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티나의 생업 – 목축업, 농업,상업

 

팔레스티나의 생업


가. 목축업




  히브리인들의 조상은 반유목민(Semi-nomad)이었다. 그들은 약간의 살림살이를 나귀에 싣고 가축 EP를 몰고서 사막이나 광야의 주변을 떠돌아다녔다. 창세기 저자는 히브리인들의 원조인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어떻게 우르 지방의 찬란한 도시 문명을 떠나서 가나안 땅을 전전하며 반유목민 생활을 하였는지 전해 준다(창세 12-24장). 반유목민들 가운데는 낙타를 몰고 다니던 부족도 있었으나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반유목민과 유목민의 차이는, 후자가 사막을 삶의 근거지로 삼고 사막 깊숙이 찾아 들어가는 데 반하여(베두인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전자는 사막의 언저리를 방황하다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지 정착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기원전 13세기, 마침내 히브리인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반유목민의 생활을 청산한다. 그러나 유목 생활의 여러 요소는 히브리인들의 사고와 종교 의식(儀式)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유목 생활은 철저하게 단순하고 검소하다. 누구나 나귀에 실을 수 있을 만큼만 재물을 소유하였다. 낭비와 사치는 금물이며, 누구나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또한 공동체의 단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동의 적 앞에서 분열과 의견대립은 부족을 파멸로 이끈다. 가축 떼를 몰고 함께 다니는 동안 모든 사람이 똑같은 고통을 겪게 되며, 특권계층이란 용납될 수 없다. 조언자들의 도움을 받을망정 명령권자는 단 한 사람뿐이며, 공동체는 그의 말에 절대 목종해야 한다. 한편 지도자는 자기 부족을 위해 가장 알맞고 현실적인 통치구조를 세워 운영할 책임이 있다.


  히브리인들이 반유목민의 생활을 청산한고 정착농민이 되었을 때, 이러한 생활방식도 바뀌게 된다. 그렇지만 농경 생활의 폐단 앞에서 그들은 광야에서의 유목 생활에 대한 동경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예언자들은 광야에서 목동들이 입던 짐승가죽 옷을 즐겨 입었고(2열왕 1,8; 즈가 13,4), 이러한 전통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생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마태 3,4).


  예언자들은 소수 특권측이 누렸던 종경 생활의 안락과 사치를 고발하고 거부하였다. “불행하여라, 빈터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해 가고 밭에 밭을 늘려 가는 자들! 너희만 이 땅 한가운데에서 살려 하는구나”(이사 5,8). “그들을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 양을 잡아먹고 우리에서 가려 낸 송아지를 잡아먹는다. 수금 소리에 따라 되잖은 노래를 불러대고 다윗이나 된 듯이 악기들을 만들어 낸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 마시고 최고급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아모 6,4-7). 그들의 가르침에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아무도 노예나 임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유목 생활에서 배운 평등사상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레위 25,39-41; 판관 9,6-21; 1사무 8,10-22). ‘레갑인’들은 광야에서의 금주 규범을 바빌로니아 유배 생활에까지 끌어들여 포도주 마시기를 거부한다(예레 35장).


  특히 가나안 진입 전. 시나이 반도에서의 유목 생활은 이스라엘의 신앙관 형성에 결정적 구실을 한다. 광야의 방랑 시절은 히브리인들에게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들과 주 하느님 사이의 관계가 가까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너는 이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를 낮추시고, 네가 그 분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의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를 시험하신 것이다”(신명 8,2). 신명기의 저자는 광야에서 방황하던 시절의 갖가지 어려움을 늘어놓고 동시에 하느님의 따뜻하고 자상한 돌보심을 떠올리게 한다(신명 8,2-5).


  이스라엘의 순수한 야훼 신앙은 이렇듯 광야 체험에 뿌리를 내린다. 반면에, 노경 생활의 안락함과 사치스러움, 대지주와 소작인들 사이의 빈부차, 왕족과 귀족 특권층의 황포는 이스라엘의 단결을 해쳤고, 유다 민족의 종교 생활과 정신문화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하느님의 은덕을 저버리고 자만심에 빠져 “나의 능력과 내 손의 힘이 나에게 이 재산을 만들어 주었다”(신명 8,17)고 주장하는 유목민의 후예들에게 예언자들은 결국 뿌리찾기 운동을 벌인 셈이다.




나. 농업




  성서에 목축업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등장하긴 하지만, 히브리인들의 일상 생활은 주로 농업과 인연을 맺는다. 그들의 축제는 수확과 관련되고, 여러 가지 법령도 농사일과 깊이 연결된다. 그들의 비유와 상징도 많은 경우 농업에서 유래한다.


  팔레스티나는 경작하기에 알맞은 땅이 결코 아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유목민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탈출 13,5)이었겠으나, 농업을 본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척박한 땅에 지나지 않는다. 농토의 대부분이 가파르고 우기에는 산사태가 잦았다. 온통 자갈로 뒤덮인 땅에 씨를 뿌리기 위해 농부들을 어깨가 빠지고 허리가 무너져 내려앉는 노동을 참아 내야만 했다. 아담이 죄를 지은 뒤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에 이 어려운 경작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이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7-19). 팔fp스티나에서 가장 좋은 밀 경작지로 꼽히는 곳은 요르단 강물을 끌어들일 수 있는 요르단 계곡을 비롯하여, 불레셋 평야, 에스드렐론 평야, 바산 평야, 모압 평야 등이다. 그러나 빵이 주식인 그들에게는 경작하기에 알맞은 땅만을 골라 밀 재배를 할 처지가 못 되었다. 심지어 산비탈에도 층계식 밭을 만들어 밀을 재배하였다.


  이곳의 농사는 온전히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일년 중 다섯 달은 틀림없이 가뭄이 계속되지만, 우기라고 해서 풍족한 비가 반드시 내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사시사철 밭에 필요한 물을 대기 위하여 넓고 깊은 저수 동굴과 수로들을 만들어야 했다. 유다 임금 우찌야는 “평원지대와 평야에 많은 가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광야에 탑들을 세우고 저수 동굴을 많이 팠다. 산악 지방과 기름진 땅에는 농부들과 포도밭 일꾼들을 두었다. 그는 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2역대 26,10).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 유다 임금 히즈키야는 샘과 수로를 잘 이용하여 아시리아인들의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히즈키야는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략할 것을 예상하여 신하들과 미리 의논한 끝에 성 밖에 있는 샘들을 모두 메워 버리고 들판 한가운데에 흐르는 물줄기를 막아 버렸다(2역대 32,3-4). 그러나 자신들을 위해서는 기혼샘 위쪽 물줄기를 막아 땅굴을 파서 그 물을 다윗성 서쪽으로 돌려 성 안으로 감쪽같이 끌어들였다(2역대 32,30). 이 비밀 수로는 오늘날 유적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처음 밭갈이는 가을비가 내릴 때 곧바로 이루어지는데, 여름내 가뭄으로 굳어진 땅을 원시적인 괭이나 쟁기로 파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쇠를 사용하기 전 가장 좋은 목제 농기구는 떡갈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다가 쇠를 자유롭게 다루게 된 다윗 시대에는 단단하고 오래 쓸 수 있는 철제 농기구가 생겨나면서 밭갈이가 한결 수월해졌다. 먼저 밭을 갈고 그 다음에 씨를 뿌리기도 하지만, 보통은 씨를 뿌리고 밭을 간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농부가 씨를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속에 뿌린다는 상식 밖의 이야기는 팔레스티나의 이런 영농법을 모르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마르 4,1-9; 병행: 마태 13,1-9; 루가 8,4-8).


  다년생 식물로서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리기 때문에 여름철 가뭄을 이겨 낼 수 있는 포도와 무화과와 올리브는 8월과 9월에 수확한다. 특히 포도와 올리브는 밀과 더불어 팔레스티나의 3대 작물에 속한다. 포도와 수박을 비롯한 여름철 과일과 채소는 건조한 기후를 이겨 내야 하는 이 지역 주민들에게 수분을 제공하는 식품이다. 그리고 건포도와 말린 무화과는 겨울철 식품으로도 사용된다. 마침내 모든 일거리를 끝낸 농부들은 큰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초막집에서 먹고 마시며 가을비가 내리기까지 잠시 휴식을 즐긴다. 이스라엘의 중요한 축제인 초막절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가뭄이나 메뚜기 떼, 우박 따위의 재해를 만나 한해의 농사를 망쳤을 때는, 수고한 보람도 없이 농부들은 굶주림에 맞닥뜨리게 된다. 특히 쌓아둔 재산이 있을 리 업는 소작인들이 농사에 실패하면 그들과 가족들은 빚더미 위에 올라앉을 수밖에 없다. 빚을 못 얻거나 못 갚을 경우에는 자식들과 아내와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종으로 팔아야 한다. “셈을 밝히기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왔다. 그에게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고 하였다”(마태 18,24-25). 공관복음의 비유에서는 이런 빚쟁이와 빚진 자의 사정이 죄인들과 하느님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 자주 이용된다.


  반면에, 한 해의 수확이 성공적으로 끝났을 때 농부들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현재와 가까운 미래의 행복이 보장되고 이어지는 한 해 동안은 적어도 굶주림에서 완전히 해방되기 때문이다. 보리와 밀을 풍부하게 수확한 뒤, 사람들은 주님께 감사의 제사를 바치면서 실컷 먹고 마시고 신명나게 춤추며 노래한다.


  다른 한편으로 히브리 농부들이 얼마나 쉽게 주변 민족들의 풍산신 숭배에 빠져들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고대 근동인들은 풍산신전에서 거행하는 제사로 신들을 움직여 동식물의 번식과 수확을 결정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가나안 주민들은 온갖 잡다한 신상들을 세워 놓고 그 앞에서 신전의 창녀들과 성행위를 하면서 풍년과 다산을 기원하였다. 이렇듯 요란하고 실감나는 그들의 제사는, 구체적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어떤 우상도 거부하며 보이지 않는 한 분 하느님만을 섬기는 이스라엘인들을 곧잘 말려들게 하였다.




다. 상업




  옛날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도시국가에서는 거대한 지구라트와 성전 건물이 시장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성서 시대의 팔레스티나에서는 작은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가 상업의 중심지였다. 가게마다 특정한 물품을 취급하였다. 농산물 가게는 물론 금은방, 목공예점, 침구류 가게, 대장간 등이 한길 가에 늘어서서 오가는 사람의 발길을 붙들었다. 이런 시장 거리는 상인과 고객에게 모두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상인들은 특정한 물건이 동이 났을 때 쉽게 옆 가게에서 구해다 팔 수 있었고, 고객들은 가격을 비교하면서 흥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경우 가게 주인들이 직접 주문을 받고 물건을 만들어 팔았다.


  앞에서 말한 대로 팔레스티나는 서쪽으로는 유럽, 북쪽과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남쪽으로는 이집트를 이어 주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성서 시대에 팔레스티나는 농산물과 금속 제품을 수출하거나 수입하였다. 북쪽의 페니키아에는 밀, 올리브 기름, 포도주를 수출하였고, 남쪽 이집트에도 올리브와 포도주를 수출하였다. 동쪽 사막지대의 주민들도 다윗 시대  이래 팔레스티나의 농산물을 수입해 갔다. 불레셋인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철은 다윗이 시리아를 정복한 다음부터 그곳에서 가져다 이집트에 팔았다. 솔로몬은 홍해를 이용하여 아라비아와 아프리카와도 무역을 시도하였다. 그는 팔레스티나의 농산물과 광물을 수출하는 대신 그 곳의 향료와 조미료, 금을 수입하여 이집트와 지중해를 거쳐 유럽에 되팔았다. 양 떼에서 얻는 양털과 모직은 주로 모압에 수출하였다. 이스라엘인들은 여러 가지 수공업 제품들을 페니키아와 이집트에서 수입하였다. 무역은 특정한 지역의 물품을 수입하고 수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같은 물품이라도 지역에 따라 가격 차이가 크게 날 때에는 싼 곳에서 사서 비싼 곳으로 팔아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 시대에 밀의 가격이 팔레스티나에서는 로마보다 반 값이었던 반면, 이집트보다는 두 배나 비쌌다.


  원시 사회에서는 상업이 단순한 물물교환이었지만, 세월이 지나 물건의 양과 종류가 많아지면서 물건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화폐 제도가 생겨났다. 주조 화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구약 시대 말기 무렵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덩어리나 고리나 막대 형태의 금과 은을 무게를 달아 화폐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처음에 무게를 재던 도량형의 단위가 나중에 화폐 단위로 굳어 졌다. 특히 무게를 달아 물건과 교환하는 은의 유통은 주조 화폐와 더불어 예수님 당시에도 그대로 유효하였다. 투자와 재산축적의 방법으로는 무게는 덜 나가지만 값어치가 높은 각종 보석이 이용되었다.


  동전은 알렉산더 대왕 때부터 널리 쓰이기 시작하였다. 신약 시대는 세 가지 화폐 체계, 로마 화폐와 그리스 화폐(안티오키아와 띠로에서 주조)와 유다 화폐(아마도 가이사리아에서 주조)가 생겨났다. 로마와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에는 황제 직속의 화폐 주조소가 있었고, 그 밖의 여러 도시에도 주조소가 있어서 다양한 동전들을 찍어 냈다. 스승을 팔아넘긴 대가로 가리옷 사람 유다가 받은 삼십 은전은 아마도 띠로나 안티오키아에서 주조된 은전이었을 것이다. 삼십 은전은 120데나리온,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으니 넉달치 임금에 해당한다. 탈출 21,32에 따르면 이 돈은 종이 사고로 죽었을 때 지불해야 하는 몸값 또는 핏값이었다.


  주조소에서 찍어내는 동전들의 크기(8-20밀리미터)와 가치는 제각각이어서 이를 평가하고 조절해 주는 환전상들이 필요하였다. 또 로마 제국에 세금을 낼 때에는 로마 화폐나 그리스 화폐 어느 것이나 사용할 수 있지만, 성전세를 내거나 성전에서 바쳐질 제물을 살 때에는 유다 화폐나 순도가 높다는 이유에서 띠로 화폐만 사용해야 했다. 성전세는 느헤미야 시대에는 3분의 1세겔이었고(느헤 10,32-33) 예수님 당시에는 반세겔 또는 디드라크마(두 데나리온)였던 것 같다(마태 17,24; 참조; 탈출 30,13). 요세푸스에 따르면 스무 살 이상의 모든 유다인은 해마다 팔레스티나 안에서건 밖에서건 이 성전세를 낼 의무가 있었다. 미쉬나의 기록에는 해방절 직전까지 20일 동안 성전 경내에 와서 성전세를 바쳐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모든 유다인에게 이 성전세를 인두세(人頭稅)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파괴된 성전에 바치는 대신 로마에 바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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