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적인 신학적 내용
아모스서의 예언은 근본적으로 야훼에 대한 선포(복음)이다. 특별히 야훼가 인간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하는 이 문제를 아모스는 자기의 관심사로 여겼던 것이다. 야훼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어떻게 하느냐하는 것을 보는 각도는 정의이다. 히브리어로는 טꚉꗬ(mishpat), 즉 드러난것, 하나의 가는 길,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공개적인 것을 이름이다. 그러나 호세아 예언자와는 달리 계약이라든지 또는 법이라든지 또는 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준 충실성이라든지 등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호세아는 끊임없이 조상들의 신학적인 체험들을 근거로 해서 그것을 다시 생활화시키고 그것을 근거로해서 다시 광야의 시대로 가는 작업을 했다면 아모스는 그렇지 않다. 아모스는 ‘다른 민족도 야훼께서 이끌어 내셨다’라고 하는 보편성을 띤 정의를 내세운다. 여기에서 출발해서 나중에 사회정의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 정의를 구분한다면 야훼와 이스라엘의 과거의 관계에 입각해서 나오는 법이나 ‘הꙜוֹתּ(torah)’에 각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나타나는 불의(不義), 이것에 반하는 원천적인 정의이다. 그러므로 호세아 예언자가 역사를 근거로해서 어떤 선포성의 내용을 추론하는 것과는 다르다. 호세아는 끊임없이 이스라엘의 광야체험, 시나이 체험등을 자꾸 상기시키는 작업을 한다면 아모스는 그렇지 않다. 또 호세아서와는 달리 야훼께 대한 어떤 다각적인 표현들이 별로 없다. 물론 9,4; 1,8에서 야훼가 백성에게 관여하는 표현들이 조금씩 나오며 그런 내용을 통해서 야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기의 힘을 드러내는 것은 나타나지만 역사적인 맥락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관계의 맥락 이것을 근거로 해서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은 아니다. 또 아모스의 경우는 주님이신 야훼의 개념이 비교적 적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 역사를 근거로 한다면 항상 계약이 나타나는 것이고 계약을 근거로 한다면 야훼는 이스라엘의 주님이시다하는 것이 그 계약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모스서에서는 그런 역사적인 것을 근거로 하지 않기 때문에 ‘야훼는 주님이시다’라는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아모스는 야훼에 대해서 중심을 이루는 반면에 다른 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다른신과 비교를 하지 않는다. 이사야서와는 달리 절대적인 야훼를 생각한다). 또 가나안 땅을 약속하는 즉 가나안 점령의 전승도 나타나지 않는다.
아모스서는 우선 심판을 통한 당신의 정의이다. 계약에 입각한 충실성이라든지 그런 의미의 정의가 아니다(3,2). 따라서 구원사적인 의미의 전승이 적다. 만일 그런 것을 얘기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불충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써 먹을 뿐이지 야훼가 인간에게 긍정적으로 무엇을 한다는 점에서 구원사를 이용한다는 것은 아주 드물며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했느냐는 아모스의 경우 절대적인 야훼이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하시는가 하는 것이 크게 부각된다.
절대적인 야훼가 무엇을 할때 그 중개자는 누구냐? 아모스의 경우, 중개자는 예언자이며 예언자를 통해서 시도하려는 것은 아모스의 경우는 심판이다. 가장 평화스런 시대에 야훼의 심판에 대해서 얘기한다는 것이 역설적인 것이다. 이러한 심판은 심지어 구원사에 입각한 역사까지도 별로 의미가 없을 정도로 엄격한 심판이다(1,8; 2,13; 3,2; 3,15 심판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야훼의 예언자로서의 아모스는 심판을 어떻게 선포하는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미래란 곧 이스라엘의 끝을 의미한다. 심판의 모양으로서 지진이라든지, 전쟁이라든지 또는 귀양 비슷한 징벌(7,11) 등의 사회적이고 자연적인 재앙을 선포함으로써 곧 미래가 부정적으로 다가옴을 나타내고 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그런 심판을 받고 남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는 얘기가 별로 없었으나 후대에 남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는 얘기를 붙임으로써 아모스가 결코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는 해석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후대에 붙은 것이며 아모스의 기본 메시지는 심판, 징벌 이런 것이다. ‘살고 싶으면 야훼를 믿어라.’ 등은 나중에 붙은 것이다. 미래에 대해서 그렇게 심판하는 까닭은 현재의 이스라엘의 생활 때문이다. 현재 이스라엘에 대해 분석하면서 나타내는 것이 사회비판이다. 곧 다가올 이스라엘의 종말은 결코 현재에 잘못했기 때문에 생긴 인과론적인 종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이다라고 아모스는 얘기한다. 이렇게 얘기한다면 아모스의 선포는 역사를 볼 때 결코 인과론적인 흐름으로 본 것이 아니라 야훼가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하느냐 하는 관점에서 신학적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결국은 상급도 은총도 늘 하느님의 개입으로 온다고 하는데 아모스의 경우는 벌도 하느님의 개입으로 온다고 보고 그것을 절대화시킨다. 이는 현재 나타나는 불의가 지니고 있는 절대성격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절대성격으로 나타난 표현들이 심판이다. 아모스의 관전에서 본다면 전쟁이라든지 여러 재앙은 역사적으로 잘못 이행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렇게 된다라는 역사학에서의 인과론적인 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개입으로 나타난다. 이때 이 중개역할을 하는 것중의 하나가 경신례에 대한 비판이다. 이 경신례에 대한 비판은 사회적인 비판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경신례가 값이 있을려면 사회적인 정의, 인간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아모스의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아모스시대의 사회불의를 이렇게 얘기한다. “초기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형태가 그 시대에 나타났고 그것을 파악한 사람이 아모스다.”
사회불의의 대표적인 것은 바로 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것이다.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단순히 도움을 받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오히려 착취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회 안에서 계속 옆으로 밀려나는 사람들 그리고 가운데 사는 사람들, 소위 주류와 비주류의 사람들을 아모스의 관점에서 입각해서 본다면 거기에는 가난한 자에 대한 억압이 사회적으로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이루어진 억압으로 인해 경신례와 차단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볼 때 가난한 자에 대한 억압을 오히려 정당화시키고 마음편하게 만드는 것이 경신례로 나타난다.
하느님의 심판이 인과론적으로 역사학적으로만 이어지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만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가난한 자에 대한 착취를 폭로하는 것은 인간이 포악성, 폭력성을 폭로시키는 것이다. 아모스서는 하느님이 가난한 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찾아내게끔 한다. 가난한 자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는 창조의 질서가 파괴된다는 점에서 이론적인 근거가 있다. 그래서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착취한다는 것은, 환경론으로 말한다면 종(種)이 얼마남지 않은 동물이나 식물을 없애버리는 그러한 과정과 비슷한 것이다. 또 가난한 자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볼 때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한계성, 그것을 늘 우리는 죽음이니 피안의 세계로 이해하는데 나중에는 인간이 지기고 있는 사회적인 한계성을 하느님이 수용하고 그 어두움의 악순환을 폭로시키려고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아 하느님은 저 멀리 계시고 인간은 하느님에 대해서 무언지 모르겠다’라는 식이었는데 그것에 대한 폭로는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야훼가 내려와서 이스라엘을 끌어냈다는 그런 차원에서. 죽음에 대한 폭로, 죽음 뿐만 아니라 한계에 대한 폭로도 예언자를 통해서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사회적인 악순환에 대해 폭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죽음이라든지 피안의 세계라든지 이것으로 국한시켜 가지고 어두움의 악순환만을 폭로한 것으로 국한시킨 것이다. 거기에서 하느님의 이런 아모스를 통한 예언이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의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란 결국 사회적으로 본 어두움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라는 것이다.
선포의 내용 가운데 이스라엘의 Identitas가 있다. 3,2를 보면 예외적으로 한 번 나오는 ‘너희들을 내가 선택을 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얼핏 보면 이것은 구원사적인 것을 연관시키고 있는듯이 보이지만, 이는 구원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너희들이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개입을 규정짓는 것으로 나타난다(따라서 이 심판이란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하느님의 구원을 드러내는 계시의 대상-주체-일 뿐 아니라 바로 심판을 통해서 하느님의 정의를 나타내시고 그 때문에 이스라엘을 외면하시는 야훼의 모습을 반영하는 주체인 이스라엘을 부각시킨다). 이 이스라엘이 긍정적으로 은총만 반영하는 주체만이 아니라 야훼의 심판도 반영하는 주체라는 것을 알려줌으로해서 아모스시대에 와서 야훼는 이스라엘이 암울하다는 것을 선포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선택되었다는 것은 선민으로서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악이 얼마나 심각한가 하는 것을 알게하는 주체로서 선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모스의 선포 내용 가운데 다른 민족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이민족들이 늘 이스라엘을 괴롭혔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괴롭힌 적은 있지만 그것이 근거가 되서 심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이스라엘보다 강한 민족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얘기할 뿐이지 반드시 과거에 이스라엘을 괴롭혔기 때문에 인과론적으로 심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아모스의 관심은 국내 뿐 아니라 국외의 외교적인 차원에서도, 약한 민족 또 강한 민족에 대한 대비를 통해서 약자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이 역사적으로나 대국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나중에 보겠지만 얼른보면 마치 이스라엘을 괴롭혔으니까 하는 식으로 벌을 해석할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선 아모스서의 신학적인 관심은 야훼는 유일한 신이다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뿐 아니라 세계 역사를 주관하는 신이다. 이것이 크게 부각된다. 그 다음에 과거, 미래를 통털어서 주관하는 신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데에 있어서 현재나 과거의 잘못을 이야기 하지만 결코 그것 인과론적인 결과라기 보다는 야훼의 절대적인 개입을 신학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종말론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 종말론적인 성격은 야훼의 역사에 대한 절대권리, 유일한 신이란 개념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이 곧 역사의 끝이라고 얘기한다. 따라서 지금까지 구원사를 믿고 까불던 이스라엘에게 아모스는 구원사가 별게 아니다라는 것을 얘기한다. 그것을 드러내는 대상(주체)은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구원사라는 것이 종말론적인 심판의 시기에 와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위치는 다른 민족보다 독특한 것이다. 이런 결과로 말미암아 결국 이스라엘이 구원의 주체로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나타난 구원을 전세계가 이어받는다라고 할 때, 이점이 보편성을 지닌다면 부정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즉 심판은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구원과 같이 그 보편성에 있어서 다른 민족에게도 하느님의 심판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모스는 당시 여로보암 2세 시대의 사회비판을 신학화시키면서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새롭게 본다. 그것은 구원사 자체를 신학적으로 부정한다기 보다는 구원사 자체가 지니고 있는 잘못될 수 있는 가능성을 소극적인 측면에서 지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긍정적인 측면에서 이것을 아모스가 얘기한다면 여기서 벗어날 길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이 야훼가 유일한 신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이 사회의 불의를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보통은 이 사회의 불의를 제거하면 곧 평화가 올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 또한 인과론에 머무는 것이다. 불의를 제거한 다음에 오는 평화는 야훼의 절대성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불의를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데에 있어서 하느님이라는 절대적인 개념 없이는 안된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