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 의도적인 기능
1. 두 번째로, 위에서 지적한 사실들은 결혼 생활 안에서 발견되는 상징의 긍정적인 의도를 보게 한다. 이 은유를 통해서 예언자들은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의 이상적인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2.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결혼은 최초의, 즉 이스라엘 역사 시초에 이루어진 행동이다. 바로 최초, 시초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혼은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의 속성을 규정하고 공통된 그들의 역사의 진실성과 책무를 제시하고 있다. 부부 관계에 관한 은유는 최초의 논리적인 초상, 긍정적인 의미들의 풍부한 초상들을 연상시킨다.
3. 여하튼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이 초상은 간음과 매음에 내어 맡긴 백성의 불성실한 태도와 처신에 의해서 변질되었다. 이것때문에 결혼을 통한 최초의 결합 관계가 풀리면서 그 다음으로 이혼이 뒤따르게 되었다. 즉 하느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로부터 멀리하시는 극적인 행동을 연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4. 그러나 결혼에 관한 은유는 하느님과 백성의 기억 속에 남아 있으며 예언자들에 의해서 이것이 종말론적인 형태로 다시 주창된다. 이것은 주로 “그날이 오면 하느님께서 새롭게 쇄신되고 완전하게 된 신부(아내)와 결정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하나가 되실 것이다” 라는 표현으로 묘사되고 있다.
5.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결혼은 이처럼 신랑이신 하느님과 그 하느님과의 통교와 합일을 위해 걸어가고 있는 인간 역사의 도정을 지지하는 약속과 희망이 된다.
⑶ 야훼와 바알(לꘞꔰ)
1. 앞에서 살펴본 결과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 부부적 초상을 곧바로 해산시키는 바알(לꘞꔰ)의 모습에 대한 언급이 꾸준하게 등장하고 있다. 바알의 이름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론적인 모든 가치와 함께 바알의 이름을 염두에 둔다면 2,1-19 단락 내부에 일관성 있게 나타나고 있는 테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테마는 2,1-19 뿐만 아니라 2,1-4,4 전체 단락 안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2. 그 테마는 다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 ①남편으로서의 바알(남편인 바알), ②주인으로서의 바알(주인인 바알), ③풍산, 풍요의 신으로서의 바알, ④우상으로서의 바알, ⑤유사한 발음으로서의 바알(paronomasia 언어의 유희)
3. Langenscheidt 사전에서는 바알을 master, lord, possessor, owner, husband, citizen, inhabitant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① 남편으로서의 바알
1. 이 테마는 의미론적인 선상에서 예레미야서에 분명하게,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테마이다. 2,2에서 이스라엘은 간접적으로 남편(husband)인 바알과 결부되는 הꗢꗐ(칼라흐) 즉, ‘신부’라는 초상으로 표현되고 있다.
“네 젊은 시절의 충절과 신부로서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너는 광야에서 씨뿌리지 못하는 땅에서 나를 따랐다.” (예레 2,2 : 정태현 시역)
2. 역시 2,32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참조할 수 있다. 여기서 이 젊은 신부는 דꘑꖒ(헤섿: ‘자비’, ‘성실’, ‘사랑’)과 הꔧꕟאַ(아하바: ‘사랑’)와 함께 야훼의 길을 쫓아가는(יꙟꖖאַ ꗗלה 할랔 아하레: ‘….의 뒤를 쫓다’) 젊은 부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사막에서의 시절이었다. 이 context에서는 성실하게 부부의 길을 걷고 있는 아내로 표현된다고 봐야 될 것이다.
“처녀가 노리개를 잊을 수 있으며 신부가 각시 때를 잊을 수 있겠느냐? 그러나 내 백성은 셀 수도 없이 허구한 날 나를 잊었다.” (예레 2,32 : 정태현 시역)
3. 그러나 가나안 지방에 들어감으로써 위에서 지적한 성실한 태도에 혼란과 동요가 일어나게 된다. 2,7 이하가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 보면 אמט(타마: ‘더럽히다’, ‘모욕하다’) 동사가 사용되었고 הꔧ꘠וֹתּ(토에바: ‘역겨운’)와 같은 표현이 나온다. 그리고 이것뿐만 아니라 2,2과는 역으로 “남편이 아닌 사람의 뒤를 쫓아다니다”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내가 너희를 비옥한 땅으로 데려와 그곳의 열매와 좋은 것을 먹게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여기 들어와 내 땅을 더럽히고 나의 상속 재산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 사제들도 ‘주님이 어디 계시는가?’ 하고 묻지 않았다. 율법을 다루는 자들이 나를 몰라보고 목자들도 나를 거슬러 반역하였다. 예언자들은 바알에 의지하여 예언하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을 따라다녔다.” (예레 2,7 : 정태현 시역)
4. 또 변절과 변심에 관한 테마가 2,11에, 그리고 ‘버린다’는 테마가 2,13에 나온다. 이 두 가지 테마는 의미론적 선상에서 간음을 행하였음을 선포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한 민족이 제 신을 바꾼 적이 있더냐? 비록 그것들이 신이 될 수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내 백성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과 제 영광을 바꾸었다.”
(예레 2,11 : 정태현 시역)
“정녕 내 백성이 이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구나. 그들은 생명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스스로를 위해 물을 담지 못하는 금간 웅덩이를 팠도다.” (예레 2,13 : 정태현 시역)
5. 2,20 이하에서 출발해서 이 은유는 이스라엘을 창녀로 묘사하고 있다(2,20; 3,1.2.3.6.8.9)
“나는 오래 전에 네 멍에를 부러뜨리고 네 멍에 끈을 끊었다. 그런데도 너는 ‘나는 더이상 섬기지 않겠다’고 하고는 온갖 높은 언덕 위에서, 온갖 푸른 나무 밑에서 창녀가 되어 드러누웠다.” (예레 2,20 : 정태현 시역)
“사람들은 이렇게들 말한다. 만일 한 남자가 자기 아내와 이혼하여 그 여자가 남편에게서 떠나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면, 전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시 돌아오겠느냐? 그렇게 되면 저 땅이 역시 더럽혀지지 않겠느냐? 그런데 너는 뭇 남자 친구들과 창녀질을 하고……” (예레 3,1 : 정태현 시역)
6. 또한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여자로 묘사하고 있다.
“벗겨진 산 위를 쳐다보아라. 네가 놀아나느라고 몸을 더럽히지 않은 곳이 어디 있느냐? 사막에 숨어 있는 아랍인들처럼 너는 한길 가에 앉아 정부들을 기다렸다.” (예레 3,2)
7. 그 다음에 불성실한 아내로 묘사하고 있다(3,7.8.10.11.20). 여기서 הꕇוֹגꔯ(바고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런 짓을 실컷 하고 나면 행여 나에게 다시 돌아올까 하였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고 말았다. 그 아우 유다도 똑같은 화냥년으로, 언니가 하는 짓을 모두 보았다.” (예레 3,7)
“나를 배반하고 놀아났다가 이혼장을 받아 쥐고 내쫓기는 것도 보았다. 그러고서도 겁없이 배신하고 나가서 저도 음란을 피웠다.” (예레 3,8)
8. 이 은유가 표현하는 ‘창녀’,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여자’, ‘불성실한 아내’와 같은 이러한 표현들은 진짜 남편은 제쳐놓고 이스라엘이 사랑의 대상으로 다른 남자들을 찾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적으로 2,33이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너는 사랑을 찾아 제 갈 길을 얼마나 잘도 걸었던가? 그리하여 너는 죄녀들에게도조차 네 길을 가르칠 정도였다.” (예레 2,33 : 정태현 시역)
9. 여기서 םיꙞꕾ(자림: ‘낯선 사람’ 즉 ‘이방신’)이 2,25과 3,13에 나오고 있다. 또 םיꘟꙟ(레임: ‘정부들’)이라는 단어가 3,1과 3,20에 나타나고 있다.
10. 또한 3,1-5에서 이 테마가 결정적인 순간에 소개됨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3,1-5은 이혼하여 다른 남자의 여인이 된 아내는 남편에게 더이상 되돌아올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부부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법(신명기 24,1-4)을 회상할 때 2,2의 언급은 신명기 법을 어긴 아내에 대해서 향수에 젖어 신명기 24,1-4에서 단언한 내용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누가 아내를 맞아 부부가 되었다가 그 아내에게 무엇인가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 남편의 눈밖에 나면 이혼 증서를 써 주고 그 여자를 집에서 내보낼 수 있지만, 그 여자가 나가 지내다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는데, 둘째 남편도 그 여자를 싫어하게 되어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집에서 쫓아 냈다든가, 둘째 남편이 죽었다든가 할 경우에 그 여자를 내쫓은 처음 남편이 이렇게 몸을 더럽힌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일 수는 없다. 이런 짓은 야훼께서 역겨워하시는 짓이다. 이런 짓을 하여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주시어 차지하게 하신 땅에 죄를 입혀서는 안된다.” (신명 24,1-4)
② 주인으로서의 바알
Langenscheidt 사전이 이야기하듯이 바알은 남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master), 소유주(owner) 등도 의미하고 있다. 바로 남편이기 때문에 그는 신부에 대해서 권위를 갖고 있다. 그리고 모든 재산이 그에게 귀속된다. 특히 땅이 그렇다.
이러한 선상의 테마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텍스트 안에서 서로 보충하는 두 개의 파급효과를 지니고 있다.
ㄱ. 첫 번째 파급효과 : ‘주인과 종’의 관계
1. 첫 번째 효과는 2,14에서 역설적으로 예고되었고, 이어지는 부분(2,20)에서 다시 채택되고 있는 ‘주인과 종’의 관계이다.
“이스라엘이 노예이더냐? 그가 태생 종이더냐? 그런데 어찌하여 그가 약탈의 대상이 되었단 말이냐?” (예레 2,14 : 정태현 시역)
“나는 오래 전에 네 멍에를 부러뜨리고 네 멍에 끈을 끊었다. 그런데도 너는 ‘나는 더이상 섬기지 않겠다’고 하고는 온갖 높은 언덕 위에서, 온갖 푸른 나무 밑에서 창녀가 되어 드러누웠다.”(예레 2,20 : 정태현 시역)
“너는 일찍부터 고삐를 끊고 날뛰는 굴레 벗은 말이었다. 나를 섬길 생각이 없어 높은 언덕 무성한 나무 밑 어디에서나 뒹굴며 놀아났다.” (예레 2,20 : 공동번역)
2. 공동번역은 70인역과 동일하게 ‘너는’(단수, 2인칭, 여성)으로 번역했다. 아마도 이스라엘을 생각해서 여성으로 사용한 것 같다.
이 경우에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또는 출애굽 때부터 구속받기를 싫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근본적인 불순종을 자주 되풀이하여 상기시키고 있다(6,27-30; 8,4-7; 13,23).
“내 백성의 속을 떠보도록 너를 임명하였으니, 내 백성이 사는 꼴을 시험하여 보아라. 하나같이 말을 듣지 않는 것들, 남을 모함이나 하며 돌아다니는 철면피들이라. 모두들 썩었다. 아무리 풀무를 부쳐도 도가니가 제 구실을 못하여 납 찌꺼기가 녹지 않듯이 나쁜 자들이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그런 자들을 나 야훼는 내버린다. 그러니 ‘내버린 은’이라고 불러 주어라.” (예레 6,27-30)
출애굽 때부터 구속받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내용은 에제키엘서 20,23-24에서 볼 수 있다. 또 사도행전 7,51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을 여러 민족 가운데 흐트러뜨려 여러 나라에 쫓아 보내겠다고 광야에서 또 한번 손을 들어 맹세한 것은, 그들이 조상들이 위하던 우상들에 눈이 홀려 내가 세워 준 법대로 살지 않았고, 내가 정해 준 규정을 거절하였으며 내가 정해 준 안식일을 욕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에제 20,23-24)
3. 반면 마소라 텍스트 원문은 정태현 신부님 시역처럼 ‘나는’(יꚝꕵꔨꚂ)으로 나온다. 이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이집트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지만 이스라엘은 이 해방자를 섬기려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이렇게 두 가지 가능성이 다 있겠지만 우리는 70인역과 공동번역처럼 번역하도록 하겠다. 그래서 직역하면 “그렇다. 오래 전부터 너는 너의 멍에를 부셔버렸고 너의 멍에 끈을 끊어버렸으며 나는 ‘당신을 더이상 섬기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5. 예레미야가 단언한 것처럼 이스라엘은 야훼와의 관계를 마치 하나의 노예 생활처럼 생각하고 살아왔다(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기 주님을 버렸다. 어떻게 보면 하느님의 관심이 자기를 얽어매는 속박으로 생각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주님을 버렸고 사실 이스라엘은 노예의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발견된다.
ㄴ. 두 번째 파급효과 : ‘주인과 땅’의 관계
1. 두 번째 파급효과는 ‘주인과 땅’의 관계로 살펴봐야 될 것이다. 여기서 가나안 지방에 관한 바알과 야훼 사이의 논쟁이 분명하게 발전된다. 야훼께서는 사막의 하느님만이 아니시라는 사실이 2,2과 2,31에서 강조되고 있다.
“너희 이 세대 사람들아. 주 나의 말을 들어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였더냐? 아니면 어둠이 짙게 깔린 땅이었더냐? 어찌하여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가 자유를 찾았으니 이제 더이상 당신께 가지 않겠소’ 라고 하는가?” (예레 2,31 : 정태현 시역)
2. 야훼께서는 사막의 하느님만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기름진 땅, 가르멜의 땅은 바로 그분의 땅이며 그분에 대한 유산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에 대한 증언이 2,7과 3,19에 나온다.
“내가 너희를 비옥한 땅으로 데려와 그곳의 열매와 좋은 것을 먹게 하였다.”
(예레 2,7 : 정태현 시역)
3. 따라서 바알은 사기꾼이요 착취자이며(3,23-24), 그를 따르는 사람은 강도요 도둑이다(2,26).
“언덕 위의 산당들은 모두가 헛된 것이었습니다. 이 산 저 산에서 수선을 떨어 보았지만 모두 헛된 것이었습니다. 우리 하느님 야훼밖에 이스라엘을 건져 주실 분은 없사옵니다. 그런데 조상들이 애써 얻은 것을 일찍부터 우리는 바알에게 바쳤습니다. 소떼와 양떼와 아들 딸까지 바쳤습니다.” (예레 3,23-24)
“도둑이 붙잡혀 수치를 당하리라. 이스라엘 집안이 수치를 당하리라. 그들과 그 왕들과 제후들이,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수치를 당하리라.” (예레 2,26 : 정태현 시역)
③ 풍산, 풍요의 신으로서의 바알
1. 여인의 남편인 바알은 그녀가 자녀를 낳게 해 준다. 가나안 신화에서 언급한 바대로 바알의 비는 땅을 풍요롭게 하고, 바알의 씨는 암소를 수태케 한다고 한다. 이러한 선상의 의미가 우리가 다루고 있는 텍스트 안에서 강조되고 있다.
2. 자연과 생명의 산출에 관한 모든 언급들 즉, 사막에 대한 언급(2,2.6), 파괴와 고립에 관계된 것(2,12.15), 많은 열매와 수확을 맺는 비옥한 땅에 관한 언급(2,3.7), 물들에 관련된 언급(2,13.18) 등은 바로 이 의미론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아야 될 것이다.
3. 이어지는 부분, 즉 2,20-4,4에서 이 테마는 다른 것과 연결되어 나타나는데, 나무들(2,20; 3,13), 포도나무에 관한 초상(2,21), 암낙타에 관한 초상(2,23 이하), 갈증에 관한 테마(2,25), 비에 관한 테마(3,3), 가축들과 자식들에 관한 테마(3,24) 등과 연결되어 나타난다. 이런 것들이 언급될 때 바로 자연과 생명의 산출에 관한 테마들이 함께 언급되고 있다.
4.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을 여인 또는 땅으로 동일시하려는 의미론적인 경향이 나타난다(3,1). 이 의미론적인 경향은 바알이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에게 생명과 풍요로움을 준다는 거짓 주장을 폭로하려고 한다.
“남편에게 소박맞은 아내가 다른 사나이를 찾아갔으며, 본남편이 그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을 수 없는 법이다. 그랬다가는 이 땅이 부정을 탄다. 그런데 너는 수많은 정부와 놀아나고서 나에게 돌아오겠다니, 될 법이나 하느냐? 이는 내 말이니 잘 들어라.” (예레 3,1)
5. 이렇게 이스라엘을 여인, 땅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바알이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준다는 것을 폭로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3,23에 나타나고 있다.
“언덕 위의 산당들은 모두가 헛된 것이었습니다. 이 산 저 산에서 수선을 떨어 보았지만 모두 헛된 일이었습니다. 우리 하느님 야훼밖에 이스라엘을 건져 주실 분은 없사옵니다.” (예레 3,23)
6. 사실 그의 뒤를 쫓는 결과는 완전히 생명이 아니라, 풍요가 아니라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표현하고 있고, 파멸과 고립을 가져올 뿐임을 지적하고 있다.
7. 바알이 비옥했던 땅을 사막으로 바꾸는 존재라면, 야훼는 심지어 사막에서까지도 생명이 움트게 하시는 바로 그분이심을 천명하고 있다(2,2.6). 이것은 왜 이스라엘이 생명의 원천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그 이유를 이스라엘에게 고소하는 것이요, 이스라엘의 측에서 볼 때는 하나의 희망이 된다(2,13).
“정녕 내 백성이 이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구나. 그들은 생명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스스로를 위해 물을 담지 못하는 금간 웅덩이를 팠도다.”(예레 2,13 : 정태현 시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