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아 1장 1-3절 주석

 

예레미아 1장 1-3절


   


1. 텍스트 분석






1) 1장 1절




1,1  וּהꖷꗱꙣꖹ יꙟꔮꕑ


1,2  ויꗚꔞ הꕯהꖾ־רꔨꕎ הꖷꕗ רꚆꔣ




1,1  Τό ῥημα τού θεού, ὅ ἐγἑνετο ἐπἰ Ιερεμιαν (τον τού Χελκιου ἐκ τών ὶερεων ὅς κατᾡκει          ἐν Αναθωθ ἐν γῇ Βενἰαμιν)


1,2  ὅς ἐγἑνεθη λὅγος τού θεού προς αὐτον…….    




예레미야서의 제목에 (1,1-3)을 살펴볼 때 70인역은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마소라 텍스트는 וּהꖷꗱꙣꖹ ꙟꔮꕑ (디브레 이르머야후; ‘예레미야의 말’)라고 시작하는 반면에  70인역은 Τό ῥημα τού θεού (‘하느님의 말씀’)라고 시작하고 있다. 이 차이점은 부차적이고 우연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예언의 개념에 대한 일종의 유희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70인역은 예언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임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마소라 텍스트는 ‘예레미야의 말들’을 다루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에언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70인역의 전승의 경우 문장의 발전이 의미상의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점을 참작할 적에 마소라 텍스트의 전승이 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1,2절을 함께 보면, 70인역은 괄호부분을 생략하면 ‘하느님의 말씀(logos)이 그에게 내렸던 예레미야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있었다.’ 라고 해석된다. 그러나, 마소라 텍스트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던 예레미야의 말”이라고 간단히 표현하고 있다. 마소라 텍스트의 1,1-3을 읽을 때,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한 텍스트 비평상 어려움이나, 설명이 필요한 문법적인 문제들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단지 구문론적인 몇몇 특징만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 1장 2절




ויꗚꔞ הꕯהꖾ־רꔨꕎ הꖷꕗ רꚆꔣ




구문론적 입장에서 일부 학자들은 마소라 텍스트의 구문이 상당히 강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언어가 대담하게 사용된  현상은 텍스트 안에 다양한 방법으로 어떠한 삽입, 손질이 있었음을 전제하게 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 2절이 편집의 2번째 순간에 1절에 첨가되었고, 1절이 본래의 제목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2절은 고유한 의미에서 소명에 관한 제목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예로써 46장 1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וּהꖷꗱꙣꖹ־לꔟ הꕯהꖾ־רꔨꕎ הꖷꕗ רꚆꔣ




이것은 2절과 똑같은데(차이가 있다면 ויꗚꔞ와 לꔟ의 차이. ויꗚꔞ은 전치사 לꔟ의 3인칭 단수 남성인데 접미사가 붙었다) 이러한 사실을 참작할 적에 2절은 고유한 의미에서의 소명에 관한 제목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3절의 יꗭיꔱ יꕙꖾꕰ(와요히 비메) 라는 표현 때문에 3절이 파괴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3절에는 הꖷꕗ(하야; 영어의 be동사)가 불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들어와 있기 때문(이 때문에 3절의 문장이 파괴되었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지지를 받으면서 비평적인 주석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결론들은 현재의 구성 체계를 이루게 한 다양한 순간들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 텍스트를 구분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세 구절들은 점차 연속적으로 작성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가능케 한다. 이 학구적인 결론들은 대부분의 경우 수용할 만하지만 전체적인 입장에서 어떤 확실한 결론을 이끌지는 못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레 1,1-3을 편집자가 책의 제목으로 위치시킨, 편집된 하나의 단락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최종 편집자가 제목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여러 차례 과정을 거쳐 편집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2. 텍스트의 구성 요소




지금까지 텍스트의 차이점과 이를 통해 하나의 편집된 흔적을 살펴 보았다. 이제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텍스트를 구성 체계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주요한 3가지의 요소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반복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주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① 말 또는 말씀,  ②공간(장소) 그리고 ③시기(연대)인데 이 세 가지 요소가 일치하여 예언의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1) 말(말씀)




말, 말씀(רꔧꕏ 다바르)은 텍스트에 2번에 걸쳐 나오는데(1절:וּהꖷꗱꙣꖹ יꙟꔮꕑ와 3절:הꕯהꖾ־רꔨꕎ), 이 용어가 나오는 경우를 주시해 볼 필요가 있다. 텍스트 안에 묘사된 말씀의 테마 체계 즉, 사전이 정의하는 바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보면 2명의 화자(話者)가 나타남을 알 수 있는데, 예레미야가 말하는 것과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히 하나의 말이지만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이 이중성은 예언의 근본적인 특성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예언에 대한 해석의 풍부함을 제공함과 동시에 구조적으로 복잡하기도 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여기서는 두 화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화자 즉 예레미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에게 말하는 이는 특별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즉, 특별하다는 것은 그의 말이 곧 하느님의 말씀인 사람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사람의 말 안에 육화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이 사실은 엄청난 사실이며,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적인 언어 안에 육화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안에서 말하기 시작한 어떤 사람의 명백한 말을 통하지 않고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 하느님의 말씀은 누가 발설한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예레 1,9도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나는 이렇게 나의 말을 너의 입에 담아 준다.”) 결국 예레미야 입에서 발설되는 말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된다. 두 사람의 화자가 나오지만 결국 하느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이 화자의 이중성은 해석상의 문제를 제기한다. 텍스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인간 예레미야의 말들을 이해하는 것만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도 필요하나 이 말들 안에 담겨 있는  있는 하느님의 말씀도 깨달아야 한다. 즉 우연한 또는, 우발적인 말들 안에 표현된 절대적인 메시지를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이 부분의 주석은 신앙에 대한 이해 즉, 인간적인 말들 안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영역을 깨달을 것을 촉구하고 있다. 즉 전체 예언 전승 안에서 그 의미를 부여하며, 동시에 예언 전체에 대한 주석의 열쇠가 되는 이 유일하신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때까지 주석 작업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יꙟꔮꕑ(디브레)와 רꔨꕎ(더바르)의 차이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똑같은 어원이지만 표현된 차이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말들의 다수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 말씀의 유일함 사이의 긴장 관계가 나타난다. 하느님의 명령은 근본적으로 유일한 것이다. 즉 유일회성, 단일성, 이것은 하느님 영역에 속하는 반면 다수성과 다양성은 인간의 영역에 속한다. 이 하느님의 말씀이 歷史 안에 들어올 때 여러 수많은 예언자들의 다양한 말들 안에 표현된다.


또한 주석 행위는 언급한 것들의 다수성과 다양성을 추적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이 다수성과 다양성 안에서 모든 것의 유일무이한, 초지일관한 의미를 깨닫게 하는 어떠한 원칙을 발견해 내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주석 작업이 말들 또는, 담화들의 다수성 안에 내포되어 있는 초지일관한 유일함을 깨닫게 한다면 이 작업을 통해 얻은 원칙은 신적인 것이 된다. 이 사실은 예레미야의 예언뿐만 아니라 예언 전체에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즉 모든 예언자들이 모든 예언의 말을 말씀 즉, 주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수렴하였는지, 그 점을 이해할 때까지 예언 전체에 확장되어야 한다. (모든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우리들로서는 예레미야를 공부할 때 이러한 점을 지향해야 한다.)






2) 공간(장소)




말, 말씀은 동시에 공간적인 장소에서 발설되기 때문에 그 장소를 필요로 한다.   1장 1-3절에서는 예레미야의 고향(아나돗)이 언급된다. 또한 예언이 발설된 장소 즉, 유대 및 예루살렘의 상황과 분위기가 묘사되고 있다. 지형을 언급하는 것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근본적으로 남조 유다 왕국을 배경으로 함을 지적하려고 하는 것 같다. 예레미야 예언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예언자가 자신의 예언과 설교를 유다 왕국에만 국한시킨 것이 아니라 이집트 및 바빌로니아까지도 확장시켰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예언은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어떤 장소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공간적인 요소도 육화의 원칙을 요구하고 있다. 예언자는 정해진 장소에서 태어나 활동한다. 이 사실은 예언 현상 안에서 특별한 긴장 관계를 야기시키게 된다. 예언이 어떤 장소에서 주어진다고 해서 즉, 예언이 장소화된다는 사실을 통해서 예언은 그 예언이 발설되고 울려 퍼지는 장소에만 배타적으로 국한된다는 생각을 할 지 모른다. 혹은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 전체에 울려 퍼지기보다는 오히려 제한된 장소 안에 머물 뿐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언이 (어떤 제한된 장소가 아니라) 각처에 존재한다고 해서 보편적인 예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예언자가 어떤 메시지를 모든 나라, 모든 지방에 선포하였다고 해서 보편적인 메시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언자가 어떤 나라에 메시지를 전파하지 않았다고 해서 보편적인 메시지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예언은 특별한 장소에서 세상 전체를 위해서 계시되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장소가 제한되었다고 해서 거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성, 한계성으로 인해 특별한 장소에 육화되지만, 그 예언은 세상 전체를 위해 계시되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예언은 아나돗, 거기에만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까지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3) 시기(연대)




세번째로 강조되는 요소는 시기(연대)이다. 1장 1-3절에는 시대에 관한 언급이 충분하게 나온다. 그리고 이 연대에 대한 언급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하도록 한다. 우선 예언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언에는 연대와 시기가 정해진다. 다른 모든 성서 문학과는 달리 예언은 예언, 또는 예언자가 태어난 그 시기와 그 예언자의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관련된 시기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이 예언 문학이 다른 문학과 다른 점이다.




여기에서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구조적으로 예언이 성취될 때만 그 예언을 참된 예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적에(신명 18,-21-22: 참 예언자의 식별 기준) 예언은 비현실적인 그리고 상황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항상 시기와 시대가 정해진 예언을 그보다 수천년 후인 우리 시대에 어떻게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읽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문제가 제기된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는 예언된 말씀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들의 구조를 취합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과연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가? 예언자의 시대 상황과 우리의 시대 상황 사이에 구조적인 유비로 즉,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상징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다시 말해서 상징 또는 표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유적인 이해로만은 충분하지가 않다. 말씀의 시기가 정해져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그 역사가 의미 있음을 단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말씀이 뿌리 내린 그 역사적인 순간, 그 순간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선행하는 역사 즉 과거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현재의  이 순간을 이해할 수 없다. 과거는 오늘까지 우리를 이끌어 온 사건들의 의미를 언급하는데 유효하다. 우리는 구약성서가 우리에게까지 도달하였고, 우리의 오늘을 결정한 이 역사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성서를 읽게 된다. (Pannenberg의 이야기- 역사는 하느님이 드러나는 장이라는 서론에서 지적한 말을 다시 한 번 환기하기 바란다.) 이러한 의미에서 계시는 역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언을, 시간적인 차이가 있지만, 하나의 상징으로서, 표상으로서 그 시기를 뛰어넘는 의미로 우리는 일차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연대 또는 시기는 왕들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강조되고 있고 나타나고 있다. 다른 것들과 비교함으로써 사건들의 연대를 지정하는 임의의 방법이 예레미야서에서 소개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왕들의, 또는 통치자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왕은 하느님의 권위를 갖춘 인물로서, 백성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운명을 결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때는 왕들의 운명은 백성들의 운명 그 자체이기도 했다.


백성을 위해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언자는 구조적으로 왕과 무엇인가를 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정치적 영역에서 이사야를 비롯해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예언 초기 시대, 사무엘과 나단, 엘리야, 엘리사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때부터 예언자들은 왕과 함께 가시적으로 무엇인가를 해 왔다. 사실 예언자는 권위 있는 말씀의 전달자이다. 왕정 제도의 정통성을 평가하며, 또한 왕들이 인간들의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행사하는 권력과 그들의 결정 사항 등을 평가하고 심판한다.


이처럼 예언자들은 정치적 영역을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적 영역은 예언자의 관심과 그가 전하는 말의 대상이었으며, 따라서 정치적 영역은 동시대인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구체적인 삶 자체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되어야 할 것은 예언자들이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쳤지만, 예언자들은 정치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예언자들은 우선 종교인이었다는 것, 이 지점을 먼저 염두에 두고서 정치적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역시 여기서도 또 하느님 말씀의 육화의 개념이 나타나게 된다. 하느님 말씀은 참으로 이 세상의 삶과 역사를 취하셨다. 왜냐하면 인간과 대화하시고, 인간과 계속 관계를 맺으시는 하느님의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관계를 의미하고 계시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씀에 육화했고, 또 장소에 육화했고, 시간에 육화했다. (말씀이 장소와 시간 안에 육화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을 떠나서 어떠한 이상적인 것, 이상한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께 접근하려는 방법은 상당히 어리석은 방법일 것이다. 육화된 말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고 인간적인 조건하에서 바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하고서 주석 작업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3. 본문 주석




이 부분의 주석 방향은 예언자의 말이 뼈대를 형성하게 된 구체적 역사적 요소를 찾아 그것을 밝히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강의 중에 특정 역사에 관한 질문에 오랫동안 집착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일반적이고 총괄적인 구약성서 입문서나 예레미야 예언서 주석서의 도입 또는 입문 부분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1) 1장 1절




וּהꖷꗱꙣꖹ יꙟꔮꕑ




이는 일반적으로 ‘예레미야의 말들’ 이라고 번역한다. 그 이유는 고유한 이름과 결합된 יꙟꔮꕑ라는 표현은 다른 책들의 경우에 보통으로 제목을 언급하는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יꙟꔮꕑ와 고유명사가 함께 나오는 것은 이렇게 책의 제목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형태이거나, 또한 같은 책의 경우에서는 내면적으로 수집된 것을 지칭하는데 사용되는 전형적인 표현 형태이기도 하다. 그 예로서 아모스서 1,1은 책의 제목을 이야기하고 있다. 잠언 30,1; 31,1은 같은 책이지만, 그 안에 수집되어 있는 어떠한 소그룹의 제목 역할을 한다.  또 전도서 1,1이 있다.




W. Rudolph는 Jeremiah(handbuch zum Alten testament),Tübingen, (1947) 이란 책에서     יꙟꔮꕑ에 ‘역사’라는 의미를 부여하라고 한다. (여기서 역사란 일대기, 수기 등의 의미에서의 역사이다.)  왜냐하면 루돌프에 의하면 예레미야서는 예언자의 말들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예언자의 삶과 관련된 사건들과 체험들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히브리어 사전이 정의하는 바에 의하면, 루돌프의 견해는 타당하다. 가끔 구체적으로 결정된 어떤 인물의 역사를 지적하기 위해서 יꙟꔮꕑ 단어 다음에 고유한 이름이 뒤따라 나오는 현상이 발견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 예로서 1열왕 11,41; 14,19; 14,29; 15,7; 15,23 등을 들 수 있다. 특별히 느헤 1,1의 제목(【본문확인】)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번역을 보면 “하갈리아의 아들 느헤미야의 ‘수기’ ”라고 번역했다.)  1열왕 11,41(【본문확인】)에서도 ‘역사’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공동번역: “솔로몬이 어떤 지혜를 가지고 무슨 일을 했는지 그 나머지 ‘역사’는 솔로몬 왕의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יꙟꔮꕑ용어에 관하여 의미론적으로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이미 언급한대로 ‘말들’이라는 의미와 ‘역사’라는 의미이다. 성서 주석가들의 경향은 전자의 의미도 받아들이고, 후자의 의미도 받아들이려는 두가지 경향 다 나타나고 있다. 나(이기락 신부님)의 의견으로는 주석은 사전적 정의 자체 안에 포함되어 있는 의미론적인 풍부함을 언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וּהꖷꗱꙣꖹ יꙟꔮꕑ 이 표현은 예언자의 말들 혹은 예레미야의 역사 또는 예레미야의 일대기를 의미한다. (이 점에 대한 언급은 유보시켜 두고, 소명에 관해서 살펴볼 적에 좀 더 이야기해야 될 것이다.) 즉, 예언자의 사건 또는 일대기는 예언자 자신의 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결국은 두 가지 사실을 다 종합한 것이 되겠다. 그의 행동들과 그들의 운명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예언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말들뿐만 아니라 행동까지도 그리고 운명까지도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


복음서들의 경우에서처럼 예레미야서에는 말씀들의 수집과 사건들의 수집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말씀과 사건들은 자주, 예언자가 개입하는 어떤 틀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의미론적인 풍부함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긴 하지만, 평범하게 민간적, 서민적인 번역으로 יꙟꔮꕑ 를 말씀들, 말들로 번역하고 싶다. 그래서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겠지만, 여러가지 복음서라든가 예레미야서를 참작해서 ‘예레미야의 말들’이라고 번역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서는 말씀이 우세하게 나타나는 예언 작품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또는 예레미야의 삶과 행동들은 말이 되었고, 이를 통해서 그의 삶과 행동들은 우리에게 영감을 받은 메시지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렇다. (말씀이 예레미야서에 우세하게 나타난다는 점, 그리고 예레미야 삶과 행동들은 하나의 언어화되었고, 이를 통해서 그의 삶과 행동을 통해서 영감 받은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루돌프는 예레미야서 1,1-3에 나타나는 וּהꖷꗱꙣꖹ יꙟꔮꕑ란 제목이 예레미야서 1장부터 39장까지만 적용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1장 1절부터 3절까지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유배를 끌려갈 때까지의 예레미야의 말씀들, (루돌프가 말하듯이) 역사, 일대기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40장 1절에는 다른 제목이 나타난다고 한다.




הꕯהꖹ תꔞꗭ וּהꖷꗱꙣꖹ־לꔟ הꖷꕗ־רꚆꔣ רꔧꕏꕘ



(ןꗬ은 ‘어디로부터’ 이고, תꔞ는 4격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with(무엇과 함께)’라는 의미이다. רꔧꕏꕘ는  ‘그 말’로 번역되고 이것은  וּהꖷꗱꙣꖹ־לꔟ הꖷꕗ־רꚆꔣ 과 연결되어 ‘예레미야에게 있었던(내렸던) 그 말들’ 이라고 번역된다.)


이런 식으로 40장 1절이 시작되는데, 이것은 40장부터 45장까지 유효한 것으로 루돌프는 보는 것 같다.




예레미야서의 편집적 구성상의 문제들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 뿐만 아니라 학자들 간에 일치된 주장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여하튼 51장 64절의 다음 표현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וּהꖷꗱꙣꖹ יꙟꔮꕑ הꘅꕚ־ד꘨




(ז꘨은 ‘어디어디까지’,  הꘅꕚ־ז꘨는 ‘여기까지’, 따라서 직역하면 “예레미야의 말들이 여기까지”)


예레미아의 말들이 여기서 끝난다는 이야기이다. 1장 1절에 나타나는 וּꕗיꗱꙣꖹ יꙟꔮꕑ와 51장 64절 마지막에 나타나는 이 구절이 하나의 inclusio(괄호, 삽입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배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52장은 1장 1절부터 3절까지의 제목 안에서 선포된 예레미야의 예언 모두를 마감하기 위해서 부록으로 첨가된 것으로 보인다.






וּהꖿꙎꗡꖐ־ןꔳ וּהꖷꗱꙣꖹ




‘힐키야의 아들 예레미야’ 라는 뜻이다. 혈통의 계보에 관한 서술은 예언서 작품집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예레미야란 이름과 힐키야라는 이름은 매우 흔한 이름으로 나타난다. 예레미야에 관계되는 것이 1역대 12,4.10.13; 2열왕 23,31; 24,18; 예레 35,3; 52,1; 느헤 12,1.12.34; 10,2 이렇게 나오고 있다. 힐키야란 이름이 나오는 것은 1역대 6,45; 26,11; 2열왕 18,18; 이사 24,20; 36,3; 예레 29,3; 2열왕 22,4-14; 2역대 34,9-22; 35,8; 느헤 12,7.21; 8,4; 바룩 1,1.6.7; 다니엘 13,29.63 등이다. 아마도 레위인들의 특징적인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힐키야란 이름이 그렇다. 요시야의 개혁 때 대사제 힐키야의 역할에 대해 언급하는 2열왕 22,4도 참조할 수 있다.






תוֹתꗺ꘥ꔰ רꚆꔣ םיꗼꕟꗔꕢ־ןꗬ




(ןꗬ은 ‘어디에서부터’ 즉, 출신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번역하면 “아나돗에 살고 있는 사제들 중의 한 사람”.)


ןꗬ 의 의미에 대한 문법적인 논쟁이 학자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다. 부분 관사인가? 아니면 기원, 출처를 나타내는 말인가? 부분 관사로 이해할 경우 예레미야는 사제였을 것이다(사제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기원, 출처를 나타내는 의미로 이해할 경우에는 예레미야는 단순히 사제 가문의 후손일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 사제직의 문제점은 매우 복잡한 문제 중의 하나로서 아직까지도 이 문제 전체를 수렴하여 명백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견해가 나타나고 있지 않다. (R. de Vaux, ‘구약 시대의 사회 풍습, 이 양모 역  327-385p에 레위지파의 사제직 제도에 대해 언급한다.)


여하튼 사제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사제직은 대를 이어가면서 계승되었고, 가정에서 학습되던 하나의 직함 또는 자격이요, 하나의 직업이었다. 세습된다는 면에서 가정에서 학습된다는 면에서 왕정 제도의 왕직과 유사하지만 하느님의 특별한 계획을 전제로 하고 있는 예언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사제직은 혈육에 의한 것이지만, 예언직의 수여는 하느님 말씀의 명령에 의한 것으로서 특별히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예언 현상 또는 예언직은 가족 전승 내지는 가족 계승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족 전승 내지는 가족 계승과의 단절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예언직은 직업적인 훈련을 통해서 계승되는 것이 아님을 예레미야 예언서는 입증하고 있다. (아모스서도 마찬가지. “나는 돌무화과에서 목축을 하던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이렇게 됐다.” 이런 식으로 특별한 소명과 함께 그런 능력을 부여받는 것을 말한다.) 또한 세습되는 사제직은 오직 성소에서 그 사제직을 받는다는 원칙 안에서만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개신교의 장로 임직식, 가톨릭의 사제 서품과 마찬가지.)


이런 점을 고려할 적에 예레미야는 사제 가문의 후손이라는 관점에서의 사제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사실을 통하여 그가 사제직을 수행하였거나, 혹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어떤 특수한 사제적 임무를 수행하였다는 결론을 연역할 수는 없다. 예레미야서는 이에 대해서 어떤 암시도 하지 않고 함구하고 있다. 이 사실은 예레미야와 아나돗의 사제들 사이의 구체적인 실재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석가들은 예레미야서 1,1과 1열왕 2,26-27에 나오는 에피소드 사이에 연결을 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1열왕 2,26(【본문확인】)에 보면 솔로몬은 사제 에비아달을 아나돗 지방으로 추방한다. (여기서 사용된 그대의 ‘땅’이란 말은 너의 영토, 너의 땅, 너의 들판이라는 그런 의미에서 ꗘיꕋꚂ(사데카)이다.) 왜냐하면 그가 솔로몬의 정적이었던 아도니야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1열왕 1,7.25 참조(【본문확인】)  이렇게 솔로몬은 에비아달을 야훼의 사제직에서 쫓아내 버렸다. 그래서 사독만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 사실에서부터 아나돗의 사제들은 예루살렘에서 사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금지된 사제들이라는 사실을 연역해 낼 수 있다. 또한 에비아달은 아히멜렉의 아들로서 사울의 명령에 의해 놉에서 사제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할 때에 그만이 죽음을 면하게 된다. (1사무엘 22,20【본문확인】)  놉의 성소는 아나돗과 예루살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사울에 의한 대학살 이후에 놉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되고 있지 않다. 에비아달은 자리를 옮겨 다윗을 추종하게 된다. 이와 같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설한 솔로몬 왕에 의해서 사제직을 박탈당한 에비아달과 그 후손들은 더이상 어떤 성소와도 관련을 맺을 수 없었다.  에비아달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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