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성전 축성식 부분으로 신명기적 신학이 보인다. 8장은 가장 길며 신명기 역사가의 대목이다. 구분을 하면 1-13절은 서론부분, 14-61절은 솔로몬의 축사부분, 62-66절은 결론 부분이다.
1~14절이 70인역에는 짧게 되어있다. 역사서 본문 비판으로 보아 70인역이 더 원전에 가깝다. 왜냐하면 70인역으로 번역할때 알렉산드리아 지방에 성서를 보낼때 팔레스티나에서는 가장 신빙성 있는 원본을 보냈을 확률이 많기 때문이다. 마소라 테스트는 해석을 첨가하였기 때문에 더 길어졌을 것이라 보고 있다. 그 증거로써 1-13절의 앞뒤가 안 맞는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짧은 내용에 신빙성이 있는 이유는 성서는 구전문학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절에서는 원로로 2절에서는 모든 사람으로 되어있다.
14~61절: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을 다시 구분하여 보면 14~21절은 서론, 22~53절은 축성부분, 54~61절은 권고, 하느님께 간청하는 기도, 미래지향적인 기대가 들어 있다.
13절: 신명기 이전의 테스트에서 취해 왔다.
14절이하: 신명기 요소가 있다. 신명기 신학이 축소되어 들어있는 축사이다. 솔로몬이 이야기한 것을 신명기 형태로 표현하였다. 이 절이 쓰여졌을때는 신명기 역사가 창조된 것이 아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시키고 국가가 기울기 이전에 이었던 것을 신명기 역사가가 썼다. 그 증거로 분홍색 미래가 들어가 있으며 나라에 대한 원망, 위기의식이 들어 있지 않다. 20절, 30절, 37~39절, 57~59절에는 이스라엘의 위기가 있지만 신명기 역사가 신학의 근본은 일반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약을 지켜야한다는 것이다. 성전을 짓는 것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라 성전 완공을 계기로 계약을 통해서 받은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전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충성을 비친 상징물이 다. 충성의 근거는 계약이다. 성전은 역사적으로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는 장소가 된다. 궁극적인 목적으로는 이스라엘이 평화롭게 살수 있도록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지 않도록, 이스라엘이 쉴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자유로운 민족으로 살수 있는 것이다. 축사속에는 성전과 정치, 약속과 이행, 현재와 미래가 다 포함되어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14~61절은 성전 축성에 관한 내용과 성전하고 세상을 연결하기 위한 솔로몬의 생각들을 잘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을 근거로 단순히 성전 축성의 예문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신명기 역사가가 세상과 성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여기에 참고해 볼 text로서 2에즈라 9장, 느헤미야 9장, 다니엘 9장을 보면 좋다.
전체적으로 볼 때, 성전이란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 하느님이 나타나시는 곳으로써 신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가필된 것까지 염두해 두고 얘기한다면 신명기적 요소하고 제관계적 요소가 있다. 신명기적 요소는 이름에 관한 얘기요, 제관계적 요소는 영광에 관한 얘기이다. 신명기적 요소인 이름에 관한 신학의 대표적인 것이 신명기 12장이다. 그 다음 영광에 관한 것은 에제 11,22~25; 43,1~5 이다. 에제키엘서는 제관계 시대의 예언서이다. 따라서 제관계가 신학적이고 산문적인 것이라면, 동시대의 에제키엘 예언서는 종교적이고 예언적인 쟝르같은 것을 많이 얘기했다.
1~13 절 : 역사적인 서론
1~9절을 보면 성전을 지은 다음에 성전에 하느님이 현존하시게 하는 상징으로서 계약의 궤를 놓았는데 이 계약의 궤에 대해서 두 가지 표현이 있다. 여기서는 아론(ןורא)이라고 하는데, 신명기 또는 신명기 역사학자는 이렇게 아론이라고 한다. 그런데 제관계에서는 에돝(תודע)이라고 한다.
계약의 궤는 1사무 4,6장과 2사무 6장, 그 중에서도 야훼의 전쟁에서 많이 나오는 것인데 여호수아 6장에서 계약의 궤가 이스라엘을 어떻게 이끌었는가, 또 계약의 궤를 통해서 어떻게 하느님이 같이 계시는가를 볼 수가 있다.
이 계약의 궤는 한마디로 ‘상자’이다. 그리고 거기다가 아무 것이나 다 집어 넣을 수 있다. 그런데 신명기 역사학자에 의하면 여기다 넣은 것은 돌로 된 조각(신명 10,1~5)이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 주신 계명을 넣었기 때문에 우리는 계약의 궤라고 한다.
‘에둩’이라고 하면 이것은 ‘증거’라는 뜻이다. 이것이 단순히 계약의 책이나 법을 말하지만 이것보다는 ‘증거’로 보는 것이 좋다. 이런 식으로 제관계에 와서는 계약의 측면이 강조된다. 또는 에둩을 법이라고 해석한 것도 있다. 제관계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갈 때 같이 있었던 그런 대상으로 보는데(민수 10,35), 그것보다는 1사무 4,3에 나오듯 계약의 궤가 올 때 하느님이 오신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왜 그런 종교적인 것을 갖게 되었는가?, 계약의 궤가 무엇이었느냐?, 이런 물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는데, 어디서부터 왔느냐하는 것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는 잘 모른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또 하나 계약의 궤와 케루빔이 함께 있다는 것이 계약의 궤의 특징이다. 그 뚜껑에 천사 모양을 한 케루빔이 있어서 거기에 하느님이 계신 것이다(1사무 4,4). 그 다음 시편 99,5; 132,7; 1역대 28,2 같은 데를 보면 그러한 것을 하느님이 계시는 곳으로써 하느님이 발을 딛고 계시는 발틀 혹은 발궤같은 것으로 보았다.
아뭏튼 계약의 궤를 갖다 놓으면 성전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 이런 것을 에제 43,7에서 볼 수가 있다. 또 계약의 궤를 갖다 놓으면 하느님이 거기에 계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당신이 역사의 주재를 하신다든지 전쟁에 이기게 하신다든지 하는 상징도 나타낸다. 따라서 야훼의 궤를 옮겨 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1절: ‘이스라엘 후손들의 가문들의 으뜸들이고 지파의 모든 어른들인 장로들을 임금 솔로몬에게로 예루살렘에 소집하니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일곱째 달인 에다님달 경축일에 임금 솔로몬에게 모여 드니라.’
에다님달은 이스라엘의 달력에 의하면 일곱째 달에 해당하는 것인데 양력으로 할때 9~10월에 해당하는 달이다. 그래서 현대의 신학적 의미로 볼 때, 신명기가 초막절과 연결시켜서 이런 일정한 날짜를 넣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때가 추수하는 때이고 초막절이 순례 축제이고 빠스카, 무교절 못지않게 중요한 때이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일정한 시기를 정하지 않았는가 한다.
3~4절 : 3절에서 사제들이 그 궤를 메었는데 4절에 가서는 사제들과 레위 사람들이 모시고 올라간다고 하였다. 이것은 후대에 들어간 것이라고 본다. 민수기 등을 보고 제관계의 영향을 받아 넣은 것이라 추측.
5절 : 여러가지 양들과 소들을 잡아 바친다 했는데, 이것은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 문제하고 연결된 것이다. 물론 레위기는 제관계이다. 레위기 1-7장에 나오는 제사에 관한 여러 가지는 귀양 때 쓰인 것이지만 제사의 전통은 귀양 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있었던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중의 일부는 성전을 짓기 전에 그런 습관이 있었다고 본다(모임의 장막이라든지 등). 그래서 제관계는 제사에 관한 한 유목민 시대의 습관, 귀양 전 성전에서 하던 것들을 다 모아서 귀양간 사람들에게 제사에 대해서 일러주었다고 생각하면 제관계 성격이 나타났다하더라도 그 자체가 시대착오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여러 양들과 소들은 제사에서 여러 형태로 바쳐진 제물이라고 보면 된다. 다만 양이나 소, 특히 소는 제사를 바칠 때 경제적, 실제적으로 손실이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목민이나 농경민에게서 소를 바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나중에 새를 바치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소를 바칠 수가 없으니까 그런 가능성은 열어 놨지만 소를 바친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 생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의미가 있다.
‘희생으로 바쳤다’ 이것은 제바흐(חבז)에서 나온 것이다. 꼬르반( )이라는 것은 까랍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인데 제물을 일반 신자들이 가져오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가져오면 사제가 목을 찔러 피를 흘리고 제단에 피를 뿌리는 것인데 이처럼 이것은 일반적인 제사를 의미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소나 양들을 가져와서 희생으로 바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봉헌하셨다는 의미에서는 꼬르반, 그리고 당신을 희생으로 바쳤다는 데서는 제바흐에 해당하는 것이다.
6절 : ‘사제들이 계약의 궤를 성소의 밀실, 곧 지성소로’ : 지성소라는 말의 표현은 제관계의 표현이다. 그래서 이것을 후대에 붙은 것으로 본다. 그냥 성소의 밀실을 말할 때는 더비르(ריבד)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지성소보다는 밀실로써 계약의 궤를 갖다가 놓은 곳이다. 이것은 성전 이야기에는 많이 나오는 것이다. 대사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써 성전 예식의 특수 용어이다. 이것을 나중에 지성소, 거룩한 곳으로 다시 한 번 해석하는데 이것을 ‘지극히 거룩한 곳’이라 하여 최상급의 형태로 표현했다.
9절 : 호렙도 시나이의 신명기적인 독특한 표현이다. 신명기에 와서 시나이가 바빌론의 달(月) 신을 연상케한다고 해서 호렙으로 바꾸었다. 신명기 신학이 하느님은 한 분뿐이라는 것인데 이교 신앙을 연상케하는 표현을 피하다 보니까 호렙이라고 했다. 호렙의 어원은 ‘아라바’라 해서 광야, 모래 광야라는 뜻이다. 사실 시나이라는 말보다는 호렙이라고 한 신명기적인 명칭이 더 잘 맞는지도 모른다.
8,1~9절의 신학적인 함의
8,1~9절까지를 살펴볼 때는 이곳은 성전에 관한 이야기인데 성전은 근본적으로 전승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곳, 하느님이 머무르는 곳이라는 개념을 갖게 되었다. 나중에 솔로몬은 하느님은 높이 하늘에 계시는데 어떻게 이 성전에 오시겠는가? 이것을 상징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계약의 궤다. 계약의 궤를 위해서 온 나라에서는 우선 각 지파들대로 장로들이 모였다. 여기에는 12지파를 다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암암리에 가르키고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리고 경축일을 에다님으로 한 것은 인위적이 않았는가? 그래서 특별한 순례절의 하나인 초막절에 그것을 맞추지 않았는가? 계약의 궤를 가져와서 하느님이 거기에 계시다는 전례적인 전통,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라 했을 때 비로소 성전이 제대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솔로몬이 축성사를 하기 전에 성전을 꾸미는데 7장까지는 여러 가지 기구들은 가져오는데 그것은 다른 민족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계약의 궤를 모셔온다고 함으로써 비로소 이스라엘의 독특한 성격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성전을 신학적으로 정리해 주는 곳이 9절이다. 9절은 관용구로써 이스라엘을 미쓰라임 땅에서 이끌어 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끌어 내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처음에는 ‘이끌어 낸다’고 나오는데, 후대에 갈 수록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온다’고 한다. 관용구적인 표현이 상당히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9절 속에는 정식 관용구가 아니지만 이끌어 내온다는 관용구를 전제로 하는 표현이 하나 들어 있고, 또 하나는 계약을 맺는 관용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 9절은 이미 다른 데서 정식으로 계약을 맺는다든지, 이스라엘을 이끌어 낸다든지 하는 사건을 묘사한 것을 전제로 한다. 관용구이기 때문에 일정한 배경이 있는 문헌이다. 이것이 계약의 궤를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약의 궤는 그 전승이 고대 어디서부터 나왔는지 상관없이,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사건이 있었던 것을 가리키는 계약의 궤이다. 시나이에서 맺었던 계약을 전제로 하는 역사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바로 계약의 궤이다. 이처럼 1-9절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종교 상징 속에 역사 사건을 넣어서 신학화하였다. 그래서 계약의 궤를 넣어서 성전이 되었다고 할 때 그 속에는 단지 계약의 궤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계약의 궤가 구절별로 해석한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성전에 대한 신학을 이야기 할 때 성전이 바로 ‘하느님이 머무는 곳’,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라고 할 때처럼 ‘빈’ 개념으로 발전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렇게하지 않고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이끌어 낸 것, 나올 때 계약을 맺은 것같은 사건이 부가된 계약의 궤가 있기 때문에 성전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은 앞으로 우리가 생각할 때에도 이런 사건이 끊임없이 드러나야만 올바른 성전이 된다. 이처럼 계약의 궤를 이스라엘화했다는 것은 성전을 계기로 사건화된 상징물로 바뀌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8,1~9절은 이러한 신학적인 지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제사 요소라든지 경축일 요소라든지 장로들이 모였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외적인 것과 그 다음에 계약의 궤에 케루빔이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케루빔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케루빔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는데 결국 그냥 케루빔으로 쓰기로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모르면 모르는대로 쓰고 설명을 하자는 취지에서이다. 케루빔은 하느님을 호위하는 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10절 : “사제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 구름이 야훼의 성전을 가득 채우니라”
이 구름이 성전을 가득 채우는 요소는 제관계적 요소가 다분한 것이다. 그 다음에 구름과 영광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대한 것은 출애급 24,15절이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구름이 산을 덮고 야훼의 영광이 시나이 산 위에 머물러 있어 ‘구름이 엿새동안 산을 덮었다’하는 표현은 이것을 듣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내려온 제관계적 표현을 연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영광은 제관계에서는 하느님이 현존하는 양식이다.
13절 : 여기에서 성전을 하느님이 머무시는 곳이라 한다. 차이가 있다면, 시나이 산이라는 제관계의 구름과 영광이 지니고 있는 성격은 계속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성전은 이것을 계속 유지시키는 곳으로 생각이 변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뒤에는 계약의 궤하고 비슷한 신학적 성격이 들어 있는데 어떤 장소가 기원적으로 보아서는 하느님이 내려오시는 곳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을 바꾸어서 이제는 그 장소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곳’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카리스마하고 제도라는 것이 병행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반대로 하느님이 구름을 통해서 영광을 거기에 머물게 하지 않으면 이런 장소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계약의 궤가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오셔서 거기에서 계약을 맺으셨다는 사건이 머물러 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과 비슷한 얘기이다. 따라서 출애굽 사건에서는 제관계적 요소가 들어 있어서 어떤 카리스마적인 요소가 제도화 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여기서는 성전을 중심으로 그런 성격이 부가됨을 볼 수가 있다.
14절 : 여기에서 21절을 보면 어떻게 짓게 되었는가하는 얘기를 하는데, 여기서 잘 보면 우선 역사를 기억하는 부분이 있다. 하느님이 다윗에 대해서 어떻게 했는가? 선조에 대해서 어떻게 했는가?를 먼저 인용하고 그 다음에 다윗에게 하는 것을 이어가는 것이 보인다. 그래서 15~16, 18~19절을 다윗에게 하느님이 하신 말씀으로 얘기하면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다. 14절에 “서 있다”는 것은 그냥 단순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또는 왕 앞에서 서 있는 전레적인 의미가 있다. 무엇을 섬길려고 서 있다든지 명령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서 있는 것이다.
16절 :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미쓰라임으로부터 내가 나오게 한 그 날로부터 나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서 읍 하나를 골라 내 이름이 머무를 성전을 세우려하지 않았고, 다윗을 뽑아 그로 하여금 나의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처음에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고 하였는데 나탄이 짓지 못하게 하였다. 나탄이 짓지 못하게 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실제적으로는 전쟁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백성이 궁핍하고 상당히 시달렸기에 그랬던 것이다(실제적 사회적 이유). 또 하나는 종교적인 이유로 성전을 짓게 될 경우에 예루살렘이 가나안의 수도였었고 예부싯 족의 중심지였고 했는데 그런 성전을 지어서 종교적 갈등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는 것도 있다. 그래서 나탄의 이름을 통해서 이렇게 이야기 한 것이다(종교적 이유).
“내 이름이 머무를 성전을 세우려하지 않았고” : 여기에 성전의 개념이 나타나는데 선명기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이 머무는 곳이 바로 성전이다. 구름, 영광 같은 것을 통해서 제관계적인 의미에서 성전이 하느님이 머무는 곳인데, 그것을 표상하기 위해서 구름이라든지 영광이라는 표현을 썼다면, 신명기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이 머무르는 곳이 성전이다. 이것도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하나의 양태이다.
이것을 잘 가리키는 것이 신명기 12장인데, 거기에서서는 하느님이 선택한 곳에서 제사를 지내라는 중앙 집중법이 나오며, 이것은 12~26장에 걸쳐 나온다. 그래서 12~26장의 중요한 골자는 야훼께서 선택한 곳에서 제사를 지내려는 경신례의 중앙 집중법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12,13~19을 보면 단순히 하느님이 선택한 곳에서 제사를 지내야 된다고 한다. 그것이 가장 오래된 text인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변하냐면, 하느님이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 선택한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야된다는 것으로 발전을 한다. 그래서 초기 형태의 하느님이 선택한 곳에서 제사를 지내야 된다는 것은 ‘선택’이라는 것에 중점이 있다면 나중에는 당신의 이름을 둘려고 선택한 그곳으로 중심이 옮겨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을 통해서 지향하는 신학적인 목적은 그 성전을 ‘차지한다’, 또는 그 장소를 ‘차지한다’, ‘다스린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또 나아가서 거기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장소로 발전을 하도록 한다. 그것이 12-26장 사이에 계속 중앙집중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표현한 최종 형태의 의미이다. 처음엔 그냥 단순히 하느님이 선택한 거기서 지내야 된다고하여 꼭 예루살렘을 지칭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외에 보면 하느니이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 선택한 곳에서 제사를 지내야 된다고 할 때에는 바로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그런 곳으로 신학적인 발전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는 단순히 하느님의 이름이 머무를 성전을 세우려 할 때에는 신명기의 중앙 집중 관용구에서 후대의 발전 형태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신명기 역사문학의 근거로 얘기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따라서 신명기 신학에서 하느님이 머무를 곳, 곧 머문다는 점은 초자연적인 하느님이 특별히 인간 속에 같이 있다는 것과 그 성전이 하느님을 부를 수 있는 곳으로 되는 의미가 같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전에는 구름이 나타나서, 영광이 나타나서 하느님이 현존하였고, 그 현존은 인간이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시나이 산에서이다. 그런데 이제는 성전이 거기서 하느님을 불러도 되는 곳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신학적 여담 상식으로 알아둘 것을 신명기 12-26장이 신명기에서 제일 오래된 것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12-26장이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하지만 그 속에도 나중에 붙은 것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현재의 신명기가 언제 생겼는가에 대해서는 요시아 개혁 때 발견된 문서를 근거로 신명기를 쓴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12-26장은 근본적으로 법이다. 법이란 출애 21-23장의 계약의 책을 전제로 해서 펴 나간 것이다. 또 그것은 레위기 17-26장에 의해서 이어진 것이다. |
18절 : ‘너의 마음이 나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지으려 하였으니, 네가 마음에 두기를 잘 하였도다. 그러나 다만 너는 그 성전을 짓지 못할 것이요, 너의 허리에서 나올 너의 아들 저가 나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지으리라.’
이래서 다윗이 짓지 못하고 솔로몬이 짓게 되었다. 여기까지의 의미는 성전을 짓게 된 데에는 자기의 계획에 의해서 지은 것이 아니라 다윗으로부터 내려온 하느님께 대한 약속,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이 인정한 곳이며, 그 인정한 내용에는 다윗이 짓지 못하고 ‘너의 아들이 짓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며, 이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이 다윗에게 한 그것을 비로소 솔로몬에 와서야 이룩하셨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계약의 궤와 영광, 이름 거기에 넷째 요소로 하느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룩하셨다는 것이 추가된다. 이것들이 이 성전에 붙어있는 신학적인 요소를 여러 형태로 얘기한 것이다. 그래서 영광이나 이름이 신학적인 요소라면 이것은 역사적인 요소와 또 야훼께 직접 이 성전을 짓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는 준비를 시켜주는 이야기이다.
21절 : 여기서는 9절과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다. 미쓰라임 땅에서 나온 것, 계약 맺은 것, 그리고 계약의 궤가 나온다. 그래서 14~29절을 보면 1~13절을 이어받아 가지고 성전을 짓게 된 것을 역사적으로 얘기하면서도 사실은 그 성전이 어떤 것인가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역사적으로 계속 이 사건이 이어져 가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이고 또 하나는 다윗에게 약속한 이것이 실현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신학적으로 영광과 계약의 궤를 통해서 하느님이 현존한다면, 다른 한편으로 역사적으로 하느님이 계획하신 사건이 성전에서 표상화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커다란 요소는 외적으로 나타난 상징물, 즉 계약의 궤같은(제관계에서는 영광이나 구름),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성전이 이어오는 데 커다란 신학적 축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 전례적으로나 사목적으로나 이 시대에도 똑같이 선포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성전이 근본적으로 야훼의 약속이 이루어진 곳, 역사적 사건이 확인되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이냐면 다윗을 통해서 지금 솔로몬이 성전으로 지은 것과 또 다른 하나로써 백성을 통해서 일어났던 그 일은 지금까지도 열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전은 그런 신학적인 표현때문에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며 계약의 궤가 있기때문에 그냥 오셨다 가시는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3) 솔로몬의 성전 경축사(Georg Hentschel의 주장)
8,22~53의 ‘솔로몬의 경축사’가 문헌비판적으로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전체적인 차원에서는 출발점으로 인정할 수 있다. 그것이 한꺼번에 솔로몬이 한 것이 아니라 짧게 한 말인데 신학적으로 재해석이 되어서 지금과 같은 긴 경축사가 된 것이다. 네 단계로 발전한 것이다.
14~21절 : 성전 지으면서 한 것이다. 즉 신명기 역사학자가 신명기부터 열왕기까지 다 썼지만, 그러나 거기에 사료를 여러가지 사용하였다. 신명기의 사료는 요시아 개혁 때 발견된 책도 있고, 솔로몬과 관련된 것도 있는데, 그중에서 14~21절은 성전을 짓고나서 한 얘기다. 그것을 신명기 역사학자가 받아서 자신의 큰 책을 쓸 때 사료로 이용해서 쓴 것이다. 그런데 22~53절까지는 한꺼번에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에 있어서는 학계에 있어서도 공통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그 출발점으로 Hentschel의 얘기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14~21절과 동시에 쓰인 경축사는 어느 것이냐? 22~26절, 28절이다. 왜냐하면 14~21절, 1~13절에 있는 요소에 의하면 성전은 ‘영원히 머무는 집’, ‘하느님이 계속 있는 집’이다. 그것을 22~26.28절이 바로 이 점을 강조한 것이다. 성전은 ‘하느님이 계속 계시는 집’, 따라서 이 집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물론 그 후에 다 부서졌지만).
두번째, 29~42절은 백성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인데, 이 때는 벌써 백성이 일부 귀양을 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백성을 위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백성이 귀양을 갔으니까 고향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귀양 간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배경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셔서 그 백성을 도로 데려와라. 그러면 그 자비를 우리가 어디서 얻을 수 있느냐? 이 성전에서 기도함으로써 된다. 이런 식으로 신학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성전은 이제 ‘기도하는 집’이다.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곳이다.
세번째, 44~51절. 귀양 간 이 사실을 또 다른 형태로 다시 한 번 재해석을 했다. 여기서는 귀양 간 사람들이 억압을 당하고 있으니까 여기 내려오시는 하느님, 제발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이런 재해석한 내용이 21절, 9절 등 출애급 때의 백성에 의해서 하느님이 이렇게 했던 것이 실현된 것이 바로 성전이다라는 것과 비슷한 신학적인 맥락이 있기 때문에 이런 재해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네번째, 27절, 52절 이하. 여기에서는 성전을 기도하는 정착된 장소, 정체된 장소, 고정된 장소.
바로 이 네번째 단계에서는 그런 점에서 성전이 그전까지는 거기와서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면 귀양 간 백성들을 다시 이끌어 올 수 있는 기도하는 집으로 보았으나, 여기서는 그렇게 보지 않고 백성이나 하느님을 구해달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백성이나 왕이 하느님께 기도를 하면 그때 들어주시는, 하느님을 부르면 들어주시는 그런 하느님. 이런 것을 얘기한 것이다. 이 뒤에는 성전이 하느님을 있게 하는, 또는 존재하게 하는, 수용하는 그릇으로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수용하기에는 성전이 좁은 장소로구나라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네번째 단계에서는 지역적인 성전으로부터 하느님을 성전의 개념 속에 수용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 얘기는 가톨릭이라는 제도 속에 하느님을 수용할 수 없다는 얘기와 일맥 상통한다.
안병무 씨는 백성과 함께 하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성전이다. 에집트에서 나올 때 백성과 함께 하는 하느님이라는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았으면 교회도 굉장히 활발할 것인데, 여러 형태의 사람들에게 갈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었을 텐데 솔로몬이 성전을 지으면서부터는 정체적인, 고정된 하느님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전을 못한다, 썪었다, 고여있다, 흐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는 얘기다. 왜 예수님이 회당에 머물르지 않고 다녔는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신학적으로 비탄에 빠져서 얘기한다. 사도시대처럼 전교하고 떠나고 하면 좋을 텐데하고 비탄에 젖어 보지만, 이것이 실제로 가능하지 않다. 그러면 예수님같이 순례적인 모습을 현재의 정체적인 성전 개념을 통해서 실현할 수 없는가?하고 질문해 보아야 한다. 지금 여기 나오는 성전의 개념을 근거로 거기에 출애급적이고 계약을 맺은 하느님의 역사 현실이 끊임없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과정, 정리하는 과정, 또는 미래의 초석을 놓는 과정, 즉 영광, 이름, 계약의 궤 등등 전승적인 개념을 통해서 했지만 이런 것을 미래지향적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 그것이 사건이나 이념으로 정립된 신앙이나 신뢰로 나타난다. 신앙과 신뢰란 확인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서 우리가 끊임없이 떠나가는 것을 말한다. 투자한 만큼 결과가 나타났는가를 계산해 보는 것은 교회의 정신에서는 맞지 않는다. 신앙이나 신뢰를 통해서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설교하고 떠나가는, 또는 출애급 때 나온 순례, 해방을 향해 가는 것, 시나이를 향해서 가는 것을 성전을 짓고 있으면서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22~26절
22~26절은 14~21절에서와 같이 성전을 짓고 경축사를 하면서 솔로몬이 했을 것으로 추정해도 좋은 대목이다.
22절 : “야훼의 제단 앞에 서서 자기의 두 손을 하늘로 펼쳐들고” – 두 손을 펼쳐드는 얘기는 출애 17에서 처럼 모세가 두 손을 펼쳐 들고 기도를 하면 승리를 하고 아니면 패하는 얘기와 일맥상통한다. 두 손을 펼쳐든다는 것은 하느님께 경배한다는 뜻, 자비를 구하는 뜻 등이 있다.
23절 : “이스라엘의 천주 야훼시여” – 이 말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이 말은 21절, 9절 등에 나오는 계약을 반영하는 얘기다.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었다는 것, 계약의 전반부를 종합해서 얘기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