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전체 주제 : 因 果 應 報
종전까지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불변의 원칙은 선한 사람은 잘 살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아주 커다란 원칙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선한 사람이 얼마든지 고통을 당하고, 반면에 악한 사람이 더 잘 사는 경우도 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제적인 체험, 현실과 기존의 믿음 사이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결국 하느님께 대한 인식을 다르게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욥의 친구들은 因果應報論이 깨질 때 욥이 신앙을 보존할 것인가를 계속 취재하려고 한다. 이러한 因果應報論을 욥 자신이 반대하는 것같지만 그도 역시 강하게 지니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욥 역시 그의 친구들과 똑같은 논리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테두리에서 나오지 못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욥의 세 친구나 욥이 고통 자체의 의미보다는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 문제에 대해서만 관심을 집중시키는데 있다. 의인이 당하는 고통 안에서 이 고통의 의미가 하느님을 참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만, 욥과 그의 친구들은 이 단계에 이르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因果應報論의 이야기가 어느 시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잃고, 결국 부인에게까지 도전을 받지만 계속 하느님께 충실하는 욥은 그 결과로 마지막에 42, 10 이하에 가서는 도로 다 보상을 받는다. 즉 새로운 현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또다른 역설적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을 이들은 어떻게 극복했는가? 욥은 어떻게 극복했는가? 이를 통해 욥은 달라졌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기존의 사고(因果應報論)에 매여 있던 욥이 어떻게 이러한 역설적 모순을 받아들였는가, 그리고 어떻게 변화되었는가가 생각해 볼 문제인 것이다.
4. 특성
① 구전 단계의 전사 → 문전 단계
서론, 결론에서 종종 등장하는 야훼 이름이 詩 부분에서는 3 – 41, 6 까지 단 한 번(38, 1)만 나온다. 이를 근거로 욥기의 근본은 서론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즉 다른 이방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다. 최초에는 욥기가 하나의 구전 단계에서 전사가 있었을 것으로 본 다. 구전 단계의 전사는 굉장히 오래 된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바빌론에도 욥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고 수메르에도 욥기와 비슷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혹자들은 B.C 2000년 때부터 다른 민족에게 이 욥기와 똑같은 문제가 있었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욥기의 문제는 어쩌면 인류 전체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에제키엘서 14, 14을 살펴보면 욥은 굉장히 옛날부터 알려진 유명한 그야말로 영웅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이 욥기를 모르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에제키엘이 욥을 굉장히 훌륭한 사람으로 묘사할 때는 아직 구전적인 단계, 전사에 나오는 욥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욥의 설화는 굉장히 오래된 것이다. 그래서 구전의 전사가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출처 없는 민담의 형식으로 내려왔는지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근본적으로 대단히 기술적으로, 서사적으로 쓴 지혜 문학적 성격을 띤 가르침의 이야기이다. 처음에 최초의 전사시대에 어느 누군가 지혜 문학적 요소를 넣어, 가르치기 위해서 잘 기술한 것이다. 의미적으로 너무나 재미있고 중요한 이야기였으므로, 이를 통해 구전으로 내려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루는 문제가 무엇인가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그때부터 이미, 즉 전사의 단계부터 하느님께 대한 충성, 삶에 대한 충실성의 문제, 현실의 문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당하는 고통의 문제 등을 다루었다고 본다. 이렇게 구전으로 전해지다 여러 가지 형태를 통해 시적인 양식을 띠게 된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이러한 시적인 형태가 어떤 설화적인 단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적 양식으로의 발전은 설화적인 이야기의 발전을 전제로 할 때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생성 단계로 볼 때, 구전의 단계에서의 전사는 결국 욥기에 와서 이러한 詩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테두리 이야기로 축소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② 생성의 과정에서 전사의 문제
또한 테두리 이야기로 축소된 전사에 있어서도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이들은 1장, 2장이, 특히 2장이 후대에 붙은 것은 아닌가 추정한다. 더욱이 42장에 가서는 2장에 나오는 건강에 대한 이야기와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이러한 이야기나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2장을 후대에 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1장, 2장은 처음부터 함께 연결된 것으로 보는 것이 원칙입니다. 물론 문헌비판적인 차원에서는 앞뒤가 안 맞는다. 즉 처음과 끝이 맞지 않는다. 이것은 구전적인 단계에서 이러한 테두리 형성시 그 부정확성 및 그 일관성의 결여가 파생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2장에 와서 욥 자신을 공격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은 고통의 문제에 있어서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에 전사에 단계에 있어서 바로 그러한 가르침이 그와 같은 형태의 테두리 이야기로 바뀌면서 축소와 생략으로 인한 부정돈 상태, 어떤 무질서 상태이기에 처음부터 1장, 2장이 따로 생성되었거나, 없던 것이 후에 붙은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생성과정에서 또 하나의 문제가 되는 것은 이방인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이다. 그 근거는 1, 3절에 ‘그 동쪽에서’, ‘동쪽의 자녀’, ‘우즈’라는 지방이 언급되고, 또한 엘리파스가 테만, 즉 에돔이라고 보며, ‘빌닷’, ‘휴흐레 빌닷’ 즉 유프라테스강으로 추정해 본다. ‘스파르’는 ‘나아마’ 즉 북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또한 욥에게 있는 흔적으로 보아 외국의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욥 자신과 욥의 친구들도 외국에서 온 사람, 즉 외국의 전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아닌가 의문을 가져 볼 수 있다. 하지만 지혜 문학적인 성격을 가르침의 이야기로 보아 이스라엘에서 생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전통이 너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학자들은 사탄의 등장(자카리아서 3장), 가장이 제사(역대기 상권 21, 1; 1, 5)를 지내는 문제 이런 등등으로 보아 이것은 이스라엘의 어떤 전통이며, 따라서 이 이야기 자체는 테두리 이야기로 축소된 그 욥기의 전설, 구전단계의 전설로 받아들이고 이스라엘에서 생성이 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③ 구전 → 문전 시기
확실한 것은 귀향 후이다. 구전 단계에서 현재의 그 욥기가 완성된 것은 학자간의 다소 차이는 있지만 페르시아 시대나 초기 귀향후 시대 길게는 5 ~ 3C라고 본다.
④ 후에 삽입된 것
-32장 ~ 37장 : 현재 욥기에서 나중에 붙은 것이 있다고 보는 것으로 우선 확실시되는 것으로 엘리오의 관여이다. 엘리오에 대해서는 그곳에서만 언급되며, 또 특별한 것은 빌닷, 소파르, 엘리파스는 도전하고 대들고 욥이 이에 대해 대답을 한다. 하지만 엘리오에 대해서는 그런 것이 없다. 문학적인 특성으로 보아 독립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32장 ~ 37장 엘리오 이야기는 나중에 첨가된 것으로 본다. 더욱이 이것은 31, 15이하와 그 후에 나온 하느님의 대답을 갈라놓는다. 31, 35에서 욥이 외치는 것이 38장 이하에 그 답이 나온다. 즉 그 연결을 단절시킨다.
-28장 : 보통 지혜 문학은 지혜를 Persona Person으로 보지만, 여기서는 어떤 보물, 물건같이 취급하는 것으로 보아 지혜 문학에 대한 관점이 다름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더 후대의 것으로 본다.
例) 11 ; 13, 21-20
-22장 ~ 27장 : 이 부분 역시 완전치 못한 요소를 띠고 있기 때문에 후대에 들어간 것으로 본다. 즉 엘리파스, 빌닷, 소파르 순서대로 이야기와 답을 하지만, 22장 ~ 27장에서는 빌닷이 하는 얘기는 너무 짧고 소파르는 얘기도 안한다. 따라서 세 번째 나타나는 세 친구와 욥과의 대화는 무엇인가 삭제된 듯한 불완전성을 지닌다.
-38장 ~ 41장 : 전체가 현재와 같이 완성된 것으로 쓰여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하느님의 답, 말씀, 욥의 겸손된 고백
-40, 3-5; 42, 1-6
-40, 15-24 : 나일강에 대한 말
-40, 25- 41, 26 : 레비아탄, 악어 이야기
-39, 13-18
5. 전체 구성의 문제
① 제 1 단계로 욥 이야기의 구전전사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에제키엘 14, 14 등 이것은 지금의 욥기를 모르는 에제키엘이 구전에 내려오는 다니엘이니 노아니 이런 과거의 인물들이 위대하다고 설명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욥을 격상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지금 문전으로 된 것을 모으는 단계이다.
② 욥기에 관한 욥의 문제로서 제기된 것이 얼마만큼 역사적으로 오래되고 방대하며 광범위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귀향 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면서 늘 당했던 문제이며, 여기에서 신관이 끊임없이 도전 받는 것이다.(신관의 변화) 이것은 욥기 1장, 2장, 42장에서 테두리 이야기로 욥의 이야기를 보는데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한다.
③ 욥기의 시편 3장 ~ 42, 6까지 삽입 또는 삭제된 것의 문제.
例) 28장, 32장, 37장, 그 사이에 들어갈 수 있는 몇 개 의심되는 것들.
6. 내용적인 특성
① 2, 10 : 아직 지혜 문학적인 요소(因果論)가 남아 있다. 지혜 문학적인 요소 즉 단순한 몇 마디가 아니라 코헬렛, 전도서와 같이 지혜 문학 자체에서 취급된 크게 문제가 된다. 특별히 시편에서 보면 3장 ~ 42장까지 지혜 문학적인 요소가 길게 다루어진다. 또한 이스라엘의 법적인 요소도 있다. 그 다음에는 시편과 똑같이 가끔 볼 수 있는 탄원, 탄원의 요소, 또는 찬미의 요소 등을 볼 수 있다. 특별히 28장이 찬미의 요소이며 38, 1 이하에서는 테오파니의 요소가 등장하는데, 즉 하느님 현현의 요소이다. (상당히 오래된 전사가 있는 요소이다) 이것은 이사야서 40장 ~ 55장과 비교해서 생각할 수 있다.
지혜 문학적인 요소에서는 인과론이 가장 큰 요소이다.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해야 되는가? 이 물음은 이제 결국 끝에 가서는 하느님이 옳다고 동의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7. 고통의 Theme
구약에 있어서 고통은 전통적으로 죄에 대한 벌로 일단 이해가 된다. 여기서 문제는 의인이 하느님을 피할 수 없으면서, 동시에 고통에 노출되는 모순에 대한 것이다. 고통을 당하는 인간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 어떤 힘, 위대한 힘으로부터 도전을 받게 된다면 이해가 되겠지만, 야훼 하느님 앞에 노출되면서도 고통으로부터 떠날 수 없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창세기 3, 14 이하의 원죄를 통해 인과론적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욥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중요한 요소는 하느님과의 공동체는 고통 속에도 가능하다는 것이다.(시편 73; 이사야서 53장)
하지만 이에 대해 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벌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 역설적이지만 하느님께 도전하면서 동시에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 것이다. 즉 하느님 面前에 서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으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피하지 못하고 하느님께 나아가야 되는 상태를 자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38장 이하에서 하느님이 욥에게 하시는 말씀의 요지이다. 욥의 그러한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하느님이 모든 사람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 즉 인정하는 것이다.
욥은 13, 3. 18이하; 23,4이하에서 하느님과 자기 사이의 문제를 하느님보고 판단해 달라고 청한다. 하느님 때문에 생기는 문제로 인해, 하느님을 떠날 수 없는 것이 이제는 몸의 고통으로 노출된다. 따라서 욥이 마지막으로 취하는 자세는 하느님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대하시며 더 높으시다는데 동의를 한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늘 똑같은 것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상의 진전이 너무 없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또 하나는 친구와 욥의 대화가 논리적이지 못한 禪問答하는 식으로 평형을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어떤 진주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욥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처음에는 위로에서부터 시작을 하지만 뒤에는 굉장한 단죄로 이어진다. 욥은 자기 탄생을 저주까지 하며, 결국 하느님께 대해 도전과 탄원을 하는 식으로 발전한다. 결국 하느님께 자기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즉 자기 미래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을 노출시킨다. 이에 대해 클라우스 베스터만도 언급하였듯이 하느님은 인간의 체험에 근거한 논리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분이다. 따라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것은 고통 안에서도 하느님께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다. 고통 안에서 하느님께 신뢰하고, 하느님을 믿는 그것이 하느님을 새롭게 이해하는 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을 근거로 우리는 각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쉽게 고통을 이기도록 도와주려는 시도 안에는 고통을 어떤 틀에 넣어서 인식시키려는 오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고통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에 대해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무능하다. 다만 욥과 같이 하느님이 우리 생각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어떤 겸손, 수긍, 이것을 통해서 고통을 뛰어넘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 이것만을 촉구할 수 있을 뿐이다.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고통 문제에 관한 이러한 주관성을 어디에서든지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창세기 1장, 2장, 3장에서 볼 수 있듯이 원죄의 출처, 즉 고통의 유래를 설명하려는 의도보다는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더 깊게 내재되어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테두리의 이야기 <1, 1 – 2, 13 ; 42, 7 – 17>
1, 1 – 2, 13 서론 | 1, 1 – 5 | 욥기에 대한 전반적인 묘사 |
1, 6 – 12 | 간단한 상황설명과 천상대화(회의)Ⅰ | |
1, 13 – 22 | 간단한 상황설명과 1차 신앙의 위기 | |
2, 1 – 6 | 천상대화 Ⅱ | |
2, 7 – 10 | 2차 신앙의 위기 | |
2, 11 – 13 | 세친구의 방문 | |
42, 7 – 17 결론 | 42, 7 – 10 |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 |
42, 11 – 17 | 소유에 대한 이야기- 잃어버린 것의 복구(건강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있음) |
다른 특성으로는 1, 1-5절은 하나의 욥에 대한 주제(욥에 관한 신상 명세서), 1, 6-12은 욥에 관한 반대되는 주제, 13절 이하에서는 반대되는 제안의 실천으로 구성되고 있다. 결국 축복을 없앨 경우, 상황이 세번째 장면에서 따라 나온다. 1, 6-12의 특성을 보면, 첫째 장면과 셋째 장면에서는 엘로힘이 계속 나오고 있다. 야훼는 단지 인용되고 있는 21절에서만 나오고 있다. 반대로 1, 6-12은 야훼만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8b를 보면 1절에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두번째 장면과 세번째 장면이 연결되어 있다. 참된 신심(평화)이 무엇인가하는 문제를 사실(전개)로 바꾸는 문제로서 제시하는데 도움을 주는 장면이 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