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2장 19절
⑴ 번역의 문제
ꗗꖹꗛꔞ יꚕꕏꖕꘪ אꗟꕵ
너에 대한 나의 두려움
1. 마소라 텍스트는 이 구절을 ‘너에 대한 나의 두려움’이라고 번역하고 있다(여기서 יꚕꕏꖕꘪ는 명사로서 여성명사 הꕏꖕ에 대명사 접미사 1인칭 단수가 붙은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다른 식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
2. Vogt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이 텍스트를 יꗛꔞ יꚝꕎꖏ꘩〈70인역=(καὶ οὐκ) εὐδόκησα〉, 즉 ‘너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라고 번역한다 (יꚝꕎꖏ꘩의 원형은 ꚢꕎꖏ꘩로서 여기에 고전적 여성 단수 2인칭형인 יְ가 붙은 것이다. 그들은 이처럼 יꚝ…로 고쳐서 읽을 것을 주장한다).
3.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두려움’, ‘공포’라는 명사(הꕏꖕ)는 구약성서에 단 한번 나타나는, 여성명사 hapax이고 반면에 두려움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흔히 דꖏ라는 단어가 많이 쓰인다.
② יꚕꕏꖕꘪ가 명사절이라 한다면 그 앞에 나오는 부정사 אꗟꕵ은 ןיꔞ로 바뀌어야 한다.
4. 그러므로 יꚕꕏꖕꘪ를 70인역처럼 동사(칼 완료형 여성 단수 2인칭, 즉 יꚝꕎꖏ꘩)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 예로 2,20에서도 비숫한 표현이 나타나고 있고 2,33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성명사를 고풍스럽게 ‘ י.…… ’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5. 또한 ꗗꖹꗛꔞ도 יꗛꔞ로 고쳐서 해석해야 한다고 Vogt는 주장한다. 그 이유는 יꚕꕏꖕꘪ를 ‘나의 두려움’이라고 명사로 읽은 성서사본 서기가 앞에 나온 ꗗꖹꕘꗟꔤ(‘너의 하느님’)의 영향으로 יꗛꔞ를 ꗗꖹꗛꔞ으로 고쳐씀으로써 문장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옛날의 서기가 5글자(יתדחפ)를 발견하여 명사처럼 읽었고(그러나 이는 구약성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자기가 처음 읽은 내용에 단어를 합치시키기 위해 יꗛꔞ를 ꗗꖹꗛꔞ로 수정했다는 것은 매우 낯설다. 이보다는 서기가 마소라 텍스트의 표현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고(ꗗꖹꗛꔞ יꚕꕏꖕꘪ), 이것이 그에게 모음부호와 의미상의 어려움을 일으켜서 혼란을 야기시켰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서 이 어려운 텍스트에 확실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여성명사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7. 여기서 어려운 점은 לꔟ דחפ이라는 숙어이다. 이 숙어는 ‘어느 누구를 두려워하다’, ‘경외심을 갖고 어느 누구에게 접근하다’의 뜻(호세 3,5; 미가 7,17)으로 번역되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 동사의 목적어는 하느님이다. 그러나 이 숙어는 ‘어느 누구의 운명 때문에 두려워하다’라는 다른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이사 19,17; 예레 36,16; 욥 31,32).
8. 그러므로 예레 2,19은 마소라 텍스트의 자음을 존중하여 있는 그대로 읽고 모음을 약간 수정하여(ꗗꖹꗛꔞ יꚝꕎꖏ אꗟꕵ) ‘너는 너 자신 때문에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즉 ‘너는 네가 행동한 것의 결과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⑵ 친저성 또는 편집 역사의 문제
1. 또한 이 부분의 텍스트에 대해 주석가들은 친저성 문제를 언급하기도 한다. 또 편집 역사를 설명하는 학자도 있다. 예를 들면 Vogt는 2,16과 2,18을 살펴볼 때 이 두 구절은 context 안에서 서로 다른 주제를 설명하고 있고 또한 다른 시대에 속한다는 점에서 2,14-19 사이의 신탁의 단일성을 혼란시킨다고 주장한다.
① 2,18(그리고 2,36 이하)에서 유다왕 시드키야는 기원전 588년경 바빌론에게 반기를 들고 에집트에 원정을 청한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에집트에 원정을 청한 것은 시로-에프라임 전쟁 때 앗시리아에게 도움을 청한 것과 마찬가지로 무익한 것임을 예언한다. 여기서 Vogt는 2,18에 이어지는 번역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에집트로 가는 것에 어떤 이익을 끌어들일 수 있는가? (현재)
앗시리아에 가는 것에 어떤 이익을 끌어들였는가?” (과거)
이를 통해 Vogt는 시드키야를 반대하는 예레미야의 말을 편집자가 2,18에 첨가하여 유다를 향한 언급으로 삼았고 2,18을 제외한 나머지 구절은 모두 북조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이라고 설명한다.
② 또 2,16의 신탁도 시드키야시대 때의 신탁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Rudolph는 2,16은 첨가된 인상을 주지만 이 부분은 예레미야가 여호야킴시대에 첨가한 것이고 2,18은 앗시리아가 국가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여호야킴 이전에 서술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2. 이상의 사실들을 참작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겠다.
① 이같은 해설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설득력있는 주장이 아니라면 텍스트에 대해 반대입장을 취할 수 없고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단순히 그 시대의 배경과 정치적 상황을 조금 알고 있다고 해서 그러한 암시에 기초하여 어떤 텍스트의 연대를 정하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② 그리고 현행 context 안에서 2,16.18은 의미의 관점에서 그렇게 당혹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이 구절들의 불연속성을 고려하여 문학 양식적으로 달리 표현될 수 있음을 배제해서는 안된다.
3. 하지만 2,18은 결론을 내리는 하나의 토시인 הꚛꘞꕵ에 의해 도입되고 있으므로 썩 좋은 도입구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2,18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똑같은 말인 ꗗꙠꕋꗡ ꗗꗢ־הꗫ가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잘못 편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인위적으로 도입된 것처럼 보이는 2,16은 원수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이는 2,15와 다르다. 2,15에서는 파괴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반면 2,16에서는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