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들어라. 이스라엘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두고 부르는 이 만가를.
§원문 : 이스라엘의 가문아 내가 너희를 부르는 만가를 부르는 이 말씀을 들어라.
。‘들어라’와 ‘말씀’을 사용함으로서 청중들에게 주목을 하도록 하는 기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2-3절 개관
보통 만가를 ‘부른다’는 얘기가 ‘목소리를 들어 올린다’는 동사를 쓰고 목적어로 ‘만가를’ 누구에게는 ‘לꘝ(‘al)’을 쓴다. 그런데 이것은 예레 7,29; 9,9; 에제 19,1; 21,17; 27,2.32; 28,12; 32,2에도 나온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징계를 한다고 할때 예언자가 그 징계의 내용을 이 만가의 형태로 얘기한다. 즉 징계를 얘기하는 관용구라고 말할 수 있다.
2절
처녀 이스라엘이 죽었구나.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구나. 그 쓰러진 곳이 타향도 아니건만 일으켜 줄 사람 하나 없구나.
§번역 : “처녀 이스라엘이 넘어졌구나.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구나.”
。‘처녀 이스라엘은 땅에 쓰러져서 일으켤 줄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땅에 넘어졌다’ – 보통 전쟁에서 병사들이 칼에 쓰러지고, 적군에게 당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지칭한다. 그런데 ‘넘어졌다’ 할 때에는 동사 하나만이 쓰여졌기 때문에 어떤 배경에서 죽었는지를 알수는 없고 다만 현재 이스라엘이 당한 상태만을 알 수 있다. 이런만가의 내용, 죽음의 송가의 내용은 이스라엘 역사에 여러번 나온다. ‘넘어진다는’ 것이 모든 텍스트에서 중요한 것이다. 넘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2사무 8,19(요나단이 죽었을 때), 예레 9,21(칼로 말미암아 넘어졌다)가 나온다. 따라서 전쟁에서 상대편에 의해서 쓰러진 것을 말한다.
‘처녀 이스라엘이 죽었구나’,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구나’라는 이런 표현들은 전쟁의 배경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흔히 여자, 어린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처녀 이스라엘이 쓰러졌다’는 것은 어려운 처지에 처하게 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임에도 불구하고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역사로 볼 때는 이스라엘이 어려웠을 때 야훼가 도와주었다. 처녀 이스라엘은 약한 사람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야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호세아의 부부간의 관계를 연상하게 한다. ‘땅위에 쓰러졌는데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라고 표현함으로서 ‘다른 데도 아니고 자기 땅에서 쓰러졌는데’라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귀양을 간 것도 아니고, 적이 와서 쓰러뜨린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 그래서 이것은 한편으로는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적인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망해가는데도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자체로 넘어진 것을 연상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와줄 사람이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나타낸다. 이것이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입장에서 노래를 부른 것인지 아니면 이미 당했기 때문에 노래를 불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일 아모스 예언자가 활동한 이후에 아모스의 제자들이 이것을 보았다고 한다면 곧 다가올 일을 지칭하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같은 시기에 나타났다고 생각한다면 망한 후에 남쪽에서 이스라엘을 애석해 하면서 부른 것이 아닌가 하고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아모스 예언자가 말씀하신 것을 제자들이 곧 이어서 모아 놓은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3절에 이어지는 야훼의 권위에 의해서 1.2절을 3절과 연결시켜서 얘기하기 때문이다. 야훼의 권위에 의한다는 내용은 물론 1.2절과 내용은 다르지만 기능면에서는 같다.
‘이스라엘이 죽었다’는 등등의 얘기가 3절의 야훼의 말씀에 의하면 전쟁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대항할 능력이 없는 이런 상태이며 이것을 본다면 이것은 이스라엘이 망해가는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고 따라서 망한 다음에 그것을 해석하는 차원에서 남쪽에서 불렀다고 보는 것은 별로 바른 생각이 아니다.
3절
천명이 출정하던 성읍에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출정하던 성읍에 열 명만 남으리라.
。이스라엘의 군대 조직이 천명 단위, 백명 단위였다(열왕기 참조). 내용으로 보아서는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했음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 얘기와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관념상으로는 같은 얘기이다.
§원문 : ‘백명이 출정하여 열명만 이스라엘 가문에 남으리라.’ – 원문이 이렇기 때문에 1절에서는 ‘이스라엘 가문아, 이 말씀을 들어라’하고 ‘이스라엘 가문’이 맨 끝에 나타난다. 표현은 다르지만 관념상으로는 같은 것이다. 전쟁의 동기, 배경을 통해 얘기하지만 죽었다는 것이 중요하게 나타난다.
4-5절
나 야훼가 이스라엘 가문에게 선고한다. 살고 싶으냐? 나를 찾아 오너라. 베델을 찾지 말고 길갈로도 가지 말고 브엘세바로도 건너 가지 말라. 길갈 주민은 끝내 잡혀 가고 베델은 빈터만 남으리라.
。4-5절은 그 성격으로 보아 예언 서클에서 나온 특징도 있다. 베텔, 길갈, 브엘세바는 성소를 의미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1-3절과 연결시켜서 ‘어떻게 산다는 얘기가 나오는가?’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한다. 또한 ‘שׁꙜꕏ(darash)’라는 단어가 예언자들의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쓰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 살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또는 5절을 근거로 한다면 예언자들이 경신례에 대한 제재가 아닌가하고 얘기도 한다.
。1-3절과 4-5절을 같은 아모스의 말씀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가? 1-3절은 백성의 영도자급에 대한 전적인 멸망을 얘기하는 것이고, 4-5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 길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구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아모스에서는 지도부와 백성을 분류하는 것은 근거가 없다. 둘째 견해는 합쳐서 보는 견해인데 이는 야훼가 벌을 주시려고 하시다가도 얼마든지 자유로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신 데에 근거한다. 그래서 여기 이스라엘을 이끌어 오는 백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롭게 행동을 하시기 때문에 세번째 의견은 살아 남을 길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결국 살 수 없다는 것을 5절에서 확인하기 때문에 문학적인 기능으로 보아서 역설적인 방법에 불과한 것이라고 얘기하는 의견이 있다.
。그런데 שׁꙜꕏ 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예언서 전승에 의하면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그 자체가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5절을 통해서 4절이 무가치해지는 것이 아니라 5절은 오히려 4절을 어떻게 실천에 옮길까 하는 것을 부정적인 방법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5절은 멸망이 되는 원인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1-3절의 멸망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야훼의 뜻을 찾기보다는 외적인 경신례를 믿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베델 , 길갈, 브엘세바 등의 성소는 이스라엘의 북쪽 국가에 있어서는 야훼를 만날 수 있는 성소로 대대로 이어져왔다. 그런데 그런 성소가 폐허가 된다는 것은 경신례를 통한 하느님께 대한 접근은 별 의미가 없음을 암시하며 그럼으로써 강조되는 것은 야훼의 뜻을 찾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4-5절은 아무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 된다. 이것을 관념적으로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이 외부로부터 침입을 받을 때, 전쟁의 결과로 멸망을 할 때 그때에도 근본적으로 야훼의 뜻을 찾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한 결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살 수 있다’ – 앞의 ‘일으켜주다’와 연결시킬 수가 있다. 단순히 추상적인 삶보다는 넘어 졌을 때 일으켜주고 넘어지지 않게 하는 그런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넘어지지 않게 하는, 죽지 않게 하는 기능도 이 문맥 상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야훼의 뜻을 찾는다는 것은 이 ‘죽음의 송가’에 있어서는 바로 죽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가리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야훼의 뜻을 찾는다’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야훼께 돌아가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4-5절은 1-3절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래도 살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베텔, 길길, 브엘세바에 가봐야 소용이 없다. 때문에 어떻게 하면 야훼의 뜻을 찾을 수 있을까가 문제로 남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