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장 5절-6장 30절 주석 6

 

Ⅴ. 결 론 : ‘왜 주님은 그들을 버리셨는가?’(6,27-30)




‘왜 주님은 그들을 버리셨는가?’ : 결론으로 제시하려는 이 테마를 우리는 강의를 시작할 때 처음으로 제시한 바 있다. 이 제목으로 예레미야는 1-6장 전체를 결론 짓고 있다. 특별히 야훼 측에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것의 의미와 중요성을 이 대목에서 살펴보려 한다.




“나는 내 백성 가운데서 너를 귀금속 제련사로 내세워 저들의 길을 살펴보고 시험하게 하리라. 그들은 모두 고집센 반항자들로서 떠돌이 중상모략가들이요, 구리와 쇠붙이에 지나지 않으며, 모두가 썩어빠진 행동만을 저지른다. 풀무가 세차게 돌고 납이 불에 담금질을 받아도 제련은 허탕만 칠 뿐이니 악인들이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버려진 은이라 불리리니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이다.” (예레 6,27-30 : 정태현 시역)






1. 예루살렘의 파국




우리가 지난 시간까지 살펴본 4,5-18의 종합적인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예루살렘 파국과 관련지어 지적할 수 있다.






1) 하느님 백성의 파국




1.  우선 도시의 의미론에 기초한 발전과 그 부정적인 관점의 해석(즉, 파멸의 테마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은 일반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파국 자체임을 제시하고 있다. (평범한 사건이 아니었다. 하느님 백성 전체의 파국이다.)




2.  예루살렘의 파멸은 사실 이에 앞섰던 사마리아의 멸망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이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제 더 이상 선택과 축복의 전통적인 카데고리에 따라서 정의될 수 있는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택과 축복이라는 그러한 테두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몽땅 망해버렸다.




3.  예레미야서에서 이 사건은 문학유형상 줄곧 지배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 예루살렘의 파국과 관련된 내용이 예레 1,13-16에 나오고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에 관한 것이 예레 7장, 26장에 나타나고 있다. 또한 예레미야의 전체 전기 안에서 예루살렘 파국에 관한 테마가 지속되고 있다.


4.  또한 이렇게 줄곧 예레미야서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곧바로 종말적인 사건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4,23-26). 이러한 재앙은 내면적으로 유사한 영역에 호소하고 있다. 마음 또는 심장에 관한 테마는 도시의 테마와 결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땅을 내려다보니 끝없이 거칠고 하늘을 쳐다보니 깜깜합니다. 산을 바라보니 사뭇 뒤흔들리고 모든 언덕은 떨고 있습니다. 아무리 돌아봐도 사람 하나 없고, 하늘에 나는 새도 모두 날아갔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옥토는 사막이 되었고, 모든 성읍은 허물어져, 야훼의 노여움에 불타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예레 4,23-26)






2) ‘마음의 죄’와의 관계




1.  우선 도시의 파멸과 마음의 죄 사이의 관계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서와 구약성서에 의하면 항상 마음에서부터 유래하는 죄는 처벌을 받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없음을 천명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죄는 하느님이 친히 정의를 실현하시도록 촉구하고 있다(출애 20,5; 신명 5,9의 십계명, 그밖에 출애 34,6-7; 민수 14,18; 예레 30,11).




“야훼께서 그의 앞을 지나가시며 외치셨다. ‘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수천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푸는 신,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 주는 신이다. 그렇다고 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조상이 거스르는 죄를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사 대까지 벌한다.’” (출애 34,6-7)




2.  그러나 예레미야는 파멸을 도시의 회심과 구원을 획득하기 위한 위협으로 선포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파멸을 선포하는 목적은 그들을 위협해서 그들의 회심과 구원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적 메시지가 울려퍼질 때까지는 항상 구원되고 구제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4,14; 36,2.3).



“예루살렘아, 살고 싶거든 못된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라. 쓸데없는 생각을 언제까지 품고 있으려느냐?” (예레 4,14)




3.  불행하게도 예레미야의 말은 고집이 세어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예루살렘을 구원하기 위한 지속적인 파견이 있어왔지만 예레미야의 사명은 실패로 그 종말을 고하게 된다.




4.  여기서 파멸 사건에 관한 전통적인 윤리적 해석을 만나게 된다. 즉, 그것은 죽음에 치닫게 하는 것은 사악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사악한 마음이 범한 죄는 적절한 벌을 마땅히 받아야하기 때문에 그렇다.






3) ‘마음의 깨달음’과의 관계




1.  도시의 파멸과 마음의 깨달음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도시의 재앙과 위험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위협의 말들은 첫 순간에 허공으로 날아간 것 같다. 그러나 그 결과 바빌론 군대의 침입을 야기시켰으며 예루살렘은 포위당했다(4,16).




“예루살렘이 풍전등화처럼 되었다. 이 소식을 만방에 알려라. ‘먼 곳에서 원수들이 밀려와 유다 성읍들을 공격하느라고 야단들이다.’” (예레 4,16)






“이스라엘 가문아, 내가 먼 데서 한 민족을 불러 들여 너희를 치게 하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그 민족은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 너희와는 말이 다른 민족이다. 너희는 그 말을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한다.” (예레 5,15)




2.  이렇게 도시는 고통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 고통은 그들 고유의 책임임을 깨닫게 하였고 회심을 유도하였기 때문에 하나의 교훈이 되었다. 2,19에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내용이 4,17-18에 나오고 있다.




“너희가 너무나 못되게 굴었기에 이 벌을 내리는 것이다. 나를 배신하다가 너희는 이 죄를 받는 것이다. 야훼 너희 하느님을 저버리고 공경하지 않다가 이 처참한 재난을 겪는 것인 줄 똑똑히 알아라. 만군의 야훼가 하는 말이다.” (예레 2,19)




“내가 똑똑히 일러 둔다. 예루살렘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예루살렘은 나를 거역하다가 이 꼴이 되었다. 그런 못할 짓을 하다가 이 꼴이 되었다. 가슴에 칼이 꽂히는 이 아픔은 너희 죄 때문이다.” (예레 4,17-18)




3.  포위당한 동안 예레미야는 자신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반복하였다. 즉 예레미야는 바빌론의 멍에를 메라고, 바빌론에 대해서 항복을 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러나 왕과 대신들은 이에 대해서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반기를 들었다. 도시의 정치적 운명이 정해졌다면 구원의 가능성이 아직 있는 것이다(27,12-15; 34,2-5; 38,17-18).




나는 유다 왕 시드키야에게도 같은 말을 전하였다. “너희는 바빌론 왕의 멍에를 메어라. 그 왕과 그 백성을 섬겨라. 그러면 모두 죽지 않으리라. 바빌론 왕을 섬기지 않는 민족에겐 벌을 내리겠다고 하였는데, 너와 너의 백성은 어찌하여 그 벌을 받아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죽으려 하느냐? ‘바빌론 왕을 섬기게 될 리 없다’고 하는 것들은 거짓 예언을 하는 것들이니, 그 말을 듣지 말아라. 내가 똑똑히 일러 둔다. 나는 그들을 보낸 적이 없다. 그들은 내 이름을 팔아서 거짓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면 너희는 그 예언자들과 함께 쫓겨나 망하고 말리라.” (예레 27,12-15)




4.  그뿐 아니라 첫번째 유배(597년: 여호야킴 왕이 바빌론으로 귀양감)가 실행되었음을 유다백성은 기억해야만 했었다. 분명 이 첫번째 유배는 두번째 유배(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있었던 유배)를 피하게 하는 훈계가 되었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교훈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5.  여기서 부정적인 사건에 대한 지혜문학적 해석이 나타난다. 이 사건은 어디에 축복과 저주, 행복과 불행이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체험이 되었고 미구에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삶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하는지를 배우게 한다.






4) 소결론




1.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루살렘의 파국과 관련된 사건들은 위에서 언급한 관점에 따라 인간 역사의 여타의 다른 부정적인 사실과 연관된 사건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경우에 예루살렘은 니느웨(바빌론의 수도)와 같은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2.  여기에서 ‘악’과 ‘불행’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성립된다 : 4,6과 4,18에서 똑같이 הꘝꙜ(라아)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4,6에서는 ‘불행’이라는 의미로, 4,18에서는 ‘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악’이 ‘불행’을 초래하였다는 의미가 되겠다.




“‘시온으로 가는 길에 깃발을 꽂아 지체 말고 다들 피난하라’고 하여 보려무나. 북녘에서 재앙이 밀어 닥친다. 대살육이 임박하였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였다.” (예레 4,6)




“그런 못할 짓을 하다가 이 꼴이 되었다. 가슴에 칼이 꽂히는 이 아픔은 너의 때문이다.” (예레 4,18)




3.  4,14과 4,15에는 ןꕳꘝ(아웬)이란 단어가 역시 똑같이 나오고 있다. ןꕳꘝ(아웬)은 4,14에서는 ‘불의’라는 의미로, 4,15에서는 ‘재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불의’가 ‘재난’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되겠다.




“예루살렘아, 살고 싶거든 못된 그마음을 깨끗이 씻어라. 쓸데없는 생각을 언제까지 품고 있으려느냐?” (예레 4,14)




“단에서 전령이 달려 온다. 에브라임 산악지대에서 흉보가 날아 든다.” (예레 4,15)




4.  이렇게 הꘝꙜ(라아) 즉 ‘악’과 ‘불행’ 사이에 그리고 ןꕳꘝ(아웬) 즉 ‘불의’와 ‘재난’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성립되고 있다. 이 관계는 정의가 표현되는 보편적인 방식에 따라서 성립되고 있다.






2. 예언자의 역할




6,27-30에서 예언자의 역할이 또한 소개되고 있다. 예언자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이제 6,27-30의 단락을 간단히 분석하면서 이 점을 좀더 생각해보고자 한다.


텍스트는 문제가 되는 표현들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학문적인 토론을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참고문헌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비록 텍스트상의 문제점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모두 일치된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단락의 의미는 종합적인 주석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






1) 예언자의 역할을 표현하는 용어들




1.  6,27에서 예언자의 역할, 예레미야의 역할이 언급되고 있다. 예언자는 여기서 (정신부님 시역에 의하면) ‘제련사’로 표현되었다. 또한 ‘망대’와도 관련되고 있고 관찰한다는 의미에서 ‘관찰가’, 무엇을 조사한다는 의미에서 ‘조사가’ 등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백성 가운데서 너를 귀금속 제련사로 내세워 저들의 길을 살펴보고 시험하게 하리라” (예레 6,27 : 정태현 시역)




2.  여기서 ןוֹחꔯ(바혼: ‘제련사’)이란 명사와 ןꖏꔯ(바한: ‘시험하다’) 동사의 변형된 활용형태, 즉  ꚛꘁꖏꔧ(바한타: ‘너는 시험할 것이다’, ןꖏꔯ(바한) 동사의 칼형 완료형 2인칭 남성 단수)가 사용되었다. 또   ןꖏꔰ(바한: ‘망대’)이란 명사도 있다(이사 23,13; 32,14).




“정녕 궁궐은 버려지고 붐비던 성읍은 황량해지며 언덕과 망대는 영원히 짐승의 소굴이 되어 들나귀들의 기쁨이 되고 가축들의 풀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 32,14 : 임승필 번역)




3.  따라서 금속 제련사는 망대처럼 경계하는 기능을 가졌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예언자는 무엇인가 제련하고 관찰하는, 살펴보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귀금속을 세공하는 사람이 도가니에서 금속을 정제해야 하듯이 그것에서부터 순수한 은을 추출해내어야 한다. 이것이 예언자의 소명이다(6,29 : 여기서 도가니에서 금속을 정제한다는 의미에서 ףרצ(차랖: ‘정제하다’) 동사가 사용되었다).




“풀무가 세차게 돌고 납이 불에 담금질을 받아도 제련은 허탕만 칠 뿐이니 악인들이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레 6,29 : 정태현 시역)



4.  이렇게 ןꖏꔯ(바한)과 ףרצ(차랖), 이 두 동사는 죄인들 중에서 그래도 누가 무죄한가를 분별하고 구별해야 하는 재판관의 위엄있는 활동과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다. ןꖏꔯ(바한)과 ףרצ(차랖)은 이처럼 법적 영역에서 재판관의 구별하고 분별하는 그런 은유로 자주 사용되어 왔다.




5.  이제 바로 이러한 임무가 예언자에게 위임되었다. 예언자는 인간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심판의 현존 자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불행하게도 구별하는 행동의 의도는 ‘모두가’(םꗢꗕ 쿨람) 반역자들이요 청동과 철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이다(6,28).




“그들은 모두 고집센 반항자들로서 떠돌이 중상모략가들이요, 구리와 쇠붙이에 지나지 않으며, 모두가 썩어빠진 행동만을 저지른다.” (예레 6,28 : 정태현 시역)






2) 예언 활동의 무익함과 실패




1.  6,29에서 정화시키는 예언자의 활동은 결국 허탕만 칠 뿐이라는 ‘무익함’(אꕵꚋꗛ 라싸아)을 드러내고 있다. 납 찌꺼기들, 즉 ‘악인들’(םיꘟꙜ 라임)이 불에 녹지 않기 때문에 무익할 뿐이다. 예언자가 자신의 활동에 대해 완전하게 항거하고 반항하는 인간적인 현실을 만나게 됨을 의미한다.




2.  예레미야는 사실 동족으로부터 꾸준한 배척을 받아왔다. 청동과 철로 대변되는 그들 앞에 메시지를 전했지만, 무익함(אꕵꚋꗛ 라싸아)으로 예언활동은 끝나게 된다. 예언자의 예언직의 봉사와 그를 통한 노고는 피곤함을 가져왔을 뿐이며 그의 봉사는 전반적인 실패로 끝을 맺는다. 왜냐하면 귀금속 세공자로서 그의 예언활동의 결과는 손에서부터 내버려진 것, 즉 ‘쓸모없는 은’(סאָꗱꗼ ףꘑꗓ 케셒 니마스)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의 손바닥에는 금이 아니라 쓸모없는 은만이 남아 있다(6,30).




“그들은 버려진 은이라 불리리니 주님께서 그들을 버리셨기 때문이다.”


                                                           (예레 6,30 : 정태현 시역)




3.  그러나 아직도 보다 극적인 것이 지속되고 있다. 쓸모없는 것을 가려내는 예언자의 이 활동은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언자를 선택하여 그를 예언자로 세우고 그를 파견하신 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느님이 원하셨던 것이 바로 그 하느님에 의해서 파멸되었다. 예언자의 실패는, 또 역설적이겠지만 하느님의 실패를 의미한다. 45,2-5의 내용이 이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바룩아, 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너에게 말한다. 나는 네가 하는 말을 들었다. ‘아, 나는 끝장이다. 가뜩이나 고생스러운데 야훼마저 나를 괴롭히시니, 나는 한숨 쉴 힘조차 없고, 조금도 안심할 수가 없구나.’ 내 말을 들어라. 나는 세웠다가도 헐 수 있고 심었다가도 뽑을 수 있다. 네가 이제 큰일을 도모한다마는, 그만두어라. 내가 곧 모든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겠지만, 너만은 어디 가든지 목숨을 건지도록 보살펴 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예레 45,2-5)




4.  예언자의 실패는 이렇게 하느님의 실패를 암시한다. 예언자의 활동은 이렇게 무익함으로 끝났는데 그것은 하느님과도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 주석상의 문제를 야기시켰고 해석상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3. 역사의 신비




1) 예루살렘 파국의 모순




1.  분명 예레미야의 예언은 자신의 예언직에 대한 실패를 고백하게끔 한다. 자신의 실존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무익성과 예루살렘의 역사에 대해 근본적인 무익성을 고백하고 있다. 사실 예언자의 설교와 그가 선포한 예고의 실패는 예레미야가 언급한 도시의 역사의 실패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2.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분명 이런 현실은 모순의 역사, 기만의 역사임을 역시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소임과 관련해서 예언자가 자신의 내적체험을 언급하고 있는 20장에서 예레미야는 하느님이 자신을 기만하셨음을 명백하게 단언하고 있다(20,7).




“야훼여, 저는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읍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읍니다. 그래서 날마다 웃음거리가 되고 모든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었읍니다.” (예레 20,7)




3.  예레 4,10에서도 역시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이 말씀에 나는 항의하였다. ‘주 야훼여, 당신이 이 예루살렘 백성을 속이시다니. 꼼짝 못하게 속여 넘기시다니. 칼이 목에 닿았는데도 잘 되어간다고 하시지 않으셨읍니까?’”


                                                                        (예레 4,10)




이 글은 카테고리: 구약성경이야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