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

 

성서에 나타난 죽음의 의미




옛날 셈족의 인간학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희랍의 이원론적 관점과 엄격하게 다르다. 따라서 성서에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를 단순하게 영원히 육체에서부터 분리되는 것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적합한 설명을 위해서는 성서에 나타난 현상에 대한 연구가 요청된다. 우선 생리학적 죽음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신학적인 관점을 언급한 후 죽음이란 개념이 사용된 은유적인 의미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1) 생리학적인 죽음




⑴ 구약성서




1.  옛날 근동지방의 사람들의 경우 삶과 죽음은 두개의 다른 추상적인 실체가 아니었다. 그 보다는 삶과 죽음은 반대되는 두개의 다른 영역이었다. 히브리어로 죽음은 תꕳꗪ(마웨트)라고 표현한다. 이 죽음은 죽은자들의 영역이란 의미에서 공간적으로만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의 힘을 통하여 역동적으로도 체험되는 것이다(호세 13,14).




“내가 이스라엘을 스올의 손아귀에서 건져 내리라.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빼내리라. ‘죽음아, 네가 퍼뜨린 염병은 어찌 되었느냐? 스올아! 네가 쏜 독침은 어찌 되었느냐?’”


                                                                       (호세 13,14)




2.  이스라엘 사람은 죽음을 생리학적 과정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희랍식으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으로 이해하지도 않았다. 그 보다는 오히려 죽음이란 생명의 마지막 상태, 생명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종착역, 달갑지 않은 상태로 약해지는 것, 생명을 잃는 것으로 보았다. 촛불이 서서히 꺼져가듯이, 초가 완전히 녹아 없어지듯이 바로 죽음이란 것은 생리학적으로 이렇게 생명을 완전히 소진하는 것으로 보았다.




3.  그러나 시간이 경과된 후에 비로소 죽음은 자연적인 어떤 것으로 수용될 수가 있었다(시편 90,10). 그리고 사람이 죽어서 공허한 상태를 שׁ꘭ꗾ(네페스: ‘영혼’, ‘혼’, ‘생명력’)가 빠져나간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창세 35,18; 2사무 1,9; 1역대 17,21).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 가듯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시편 90,10)




“마침내 라헬은 죽게 되어 숨을 거두면서 아기 이름을 벤오니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기 아버지는 베냐민이라 불렀다.” (창세 35,18)




4.  사람은 마지막으로 숨을 내쉬고 자신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욥 11,20; 예레 15,9) 경험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생명은 호흡으로 드러나고 사람 또는 짐승의 죽음은 ‘숨’(ꖏוּר 루아흐)이 육체에서 떠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시편 146,4; 104,29; 욥 12,10; 전도 8,8; 12,7).




“그분의 손에 모든 생물의 목숨과 그분 모든 육체의 숨결이 달려 있음을.” (욥 12,10)




5.  이제 좀 후대의 개념으로 ‘피’는 일차적으로 생명력이 있는 것으로 고려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레위 17,11; 신명 12,23을 보면, 피는 생명의 자리, 삶의 자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피를 흘리게 되면 생명, 즉 목숨도 흘러나오게 된다고 레위기와 신명기는 고백하고 있다.






⑵ 신약성서




신약성서는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생리학적인 ‘죽음’(θαναθος)의 현상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도 생명은 하느님께서 ‘영혼’(ψυχη), 혹은 ‘숨’(πνεύμα)을 주실 때 시작된다고 표현하고 있다(사도 17,25). 그리고 죽음은 숨(πνεύμα)을 거두는 것을 말하거나(마태 27,50; 루가 23,46; 요한 19,30) 또는 혼(ψυχη)이 떠나는 것을 말한다(요한 10,11; 15,17; 13,37). 그러므로 숨을 쉬지 않으면 육체는 죽은 것이다(야고 2,26). 만약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서 온다면 그의 숨이 되돌아옴을 의미한다 : “그러자 그 아이는 숨을 다시 쉬며 벌떡 일어났다”(루가 8,55).〔πνεύμα는 ꖏוּר(루아흐)와 동의어이고, ψυχη는 שׁ꘭ꗾ(네페스)와 동의어이다〕






2) 죽음의 신학적 의미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죽음에 관한 일관성있는 가르침이 발견되고 있다. 신, 구약성서 모두 죽음은 죄의 궁극적인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다.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탄의 나라를 쳐이기셨기 때문에 죽음은 이제 신약성서 안에서 가공할만한 의미가 아닌 새로운 의미를 갖게된다.






⑴ 구약성서




1.  죽음의 폭력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무시무시한 불행이다(호세 13,14). 모든 사람은 죽어야 한다. 이것은 인류의 시조의 최초의 잘못과 그에 따른 벌과 자연적으로 연결되어 표현되고 있다.




2.  이러한 결과는 사람이 살도록 창조하신 만선의 하느님이 결코 의도하신 바가 아니었음을 창세 2,9; 3,22은 언급하고 있다. 단지 사람이 하느님의 계명을 어김으로써 죽게 되었다는 창세 2,17; 3,3의 증언과 로마 5,12-21에 나오는 사도 바울로의 증언을 참조할 수 있겠다.




3.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성서에서는 천수를 누린 후(창세 25,8) 혹은 제명대로 산 후(창세 15,15; 판관 8,32)에 죽은 사람을 칭송하고 있다. 




4.  또한 구약성서에는 사후세계(לꔠꚉ 셔올)에 관한 개념이 있었다.






“구약성서 저자들은 לꔠꚉ(셔올)로 알려진 어두컴컴하고 침침한 세계를 믿고 있었다. לꔠꚉ(셔올)은 사람이 죽었을 때, 그의 혼이 내려가는 죽은 자들의 세계였다. 이곳은 인간의 구별(가난한 사람과 부자. 선인과 악인, 왕과 거지 등의 구별)이 없고 상도 벌도 없는 침울하고 어두운 곳으로 이해하였다. 이렇듯 구약의 경우 사람이 죽으면 그 생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לꔠꚉ(셔올)에 내려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으로 여겼다. 여하튼 생명이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약하고 희미한 사람의 형태가 לꔠꚉ(셔올)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초창기 구약성서는 상이나 벌이 현세에 주어진다는 개념을 갖고 있었다. 개인과 집단은 야훼가 원하는 일을 하면 상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만일 누군가가 혹은 집단이 잘됐다 하면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는 표지이고 불행을 당했다면 그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다는 표지로 받아들였다(예컨대 욥기, 시편 22편; 무죄한 이들의 고통). 이렇게 상, 벌은 살아있는 동안 주어지고 사후 לꔠꚉ(셔올)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운명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에 따라 여기서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연결된다. 예를 들어 레위법에 의하며 어떤 남자가 자식 없이 죽었다면 제일 가까운 친족이 그에게 자식을 낳아 주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이 자신의 자식으로 인해 연장된다고 생각하였고 이렇게 죽은 사람의 세계와 산 사람의 세계가 연결된 것이 לꔠꚉ(셔올)의 황량함을 어느 정도 덜어 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가까운 형제가 미망인에게 찾아가서 자식을 낳아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꼭 결혼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이것을 통해서 난잡한 성행위를 허가해 준 것도 아니었다. 일단 그 여인이 임신을 하면 그 관계는 그 남자가 여자와 결혼하지 않는 한 그것으로 끝이 났다. 이렇게 대를 이어준다는 것은 현세적인 것과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여인에게 자식을 낳아주고 그 여인과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 자식은 바로 죽은 사람의 아이로 생각되었다. 이처럼 사후 세계는 לꔠꚉ(셔올)로 해서 희미하고 어둡고 힘이 없는 세계로 생각되었고 현세적인 것이 상당히 강조되었다. 그러다가 후대에 와서 내세에 대한 것이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1학기 강의록 2쪽)




5.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죽음은 육체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생각될 뿐 아니라 모든 종교적인 활동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했다. לꔠꚉ(셔올)과 하느님과의 관계는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이사 38,11).




“나는 또 생각하였네,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을 뵙지 못하고, 이제는 세상 주민들 가운데 한 사람도 보지 못하겠구나” (이사 38,11 : 임승필 번역)




〔여기서 나오는 ‘세상’에 대해 임승필 신부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낱말은 구약성서에서 여기만 나오는 것으로서 본디 중지, 생명이 중지된 곳, 그래서 죽음의 나라를 뜻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몇몇 히브리어 수사본과 타르쿰에 따라 ‘세상’으로 이해한다.”〕




6.  이것은 그분의 무한한 능력과 관련된 주제이지만 그분은 죽은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는 분처럼 묘사되고 있다(시편 88,6).




“저는 죽은 이들 사이에 버려져 마치 무덤에 누워 있는 살해된 자와 같나이다. 당신께서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시어 당신의 손길을 떠나 나간 자들처럼 되었나이다.”


                                                           (시편 88,6 : 임승필 번역)




7.  이와 비슷하게 사람은 죽은 뒤에는 야훼나 야훼 하느님의 놀라운 위협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음을 또한 시편은 시사하고 있다(시편 6,6; 88,13).




“어둠에서 당신의 기적이 만방의 나라에서 당신의 정의가 알려지리이까?” (시편 88,13)


8.  죽은 사람은 하느님의 선하심과 성실하심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으며(시편 30,10; 88,12; 115,17; 이사 38,18) 주님께 흠숭과 존경을 더 이상 죽은 사람은 드릴 수도 없고 그분의 정의로우심을 칭송할 수도 없다(바룩 2,17).




“주님, 당신의 눈을 뜨시고 보소서. 심장이 멈추고 숨이 끊어져 무덤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은 주님의 영광과 정의를 찬양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룩 2,17)




9.  이것이 바로 구약성서 안에서 죽은 사람에 대해서 가장 잔인하고도 단호한 진술이 된다. 하느님을 더 이상 참례할 수도, 칭송할 수도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죽은 사람이 치뤄야 할 가장 잔인하고 어려운 고통이라고 구약성서는 묘사하고 있다. 이 이유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연적으로 야기되며, 하느님의 영원불변한 사랑과 호의의 가장 명백한 증거라고 볼 수 있는 장수만이 이런 공포를 가볍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0.  그러나 후기 유다이즘과 친숙하게 된 묵시문학 세계의 죽음에 관한 개념은 신약성서 안에서 죽음에 대한 결정적인 태도 변화를 가능케 했다. 묵시문학 계통과 중간사 안에서 저작된 작품들, 예를 들면 제2경전이라든가 그리고 외경을 포함해서 이때 죽음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된다.




11.  이 시점에서부터 적어도 일부분의 사람들은 종말론적으로 구원을 의미하는 부흥 또는 부활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통해서 하느님은 죽음을 정복하실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구약의 이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이제 중간사 시대를 거치면서 서서히 극복되고 신약성서에 그 긍정적 의미를 바톤으로 넘겨주게 된다.




12.  구약성서에서 죽음은 모든 고통과 슬픔의 정점이다. 죽음은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하였다. 죽음은 모든 순종을 거스리는 개인적인 죄 즉, 뱀의 유혹으로 야훼 하느님과의 약속을 깨뜨린 것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로부터 나오는 최초의 원죄와 같이 개인적인 죄에서 기인한다(잠언 2,18; 7,27; 21,26; 22,23; 이사 5,14). 반면 장수는 야훼의 계명을 성실하게 실천한데 대한 보상으로 생각되고 있다(신명 30,15-20; 32,47; 바룩 3,14).




13  죄를 범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스스로 시기상조의 죽음과 파멸을 초래한다(시편 55,24; 욥 15,32; 22,16). 그러나 덕, 선행, 자선을 실천함으로써 사람은 자신의 죄를 보상하고 일찍 죽어야 하는 위험에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잠언 10,2; 11,4; 토비 4,11; 12,19).




14  그러나 이러한 교의의 보편화에 대해 강력한 반론이 지혜서 4,7이하에 제기된다. 즉 의인이 장수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요절한다는 내용이다(지혜 4,7-20). 이는 응보의 문제에 대해 보다 성숙한 증언을 반영한다.






⑵ 신약성서




1.  신약의 중요한 관심사는 죽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과 ‘생명’이다. 사도들의 복음선포(케리그마)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왔고 부활을 가능케 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핵심을 이룬다.




2.  그리스도는 죄를 짊어짐으로써 스스로 죽음의 고통을 당하시고 이를 통해 죄를 속죄함으로써 죽음을 없애시고(2디모 1,10) 죽음의 세력 곧 악마를 멸망시키셨다(히브 2,14-15). 그래서 죽음은 이제 속량된 사람 위에 어떠한 위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묵시문학적 개념 안에서 죽음은 불바다에 던져졌으며(묵시 20,14) 그리스도의 승리로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묵시 21.4).






3) 죽음의 은유적 의미




⑴ 구약성서




구약성서에서 죽음은 가끔 영혼이 육체에서부터 빠져 나간다기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 혹은 다음 세상에서 참 행복을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상실을 의미한다(잠언 11,14). 죄는 인간으로부터 인간과 하느님과의 우정 관계를 빼앗고 죽음을 가져온다(잠언 11,19). 더 나아가 거짓과 악으로 탈선한 길은 죽음으로 인도한다(잠언 12,18; 14,12; 16,25; 지혜 1,12).






⑵ 신약성서




1.  신약성서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는 자주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고(요한 5,24; 8,51; 로마 7,9-10; 야고 1,15) 불신과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단죄와 관련되어 사용된다(1요한 3,14; 5,16).




2.  묵시록은 이 경우에 ‘두 번째 죽음’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묵시 2,14; 20,6.14; 21,8). 이 두 번째 죽음, 곧 ‘영적인 죽음’은 회심과 회개를 통한 ‘영적인 부활’에 의해서 극복된다(사도 11,18).




3.  사도 바오로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죄의 상태에서 세례를 통한 은총의 상태로 옮아가는 것을 묘사하기 위하여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한다(로마 6,2-10). 믿는 이들은 죄에 대해 죽어서(사도 2,24)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한다(로마 6,4.8; 6,5; 골로 3,1-4).




4.  사도 요한도 의화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아가는 것으로 묘사한다(1요한 3,14). 믿음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된 사람은 영적인 삶을 누리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리라는 것을 암시한다(요한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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