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7절 주석

 

18-20절 개관


   18-20절과 21-27절을 나누어서 생각하라. 18절 전체는 2인칭으로 이어지며 질문의 형태로 이어진다는 것이 특징이다.  18-20절을 생각한다면 문학적, 신학적으로 많은 병행을 볼 수 있다.  내용으로 보아서는 ‘야훼의 날’(부정적인 야훼의 날)에 촛점에 있다.




18절


   저주받아라!  너희 야훼께서 오실 날을 기다리는 자들아.  야훼께서 오시는 날, 무슨 수라도 날 듯싶으냐?  그 날은 빛이 꺼져 깜깜하리라.


   。‘야훼의 날’의 개념은 1) 전통적으로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오시는 날, 새로운 시대가 나타나는 날이었는데(출애 10가지 재앙중 마지막 재앙을 참고) 여기서는 그렇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2) 일정한 날이라기 보다는 즉 시간적인 개념보다는 사건적인 개념이 우선하였다.  3) 아모스 예언서에서 야훼의 날이 처음 지칭되며 예언서 가운데에서는 제일 먼저 야훼의 날의 개념을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아서는 전쟁이나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승리한다는 맥락속에서 본다면 아모스가 창조한 개념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날은 깜깜할 뿐…’ 깜깜한 것과 빛과 대칭이 된다.  어둠은 파괴, 무질서, 혼돈, 저주의 개념과 연결된다.  종말론적인 뉘앙스도 들어 있다.




19절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고 집 안으로 피해 들어 가 벽을 짚었다가 뱀에게 물리라.


   。두개의 재앙이 아니라 한개의 재앙이다.  재앙의 원인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안전한 곳이 있다고 믿는 그것이다.  ‘뱀’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원수관계에 있는 동물의 대표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야훼의 날과 뱀이 연결된다.  야훼께서 오시는 날이 어떤 것인가를 표상적으로 얘기해 주고 있다.




20절


   야훼께서 오시는 날, 그 날이 밝은 날일 줄 아느냐?  아니다.  그 날은 다만 깜깜할 뿐 한 가닥 빛도 없으리라.


   。18-20을 함께 생각한다면 아모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이스라엘이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도 늘 안전성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안전성에 대한 기대의 배경은 사회라든지 경신례라든지 더 나아가 야훼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모스 예언자는 제도화된 이것을 뒤엎으면서 절대로 불가능함을 얘기하는 것이다.  즉 이 야훼의 날은 역사의 반전이 아니라 저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환상을 깨우는데 신학적인 의도가 있다.  위험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안전성에 대한 신뢰가 가장 큰 위험이라는 것이다.




21- 27절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에서 희생제물과 곡식제물을 나에게 바친 일이 있었느냐?  그런데 너희가 별을 우상으로 만들어 받드는구나.  시끗별을 왕삼아 메고 다니며 가이완별을 신상으로 메고 다니는구나.  내가 너희를 다마스커스 저편으로 잡혀 가게 하리라.”  – 야훼의 말씀이시니, 그 이름 만군의 하느님이시다.


   。25-26절은 후대에 신명기 신학이 붙인 것이다.  왜냐하면 1) 21절에 나온 얘기를 반복하며, 2) 히브리 문체로 보아서 산문체로 되어 있고, 3) 40년동안 등의 이야기는 신명기 신학에서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십년 동안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집 너희가 나에게 희생제물과 곡식제물을 바쳤느냐?’로 새로 번역하라.


   。‘가이완별을…’ 가이완별과 씨끗별은 바빌론의 별신의 이름이다.  여기의 신학적인 뜻은 하느님께 대해서 정의를 실천하는 생활이 경신례까지 파급되는 것이 없을 때에는 사람들은 야훼 대신에 어떤 신을 창조함을 가리킨다.  다른 신이란 인간이 도입을 했지만 결국은 자기를 믿는 것으로 전락함을 가리킨다.  야훼의 신관은 고착적인 것이 아니다.  야훼는 그 이름 본질 자체가 사건 속에 계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사건이 없다’는 것은 야훼가 없는 것이다.


   。‘다마스커스…’ – 다마스커스는 대외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최고의 원수의 대표격이다.


   。내용 요약 – 축제때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의 것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것을 바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하느님이 그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은 1) 하느님이 주신 것 자체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정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이 하느님 자체를 부정하는 위험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2) 하느님께 받은 것을 바친다는 것은 하느님이 거기 내려오신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축제때 제물을 바치는 것을 사회적인 제도로 전락시켰기 때문에 하느님이 내려오시지 않는 것으로 바뀐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순례란 본래 장막, 성전등의 계보를 통해서 장소의 하느님을 시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구원사적인 시간, 역사까지도 의문시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생명력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축제때 하느님이 안계신다 것은 달리 말하면 역사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며 비록 거기에 사람들이 참례해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것이다.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라는 구절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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