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1-19 주석 10

 

⑶ 이스라엘의 죄



1.  그러므로 우리가 살펴본 테마는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이해하면서 예레 2,1-19 안에 포함된 어떤 농도 짙은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 내면의 아버지들과 아들들에 관한 테마는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단락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제 그 모티브를 살펴보고 이 두 테마 선상의 연결점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2.  위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부성은 살과 피, 자양분, 유산 등, 구체적인 역사성 안에서 삶을 정의하는 현실의 모든 것을 아들에게 하사하는 것에서 명백해짐을 언급하였다. 이제 이 모든 것은 정신적인 하사에 상응하는 것이 없다면 참된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신적인 것, 즉 이름이라든가 어떠한 규범이라든가 율법과 같은 것 그리고 축복, 이러한 것은 물질적인 현실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 말씀 또는 말(앞에서는 ‘아버지의 말’로 표현되었다)의 요소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겠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 또는 말씀은 삶의 근원적인 시작이요 원천이신 야훼와 관련되기 때문에 그렇다.






3.  달리 말해서 말씀과 함께 아버지는 이스라엘 안에서 항구히 아들들을 기억한다. 인간적인 아버지는 자기 말을 통해서 자기 아들을 기억한다. 이스라엘은 어떤 인간의 아들, 즉 아브라함의 아들, 아담의 아들 등의 인간적인 아들일 뿐만 아니라 근원적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아버지 자신도 자신에게 생명, 자양분, 유산을 주신 높으신 분으로부터 유래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4.  이제 2,5-8에서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그들의 기원을 망각하였음을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모든 부성이 거기서부터 유래하는 그 이름, 다시 말해서 지존하신 이름이 더이상 선포되고 있지 않다. 지존하신 분이 망각되고 있다.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반역은 고유한 실존을 스스로, 그리고 독자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그분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주 내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 조상이 내게서 무슨 허물을 찾아냈길래 나에게서 멀어져 헛된 것을 따라 다니다 그들 자신도 허무하게 되었더란 말이냐. 그들은 ‘주님께서 어디 계시는가,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올라오신 분, 광야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분, 사막과 수렁의 땅에서 가뭄과 암흑의 땅에서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고 아무도 살지 않는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그 주님께서 어디 계시는가’ 하고 묻지 않았다. 내가 너희를 비옥한 땅으로 데려와 그곳의 열매와 좋은 것을 먹게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여기 들어와 내 땅을 더럽히고 나의 상속 재산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 사제들도 ‘주님이 어디 계시는가’ 하고 묻지 않았다. 율법을 다루는 자들이 나를 몰라보고 목자들도 나를 거슬러 반역하였다. 예언자들은 바알에 의지하여 예언하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들을 따라 다녔다.”


                                                                       (예레 2,5-8)




5.  이것이 이스라엘의 죄악이다. 대를 이어가며 지속되는 삶 자체에 계승되는 죄악이다. 백성의 역사는 이처럼 순전히 육체적인 생명력에 대한 설명으로 소개된다. 이 생명력은 절대적인 기원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과 번뇌와 죽음 안에서 소멸되어 가고 있다(3,24-25).




“우리가 선조 때부터 이날까지 하느님 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우리 야훼께 죄를 지었구나. 이제 다같이 부끄러운 몸, 엎드리자. 창피한 줄 알아 얼굴을 가리우자.”


                                                                     (예레 3,24-25)




6.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반역의 죄는 스스로 독립하여 스스로 자생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다른 것에게도 생명을 줄 수 있는 어떠한 능력을 소유한 것처럼 존재하려는,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하느님처럼 존재하려는 불순한 동기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즉 지금까지 그들의 아버지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아니었다. 분명히 그들의 아버지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처럼 행동하려고 하였다. 이 예레미야서가 선포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7.  예레미야는 선조들을 아들들의 속성으로 되돌아오게 하고 있다(3,14; 3,19; 3,22; 또 2,5; 3,18; 3,24; 3,25) 그리고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삶 즉, 생명의 유일한 시작이요, 생명의 원리인 진리에로 복원시키려 하고 있다(4,2).


 


“불충한 자녀들아 돌아오너라. 주 나의 말이다. 내가 너희 위에 주인이 된 까닭에 이 도시, 저 가문에서 너희를 하나 둘 시온으로 끌어내리라.”   (예레 3,14)


 


“저 날에 유다 지방은 이스라엘 지방과 더불어 걸으리니 그들은 북녘 땅으로부터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상속 재산으로 준 땅으로 함께 내려올 것이다.”   (예레 3,18)




“네가 주님의 현존을 두고 진리와 정의와 공정으로 맹세한다면 너로 인하여 이방 민족들이 복을 받고 너로 인하여 찬양을 받으리라.”   (예레 4,2)




4) 은유에 대한 결론




그러면 이제 2,1-4,4의 대단원에 대한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 2,1-4,4 안에 나타나고 있는 거대한 은유들(①계약에 관계되는 것, ②결혼에 관계되는 것, ③부성에 관계되는 것)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것을 살펴보아야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2,1-4,4에, 좁게는 2,1-19에 소개된 은유를 분석한 결과 어떤 확실한 2개 선상의 의미가 서로 상반되는 방법으로 이 텍스트를 관통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사실 이 3개의 은유는 예레 2,1-19 뿐만이 아니라 구약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라고 보아야 될 것이다.






⑴ 첫 번째 방향 : 정치적 조약과 결혼 계약




1.  첫 번째 방향은 상호 합의와 상호간의 선의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정치적 조약 형태’와 성숙한 두 상대방의 관계를 전제하는 ‘결혼 계약에 관한 초상’과 관계된다.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상호 합의, 상호간의 선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2.  그러나 이 텍스트에 의하면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이러한 관계 유형은 타락하고 악화 될 뿐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영원히 종료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3,1과 3,8을 보면 이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여인은 더이상 남편에게 돌아올 수 없음을 천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들 말한다. 만일 한 남자가 자기 아내와 이혼하여 그 여자가 남편에게서 떠나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면 전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시 돌아오겠느냐? 그리되면 저 땅이 몹시 더럽혀지지 않겠느냐? 그런데 너는 뭇남자 친구들과 창녀 짓을 하고서 내게 돌아오겠다는 말이냐? 주 나의 말이다.”   (예레 3,1)




“내가 직접 보았다. 반역자 이스라엘이 저지른 온갖 간음 때문에 내가 이혼장을 그에게 돌려주며 그를 내보내는 것을 보고서도 그의 거짓된 자매 유다마저 창녀 짓을 하며 돌아다닌 사실을.”   (예레 3,8)


 




⑵ 두 번째 방향 : 부성




1.  두 번째 방향은 ‘부성에 관한 테마’와 연결되어 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첫 번째 방향은 상호 합의와 상호간의 선의에 기초하고 있고 상대방의 성숙한 관계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 부성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상호 합의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절대적인 주도권에 기초하고 있다. 생명의 기원과 출생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 관계는 반기를 들어 반역할 수 있지만 아들의 신분을 결코 중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2.  그러므로 아들을 구성하는 절대적인 요소는 바로 아버지의 절대적인 주도권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지만 아들이란 칭호를 또한 강탈할 수 없다(2,30 참조). 이스라엘의 반역은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의 본성, 즉 그분과 백성과의 관계를 백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항상 자신에게 충실하신 하느님께 돌아가려고 할 때, 매순간 회심하여 아버지께 돌아올 때에만 일치할 수 있을 것이다.




3.  예레미야는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깨닫기 위하여 자신 안에 되돌아오고(2,19; 3,22-25) 구원과 품위와 축복의 시작이요 원리이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하여 자유롭게 스스로 버렸던 그 장소에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고 있다(3,19). 자식의 신분으로 돌아온다는 것, 자녀의 신분으로 돌아온다는 것, 다시 말해서 회심한다는 것, 즉 불성실함 때문에 야기되는 두려움 없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재발견하는 것은 항상 가능하다는 사실을 예레미야는 지적하고 있다.






⑶ 종합




1.  예레미야의 이러한 희망찬 메시지는 구약성서에서부터 시작해서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어지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이 사실은 2,1-4,4에서 첫 번째 선상의 의미 즉, 계약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정치적인 계약’과 ‘결혼의 계약’의 의미가 왜 확실한 순간에 중단되는지를 이해하게 하는 반면 처음에 강조된 두 번째 의미, 즉 ‘부성’이 마지막 부분에 반복되는 모티브가 될 때까지 부성의 의미가 계약 관계의 의미보다 훨씬 더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정치적 계약과 결혼이라는 의미는 부성의 의미와 비교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2.  3,1을 보면 첫 번째의 관계는 파기된다. 하지만 2,3은 이스라엘의 초기에 맺어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고 이것이 마지막 부분, 즉 3,14; 3,19; 3,22에서 반복되는 테마로 나타나고 있다.




“만일 한 남자가 자기 아내와 이혼하여 그 여자가 남편에게서 떠나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면 전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시 돌아오겠느냐? 그리되면 저 땅이 몹시 더럽혀지지 않겠느냐? 그런데 너는 뭇남자 친구들과 창녀 짓을 하고서 내게 돌아오겠다는 말이냐? 주 나의 말이다.”   (예레 3,1)




“이스라엘은 나에게 성별된 내 추수의 맏물이었다. 그를 삼키는 자들은 누구나 벌을 받아 그에게 재앙이 닥쳤다. 주 나의 말이다.”   (예레 2,3)




“불충한 자녀들아 돌아오너라. 주 나의 말이다. 내가 너희 위에 주인이 된 까닭에 이 도시 저 가문에서 너희를 하나 둘 시온으로 끌어들이리라.”   (예레 3,14)




“나는 너를 어떻게 아들들 가운데 하나로 내세워 아늑한 땅, 뭇민족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상속 재산을 너희에게 줄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하였다. 나는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나를 따르던 일에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예레 3,19)






3.  이렇게 결혼과 정치적 계약의 관계는 파기될지 모르지만 부성의 관계는 파기될 수 없음을 3,14.19.22에서 반복되고 있고 이것을 통해서 훨씬 더 부성의 의미가 계약의 의미보다 강함을 예레미야서는 강조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상은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는 사실임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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