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서의 형성 과정

 

예언서의 형성 과정




예언자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입으로 전한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공적이고 정치적인 영역 안에서 활동했기때문에 그들의 saying(토막말)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 예로 베델의 사제 아마지야는 아모스의 불길한 신탁을 말 그대로 인용해서 그를 고발했다(아모스 7,11 【본문확인1)). 이 사실은 이미 아모스가 발설한 saying이 아마지야에게 기억되고 있음을 뜻한다(이미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었으나 전달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런가하면 예레 26,17-19에는 미가 3,12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 나온다. 이를 보면 BC 609년에  예레미야가 재판받는데, 이때 예레미야가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되자 재판에 동참했던 어떤 장로가 100년전의 미가 예언자가 발설한 토막말을 인용하여 예레미야를 구출한 사건이 있었다(예레 26,17-19【본문확인】). 이 내용은 미가 예언자가 100년전에 히즈키아 어전에서 예언한 내용이다. 그런데 히즈키야는 미가의 말을 듣고 회심했다. 그래서 본인뿐만 아니라 백성까지도 구했다는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예레미야를 살리려 했다. 즉, 100년 전에 있었던 토막말이 장로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


많은 경우 이런 개별 토막말들이 수집된다. 여러 토막말이 수집된 것이 collection이 되고 이 여러가지 collection이 한권의 책으로 되어 예언서가 된다. 이 개별 토막말과 토막말의 수집은 그 예언이 발설된 직후에 표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예로서 예레 36,32이하를 들 수 있다. 605년 예레미야는 20년에 걸쳐 자신이 정한 토막말을 전하면서 다시 쓰게 했다. 이 토막말은 여후딧에 의해서 여호야킴왕에게 읽혀졌는데 왕은 이것을 찢어서 불에 던졌다(예레 36,21-23【본문확인】).  그러자 32절을 보면, “예레미야는 다른 두루마리를 구해 네리야의 아들 서사 바룩에게 주고나서 유다왕 여호야킴이 불에 태운 책에 적혀 있던 말을 그대로 다 불러주고 그 내용과 같은 많은 말을 불러주어 적게 하였다”. 이것은 토막말이 즉시 기록되었다는 것을 추정케 한다. 또 불에 태워진 내용 외에 더 많은 토막말이 확장되어 기록되었음이 나타난다. 




이렇게 예언자들이 말한 토막말들이 글로 기록된 것은 비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즉 예언자가 메시지를 구두로 전할 수 없을 때 사용된 비상수단이었다. 그 예로써 아모스는 사마리아에서 추방된 직후에 저술에 의지했다 (7,12).  또한 예레미야서도 예레미야가 성전 경내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금지되었음을 전하고 있다(36,4-6). 그래서 이제 예레미야도 글로 쓰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예언서 수집들의 저술은 미래를 예견하는 예언, 앞을 내다보는 예언을 보증해주는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그 예언의 성취여부는 그 예로서 이사 30,8 이사30,1-3을 들 수 있다. 또한 정치적, 군사적 재앙이 위협할 때, 예언을 보존할 필요로 저술하기도 했다. 이 사실은 왜 예언이 BC 8세기 이후 앗시리아의 위협 하에서 서서히 서술되기 시작하였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이스라엘에서 예언이 한창 번성 중일 때 거기에는 단지 소수의 예언자 집단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우리는 이 예언자 집단에 대해서 약간의 정보 밖에는 없다. 따라서 이런 제자들 그룹 없이도 왕궁이나 성전 밖에서까지 예언자들의 saying이 보호되고 전수될 수 있었는지의 여부를 알아내긴 힘들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언서의 형성 첫단계는 예언자가 발설한 내용을 기억하고 수집하고 이 작은 수집들을 기록한 것이었다. 즉 기억과 수집, 그리고 기록한 것이었다. 이들 중 어떤 것은 질서정연하게 어떤 통계에 의해서 함께 모아졌다. 예를 들면 반복되는 후렴구에 따라서 모아진 것이 있는데, 이사 5,24-25; 이사 9,7-10,4; 아모 4,6-10이 여기에 해당된다. 또한 시작하는 양식이 똑같은 것에 따라서 모아진 것도 있다(예를 들면 이사 5,8-24【본문확인】: 5장 5.8.11.18.20.21.22절에서 모두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로 시작된다). 그런가 하면 공통된 주제를 모아놓은 것도 있다(예레 29,9-40). 또 특수한 역사적 사건과 연관지은 내용을 수록해 놓은 것도 있다(이사 7,1-8,15). 이것은 시로-에프라임 전쟁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이다.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이러한 수집들은 의미 있게 정돈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러한 것들은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예언서의 전기라든가 자서전과 함께 확장되었다. 즉 편집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면 이사 2,1-5; 미가 4.1-5에 나오는 내용은 기원을 알 수 없는 토막말이라고 추정되는 데 이러한 것이 단순히 어떤 것에 연결되어 하나의 단위를 형성하여 나타난다. 언제 기원된 것인지 잘 모를 정도로 나오는데 편집자에 의해서 이러한 것이 배치되고 있다.


근동 다른 곳에서 이스라엘에서의 예언적 활동은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으로 위험한 동안에 왕성하게 나타났다. 예를 들면 근동지방의 경우 마리(Mari)의 신탁은 그 국가가 바빌론의 왕 함무라비에 의해서 정복되기 이전에 즉, 왕조가 건재하던 마지막 수십 년간에 번창하게 된다. 격동기에 예언이 번창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마리는 유프라테스 계곡의 옛 도시국가로서 기원전 1765년경에 함무라비에 의해서 멸망되었다.)


이스라엘에 경우 예언 활동이 집약되어 나타나는 것은 역시 격동기였다. 정치 군사 문화적 격동기였는데 연대적으로 볼 때에 BC 640년-586년, 이사야 예언자 때에 즈음에는 BC750년부터 소급해 올라갈 수 있다. 마리 왕조와 비교하여 볼 때 거의 1000년 이후에 이스라엘에서 예언활동이 왕성했다. 아모스서와 호세아서의 어록의 수집과 편찬은 기원전 722년 사마리아 즉, 북조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유대아적인 응답의 한 관점에서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450년경 예루살렘 멸망(BC 587)이후 약 130년 이후에 아모스서와 호세아서가 북조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 그 관점에서 서술하였듯이 마찬가지로 기원전 450년경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팔레스티나 유대인들에 의해서 이러한 수집과 편찬과 교정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예언서를  수집하고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서 그것을 손질하는 이러한 작업은 후대 유배 이후기간에도 예언적 활동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유배 이후 기간에는 예언이 과거를 되돌아보는 회상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즈가리야 1,4-7,7).


그런가 하면 이전 예언의 해석 방향을 종교적 영역 안에서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해석하고 이해하게 된다.다니엘서 9,1-2의 내용은 이전에 발설된 것을 이제 새롭게 이해 하게 되는 그러한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메대 족속 출신 아하스에로스의 아들 다리우스가 바빌론의 임금이 되던 해였다. 다리우스 제 일년에 나 다니엘은 성서를 읽다가 야훼께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에서 예루살렘이 돌무더기로 남아 있을 햇수가 칠십 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다니엘 9,1-2)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제 다니엘 예언자가 성서를 읽다가 깨닫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예레미야 예언서가 형성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한 해설 즉, 70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후에서 다니엘 예언자가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이전에 예언된 예레미야의 예언을 해석하는 방향에서 종교적인 가르침을 주려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모습을 갖춘 후기 예언서는 수세기에 걸쳐서 점진적으로 수정되고 보완되고 확장된 과정의 산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사야 예언서라 하여 이사야 예언자가 직접 쓰고 그 당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1, 제2, 제3 이사야 예언서라고 불리울 만큼 시대적으로 약3-400년에 걸쳐 이 예언서는 집필되었다. 이렇게 점진적인 수정 보완 확장을 거친 것이다.


이 과정 안에서 포함된 수집, 편집, 손질 등은 예언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데 그들은 비판적으로 예언서를 작성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예언의 전수와 손질과정은 그들이 속해있던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서 즉, 야훼신앙을 돕기 위한 필요에 의해서 쓰여졌기 때문에 역사적 문제가 중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누구의 작품인가, 언제 이것이 발설되었는가, 이러한 것에 관심이 없었고 관심은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서 주어졌다. 그들은 야훼의 눈으로 역사적인 문제를 거의 무시하고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서 이 예언을 인용하였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많은 예언서에 여러가지 손질을 거친 결과로 인해 심판 뒤의 구원이라는 형태가 현저하게 등장한다. 심판 뒤의 구원은 마지막 성취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그 좋은 예로서 아모스서 9,11-15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아모스서는 주로 심판에 관계된 것이었다. 그런데 9,11-15을 첨가함으로써 심판을 통한 구원이라는 도식 안에 아모스 예언서를 편집하게 된다.


따라서 예언서를 이야기할 때 예언서는 그 공동체의 신앙의 문제를 반영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미 언급된대로 역사성 문제는 상당히 복잡하다. 그래서 하나의 예언으로 이해하고서 역사적인 어떤 사건과 연결지을 때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저 어느때 일어난 사건이라고 모든 것을 꿰 맞추는식으로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같은 장이라 하더라도 같은 장에 나타나는 절도 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음을 전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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