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신학(호세아의 개인 체험)

 

설화신학(호세아의 개인 체험)


다음으로 호세아의 개인체험은 설화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의 설화가 전하고자 하는 신학이 무엇인가? 이것은 호세아의 개인체험과 직결된다. 호세아 1,2b-9 그리고 2,4-15 ; 3,1-4까지의 부분이 결과적으로 예언자의 개인적인 체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은 앞에서 이미 지적하려 하였다. 예언자는 야훼의 명령을 받았거나 혹은 이러한 명령을 내리시는 하느님께 대한 충동을 받았다. 그러한 영감을 받았다. 즉, 매음녀를 취하여 -여기서 취한다는 것은 법적으로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동사가 사용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자식들을 받아들이라는 명령 또는 충동, 영감을 받았다. 이 자식은 그녀와 함께 부부생활을 통하여 낳은 자식인지 아니면  그녀가 이미 낳은 자식들을 의미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호세아가 야훼의 명령을 개인적인 감정의 동요없이 단순히 순명의 행위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결론이다. 호세아 1장에서는 어떤 순간에도 사람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단순하게 그녀와 자식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이름을 붙이라는 야훼의 명령이 있다. 호세아 2,4-15에 감정의 흐름, 정서적인 상황은 1잔과 다르다. 1장에는 단순하게 어떤 사실을 지시하는  데 반하여 2장에는 분명히 감정의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위협, 울분, 고난이라는 것이 표현되고 또한 2장에서는 어떤 열망과 처벌이 가득 찬 경직된 Text로 나타나고 있다. Text가 어떤 이기주의적인 감정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는 인상은 무시할 수 없다. 여기서 יꗉꗿאָ(아노키-‘나’자신, 1인칭 대명사)로 표현되는 예언자는 자기 곁에서 삶을 같이 해 온  이 여인에게 이와 같이 많은 호의를 베푼 것에 대하여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여인은 다른 정부들을 쫓아 도주하였을 것이다. 이 Text는 예언자가 베푼 물질적인 호의, 선물을 강조하고 있다. 예언자는 모든 것을 주었다. 옷, 식량, 물과 포도원을 주었다. 그리고 10절 후반부를 보면 금과 은까지도 주었다. 이렇게 물질적인 모든 것을 호세아는 그녀에게 주었다. 호세아가 그녀에게 베풀지 않은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었을 것이다. 바로 뜨거운 사랑이 빠졌을 것이다. 그 여인은 다른 남자에게서 호세아가 주지 않았던 그 사랑을 만났던 것 같다. 이 사실을 아마도 호세아 3,1이 시사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정부와 놀아난 아내, 호세아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던 사랑을 다른 곳에서 찾았다. 이제 예언자는 자신이 여인에게 베푼 호의와 선을 되돌려 받기를 원하고 있다. 아내를 다시 찾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Text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16절까지 아내를 다시 찾겠다는 언급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 2장에서 드러난 감정의 흐름은 모욕적인 상처를 입은 사람의 경우처럼 분명히 울분과 분함에서 발견되는 거의 증오에 가까운 복수에 대한 열망이다. 8-9절은 이러한 감정과 직결되어 나타나고 있다. 분명히 증오에 가까운 복수가 표현되고 있다. 만약 그녀가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 구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도 본래의 고유한 의미로 그녀를 취할 수 있도록 그녀가 돌아오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앞에서 우리가 살펴 본 문제, 우리에게 문제를 야기시켰던 9b, 9절의 후반부는 이 관점에 따라 Text의 단일성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인은 첫번째 남편에게 돌아올 것을 결심한 것이 아니라, 예언자가 처벌에 관한 계획과 함께 이 여인이 마지막에 결정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밖에 없다고 상상한 것이었다. “나에게 첫번째 남편에게 돌아가는 것 이외에 다른 해결책이 남아 있지 않다”라는 표현이 될 것이다. זאָ יꗛ בוֹט יꗑ(자 이제 왜냐하면 나에게 이것이 좋기 때문이다). 이 표현은 호세아가 스스로 남편으로써 어떤 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 여인이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호세아가 남편이라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이렇게 Text는 깊은 노여움과 함께 종결되고 있다. 바로 הꖎꗎꚂ  יꚕꔠꕵ이 15절의 마지막이다. – “그러나 그 여자는 나를 잊어버렸다.” 이처럼 상당히 깊은 노여움과 함께 Text는 끝난다.


이렇게 2,4-15은 피할 수 없는 파멸과 예언자 측에서의 사랑의 실패, 자신의 삶에 대한 실패에 대한 어조로써 마무리되고 있다. 모든 처벌들은 아마도 상당히 오래 전에 그로부터 도망친 이 여인을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데 호세아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쉽게 상상토록 한다. 이 Text는 어떤 확실한 기간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어려운 상황을 관대하게 인내한 후 자신의 삶의 장을 결정적으로 정리하기로 결심한 순간에 비하된 한 남자의 폭발된 감정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분명 호세아도 암시적으로는 자신의 패배를 시인하고 있다. 만약 그녀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면 현재 이 여인은 존재하고 있지 않다. 가까이에 있는 여인이 아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으며 이미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는가?라고 질문되지만 그렇게 까지는 표현상 완전하지는 않다. 예언자의 메시지를 듣고 있는 주위의 군중들은 머리를 흔들면서 이야기할 것이다. “불쌍한 남자”라는 표현,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마지막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토대로 해서 3장의 드라마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조금 흐른 것 같다. 아내는 아직까지도 그에게 돌아오지 않은 것 같다. 2장에 나타나는 처벌에 대한 정당한 주장들이 이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호세아는 그녀를 내심으로 단념하고 버린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녀를 사랑하였다면 그의 마음으로부터 이러한 미움을 없애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노력은 그녀를 불러들이는데 성공하였을 것이다. 분명 사랑은 배움과 교감을 통해서 커 간다. 구체적인 표현을 통해서 사랑은 키워지고 가꾸어 나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호세아는 자신의 고요함과 평안함을 되찾고 자신을 다시 정당화하고 있다. 즉 “그녀는 나에게 적당하지 않았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시점에서 야훼는 호세아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내리신다. “가서 이제 참으로 간음녀인 이 여인, 그러나 다른 남자로부터 사랑받았던 이 여인을 사랑하라”는 야훼의 말씀이 내려진다. 호세아는 아마도 이혼한 상태, 절연한 본래의 고유한 부인을 돈으로 구입해야 한다는 모욕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신명기 24,1-4에는 다음과 같은 법조문이 있다(신명 24,1-4 참조). 신명기 24,1-4에 의하면 호세아의 이런 행동은 불법이다. 이미 이것이 율법으로 선포되어 호세아가 알고 있었다면 결국 이 법조문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호세아가 고멜에게 언급한 말들은 이제 분노의 말이 아니지만 동시에 독설도 아닌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당신은 내 아내니, 다른 남자와 어울려 불의한 관계를 맺지 말고 들어 앉아 있으시오. 그렇게 오래 지낸 뒤에야 당신과 한 자리에 들리다”(호세아 3,3). 여기에 보면 부드러운 사랑의 고백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독설도 아니다. 야훼께서 호세아가 고멜에게 가까이 가서 용서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 야훼는 가장 커다란 주제를 회상하여야 했다. 그것은 바로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לꔞꙜꚁꖹ יꗽꔶ־תꔟ הוֹהꖾ תꔨꕞאַꗖ)는 그러한 명령으로 주어진다. 따라서 호세아의 이러한 행동은 야훼의 사랑의 표현, 야훼의 사랑이 계시된 것이 아닌 그 보다는 호세아를 설득시키기 위한 주제의 야훼의 사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느님의 사랑이 계시된 것이 아니라 호세아를 설득시키기 위해 사용된 야훼의 사랑이라는 측면 안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호세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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