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장 1절-4장 4절
1. 예레 2,1-4,4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한 이스라엘과 하느님과의 논쟁을 테마로 한다. 1장에서는 ‘소명’을 다루고 있다. 소명에 관한 담화에서는 야훼와 예레미야 사이의 관계가 지배적으로 우세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 1장의 소명은 2장 이하에서 예레미야의 신탁과 하느님 말씀의 역사적인 이행으로 옮겨진다. 그런데 여기서 근본적인 관계는 야훼와 그 백성 사이의 관계로 표현되고 있다. 반면 예언자는 거의 사라져, 하나의 객체로 나타날 뿐이다. 즉 예레미야는 입만 벌려 전할뿐이고 하느님과 이스라엘과의 논쟁이 주가 된다.
2. 이 부분에서는 1,7.17.에서 이미 언급된 것이 주요 부분을 이루면서 나타난다.
야훼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이렇게 이르셨다.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 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예레 1,7)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나의 백성에게 일러 주어라. 내가 시키는 말을 모두 전하여라.” (예레 1,17)
이미 언급된, 위와 같은 내용이 여기서 강조되는데 내가 너를 파견한 모든 사람들에게 가서 내가 너에게 말하는 모든 것을 선포하라는 내용이 주요 부분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예레미야가 누구에게 파견되었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왜 이러한 메시지가 나왔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고 규명하기 위해서 그 당시 역사적 상황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3.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언은 추상적이고 관념론적인 담화가 아니다. 모든 세대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유효한 이상론도 아니다. 예언은 구체적인 역사에 대한 참된 해석이며, 구체적인 변화 속에 끼어든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간청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어떤 텍스트의 연대, 역사적인 context 그리고 메시지의 수취인을 밝히려는 연구의 의미가 주어진다.
4. 주석가들은 2장부터 6장이 하나의 거대한 문학적 단일성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단락을 크게 두 부분으로 다시 세분하려고 한다. 첫째 부분은 2,1-4,4이고 둘째 부분은 4,5-6,30이다(둘째 부분은 2학기 때 다룰 것이다).
우리의 첫 번째 작업은 왜 이렇게 세분했는지 그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 작업으로 2,1-4,4의 단락이 부분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제시하려 한다. 그런 후 2,1-19의 단락을 따로 분리하여 주석할 것이다.
1. 단락을 제한하는 이유
단락을 2,1-4,4로 제한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우선 2,1-4,4부분이 어떻게 4,5-6,30에서부터 구별되는지를 밝히고 내용이나 문학 유형에 관한 모티브를 제시해보도록 하겠다.
1) 내용상의 모티브
이 단락에는 내용상의 모티브가 내재해 있다. 2,1-4,4의 구체적 특징은 예언자의 말씀이 언급되는 수취인과 메시지의 형태를 결정하는 역사적 상황이다.
⑴ 수취인 : ‘이스라엘’
1. 2,1-4,4에 등장하는 신탁의 첫 번째 수취인들은 유다 왕국과 구별되는 북쪽의 지파들이다. 이 부분에서 청중을 위해 선정되어 사용된 용어는 ‘이스라엘’이라는 용어이다(2,3.4.14.16.31; 3,12.20.21. 23; 4,1). 반면 4,5-6,30에서는 ‘예루살렘’과 ‘시온’, ‘유다’ 등이 반복해서 언급되고있다(4,5.6.10.11.16)
2. ‘이스라엘’이란 용어는 히브리 백성 전체에 적용할 수 있도록 확실히 포괄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명칭은 여로보암과 함께 유다에서 갈라진 왕국을 창건했던 그 부족을 언급할 수도 있다. 즉 722년에 멸망할 북조 왕국을 구성했던 지파들을 언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3. 예레미야는 여기서 북조 지파들을 이처럼 ‘이스라엘’ 또는 לꔞꙜꙺꖹ תיꔲ(베트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집’, ‘이스라엘의 가문’), לꔞꙜꙺꖹ יꗽꔶ(버네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아들들’)로 부른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북조 부족들을 지적하기 위해서 명확하게 사용되는 개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개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에프라임이라든가 혹은 사마리아 등 북조 부족을 지칭하기 위한 보다 명백한 개념을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않았다.
4. 그가 이러한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를 E. Vogt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본래 북조 이스라엘에 언급된 신탁들은 두 번째 시기에 다시 채택되어 유다에 적용되었다. 예레미야가 앞에서 선포했던 모든 신탁들을 한 두루마리에 기술하라는 명령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 그에게 예루살렘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하느님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이다(예레36장 참조). 그가 이 명령을 받은 것은 여호야킴 재임 제4년째 되던 해 즉, 604년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남쪽 유다 왕국에도 적용되는 수준의 포괄적인 개념을 사용하면서 신탁들을 기술했을 것이다”라고 Vogt는 보고 있다.
5. 그밖에 두루마리에 기록되는 순간에 수취인으로서 유다에 대한 명백한 언급들도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םꗛꚂוּרꖾ יꗽꖅאָꔮ ꚓאꙜꙌꕵ ꗗꗟꕗ (2,2)
예루살렘의 귀 안에다가 선포하라 가서
ꗘיꕛꗟꔤ וּיꕗ ꗘיꙠꘝ רꘔꗬ יꗑ (2,28)
너의 신들이 있다 너의 도시의 숫자만큼 왜냐하면
םꗛꚂוּריꗜꕵ הꕇוּהꖾ שׁיאּꗡ הꕯהꖾ רꗫאָ הꗌ ־יꗑ (4,3)
그리고 예루살렘에게 유다의 남자에게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이처럼 참으로
םꗛꚂוּרꖾ יꔪꚉꗄꕵ הꕇוּהꖾ שׁיאּ (4,4)
예루살렘에 거처하는 유다의 남자
이렇게 텍스트 단락의 처음(2,2)과 마지막(4,3-4)에서 발견되는, 유다인들이란 삽입을 통해서 신탁들에 하나의 외적인 틀을 부여하려는 경향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6. 중앙에 삽입된 것 즉 2,28은 context 안에서 보다 명확히 발견되는 11,13에서 취한 문장이라고 볼 수 있다.
“유다야, 네가 섬기는 신이 성읍들 만큼이나 많은데, 네가 재앙을 만나면 그 신들이 너를 살려 주려고 일어나야 하지 않느냐?” (예레 2,28)
“유다 사람들아, 너희가 위하는 신은 성읍의 수만큼이나 많고, 바알의 산당은 예루살렘의 거리만큼이나 많구나.” (예레 11,13)
7. 그 밖에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단락(2,1-4,4)은 두 부분(3,6-12와 3,14-18)에서 유다에 대해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 두 부분은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산문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3장의 나머지 부분은 운문(詩)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이 두 부분은 문학 유형상 다르다.
8. 3,6-12은 유다가 이스라엘보다 죄가 더 많음을 강조하고 있고, 3,14-18은 미구에 유다와 이스라엘의 재결합, 통일에 대한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요시야왕 시절에 야훼께서 나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이스라엘이 나를 배반하고 무슨 짓을 하였는지 너는 보았다. 높은 산마다 올라 가고, 무성한 나무 밑마다 찾아 가서 음란을 피우지 않더냐? 그런 짓을 실컷 하고 나면 행여 나에게 다시 돌아 올까 하였지만, 끝내 돌아 오지 않고 말았다. 그 아우 유다도 똑같은 화냥년으로, 언니가 하는 짓을 모두 보았다. 나를 배반하고 놀아났다가 이혼장을 받아 쥐고 내쫒기는 것도 보았다. 그러고서도 겁없이 배신하고 나가서 저도 음란을 피웠다. 돌과 마누를 섬기며 음란을 피워 땅을 더럽혔다. 샛서방을 보며 마음껏 바람을 피우고 나서는 나에게 돌아 오는 체만 하고, 진심으로 돌아 오지 않았다. 똑똑히 들어라.”
야훼께서 나에게 또 이르셨다. “이스라엘도 배반은 하였지만, 본심은 화냥년인 유다보다는 낫다. 그러니 너는 북녘으로 가서 이렇게 외쳐라.” (예레 3,6-12)
“내가 너희의 가장이다. 나는 너희 가운데서 성마다 한 사람씩, 갈래마다 두 사람씩 뽑아 시온으로 데려 오고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세워 주겠다. 그러면 그 목자들은 알아서 너희를 잘 기를 것이다. 그날이 오면 너희는 이 땅에서 불어나 번성하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그 때 다시는 야훼의 계약궤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마음에 두고 생각할 필요도 없게 되리라. 아쉬어 찾거나 새로 만들 필요도 없으리라. 그 때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야훼의 옥좌라 부를 것이며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에 모여 와 나의 이름 야훼를 불러 예배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그릇된 생각에 끌려 가지 아니하리라.
그 날이 오면 유다 가문과 이스라엘 가문이 한 덩어리가 되어 북녘 땅을 떠나, 조상들이 나에게서 유산으로 받았던 땅에 함께 들어 오리라.” (예레 3,14-18)
9. 이 두 부분은 후에 삽입된 것으로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삽입된 내용들은 북쪽에 설교되었던 내용이건 남쪽에 설교되었던 내용이건 관계없이 그 신탁들이 두 왕국 모두에 해당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북쪽에 설파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3,12참조: “그러니 너는 북녘으로 가서 이렇게 외쳐라”).
이렇게 수취인이 2,1-4,4과 4,5-6,30 사이에 차이가 있다.
⑵ 비슷한 역사적 상황
1. 테마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신탁들 안에 표현된 상황은 거의 비슷한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이미 어려운 상황 안에서 발견되고 있는 이스라엘은 벌써 종살이를 체험하였다. 그리고 그 도시들은 황폐 및 파멸되어 이런 아픔을 체험한 것으로 묘사된다(2,14.15.17 : 모두 과거시제가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이 종이었더냐? 씨종이었더냐? 어찌하여 남에게 털리는 신세가 되었느냐?” (예레 2,14)
“사자들이 으르렁거리는 바람에 살던 땅은 페허가 되고 성읍들은 허물어져 무인지경이 되었다.” (예레 2,15)
“왜 이 꼴이 되었는지 알고 있느냐? 너희를 이끌어 주던 야훼 너희 하느님을 저버리고서야 어찌 이 꼴이 되지 않겠느냐?” (예레 2,17)
이처럼 이러한 아픔이 현실화되었다. 그 이유 때문에 예언자는 위협적인 목소리를 사용하지 않는다.
2. 그 대신 예루살렘에 대해 언급할 때에는 전형적으로 위협적인 언사가 사용되고 있다(4,3-4; 4,5).
“이제 나 야훼가 유다 국민, 예루살렘 시민에게 말한다. 엉겅퀴 속에 씨를 뿌리지 말고 땅을 새로 갈아 엎고 심어라. 유다 국민들아, 예루살렘 시민들아, 할례를 받아 나에게 몸을 바쳐라. 마음에 수술을 받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의 사악한 행실을 보고 화를 내어 불처럼 너희를 태우리니, 그 불을 꺼 줄 사람이 없으리라.” (예레 4,3-4)
“유다에 소식이나 보내려무나. 예루살렘에 전갈이나 보내려무나. ‘다들 모여라, 방비된 성읍들에 들어 가자’ 하며 나팔을 불어 온 나라에 경보를 울려 보려무나.” (예레 4,5)
3. 이 단락의 모든 예언들은 상황의 변화를 획득하기 위하여 현재 불행의 이유를 깨닫고 야훼께 돌아오도록 초대하고 있다. 이 주제는 계속 이어지는 부분에서 강조되고 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엄격하게 제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비슷하게 이런 역사적인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4. 어떻든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신탁들은 요시아 재임 기간에 예레미야가 언급한 것을 본래 소개하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에 이 요시아 왕이 이스라엘 지방의 북쪽을 포함해서 전면적인 종교개혁을 감행했다면 요시아 재임 13년째에 예언하기 시작한 예레미야는 북쪽에 회심하라는 초대가 담긴 자신의 설교를 설파하면서 이 종교개혁 운동에 가담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상을 버려라’, ‘지속적인 불행의 원인인 우상숭배를 하지 말고 우상을 즉시 버려라’ 하는 자신의 설교를 설파하면서 요시아의 종교개혁에 가담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내용상의 모티브가 여기서 발견된다.
2) 유형상의 모티브
또한 유형상 모티브가 2,1-4,4에서 발견되고 있다. 2,1-4,4에서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요소들이 있다. 텍스트의 유형으로서 즉 고발 또는 선고 유형이 나타나고 있다.
⑴ ביꙞ(립)의 문학 유형
1. 먼저 문학 유형을 살펴보자. 2장을 시작한 부분에 ביꙞ(립: ‘소송하다, 고발하다, 간청하다, 변론하다’)의 문학 유형이 나타나고 있다. 이 사실은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수용되고 있는 학설이지만 이 ביꙞ(립) 유형을 텍스트의 어느 부분까지 적용시킬 것인지에 관한 주장은 학자마다 異見이 있다. 즉 ביꙞ(립) 유형이 나타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 적용 범위가 2,4절까지인가, 아니면 2,8절까지인가, 아니면 끝까지인가? 하는 이견들이 있다.
2. 이에 대해서 J. Harvey는 자신의 고전적 연구인 Le plaidoyer prophétique contre Israël après la rupture de I’alliance(계약 파괴 이후에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적 변호, 변론) Bruges-Paris-Montreal (1967)에서 예레 2,4-13.19을 하나의 완전한 논고 또는 구형으로 생각했다. 즉 그의 주장에 의하면 2,4-13.19이 논고 형식에 의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힐책하는 질문과 역사적 논고가 나오며 하늘을 증인으로 불러들이고 구체적인 고발 그리고 죄의 마지막 선언이 나온다는 것이다.
3. 그러나 Harvey도 ביꙞ(립)은 2가지 방향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파멸에 대한 위협이고 두 번째는 관계 회복을 위해 요청되는 조건들을 지적하고 있는 긍정적인 법령 또는 규정이다.
4. 그런데 이 두 번째의 예는 이사 1,2-20에 나타난다고 이야기 한다. 또한 시편 50,14-15과 미가 6,8등에 나타난다고 본다. 특히 미가 6,8은 예언서의 모든 사상, 적어도 BC 8세기 예언자들의 예언을 집약하는 내용이다. 이는 상당히 유명한 구절로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요청되는 조건들이다.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이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나를 불러라. 구해 주리라. 너는 나에게 영광을 돌려라.” (시편 50,14-15)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겸손되이) 하느님과 함께 살아 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 (미가 6,8)
5. 그런데 예레 2장은 두 번째 유형이 아니라 첫 번째 유형 즉, 파멸에 대해서 위협하는 그러한 ביꙞ(립)의 고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예가 예레 2,14이하에서 발견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러나 Harvey는 이런 것들이 완전한 형식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6. 이 ביꙞ(립)의 구성 체계와 그 의미에 대해서는 2,1-19을 분석할 때 비교 연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간략하게 언급한다면 이사 1,18-20에서 보는 바와 같이 파괴된 관계 회복에 관한 의사 표시, 또는 관계 회복을 요청하는 것은 파멸에 관한 위협과 연결되고 있다. 회심의 목표는 진실과 정의를 토대로 한 새로운 통교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위협과 화해의 방식이 사용된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오라, 와서 나와 시비를 가리자.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어지며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좋은 것을 먹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기어이 거역하면 칼에 맞아 죽으리라.” 이는 야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이사야 1.18-20)
7. 예레 2장에는 야훼에 의해서 이스라엘에게 언급된 고발이 나타난다. 이것은 예레 2,1-13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반면 예레 3장에서 ביꙞ 문학 유형은 관계 회복을 위한 의사 표시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성취된다. 여기서 회심을 권유하는 명령법들이 나타나며, 특히 예레 4,1-2에서는 םאּ(임: ‘만일 …..하면’)라는 조건문이 나타난다.
⑵ inclusio 현상
1. 문학 유형상 두 번째로 inclusio 현상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2,1-4,4 단락이 명확한 inclusio 현상으로 제한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inclusio현상을 적어도 단락을 마감하는 표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4,5 이하에서 다른 부분을 시작한다는 표식이 있기 때문에 2,1-4,4의 단락은 긍정적이라기 보다는 부정적(소극적)으로 제한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4,5 이하에서 다른 부분이 시작한다는 표식은 다음과 같다.
① 4,5 이하에서는 명령법 형태 아래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외형적 표식을 갖고 있다.
4,5 וּדיꕁꕘ 선포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