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경전
헬레니즘 시대의 유다의 정치적 상황(성서연대기 참조)
신약에 가까운 시기, 묵시문학이 왕성하던 시기에 제 2경전이 쓰여짐.
유다민족에게 있어서 유배시기는 혼란과 좌절 그리고 탐색의 시기였다. 유배라는 악몽에서 벗어나 성전중심의 새로운 공동체 수립과 생존의 몸부림이 있음.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이 끝난 이후 (정복 전쟁기간 기원전 332-323년) 지중해 지역의 판도가 새롭게 재편되었고 이러한 상황이 한동안 지속되게 된다. 알렉산더는 정복하는 곳마다 공통된 문화(희랍문화)에 기초한 세계제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리스화(Hellenization-헬레니즘화)정책을 펼쳤다. 즉, 피정복민에게 희랍의 것을 강요하였다.
BC 323 알렉산더 요절로 정복지를 차지하기 위해 알렉산더의 부하들,후계자들 간에 싸움이 벌어짐.
BC 301 부하들 간의 전쟁이 종료된 후 알렉산더 제국은 4개로 분할되었다. 이중 팔레스티나에 영향을 준 왕조는 에집트와 팔레스티나 남부를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320-200 팔레스티나 점령)와 시리아, 페르시아에서 페니키아 지역을 지배한 셀류코스 왕조(200-140년경 팔레스티나 점령)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알렉산더의 Hellenization정책을 실제로 추구하지 않았고 팔레스티나에 종교적인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셀류코스 왕조와의 대결에서 져서 BC 198년에 팔레스티나의 통치권을 셀류코스 왕조에 넘겼다. 이러한 점령상태에서 팔레스티나의 경제적 피폐는 심각하였다. 에집트에서 팔레스티나에 대해서 세금을 걷지 않을 정도로 경제적 피폐는 심각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많은 철학사상의 유입으로 도전받고 시험받는 시기였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철학사상이 이 당시에 유포되었다. 이 시기에 페르시아 사상이나 사고방식과 팔레스티나 사고 사이에 어느 정도의 토착화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풍습이 유입되어 제한적이나마 수용되었다. 여러가지 어려움을 피해 많은 유다인들이 팔레스티나를 떠나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등 대도시로 이주하였다. 이들 디아스포라 유대인(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그 지역의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많은 지역으로 흩어져 살았지만 여전히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여기에서 점차로 히브리어를 모르는 히브리인들이 증가하였다. 이들을 위해 BC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어로 된 토라를 번역하여 [70인역]이 발간되었다.
BC 175년 안티오쿠스 4세는 대사제 오니아스 3세의 동생 요수아에게 뇌물을 받고 오니아스 3세를 해임하고 요수아를 대사제로 임명한다. 요수아는 <야손>으로 개명한다. 이 당시 대사제는 종교, 정치적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대사제라는 직책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였다. 요수아는 의복, 예절 등 희랍문화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독려하고 추진하였다. BC 171년 그의 직책은 비싼 값에 팔려 메닐라우스(또는 메넬라우스)에게 넘어간다. 안티오쿠스 4세가 메닐라우스에게서 뇌물을 받고 그를 대사제로 임명하였다. 메닐라우스는 사제가문의 사람이었지만 그는 사제는 아니었다. 야손은 메닐라우스를 이기려고 안티오쿠스에게 원조를 요청하지만 안티오쿠스는 메닐라우스를 대사제직에 앉힌다. 대사제직을 둘러싼 이러한 분쟁이 계속되자 안티오쿠스 4세는 분쟁의 원인이 종교에 있다고 판단하여 종교금지를 명한다. 즉 안식일을 금지시키고, 토라의 소지를 금지시켰으며 안식일을 지낼 경우에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할례를 금지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제우스에게 봉헌하였으며, 제우스 신전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부정한 동물인 돼지를 봉헌한 사건도 일어났다. 이러한 때에 제우스에게 제사를 드릴 것을 강요하던 시리아 병사를 마타디아 노사제가 죽이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166년에 마타디아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망치’라는 뜻)가 자유를 위한 전쟁의 지휘권을 가지고 투쟁을 한다.
이 투쟁에 즉시 참여한 사람도 많지만 회의적 자세를 가지고 회피한 계층이 더 많다. 회피한 계층 중에는 하시딤(경건주의자)집단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종교자유는 원했지만 싸움에 가담하는 것은 주저하였다.
그러나 안식일에 동굴에 숨어 있던 수많은 하시딤을 찾아내서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안식일이었기에 이들은 저항하지 않았다.이후에 하시딤들은 투쟁에 가담하게 된다. BC 165 또는 164년에 유다는 시리아 군대와의 투쟁에서 성공하여 승리를 쟁취한다.
유다이즘에 반대하는 법을 폐지하게 되고 그해 12월에 성전을 축성하여 봉헌한다. 이 기념비적인 사건은 현재까지 하누카(촛불)축제로 기념하고 있다. 종교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 종교의 자유를 얻었기에 하시딤은 저항운동에서 이탈하였고 유다 마카베오는 계속적으로 정치적 자유와 권력을 얻기 위해 투쟁하였다. 그리하여 BC 140년 어느 정도 정치적 자유(독립)를 얻어내고 하시모니아 왕조가 시작된다. 이 왕조는 사제직과 왕직을 겸비하고 있었다.
이 왕조는 BC 63년까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BC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이곳을 점령하고 이후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헤로데(로마인이 아니라 에돔사람이었다)가 이 식민지를 통치하였다. BC 4년 헤로데가 죽자 그의 3명의 아들 나누어준다(AD 6년) 이후 유다는 로마총독의 지배를 받는 로마의 속주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