 다음과 같은 양식을 지닌다.
①유다왕(이스라엘 왕) 000 몇년에, 유다왕 000 가 다스리기 시작했다.(항상)
②「유다」 – 왕의 나이, 재임기간,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왕명
「이스라엘」 – 왕의 재임기간, 수도의 위치
③정형화된 양식
「유다」 – 선조 다윗과 비교 평가
「이스라엘」 – “그는 야훼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하였고,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려 여로보암과 그의 죄를 따라 걸었다.”
④“000의 나머지 행적도 유다(이스라엘)의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⑤“그는 선조들과 함께 잠들었고 000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왕에 대한 이런 묘사에서 두들어진 한 가지 현상 : 경신례에 대한 올바른 지침을 주고 이것을 올바로 행한 왕은 존경받는 왕으로 추대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조의 경우 왕조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한 반면 남조는 멸망때까지 하나의 왕조를 유지했다.
B. 「북조의 두드러진 왕」
①오므리(열․상 16,15-28) : 수도를 사마리아로 천도 (세켐에서)
②아합(열․상 16,29- ) : 오므리의 子. 우상숭배자라기 보다 야훼숭배자로 봄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두로의 공주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이방신숭배를 묵인한다. 그리고 아합왕과 엘리야가 함께 나타나며 정치적으로 아합왕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③예후(열․하 9-10장) : 쿠테타 일으킴. 이 쿠테타는 야훼의 이름을 내건 유혈혁명으로서 아합 전가족이 전멸되었다.
④여로보암2세(열․하 14,23- ) : 예후의 손자. 이스라엘은 또 하나의 번영기 맞음. 옛 국경 되찾았다. 그러나 이 왕조가 갑자기 쇠퇴하여 마지막 왕인 호세아왕 때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었다 (열․하 17). 앗시리아 사르곤2세에 의해 사마리아 점령되고, 백성들은 앗시리아로 끌려감.
C. 「남조의 유명한 왕」
①여호사밧(열.상 22장) :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동맹을 맺음.
②아하지야 왕 : 이스라엘의 여호람과 동맹을 맺음. 그러나 예후는 이스라엘의 왕 여호람과 유다의 왕 아하지야를 죽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열.하 9장). 그러자 아하지야의 어머니 아달리야(아합왕의 딸)가 유다의 왕권 쟁취. 이 때 아하지야의 외동 아들 요아스는 난을 피하였다가 7살이 되었을 때 왕위에 올랐다(열.하 11장).
③아하즈(열․하 16-17장) : 시로․에프라임 전쟁 발발.
아람(시리아 왕국)과 이스라엘이 동맹관계 맺고 유다로 하여금 반앗시리아 동맹 맺으며 앗시리아에 대해 반기를 들자고 했으나 아하즈가 듣지 않자 발발하게 된 전쟁. 즉 시리아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737-732. 그는 선왕인 브가히야738-737의 부관이었는데 브가히야를 죽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음)가 동맹 맺어 유다왕 아하즈를 치려고 했던 전쟁이다. 이 전쟁은 BC 734년-733년에 있었다. 전쟁 동기 : 앗시리아를 거슬려 반기를 들자는 두 동맹국 왕들의 제휴를 아하즈가 거절했기 때문에. 이 두 왕은 아하즈의 반대파 중 자기들 맘에 드는 인물인 벤 타부엘이라는 인물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실패. 왜냐하면 앗시리아에 반대하여 독립하려 했던 열망은 앗시리아왕에게 미움받고 있던 터였고 그 또한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두 동맹국왕과 앗시리아왕 사이에 잦은 전쟁 있었다. 가자 지역과 바다에 이르는 장소 : 전쟁터. 이 어려운 시기에 연합군 제휴를 아하즈가 거절했고 두 동맹국왕이 예루살렘 포위하여 쳐들어 온다. 이에 아하즈는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조공과 사절단을 앗시리아에 보낸다(열.하 16,7-9). 그러자 앗시리아왕은 시리아와 이스라엘 군대를 격파하기위해 자신의 군대를 예루살렘에 파견. 결국 BC 732년 앗시리아왕 디를랏 빌레셋에 의해서 갈릴래아 지방은 앗시리아의 므기또주에 예속되고, 트란스요르단지방은 길르앗주에 예속된다. 그래서 BC 732년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가 함락되자 시로․에프라임 전쟁은 종료된다.
2) 예언자들 : 신명기계 역사가의 정신과 부합하는 예언자들
①베델의 하느님의 사람이야기(12,21-24), 유다의 하느님의 사람에 관한 이야기(13장), 실로의 아히야 이야기(14,1-18), 예후이야기(16,1-4)
②엘리야와 엘리사(열왕상 17-열왕하 9) : 엘리야와 엘리사를 후기 문서예언자들과 구별하려는 의도가 편집자들에게 있었다. 그래서 따로 전한다.
– 엘리야 설화(열왕상 17-19;21장)
특히 사렙다 과부이야기등 엘리야의 활동은 하느님의 사람의 일반 민중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또 국가 운명이 걸린 가르멜산의 대결(18,20-40), 이세벨로부터의 도피(19,1-8),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을 요구한 신의 명령(19,9-18)등도 이 설화에서 보여준다.
– 엘리야-엘리사설화(열왕하 1-9장)
특히 「나아만의 설화」 : 나아만은 자기를 고쳐 주신 하느님과 연결을 맺기 위해 그 땅의 흙을 자기 땅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그 시대의 神.信仰을 나타내는 탁월한 상징이다. 엘리사는 가끔 예언자 집단의 모임에 나타난다. 그들은 후대 성전 예언자라고 불리는 祭儀예언자-주로 경신례와 관계된 예언자-였다. 이들은 백성들을 위한 중재기도를 바쳤고, 야훼의 대변자 역할을 했고, 봉헌물 가납의 여부를 알려 주었다.
라) 바빌론 유배까지의 유다 역사(열왕하 18 – 25)
BC 586년-538년을 연장시켜 생각하자.
①히즈키야(18-20장)에 대한 기록 – 열왕기 작가는 히즈키야를 훌륭한 통치자로 소개 묘사. 북쪽 이스라엘 멸망후 유일한 왕조 유다에서는 히즈키야와 요시아 때 번성기를 맞는다. 히즈키야는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던 산당을 정화시켰고, 팔레스틴 사람들을 격파시켰으며, 예루살렘이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에 의해 포위당할 때 예언자 이사야에게 중재기도를 청했고, 이에 의해 놀라운 구원 체험을 하게 된다.
②므낫세와 아몬왕(21장) – 악한 통치자
③요시아왕이 죽고 난 후 여호야김, 여호야킨, 시드키야가 왕위계승을 하였다. 예루살렘 1,2차 함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1-3차에 걸친 유배 생활을 기술한다(22-25장).
이사야 시대부터 유다 왕국은 앗시리아에 속하게 됨. 유다는 여러차례에 걸쳐 독립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앗시리아의 마지막 왕 앗수르바니발 치세 말기에 이 해방운동은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요시아는 옛 북조 이스라엘 영토 가운데에 일부를 탈환하고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의 책을 기초로 하여 경신례 개혁을 포함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요시아는 에집트왕 느고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에집트왕 느고는 신생 바빌론과 신생국가였던 메데의 출현 저지를 위해 발버둥치던 아시리아 왕이 허약해진 틈을 타서 옛날에 빼앗긴 아시리아 땅을 다시 되찾기 위해 나서고 있었다. 느고왕과 요시아왕이 므기또에서 전투하였는데, 요시아왕이 패배하였다. 따라서 그의 아들 여호아즈가 3개월 동안 유다를 통치하다가 에집트로 끌려가 거기서 죽는다(열왕 후 23.34) 그러자 요시아의 다른 아들 여호야킴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시기는 에집트에 예속된 시기이다.
606년 앗시리아를 정복한 바빌론왕 느브갓네살이 그 당시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의 종주국이었던 에집트와 전쟁하여, 가르그미스라는 곳에서 바빌론왕은 에집트왕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따라서 에집트의 속국이었던 유다는 다시 바빌론에 예속되어 조공을 바쳐야만 했다. 바빌론왕 느브갓네살은 에집트 정복까지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꿈을 실현 못하고 여러 이유로 601년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바빌론왕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모습을 보고 여호야킴은 이 후퇴를 오판하였다. 바빌론왕은 군대를 재정비하여, 오판하고 조공바치기를 마다하는 여호야킴왕을 공격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유다왕 여호야킴은 예루살렘이 포위당했을 때, 성안에서 사망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들 여호야킨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여호야킨은 3개월간 통치하다가 포위하고 있는 바빌론왕에게 항복하고, 그 어머니, 왕비들, 내시 및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 예루살렘 시민, 군인 1만명정도의 인원이 포로로 끌려갔다. 이 때 많은 보화․재화도 약탈(597년 1차 유배) 당했다. 관례에 따라 바빌론왕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왕으로 내세웠다 – 여호야킨의 삼촌이었던 시드키야(여호야킴의 동생). 이 1차 유배로 많은 사람이 바빌론으로 끌려가자 유다백성 중 일부는 바빌론에서 유배생활하고 일부는 유다 땅에서 생활하였다.
대부분 사람은 이 유배 상황이 오래 지속되지 않고 빨리 귀환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이런 희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레미야는 이런 환상에서 깨어나기를 공고한다. 그리고 에제키엘 역시 바빌론에서 빨리 귀환될 환상에서 깨어나기를 공고한다 → 예레미야서 27장 – 유배지에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
이런 상황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친에집트 세력들은 바빌론 왕국에 굴복해야 한다는 예레미야의 충고를 저버리고 바빌론에 조공을 거부하자 바빌론왕 느브갓네살이 다시 예루살렘을 침공한다. 조공을 거부했던 시드키야는 눈이 뽑혀 바빌론으로 끌려가 죽음을 맞는다. 이렇게 예루살렘은 바빌론왕에 의해 완전히 함락되어 독립국가로서의 체면 등 모든 것을 상실하고 바빌론 주에 편입된다. 도성, 성전이 불태워졌고, 중요 직책 인물들이 2차 유배의 길에 오름.
바빌론왕은 자기 왕에 드는 사람중 하나인 게달리아를 유다 총독으로 내세우고 떠난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그에게 반기를 들어 그를 살해하고 바빌론왕의 보복이 두려워 에집트로 도망(587년 7, 8월)한다. 이때 예레미야도 친에집트파 사람들에 의해 함께 끌려가 에집트에서 죽음.
582-581년 사이의 3차 유배로 많은 시민들이 끌려간다 – 열왕 후 24장 – 바빌론으로 유배간 여호야킨이 어떻게 감옥에서 나와서 바빌론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 전한다 → 여호야킨의 연대 사용 → 예루살렘 왕으로 군림한 시드키야는 섭정인에 불과하였고 수배중에 있던 여호야킨이 실제 왕이었던 것 같다. 이 사실은 에제키엘 예언서에도 나온다. 에제키엘은 자신이 활동한 연대를 여호야킨왕의 통치 연대를 기준으로 언급한다. 또한, 많은 유다인들도 이 왕에 대하여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유다의 역사는 1-3차 유배에 이르기까지 고통으로 마감하게 된다.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이 선택하신 선민의 역사는 이렇게 끝이 나야하는가?’,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아직 자비와 용서를 얻을 수 있는가?’ 하고 질문하게 되었다. 이에 유배지에 같이 갔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용서와 구원을 강조한다. 그중에서도 제 2 이사야의 메시지가 여기에 부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