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깨서 1장에 나타난 성전재건에 대한 야훼의 말씀
2.1. 하깨서 전체 구조
하깨서는 구약 성서에서 오바디야를 제외하고 가장 짧은 책이다. 두 장에 걸쳐서 38절로 되어 있는 하깨서는 문학적 스타일이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하깨서의 현재 형태는 ‘4개의 예언적 신탁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각각은 연대 형식(date formula)으로 시작되고 있으며 (“다리우스왕 제2년…” 1,1; 1,15b-2,1; 2,10; 2,20), 이 구조 안에서 다양하게 차이가 나는 구두 연설의 형식들이 보존되어 있다(논쟁, 경고, 약속, 사제의 결정 등).1)또 Chary는 하깨서가 대칭적 구조로 아래와 같이 의도적으로 편집이 이루어졌다고 본다.2)
가 나
질책 1,1-5 질책 2,10-14
궁핍한 생활 1,6-11 궁핍한 생활 2,15-17
은총의 회복 1,12-14 은총의 회복 2,18-19
메시아의 약속 2,2-9 메시아의 약속 2,20-23
이렇게 학자들마다 약간씩 다르게 그 구조를 분석하는데3) 그 공통점과 하깨서의 현재 형태를 토대로 보면 다음과 같이 구조를 분석할 수 있다.
1) 첫째 메시지 : 성전을 재건하라는 부르심(1장)
(1) 표제 (1,1)
(2) 게으름을 책망함 (1,2-6)
(3) 성전을 재건하라는 권면 (1,7-8)
(4) 예언적 메시지에 대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반응(1,12-15)
2) 둘째 메시지 : 성전의 미래적 영광과 번영에 대한 약속(2,1-9)
(1) 표제 (2,1-2)
(2) 성전재건을 격려하기 위한 하느님의 임재의 약속(2,3-5)
(3) 성전의 미래적 영광을 선포함(2,6-9)
3) 셋째 메시지 : 부정한 백성에 대한 질책과 축복의 약속(2,10-19)
(1) 표제 (2,10)
(2) 부패한 죄의 결과를 보여주는 의식적 비유(2,11-14)
(3) 과거의 징계와 비교된 현재적 축복의 약속(2,15-19)
4) 네째 메시지 : 즈루빠벨에 관한 메시아적 예언(2,20-23)
2.2. 하깨서 1장의 본문 번역4)
1절 : 다리우스왕 2년, 6월 첫째 날에, 예언자 하깨를 통해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의 통치자 즈 루빠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사제 여호수아에게 야훼의 말씀이 내려 이르시기를
2절 : 만군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이 백성은 아직 야훼의 집이 재건될 시기 가 아니라고 말한다.”
3절 : 예언자 하깨를 통하여 야훼의 말씀이 있어 이르시기를
4절 : “이 집은 폐허로 있는데, 너희들은 지붕이 잘 쳐진 너희들의 집 안에서 살 때가 너희들 에게 닥쳤구나.”
5절 : 이제 만군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들의 마음을 너희들의 길에 대하여 두어 보아라.”
6절 : “너희는 많이 뿌렸으나 적게 수확하였고, 먹으나 풍족함이 없고, 마시나 성이 차지 않 고,입으나 따스함이 없다. 벌이를 하는 사람은 구멍이 난 지갑 안에 그 벌이를 넣 는다.”
7절 : 이제 만군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들의 마음을 너희들의 길에 대하여 두어 보아라.”
8절 : “산에 가서 목재를 가지고 와서, 성전을 지어라. 그러면 내가 그 안에서 기뻐하고 영광 스럽게 될 것이다.” 라고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9절 : “많이 바라지만 정작 적게 얻는다. 너희들은 집으로 가져오지만 나는 그것을 날려 버린 다. 왜?” 만군의 야훼의 말씀이다.
10절 : “왜냐하면 너희들은 각자 자기 집을 위하여 뛰고 있지만, 내 집은 폐허로 남아 있기 때 문이다. 그러니 너희들 때문에 하늘은 이슬을 거두고, 땅은 그 열매를 거두었다.”
11절 : “그래서 나는 땅과 산과 옥수수와 새 술, 기름과 땅이 소출을 내는 모든 것들과 사람과 짐승과 손의 힘든 일에 가뭄을 선포한다.”
12절 :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사제 여호수아와 그밖에 백성의 남은 자는 그들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그들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보낸 예언자 하깨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백성들은 야훼 앞에서 두려워 하게 되었다.
13절 : 야훼의 사자 하깨가 야훼의 메시지를 통하여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야훼의 말씀이다.
14절 : 그때에 야훼께서는 유다의 통치자 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의 영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사제 여호수아의 영과 백성의 남은 자의 영을 불러일으키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의 하느님 만군의 야훼의 성전에 와서 과업을 수행하였다.
15절 : 때는 다리우스왕 2년 6월 24일이었다.
2.3. 하깨서 1장의 구조5)
1장에는 기원전 520년 8월에 행한 하깨의 첫 번째 ‘말(Rede)’과 그 말에 대한 영향력에 대한 보도를 싣고 있다. 7절의 -너희들의 마음을 너희들의 길에 대하여 두어보아라-는 이 본문에 이 백성들의 운명에 관한 것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5절에 나오는 동일한 표현 양식을 반복하고 있다. 2절과 3절 사이의 어색한 연결은 오히려 1-11절의 본래의 문할 형태를 암시하는데, 이처럼 하깨서 편집자는 그 이전의 본문의 형태의 흔적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았다. 문맥을 깨뜨리는 7절과 8절의 위치에서도 이러한 흔적을 발견하게 되며 이 구절의 위치를 서로 바꿀 수 있다.
적어도 본래는 신탁들이 운율을 갖춘 형태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시적 형태는 다음 설교에서도 분명히 찾아 볼 수 있다. 물론 신탁들은 나중에 통상적인 방식으로 산문화 되었고 그밖에도 때에 따라 확장되었다. 신탁들은 부분적으로는 다만 보고자가 내용을 대략 진술하는 것에 불과하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시의 운율화 작업은 다만 예언자 신탁의 원래 형태를 회복하려는 시도로 평가될 수 있다.
하깨서 편집자는 이미 이 신탁들이 수집되어 있는 자료를 발견했을 것이다. 반면 2,3절 사이의 중복 모음을 편집자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만약 2절을 예언자가 한 말의 원래 본문으로 본다면 3절을 흔히 그랬던 것처럼 ‘첨가문’으로 보고 삭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경우 비슷한 도입부가 재차 3절에 삽입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가정해 볼 수 있다. 즉 3절이 4절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예언자 말의 서론 부분이었는데, 하깨서를 작성한 편집자가 그 당시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기 위해 1절의 정확한 날짜 표시와 함께 2절을 첨가했다가 불행하게도 그 2절을 ‘야훼의 말씀’으로 양식화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아마 편집자는 1.2절이 수집되어 있던 자료에서 이미 “야훼의 말씀”이라는 표현 양식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다만 발췌를 적절히 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러한 예는 하깨서에서 계속 찾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 단락의 결구(12.14)도, 그것이 자료에서 글자 그대로 발췌된 것이든 혹은 편집자에 의해 임의로 표현된 것이든 간에 편집자에 의해 삽입된 것이다. 첫 번째(4-6절)와 세 번째(9-11절)는 논쟁적인 어투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성전 건축에 대한 권면이 간접적으로만 나타나 있다.
두 번째(7-8절) 신탁은 권면과 약속의 말이다. 성전 건축에 대한 권면은 확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개개의 신탁들이 상호 보충적 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예언자의 전체적인 말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양식에 있어 명백히 하나하나의 단위는 서로 구분된다. 하깨의 첫 번째 등장에 대한 반응은 12절에 기술되어 있듯이 백성이 야훼를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 단락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왜냐하면 실제로 예언자의 말 전체가 노리는 바는 야훼에 대한 올바른 두려움을 일깨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2.4. 하깨서 1장에 대한 본문 주해
2.4.1. 표제 (1,1)
1절 : 다리우스왕 2년, 6월 첫째 날에, 예언자 하깨를 통해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의 통치자 즈루빠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사제 여호수아에게 야훼의 말씀이 내려 이르시기를
שׁꕋꖓꗛ דꖎꔟ מוֹיꔶ יꚍꚍꕘ שׁꕋꖓꔰ ꗗꗞꗶꕘ שׁꕳꖷꙣꕇꗡ מꖹꚜꚉ תꗻꚉꔱ 1
תꖏ לꔞיꚝꗡאַꚉ־ןꔳ לꔫꔯꙢꖅ־לꔟ איꔩꘅꕘ יꕀꖏ־דꖸꔶ הꕯהꖾ־רꔨꕎ הꖷꕗ
׃רꗯאꗝ לוֹדꔿꕘ ןꕚꗔꕘ קꕇוֹהꖾ־ןꔳ ꘨Ꚉוֹהꖾ־לꔟꕵ הꕇוּהꖾ
1장 1절에서는 하깨의 활동에 대하여 세 가지 정보, 즉 그가 처한 역사적 상황(“다리우스 1세 치세 2년에, 6월에, 6월 1일에”), 하깨가 파견을 받음(“예언자 하깨를 통해… 야훼의 말씀이 내려 이르시기를”), 그의 첫 대담자들(“스알디엘의 아들 즈루빠벨 유다 총독과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 대사제”)에 대한 정보를 준다. 이 대목을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예언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역사적 상황을 가리키고 있다 하깨 예언에서 날짜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매우 상황적이다. 기원전 520년 8월 29일에 해당하는 다리우스 1세 치세 2년 6월 1일이다. 이 날짜의 의미는 연대기적 고정에 그치지 않는다. 권력이 캄비세스로부터 다리우스 1세에게로 넘어가는 상황은 페르시아 제국에 심각한 난국을 초래하였다. 하깨의 예언은 페르시아 지배권의 일시적 위기와 불안을 표현하고 있다. 그 외에도 1절의 날짜는 보다 큰 비밀 한가지를 숨기고 있다. 하깨의 예언은 페르시아의 국익과 배치된다(2,23절 참조). 따라서 ‘다리우스왕 제 2년’이라고 페르시아 지배 연도가 언급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는 2,20-23절에서 페르시아가 패망한 다음 다윗 후손이 등장하여 새로운 통치권을 행사하리라고 약속한다.
둘째, 하깨는 우리에게 파견된 자로 제시된다. 그 파견이 다른 많은 대목에도 나오는 눈에 익은 장엄한 표현으로 제시되고 있다. 수집자들은 이미 수없이 쓰여진 언어를 사용한다. 1절과 3절에 그리고 2,1.10.20절에 그 언어가 나온다. 그 언어를 통하여 하깨의 예언은 ‘야훼의 말씀’으로 들린다. 그 ‘말씀’은 추상적인 관념도 아니고 습관적인 전례 용어도 아니다. 그 말씀은 분명히 역사적인 말씀이며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요한 1,14) ‘일어난다’. 야훼의 예언적인 말씀은 어엿한 사건으로서 인물을 통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일정한 해와 달과 날에 일어난다. 하깨는 ‘예언자’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 옛 예언자들은 자신에게 이 칭호를 붙이는 것을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자기네 원수들인 거짓 예언자들이 그 칭호를 남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가 3,5; 예레 3,9) 그러나 귀양살이 이후부터는 예언자라는 칭호를 많이 사용했다(하바 1,1; 예레 1,5; 즈가 1,1.4; 7,12 등). 예언자들 자신보다도 예언자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보다 전형적으로 그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예언자에게 본질적인 점은 칭호에 있지 않고, 파견 받은 사실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훼께서 예언자 하깨를 ‘통해’ 말씀을 내리신다. ‘통해’/ ‘…의 힘으로’라는 양식(1열왕 16,12; 호세 12,11; 예레 37,2; 말라 1,1 참조)은 하깨의 활동이 확연하고 효과적이었음을 부각시키기 위해 쓰여진다. 이는 하깨의 능력에서 나오지 않고 야훼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14절)
셋째, 1절에서는 즈루빠벨과 여호수아 단 두 사람만이 하깨가 처음 하는 말의 상대자들이다(즈가 3-4장 참조). 그 두 사람은 누구의 자손이고 그 임무가 무엇인지를 지적함으로써 이중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즈루빠벨(‘바벨의 싹’)은 그의 이름이 드러내는 것처럼 바빌로니아 귀양살이 동안에 태어났다. 그는 여고니야의 손자, 여호야킴의 증손자(1역대 3,17)로서 유대의 왕이었고, 기원전 597년에 포로로 끌려갔다(2열왕 24,8-17). 전승에서는 그가 예루살렘의 마지막 정통 왕이라고 말하고 있다(예레 28;2; 열왕 25,27-30; 에제 8,1 등). 즈루빠벨은 다윗의 계보에 속한다. 그는 페르시아의 총독으로서 유대에 돌아왔으므로 유대 지방을 관리할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에게 부여된 칭호는 페르시아의 한 지방을 통치할 권한과 의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된다(에즈 8,36; 에스 3,12 참조). 기원전 520년, 유대는 아직 페르시아에 속한 사마리아 지방에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는 5세기 중엽 느헤미야 아래서 갓 사마리아로부터 분리된 처지였다. 그래서 즈루빠벨은 통치자가 아니라 ‘감독’/ ‘대표’였다. 하깨서에서 그런 즈루빠벨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그의 이름들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항상 앞에 나오고, 2,20-23절에 있는 결정적인 약속의 대상이 되어 있다.
여호수아는 기원전 587년 성전이 파괴되기 전(2열왕 25,18-21; 1역대 5,40이하) 마지막 사제의 손자이다. 그의 칭호(‘대사제’)는 그에게 성소 분야에서의 권위를 부여한다(2열왕 22,4; 23,4 참조).여호수아도 귀양살이에서 돌아왔다(즈가3장 참조).
그러나 편집자들이 단 두 사람만을 청중으로 삼는 사실은 우리의 주의를 요하지만 2+4-11절에 나오는 여러 예언 말씀이 그 두 사람에게 향했을 개연성은 없다. 이미 첫 번째 말(2+4)부터 분명히 그 두 사람에게 향하고 있지 않다. 2+4-11절의 말 가운데 어떤 것이 ‘감독’과 ‘대사제’를 지칭하고 있는지를 따져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말도 그들을 특별히 지칭하고 있지 않다. 하깨 예언의 전달 대상자들이 1,1절에서의 즈루빠벨과 여호수아지만, 1,12.14; 2,2절에서는 편집자들의 의도에 따라서 보다 큰 집단으로 확대되고 있다. 하깨는 1,2.4-11절에서는 2,1-9.10-14.15-19절에서는 보다 큰 집단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 같다. 하깨는 나단(2사무 7;12) 혹은 엘리야(1열왕 21) 혹은 예레 21-23;36-38장에 나오는 예레미야와 비슷하다. 하깨는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2,20-23절을 제외하고는 분명히 하깨는 백성의 예언자이다.
하깨서에서는 즈가리야서와 마찬가지로(즈가 1,1 참조) 받는 사람의 주소와 성명이 없다. 하깨서의 첫 구절에 담겨진 정보들은 하깨서 전체에 속한다. 4-11절을 위해 3절에 새로운 서언을 배치한 것은 1절이 또한 이 책자의 시작을 이룬다는 관념을 다시금 강화하는 것이다. 2+4절이 즈루빠벨과 여호수아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2절의 “이 백성”과 4절의 “너희”는 분명히 즈루빠벨과 여호수아가 아니다.6)
2.4.2. 게으름을 책망함(1,2-6)
2절 : 만군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이 백성은 아직 야훼 의 집이 재건될 시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3절 : 예언자 하깨를 통하여 야훼의 말씀이 있어 이르시기를
הꕯהꖾ תיꔲ־ת꘡ אꔱ־ת꘡ ꔠל וּרꗱאָ הꖊꕘ םꘝꕗ רꗯאꗝ תוֹאꔧꙃ הꕯהꖾ רꗫאָ הꗔ 2
׃רꗯאꗝ איꔩꘅꕘ יꕀꖏ־דꖸꔶ הꕯהꖾ־רꔨꕖ יꕙꖾꕰ 3 ׃תוֹנꔯꕙꗡ
2절에서는 만군의 야훼가 등장한다. 역사 안에 나타난 ‘만군의 야훼’에 대해 보면, 야훼 써바오트(תוֹאꔧꙃ הꕯהꖾ)라는 말로 미디안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자신의 계약 명으로 알려주신 이름, 야훼와 셈어에 공통된 동사 어근, 즉 ‘전쟁하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 어간 싸바(אבצ : 전쟁)에서 파생된 여성형 명사 써바오트(תוֹאꔧꙃ : 군대들)의 합성어인데 써바오트는 일반적으로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규율 있는 대집단을 가리킨다. KJV와 RSV에서는 hosts(다수, 군대, 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야훼 써바오트(תוֹאꔧꙃ הꕯהꖾ)라는 관용구가 하나의 명사에 형용구문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몇몇 문장의 문맥들을 통해 틀림없이 만군에 대한 야훼와의 주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단어가 ‘만군’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최초의 예는 창세 2,1로서 거기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가리킨다. 이 경우 그 말은 하느님의 창조 명령으로 존재하게 된 자의식이 있는 모든 존재도 포함할 것이다. 이 어휘를 창세기에 나온 형태로 사용하고 있는 훌륭한 평행 구절은 이사 45,12이다. 만군의 야훼라는 문구에는 신적 지휘를 나타내는 다양한 직함들과 신명들이 덧붙여져 나란히 등장한다. 즉 만군의 야훼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시편 84,8)이라든가 만군의 야훼 하느님, 거룩한 자의 대 회의에서 엄위로우신 하느님(시편 89,8)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즉 전능하신 분의 명령과 소환에 의해 하늘의 세력이든 땅의 세력이든, 신성한 세력이든 세속적이든 우주의 온갖 세력이 함께 모인 것을 말한다(욥기 1,11; 예레 23,16). 구약으로부터 인용되고 있는 이 관용구는 성서 안에서 300회 나타나며, 하깨서에서는 14번 나오며, 하느님의 성격에 대한 계시의 주요한 부분이 되고 있다. 또한 하느님의 다른 어떤 이름과도 결합하지 않고 주로 계약 명칭인 야훼와 결합하고 있다.7)
이스라엘 역사 초기부터 이 칭호가 야훼의 역사적 역동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1사무 4,14; 2사무 6,2). 역사적으로 현존하는 야훼는 사람들을 통하여 그리고 사람들을 위하여 활동한다. 하깨는 자신을 전령으로 제시하고 있다(“만군의 야훼의 말씀이다.”). 편집자들은 하깨를 ‘전령’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적으로도 예언자적으로 매개된 이와 같은 하느님의 활동은 사람들을 위한 활동이다. 즈루빠벨, 여호수아, 땅에 사는 백성, 사제들, 모두에게 촉구하며, 하느님의 활동에 응답하여 활동하도록 호소한다.(1,12-15a) 페르시아의 주민들에게도 간접적으로 호소하는데, 이처럼 사람들의 세계는 야훼가 우선적으로 현존하는 영역이다.
또한 여기에 나타난 “야훼의 집(הꕯהꖾ תיꔲ)”은 하깨의 중심 내용이다. 사람은 살기 위하여 알맞은 환경과 보금자리가 필요하다. 히브리어로 ‘바이트(תיב)’라는 같은 단어로써 이 두 가지 관념을 표현하는데,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연적 가족이나 물질적 집을 주시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의 집에 종의 신분으로서가 자녀로서 받아들이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구약 시대에 성전을 당신이 거하시는 곳으로 삼아 이스라엘 중에 머무셨다. 우선적으로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당신을 섬기게 하시고 다른 신들을 섬기던 사람들 중에서 그를 이끌어 내셨다(여호 24,2). 아브라함은 자기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했고(창세 12,1), 천막 아래 나그네 생활을 하게 되고 그 후손들도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에집트에 정착할 때까지 그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히브 11,9-13). 그러나 이스라엘은 오래지 않아 이 “종살이 집”에서 탈출하기를 갈망하였고, 하느님은 그들을 그곳에서 구출하시어 그들과 계약을 빚으시고 친히 준비하신 장막에서 당신 백성들 속에 사신다. 이 장막에는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이스라엘의 집 전체에 하느님의 현존이 머문다(출애 40,34-38).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장막을 중심으로 모였으므로 이 장막을 “만남의 장막”이라고 부른다(출애 33,7). 하느님은 그곳에서 당신 종 모세와 말씀하셨고 모세도 항상 이 집에 들어가서 하느님께 근접하였으며(출애 22,9-11; 민수 12,7), 백성을 약속의 땅에까지 인도한다. 이 약속의 땅 전체가 또한 “야훼의 집”(호세 8,1; 9,15; 예레 12,7; 즈가 9,8)이며, 야훼는 이것을 백성이 안주하는 집으로 삼으신다(2사무 7,10). 한편 다윗은 자기가 살고 있는 왕궁과 비슷한 집에 야훼를 모시려 하였으나(2사무 7,2) 야훼는 당신의 거처는 장막으로 충분하다고 답하시면서 그 제안을 거절하신다(2사무 7,5-7). 그러나 야훼는 이 “기름 바름을 받은 자”의 지향을 축복하시고 당신이 돌로 만든 집에 사시기를 원치 않으신 것은, 다윗을 위하여 한 집을 지어 그의 견고한 왕좌 위에 그의 후손을 안착시키시기 위한 것이었다(2사무 7,11-16). 그리고 하느님을 위하여 집을 짓는 것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실 “다윗의 자손”에게 보류되어 있다(2사무 7,13-14).
한편, 솔로몬은 이 신비스런 예언을 실현시킬 자는 자기라고 생각한다. 그는 실로 하늘들의 하늘도 그 안에 살고 계신 하느님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면서도(1열왕 8,27), 야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 위하여 그리고 그 현존의 상징인 계약의 궤를 위하여 집을 지을 것이다(1열왕 8,19-21.29).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특정한 장소나 집에 얽매이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이것을 하느님의 집 즉 야훼의 이름으로 지은 성전 안에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선언하시고(예레 7,2-14), 에제키엘에게는 두 가지 현시로써 그것을 증명하신다. 첫째 현시에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속화된 하느님의 집을 떠나가는 것이 나타나고(에제 10,18;11,23), 둘째 현시에서는 “이스라엘의 집”이 유배되어 있던 이방 지역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난다(에제 1장).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이름을 더럽힌 “이스라엘의 집”에 대하여 그것을 정화하시고 다시 모으시며 일치시켜 그곳에 다시 당신의 처소를 세울 것을 예고하신다(에제 36,22-28; 37,21. 26-28). 이러한 일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집인 하느님의 집에 하느님의 영을 부어 주심으로써 실현될 것이다(에제 39,29). 이 중대한 예언은 참된 하느님의 집이 무엇인지를 암시하여 준다.8)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성전 재건은 18년 동안 지속되어 온 문제이다. 성전 복구는 고레스의 기원전 538년 포고의 내용이기도 하다(에즈 6,3-5). 지금 하깨는 그의 하느님의 이름으로 공사를 시작할 것을 명백하게 한 번 더 요청한다.
하깨는 ‘이 백성’과 맞서기 위하여 활동했다. 왜 백성들은 그 시간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이유는 이어지는 논쟁들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백성’은 처음에는 ‘야훼의 집’,즉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은 적당한 ‘시기’ 혹은 적절한 ‘순간’이 아니라고 말한다. 시국을 평가해 보며 아직 그런 시기가 이르지 않았고, 시기가 성숙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4절과 11절에서의 말들은 그들의 비참한 경제 상황 속에서도 백성들이 성전 재건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