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절
너희가 힘없는 자를 마구 짓밟으며 그들이 지은 곡식을 거둬 가는구나. 너희는 돌을 다듬어 집을 지어도 거기에서 살지 못하고 포도원을 탐스럽게 가꾸고도 거기에서 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여기에서의 배경은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소출을 막 걷어가는 것, 빌려준 것에 대해서 굉장히 이익을 남기는 행동, 이웃에게 이익을 따먹지 말라는 것이다. 이웃에게 경제적인 억압을 사용하고 혼자 이득을 취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자연속에 숨겨진 생명력도 누리지 못할 정도로 저주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정의를 펴지 않는 것는 단순히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자연적인 인과관계, 자연속에 숨겨져 있는 힘까지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와 공평을 펴지 않는 이야기는 단순히 인간 관계에서 뿐 아니라 세상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의식주를 가능케 하는 길을 막기 때문이다.
12-15절(12.13.16을 연결, 14.15절은 나중에 붙은 것으로 생각한다.)
“너희가 나를 거슬러 얼마나 엄청난 죄를 지었는지, 나는 죄다 알고 있다. 죄없는 사람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 앞에서 가난한 사람을 물리치는 자들아! 너무도 세상이 악해져서 뜻있는 사람이 입을 다무는 시대가 되었구나.” 살고 싶으냐?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여라. 너희의 말대로 만군의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여라. 성문 앞에서 법을 세워라. 그래야, 만군의 하느님 야훼께서 일부 살아 남은 요셉 가문을 불쌍히 보아 주시리라.
。이렇게 공평과 정의를 거스르는 죄들이 집성된 단계에서는 야훼를 거스르는 죄로확대된다. 7절에서 얘기한 저주의 폭이 어떻게 확대되는가를 볼 수 있다.
。‘이런 죄를 다 알고 있다’는 말씀은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신례를 통해서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겠지’하는 인간적인 지혜를 뒤엎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에 대한 하느님 지혜의 대칭을 볼 수 있다.
。13절 후반부터는 나중에 들어간 것인데 돌이킬 수 없는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다. 보통은 이스라엘이 잘못할 때 끊임없이 하느님이 어떤 자극을 주어서, 예언자를 통해서 또는 심판을 통해서 고쳐주는 역사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을 얘기하는 사람조차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하느님이 전부 아시기 때문에 생기는 벌이 어떤 것인가를 얘기하는 것이다.
16절-17절
그런즉 주 만군의 하느님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 가운데를 지나가는 날, 장터마다 울음소리가 터지리라. 거리마다 아이고, 아이고 곡하는 소리가 터지리라. 농군을 불러다 울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 울게 하리라. 포도원마다 울음소리 터지리라.”
。어떠한 벌이 내리겠는가에 대한 내용이다. 만군의 주 하느님은 항상 적을 거스려서 싸우는 능력있는 하느님, 이스라엘을 이끄시는 하느님과 연결된 것인제 이제는 자기 민족을 심판하는 분으로 오신다는 점에서 신학적인 역설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농군이나 포도원의 개념들은 이스라엘의 삶의 형태로 볼 때에는 생산적인 개념과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곡을 하는 또는 생산과 상관이 없는 것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만군의 주 하느님이 그전의 역사에서처럼 이스라엘을 위해서 대신 싸워주는 하느님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하시는 하느님으로 오는 것으로 표현하면서 그 심판이 얼마나 처절하느냐 하는 것과 만군의 하느님이 삶의 근본을 뒤흔드는, 공동체의 근본을 뒤흔드는 그런 심판을 하는 하느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야훼 심판의 절대성과 그 뒤에는 야훼 하느님의 신성의 절대성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지나가는 날’은 삭제하라.
1-17절 요약
먼저 이스라엘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또는 영원히 멸망하는 만가를 3절까지 한 다음에 4절 이하를 놓아서 야훼의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다른 야훼의 모습이란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만에 섞인 생활을 전부 드러내는데 그 뜻이 있다. 정말 구원이 가능하다고 얘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믿고 있는 그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다.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은 경신례이다. 경신례와 정의와 공평을 뒤흔드는 것이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 그것을 뒤흔드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대칭 방법을 통해서 경신례에 대해서 신뢰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구에 찬 생활인지를 일러주고 거꾸로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얘기하는 것이다. 만군의 주 야훼가 지녔던 삶의 배경은 파라오와 야훼의 배경이었다. 이때 파라오의 모습은 정의와 공평이 없는 왕이었는데 만군의 야훼가 이겼다.
이제는 이스라엘이 더이상 살 수 없음을 여러 각도(신관, 창조, 지혜문학적인 배경)에서 조명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야훼를 찾으면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삶을 구체적으로 생각을 한다면 지혜로운 의견을 따르면 살 수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것을 현대적인 차원에서 반성을 한다면 교회 내에서 반성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반성의 기본적인 출발은 경신례와 이웃에 대한 생각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이다. 왜냐하면 이웃에 대해 이중언어나 거짓증언을 하는 이런 삶과 경신례가 동등하게 되어 있지 않은가를 생각해야 한다.
5,2-5절에 나오는 아모스서를 H.W.Wolff의 말대로 독일에서 현대어로 고친다면 이렇게 할 수 있다. “교회를 버려라. 그리고 경신례에 더 이상 가지 마라. 왜냐하면 교회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고, 경신례는 인간을 파괴하는 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텍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다. 그것을 하지 않을 때에는 경신례도 인간을 억압하는 그 무엇을 전락할 수 있다. 이 찾는다는 것을 게을리 한다는 것이 교회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