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 받아라’(hoy)에 대하여

 

※‘저주 받아라’(יוֹה, hoy)에 대하여


   이것은 하나의 관용구로 절망이나 저주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어디에서부터 나왔는가? 


   1) 예언자가 쓰는 저주의 יוֹה는 경신례 차원에서 쓰이던 저주를 변경시킨 것이었을 것이다.  그 예로는 신명 27,15-26까지를 들고 있다. 


   2) 이 관용구는 만가에서부터 나온 것으로서 거기에 슬픔을 나타내는 호이를 넣어서 예언자들이 자유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개인적으로 체험한 것이 많이 들어 있다.


   3) 이 저주의 יוֹה에는 대개 그 다음에는 ‘이러이러한 사람은 저주받아라’하고 복수 명사 분사문 또는 그냥 명사가 나온다.  이렇게 본다면 주어의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교육적인 목적이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지혜문학적인 배경이 있지 않았을까?  이런 의견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한다면 우선 여기 나오는 יוֹה는 분명히 신명 26,15절과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아모스서 이외에도 여러 군데에서 많이 나온다.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רוּראָ(’arur)와 연관은 있지만 그래도 이 יוֹה는 나름대로 독자적인 전통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아모스서 뿐 아니라 저자가 다른 텍스트에서도 여러 군데에서 나올 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50여번 나오기 때문에 רוּראָ라는 단어로 연역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만일 서로 연관이 있다면 רוּראָ라는 저주의 표현도 יוֹה라는 표현 못지않게 많이 쓰였을 것인데 그렇지 않음을 보면 יוֹה는 나름대로 독자적인 성격을 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저주를 받아라’에 결론을 내릴 수 있다면 아모스도 창작을 했다기 보다는 이미 다른 데서 쓰인 것을 수용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만가와 연결시켜서 물론 자기의 독특한 능력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모스가 יוֹה를 처음썼다라고 얘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아모스서가 쓰는 저주 말고도 가정에서, 부족에서 쓰던 습관이 있었다고도 추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벌을 받았을 때 또는 부족이 멸망을 당했을 때도 יוֹה라는 관용구를 쓴 것을 보면 아모스 예언자가 백성전체에게 쓴 것이 기원은 아니었을 것이다.


   ‘공평을 뒤엎어서 소태같이 쓰게 만들고…’ 정의를 소홀히 하게 되면 단 것, 생명력을 주는 것도 쓴 것으로,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공평과 정의에 대해서 강조하는 표현이다.  공평과 정의는 단것인데 이것을 쓰게 바꾼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저주 받아라’와 연결시켜서 뜻은 신명기의 רוּראָ(’arur)와 미가의 저주의 내용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다는 것에서 슬픔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문 앞에서…’  이스라엘에는 이 성문 앞에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재판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바른 말 하는 자’, ‘시비를 가리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다. ‘바른 말 하는 사람’은 시비를 가릴 때 거짓증언을 하지 않고 이중으로 말하지 않는 사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정의와 공평을 삶의 원칙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잠언, 지혜문학에 많이 나오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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