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장
2장 1절은 5~9절과 이어진다.
2장 2~4절은 신명기 역사학자가 후계자에게 주는 교훈이다. 여기에서 신명기 역사학자의 말투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의 길을 따라 걷고”(3절)라는 표현은 열왕기에서 왕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항상 나타난다(그들은 야훼의 길을 걷지 않았다). 여기에 나오는 길, 모세의 법, 규정, 명령 등은 신명기에 계속 나오는 내용이다.
4절의 “온전한 마음과 저희 온 영신으로 나의 앞에서 걸으며 저희 길을 지키면” 이라는 표현은 신명기 5, 6장에서 볼 수 있다. 또 “후손이 끊이지 않으리라”는 표현의 삽입 바탕이 된 것은 2사무엘 7장으로 신명기적 이념을 나타낸다.
2~4절의 기능은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전승한 것처럼, 신명기계 역사학자가 계승자가 지녀야 할 하느님에 대한 자세, 의무를 피력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공”(3절)이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4절)으로 여기에 진정한 계승의 의미가 있다.
5~9절의 내용은 반대자 처리에 대한 다윗의 유언이다. 특색 있는 것은 “지혜”(6절,9절)에 대한 표현으로, 이는 3장을 준비하고 있다.
2장에 대해서는 신명기 역사학파의 이야기가 초반에 많이 들어 있다.
2~4절 : 신명기 역사학자의 표현이다. 그 이유는 여호 1,8: 22,3: 신명 11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신명기 역사학자의 이야기라는 것은 항상 신명기에 근거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3절에 “하느님의 길을 따라 걸으라”는 신명 8,6.10.12절에 “그의 계명을 지켜라” 신명 4,40에 나온다.
4절에 “그렇게 따르면 성공할 것이다” 신명 29,8; 여호 1,7; 온전한 마음과 정신으로 너 답게 걸으면, 신명 29,49 : “너의 이스라엘 왕좌에 앉을 자가 끊이지 않으리라”, 2사무 7,12에 나온다.
2~4절은 신명기에서 볼 수 있는 교훈을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야기했다. 따라서 신명기 역사학자의 문체를 엿볼 수 있다.
문제는 5~9절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빌트바인은 이것을 13절로 이어져서 다윗의 계승사의 문헌으로 본다.
마틴 롯은 5~9절이 2~4 보다 먼저 있었다고 보지만 계승사 문헌은 아니라고 본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어떻게 정적을 처단할 것인가 이야기함으로써 솔로몬으로 하여금 정치적인 짐을 짓지 않게 하기 위하여 솔로몬을 지지하는 사람이 해석한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는 다윗의 계승사와는 상관이 없다고 본다.
이러한 견해는 다윗의 계승사가 어디서 끝났는가라는 문제로 이어지는데, 마틴 롯은 2사무 6장부터 시작한 다윗의 계승사가 2,12에서 끝나고 절정을 이룬다는 입장이고 레오나르드 로스트는 2,12 이하에 서술된 아도니야와 솔로몬의 긴장이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도 계승사에 이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13절 이하를 보면 그 이야기가 앞과 흡사하고, 아도니야,에비아달,시므이 등의 죽음이 너무 과장되고 길다. 따라서 우리는 마틴 롯의 의견에 따라 2,12로 다윗의 계승사가 끝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5절 이하의 요압,아브넬,바르질래,시므이 등이 나오는데 아도니야는 안나온다. 따라서 아도니야는 따로 서술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빌트바인이나 레오나르드 로스트는 2,13이 1,53을 이어간다고 본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1,53을 이어가지만 1,53은 아도니야에게 솔로몬이 자비를 베푸는 것을 보는데 2,13 이하는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죽이려는 게 나온다. 그러나 죽을 이유가 없는 데도 죽이려고 한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는 이어지는 것 같지만 그 경향은 꼭 그렇지는 않다.
2,27은 신명기 역사학자의 예언자적 가필 DIRT에 해당된다. 즉 앞에서 이야기 한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빌트바인의 의견도 그렇다.
5~9절을 살펴보면 2~4절과는 완전히 구분되는데 그 이유는 5~9절이 29절 뒤로 이어지는데 5절에서는 아브넬과 아마사에게 잘못했기 때문에 다윗이 처단하라고 했는데 2,28 이하에서는 요압이 죽는 이유가 아도니야를 지지했기 때문으로 나온다. 2,31에 보면 피난소에 은신할 수 있는 권리가 상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관계가 있으면서도 내용이 조금씩 다름을 알 수 있다.
또한 2,8 시므이에게서도 2사무 16,5~14에 시므이가 다윗에게 욕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2,36절에 보면 예루살렘 거주에 대해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 대해 빌트바인은 1,8~9 나오는 시므이, 레이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시므이, 레이가 한편으로 솔로몬이나 다윗의 편을 들었는데, 2,36 이하에서는 시므이가 죽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따라서 1,8~9의 시므이는 다른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보다는 시므이가 2사무 2,16에서 다윗을 저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정적을 그냥두었다가 이제 솔로몬에게 처단을 부탁하는 것으로 보아야 옳다.
따라서 마틴 롯은 빌트바인 처럼 앞의 시므이가 모르는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다고 한다. 마틴 롯의 이야기가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신명기 역사학자는 왕정을 실패한 역사로 보기 때문이다.
2,13~25을 보면 아도니야의 죄에 대해서 말하면서 1,2~4에서 언급한 수넴 여자에 대해 나오는데, 마틴 롯에 의하면 이 이야기가 1장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마틴 롯은 1,2~4까지도 사실은 2,13~25절을 넣은 사람의 작품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소실을 후손이 데리고 사는 것은 다른 곳에도 나오기 때문이다. 사무 하 2장이하를 보면 압넬이 이슈바엘에게 사울의 소실을 데리고 산다고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나온다. 그런 것을 보면 1,2~4가 없다고 보더라도 2,13~25가 문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6절과 9절에서 ‘지혜로운’이 나오는데 이는 3장의 솔로몬의 지혜로움을 준비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틴 롯은 5~9절이 계승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2,8 ‘시므이를 남겨 두고, 악담을 퍼부었다’는 2사무 16,5~4 칼로 죽이지 않겠다는 2사무 19,16~24에 나온다. 2,44를 보면 마틴 롯의 의견이 합당하게 되는데 이는 2장은 앞뒤를 맞춘 것 같다. 즉 어떤 일이 이루어졌음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26~27절도 후대에 들어간 것 같다. 27절 때문에 10~11절은 열왕기에 나오는 왕에 대한 결론으로 사용된다. 즉 왕이 인제 시작하고 얼마했고 마치고 하는 종결 부분인 것이다. 따라서 신명기 역사학자의 가필이 있는 것 같다.
문헌비평의 결론
먼저 크게 보아 2장은 1장과 함께 다윗의 계승사를 결론짓는 것이다. 그리고 신명기 역사학자의 신학적 경향이 많이 있다. 그 특성은 한편으로 솔로몬으로 하여금 다윗의 부탁을 이어가는 계승적인 것이 있고 또 하나는 정치적인 숙청을 솔로몬이 하지 않고 다윗 대에서 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5-9절을 보면 다윗의 상태에서는 1장에서 처럼 그럴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어떤 경향이 있다고 보는데 그것은 계승사로 썼다기 보다는 계승사 이후에 솔로몬으로 하여금 숙청을 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 정당성의 특성은 ‘지혜롭다’는 것과 아버지의 유언을 이행한다는 것을 가미해서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유언 뿐 아니라 죽기 전에 앞과는 달리 능력있는 사람으로 나온다. 따라서 계승사에서와는 달리 후대에 그러나 신명기 역사학자보다는 먼저 그러한 해석을 붙인 것이 아닌가하는 경향이 있다.
아도니야의 죽음은 계승사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솔로몬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부정적인 시각은 문헌비판적으로 보면 제2 이사야에 나타난 솔로몬의 역할하고는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5~9절에 나타나는 다윗의 유언을 이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더군다나 자격으로 나타나는 ‘지혜롭게’를 말함으로써 솔로몬을 부각시키는 뜻으로 나타난다. 즉 아도니다에 대한 숙청이 너무 부정적으로 나타나기에 5-9절로 다윗의 유언을 이행한다는 식으로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한다. 계승사에 나타난 솔로몬의 모습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문헌비판적으로 보면 전체 계승사 속에서 2장이 지니고 있는 문헌적인 역할은 그리 많지 않은데, 계승사의 제일 끝에 붙은 것은 신명기 역사학자의 재해석이 첨가된 5~9절이 아닌가 한다. 5~9절의 신학적 역할은 13절 이하에 나타난 솔로몬의 부정적인 행위를 정당화 시킨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신명기 역사학자는 이렇게 함으로써 계승사에 나타난 다윗의 모습이나 솔로몬과 아도니야의 갈등, 솔로몬의 정치적 억압을 통해서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2~4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왕권이 이어짐을 말하고 있다. 이는 사무 하 7장에 나타난 하느님의 약속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2~4절의 내용을 지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신명기 역사학파가 보기에는 왕권은 하느님께 대한 도전으로 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올바른 길을 제시하지만 그나마 지키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실패한 역사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문헌비판적으로 마틴 롯의 의견을 쫒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1~4절 ;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권한을 넘겨줄 때 하는 충고가 나온다.
2절 : ‘어른 노릇을 한다’는 여호수아 1,7절에 나오는데 ‘강해지고 어른 노릇을 하고’는 천주 야훼께서 지켜주시고 길을 제시하고 규정을 지키는 것이 바로 어른 노릇을 하는 것이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생각과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것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강해진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여호수아가 권한을 받을 때 auxtoritas(권위)의 위기가 있음을 말한다.(민수기 10장 참조)
3절 : ‘명령, 하느님의 가르치신 바‘는 신명기의 하느님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즉 토라의 다른 형태로 표현한 것으로 보면 된다. 사무엘 하 7장을 보면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가 나오는데 이것이 신학자들에 의하면 신명기 역사학자가 가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13,14을 보면 “나는 그 나라를 견고케 하겠다”
끝으로 “어른이 되는 것”은 제관계에 보면 신의 이름이 변천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어른이 되는 것은 신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숙은 신과의 어떤 관계인가를 말하고 그것은 신의 계명을 지켜야 하며 그러자면 그 계명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5~9 : 3가지 유언
여기에는 세가지 유언이 있는데 첫째로 요압은 사회 질서의 혼란을 야기한 사람으로 국정을 대신하고 질서를 바로 잡을 때 이런 부정의 역사는 반드시 제대로 잡아야한다는 것이다. 요압은 전쟁의 피를 평화시에 복수하고 무죄한 피를 자기 허리띠와 신발에 묻힌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우선 피를 흘리면 안된다는 것은 레위기와 창세기와 여러군데 나온다. 특별히 레위 20,9.11-13에 보면 피를 흘려서 잘못을 범하지 말아라는 것이 나온다. 다음에 잘못했을 때 죄라든지 벌이라든지 본인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판관 9,57; 1열왕 8,32; 에제 9,10에 나온다. 판관 9,24에서는 누가 죽었을 때 자기 탓이면 피가 그 사람에게 돌아 온다. 2사무 21,1에도 나온다. 따라서 누가 피를 흘리면 그에 상응하는 벌이 따라온다는 사상이 구약 전체에 나온다. 평화시 복수는 바로 그런 것이고 이것은 사회질서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번째 ‘바르질래에게 잘해주어라’라는 유언은 “그가 나에게 친근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이다”라는 이유을 밝히고 있다.
세번째는 시므이에 대해서는 ’지혜롭게‘ 처리할 것을 명한다. 그런데 9절과 5절을 비교하면 똑 같은 피에 대한 이야기인데 한쪽은(5절) 평화시에 피를 흘렸기 때문에 복수하라고 하고 다른 한쪽은(9절) 평화시에 처단한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다윗의 이중성이 엿보인다.
다음 6절의 ‘지혜롭게’의 모티브가 ‘백발로 평안히 셔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가 나오는데 9절에서도 나온다. 따라서 솔로몬의 지혜가 왕권을 견고케 하는데 쓰이는데 피의 복수는 이중적으로 쓰인다. 신명기 역사가가 사료를 수집하면서 다윗의 모습을 새롭게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상을 공시적으로 볼 때 2,3은 신명기 역사학자가 볼 때 후계자로서 해야 할 덕목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통시적으로 볼 때 다윗은 정치적으로 간악한 모습을 지녔다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신명기 역사학자는 2,3을 제시하고 다윗이 그렇게 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신명기 역사학자는 바로 실패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은 역사가 실패하지 않으려면 2~3절의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2절 ; ’견고케하다‘ 이것이 신명기 역사학자의 표현이다. 이것은 기능적으로 알아들어야 하는데 ‘견고케하다’는 1장에 나오는 왕권의 갈등이 해결됨을 말한다. “다윗 왕좌에 앉았다”는 “누가 왕좌에 앉을 것인지 알려 주십시오”라고 한 나단과 바세바의 물음이 결론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마틴 롯은 여기에 계승사가 끝났다고 보는 것이다.
13-46 절
13절 이하는 솔로몬이 얼마나 나쁜가를 볼 수 있는데 3,4 이하를 보면 솔로몬이 어떻게 지혜를 얻는가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3장의 지혜와 다른 모습을 볼 수가 있다. 3장의 ’지혜‘는 하느님의 뜻을 이어가는 기능을 갖는 것이고 앞의 ’지혜롭다‘는 정치적인 것이다. 따라서 2,5~9를 계승사에 넣지 말자는 것도 바로 이 이유다. 특별히 3,9을 보면 원문에는 “듣는 마음을 주시어”인데 3장은 이집트에서 왕권의 정당성을 백성들에게 제시할 때 사용한 문헌이다. 이는 실제 이야기가 아니다. 따라서 뒤집어 말하면 2,13 이하의 악독한 솔로몬이지만 그에 대한 정당성을 말하는 것이다. 2장에서는 다윗이 유언을 했고 1장에서는 계승하도록 결정했고 그렇지만 왕으로서의 합당성은 3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반대로 생각하면 당시 솔로몬의 왕권이 얼마나 위태로웠는가를 알 수 있다. 등극사를 볼 것 같으면 2사무 5장에는 다윗이 사울을 거슬러 정치 쿠데타를 한 것으로 나온다.
13-25 절 : 아도니아의 죽음
3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전제되는 것이 2,13 이하의 솔로몬의 잘못이다. 13절 이하의 주인공을 보면 아도니야,솔로몬의 어머니, 솔로몬이다. 그리고 수넴 여자 아비삭은 앞은 1장과 마찬가지로 수동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13~25를 구분하면 먼저, 아도니야와 바세바의 이야기와 다음으로 19절에서 솔로몬과 바세바와의 만남, 25절에서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여기에는 크게 두 장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3절을 보면 “그다음”이 나오는데 이것은 언제이냐 하면 얼마 지난 다음이 아닌가해서 후대에 붙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13절 : “너의 들어옴이 화평한고” 여기서 화평한고는 샬롬을 이야기하는데 문체로 보아서는 궁중에서의 언어이다. 이것은 너의 생활이 괜챦은가를 묻는 것이다. 샬롬은 평화라는 뜻인데 이는 전쟁의 반대로서 평화가 아니라 손상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13절의 “화평한고”는 단순히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암시성은 평안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끝에 “죽여야한다”가 나오는데 이것은 평안한 것이 평안하지 못하고 죽음을 나타낸다.
15절 이하; 아도니야의 왕권에 대한 생각과 다음에 바세바의 태도를 보면 “당신이 잘 아시는 바”는 인사성이 아니라 다음에 나오는 아도니냐의 말에 동의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의견 일치를 전제한다. 그것은 첫째, “왕위는 내것이었고” 그리고 “온 이스라엘 백성이 내가 임금이 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왕권의, 1장에서 나오는 음모를 이야기한다. “왕위가 옮꺼나 나의 형제의 것이 되었으니” 이것은 아도니아가 왕권을 인정하고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인정된 것이 불법임을 말한다. 더우기 아도니야는 “야훼가 인정하였으므로”라고 말함으로써 솔로몬의 왕권에 도전하려는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런데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고 청한다.
여기에 대하여 학자들은 두 가지의 의견이 있다.1)
먼저, 아도니야는 정말 왕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는 것과 앞에서 왕위에 대한 생각이 없음을 말했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라는 두 의견이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아도니야는 죽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두둔하려는 세력을 만들었다라는 견해가 더 올바르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1,49 이하를 보면 죽을 위험이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아도니야는 어쨌든 죽을 수 밖에 없기에 왕위에 대한 생각 보다는 자기를 지지할 세력을 만들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세바를 청한 것이다.
23~24절은 앞의 12절과 연관이 있는데 이를 신학적으로 다시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도이야의 청을 한편으로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다윗의 이름으로 단죄한다. 그래서 아도니야는 살려고 한 것이 오히려 죽음으로 몰고가는 역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솔로몬의 왕권은 야훼가 지켜주셨음을 신학적으로 이야기한다. 아도니야는 단순히 인간적인 청이었는데 반해 솔로몬이 보기에는 자신의 왕권에 대한 도전과 야훼께 대한 도전으로 보았다.
26~35 절 : 에비아달과 요압의 운명
다음은 사제 에비아달의 죽음이다. 1사무 2,30~36을 보면 사제 엘리의 집안이 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6절의 아나돗은 예레미야의 고향이고 사제를 죽이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라 귀향만 시킨 것이다. 죽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야훼의 궤를 짊어지고 다닌 점이고 따라서 결정 내용은 사제 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엘리 가문을 두고 하신 말씀이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계약의 궤를 맡는 것으로 한편으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아버지와 관계를 맺게 한다. 그래서 아도니아와 마찬가지로 신학적인 이유를 댄다. 즉, 이중구조를 볼 수 있는데 1장에 나타나는 정치적인 설명과 다름을 알 수 있는데 그래서 2,13 이하가 후대에 붙은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의 이유가 된다.
다음에 요압가 시므이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살펴보아라. 그리 중요치 않다. 33절을 보면 여기서도 신학적인 경향이 있고 46절은 2,12의 왕권이 굳건하게 됨을 또 한번 이야기하는데 그래서 솔로몬의 여러 정적을 처단하는데는 야훼의 간섭이 있음이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1장에서는 다윗이 결정적으로 솔로몬을 후계로 삼느냐가 나오고 여기서는 야훼가 뜻을 드러냄을 강조한다.
1장에서는 예절을 통해서 솔로몬의 왕권을 견고케하고 여기서는 야훼께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2장 이하에서 정적을 제게할 때 야훼를 인용하는 것은 달리 말하면 솔로몬의 왕권이 그렇게라도 해서 솔로몬의 왕권을 견고케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13절 이하는 솔로몬이 왕권을 잡은 후 얼마 후에 덧붙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신명기 역사학파는 왕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야훼께 반대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2~4절을 얻음으로써 그 가운데서도 그것을 이어갈 수 있는 길을 제사한 것이다.
그래서 2장을 보면 여러 형태의 과정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기본적인 텍스트에서는 다윗과 솔로몬이 결코 이상적으로 왕권을 이어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왕권을 견고케 하고 정당화시키는 경향을 볼 수 있고 그럴 때에 야훼의 이름을 인용한다. 즉 신탁화 작업을 시킨다. 그 다음에 신명기 역사학자는 정당한 후계자의 모습으로 솔로몬을 부각시키기 위해 2~4절을 넣은 것이다.
그런데 조심할 것은 신명기 역사학자가 비록 이렇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제시한 것이 얼마나 지켜지지 않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지 거꾸로 이렇게 나쁜 모습의 다윗과 솔로몬이라도 어쨌든 왕권을 잡은 이들을 이념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즉 공시적으로 보면 그렇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데올로기의 주입이 아니다. 따라서 신명기 역사학자들은 정당성이 없는 그들의 모습과 그들의 왕권 그리고 그들의 나라가 어떻게 망하고 귀양가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근본적인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