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장의 연구

 

I.   1장의 구성 및 주석




1. 1장 1 – 5절 : 욥에 대한 설명(expositio)


【1절a】


1) 욥의 이름에 대한 여러 가지 설


창세 36, 34에서 나오는 ‘제라의 아들 요밥’은 이름의 형태로 보아서 욥과 똑같다고 본다. 에돔 왕국의 족보를 이야기 할 때 ‘요밥’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그 텍스트의 목적은 요밥도 에사오의 손자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요밥과 욥이라는 이름의 연관성은 바로 욥에 관한 설화가 이스라엘이 에돔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를 받아들여 토착화했음을 추정하는 근거가 되는 텍스트(기초자료)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어원


☞ 마틴 롯은 욥이라는 이름이 ביא (이브:거스리는 자, 원수가 맺어지는 자)라는 동사에서 변화된 명사형으로 보고 있다.


☞ 아랍 어원에서는 하느님께 자신을 향하게 하는 자로 말하고 있다.


☞ 에집트와 바빌론 지역의 마리에서도 욥이라는 이름이 관계가 있다.


☞ 아카디어에서는 아이야 아부(ajia -abu : 아버지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어원에서 나왔는데, 이 말을 줄여서 욥이 되었다고 본다.



∴ 욥이라는 주인공은 이스라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여러 텍스트에서 볼 수 있는 주인공으로서 옛날부터 다른 여러 민족과 관련된 이름으로 여러 나라에서 찬양 받을 수 있는 주인공으로 문화적인 대명사가 되어 있었다.


2) ‘우스’라는 지명도 논란이 많이 있다.


☞이스라엘의 동쪽(게뎀), 즉 다마스커스의 동남쪽 어디를 가리키지 않는가?


☞ 동 요르단의 북쪽(아람지역)


☞창세기 36, 20 – 28에서 나오는 세이르 지방 거기 어디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


☞ 고대 아랍 족속들이 에돔에 들어 왔는데, 거기 어디를 가리키지를 않는 것인지?



∴이 지명은 일정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 온 이방인임을 얘기하고 하는 것이다. 즉 어떤 일정한 지역에서 온 사람임을 제시하고 함이다. 이 이야기는 다른 민족으로부터 전승적으로 문화적인 연관이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여기에 밝혀진 지명은 과학적으로 밝혀지는 지명이 아니라(윌리암 포드), 이스라엘이 신학화 시킨 것이다. 즉 기능적으로 독자로 하여금 욥의 보편성(포괄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1, 1b : 욥 개인에 관한 이야기


1, 2-3a: 욥의 소유와 부에 관한 이야기


1, 3b : 사회적 차원에서 욥의 탁월성을 얘기


1, 4 : 욥의 아들, 자손들의 활동 안에서 드러난 욥에 관한 이야기


1, 5 : 하느님 대전 앞에 있는 사람 – 하느님과의 관계




【1절 b】*욥의 여러 가지 특성


① סמת(타망 : 완전한, 온전한, 하느님께 충실한 자, 갈라지지 않은 마음)


노아(창세 7, 1 ; 6, 9)나 에제 28, 3절에서 다니엘을 ‘온전한’, ‘완전한’자로서 얘기한다. 또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는 장면(창세 22장) 에서도 언급한다. 즉 갈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질서가 있는 것 바로 하느님의 법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자, 하느님과의 유대, 하느님과의 연대성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표현을 신약의 마태오 복음 안에서는 완전한 사람, 루가복음에서는 자비한 자로 표현하고 있다. 즉 ‘완전’은 형이상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 대전에 온전한 사람으로 하느님께서 악인이나 선인에게 똑같이 언제나 신실하신 것처럼 인간들도 또한 하느님과 같은 태도를 취하도록 말하는 것이다.


② רשׁי(야사르 : 진실하다, 인간의 신실함)-인간의 행동이 모나지 않고 곧음


(시편 25, 21 ; 37, 37, 잠언 2, 21 ; 28, 10 ; 29, 10 참조)


하느님 앞에서의 두려움을 말하는 데 이는 인간 안의 공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의 「순명」과 「신앙」에 관한 문제이다. 신명기 안에서는 신앙을 잃지 않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신명 6, 24을 보면 “그러시고는 우리를 언제까지나 오늘처럼 이렇게 복되게 살도록 하시려고 야훼께서는 우리에게 우리 하느님 야훼를 경외하며 이 모든 규정들을 지키라고 분부하신 것이다.” 또한 산파 이야기(출애 1, 17. 21)에서 나타나는 산파의 행동 안에서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이어가게 하는 힘임을 제시한다. 지혜문학에서 하느님의 두려워함은 참 지혜이며 창조 때부터 있었다. 이것은 하느님께 순명하며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사회적인 의미에서는 역사의 반전이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서 제시된다(창세 1, 15이하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그런 의미에서 ‘악한 일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고전적인 수덕 신학의 기초인 ‘세상으로부터 멀리하고, 악으로부터 피한다’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고칠 점이 있다. 즉 하느님께서 세상으로 내려오신 것처럼 세상을 멀리하는 악한 것으로서만 보는 관점을 피하여야 한다.




【2 – 3절】안에서는 하느님의 축복은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출애굽 1장에서 보면 파라오는 산파들에게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을 한다. 그러나, 산파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그 명령을 어기면서 아이들을 살린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설화적인 이야기로서 이를 제시하고 있다. 지혜문학안에서는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참 지혜이며 생명을 이어가는 것임을 제시하고 있다. 즉 창조때 신학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3절】에서 ‘부’는 하느님의 은혜(축복)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7”은 축복의 숫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참고로 사무 上 2, 3과 룻기 4, 15절을 참조할 수 있다. 바빌론 시대에도 이 숫자는 충만성, 온전성을 나타내는 숫자였다. “3”도 또한 위와 같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열왕 상 11,3). 숫자뿐만 아니라 종류에서도 섬세하게 표시하고 있다. 낙타, 소, 양, 암나귀 등은 유목민 시대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가진 부유한 사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사람의 위치 즉 부자임을 드러내고 있다.




【4절】부자일 뿐만 아니라 지배 위치에 있음을 얘기한다. 아들들도 귀족, 지배 계급에 속한 만큼 잘 살았음을 얘기하고 있다. 기능적으로는 욥만 으뜸이고 하느님 대전에 진실했다고 칭송하지 않고, 자녀들도 같이 함께 말하고 있다.




【5절】에서 “번제”를 언급하고 있다. 음식제, 속죄제는 일부를 남겨 사제나 참여한 사람들이 먹지만, 번제는 전부 다 살라 바치는 것이므로 경제적인 손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욥이 번제를 바치는 이유는 잔치를 벌이는 중에 혹시라도 자기 자신이 하느님 앞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가하는 의심과 함께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제시하고 있다. 두려워하는 것과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는 것은 지혜문학적 요소이다.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는 것은 경솔함, 미련과 연결지어 이해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욥은 모든 면에서 책잡힐 만한 사람이 아님을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당시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임을 얘기해줌으로써 expositio의 기능을 하고 있다




2. 1장 6 – 12절 : 천상대화 Ⅰ


【6절】짧은 expositio의 역할을 한다.


“하루는 하느님의 영들이 하느님 앞에 모여왔다.” – 범신론적인 요소가 있다. 이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직도 제일 높은 신이 엘신이고, 그 밑에 바알신이니 여러 잡다한 신들이 많이 있다는 이교인들의 신세계를 이어받아 쓴 것이지 야훼를 무시하고 다른 신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런 신관을 반영하여 쓴 것은 아니다. 미가 예언자가 본 천상회의(열왕 上 22, 13 – 28)장면 안에서도 이와 같이 여러 신들이 등장한다. 사탄은 거스리는 자(영)으로서 왕정시대 국가 체제 속에 있었던 검사역할을 투영하여 하느님께 죄인을 고백하는 영으로서 나타난다. 인간의 영역안에서 나타나는 그런 직권을 하느님께 투영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거스른다는 의미”를 자세히 알아보고자 하면 창세 27, 41 ; 49, 23 ; 50, 15 , 시편 55, 4 ; 38, 21 ; 71, 13 ; 109, 4 . 20 . 29를 참조)


※악의 문제 : 창세 2장과 3장에서는 악의 유래에 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악의 유래 규명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다만 악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출애굽과 이사야 6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악은 하느님의 허락하는 한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악의 문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될 문제인 것이다.




【7절】“주님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 설화적인 표현.


야훼께서 악마에게  “너는 어디 갔다 오느냐?”라고 묻자 사탄이 대답하였다. “땅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탄은 사방에 다니면서 선을 악으로 보는, 사람의 생활에 거스리는, 아무런 위임을 받지 않은, 소임이 없는, 별다른 능력이 없는 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역설적으로 하느님의 인정이 있을 때에 비로소 어떤 일(악한 일)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느님을 이해하는 점에 있어서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에서 벗어나 있음을 볼 수 있다.




【8절】야훼의 입을 통해 1절을 반복한다.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사람을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은 바로 두려워하는 것임을 말한다. 하느님께 두려워하는 자는 세상에 대해서는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언제고 세상에 대하여 적대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창세 26, 24 ; 출애 32, 13 ; 신명 9, 27). 시편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느님의 종의 특권을 이야기한다.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당신의 생각을 털어놓으시고 당신의 계약을 가르쳐 주시리라”(시편 25, 14) 즉 하느님의 상대자,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욥을 조상과 같은 급으로 격상시킨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된다. ‘종’이라는 표현은 사회적인 부정적인 의미(소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종은 지위가 낮다는 것, 국한․속한다는 것, 아랫사람임을 나타내는 표현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를 이해함에 있어서 야훼와의 특별한 관계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하나의 특성만을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즉 종으로서의 고난과 역경을 무시하려는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




【10절】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축복과 번성을 누리게 됨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출애굽에서 산파들에게 있어서 ‘두려움’과 ‘축복’이 연결지어 이야기되고 있다.


축복은 공짜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욥이 업적을 남겨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행복, 축복은 인간의 업적과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신학이 들어 있다. 사탄이 거스리는 자인 것은 축복은 하느님이 인간의 업적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인데, 이것을 비례하는 것이라 주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탄과 욥의 친구들은 하느님의 축복에 대하여 도전을 하고 있다.




【12절】결론적인 단락으로 하느님의 허락으로 사탄의 활동이 시작된다. 즉 사탄의 활동은 하느님의 영향 아래서 이루어진다. 욥에 대한 사탄의 평가와 하느님의 평가가 서로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7절 안에서 나타나는 악마와 12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악마의 모습과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3. 1장 13 – 22절 : 1차 신앙의 위기


15절 사바 사람  – 17절 갈대아 사람  :  사회적인 요소 안에서의 재앙


16절 벼락(하느님의 불) – 19절 광야에서 모진 바람 : 자연적인 요소 안에서의 재앙


◇1, 2 – 3 안에서 드러난 사회적, 자연적 요인과 비교되어 나타나고 있다.


◇욥의 건강 이외에는 모든 것을 빼앗겼다.


◇표현에 있어서 재앙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즉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갑자기 역경이 들이닥쳤다. 야훼의 보호가 없으면 인간은 재앙을 감당할 수 없는데 그래도 욥이 하느님께 충실할 수 있을 지를 시험하고 계신 것이다.




【15절】 사바 사람 – 베드윈 사람으로서 노략질을 일삼던 아랍 반도의 남쪽 지방에 살고 있었던 사람이다.




【16절】하느님의 불(민수 11, 1 ; 열왕 上 18, 38)은 재앙의 거대함을 하느님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하느님이 사탄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탄이 주장했던 것을 시험하시고자 함인 것이다.




【17절】 갈대아 사람 – 유프라테스 하류 먼 곳에 사는 유목민 상징




【19절】 광야에서 모진바람은 16절의 불 즉 벼락과 같은 개념이다.


모진바람은 야훼의 바람으로 해석할 수  있다.(새 번역 ; 큰바람)


야훼의 바람은 사탄이 허락을 야훼에게 받은 것이다. 그러면 재앙의 원인이 잠시만이라도 사탄의 손에 있었다고 착각하기 쉬우나 그렇게 보지 말고 다만 하느님의 벼락, 불 등을 통해 그 재앙이 얼마나 컸던 것인가를 보고 또 야훼가 허락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야훼의 바람이지만 사탄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16절의 불과 같은 맥락에서 재앙의 크기를 나타낸다. 재앙은 야훼가 허락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사바인과 갈대아인이 사람으로부터오는 재앙과 자연으로부터 오는 재앙 즉 하느님의 벼락, 야훼의 바람과 병행됨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재앙이나 자연의 재앙의 범위, 폭, 깊이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cf) 2장에서 친구들(위로자)의 등장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무전기, 삐삐도 없는데 동시에 욥을 찾아왔음은 벌의 효과를 나타내기 위한 것임을 참고해야 한다.




【20절】‘일어났다’라는 표현은 자리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행동을 시작하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슬픔, 고통(창세 30, 34 ; 레위 10, 6 ; 여호수아 7,6)을 표현하는 것과 머리를 깎는 것(예레 7, 21 ; 신명 14, 1)은 상징적인 것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땅에 엎드림은 하느님이나 왕에 대한 흠숭을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의 겸손을 나타날 때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21절】“야훼 이름을 찬양할 지어다”  ( 찬양 = 하느님의 수용, 인정)


‘야훼’라는 이름은 이미 신명기 신학 세계 안에서는 하느님의 현존을 표현하는 신학적인 대명사이다. “야훼”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주관적인 관여, 고백,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야훼 이름 부르는 자체가 야훼가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신명기 신학에서 야훼 이름은 성체가 현존하는 것처럼 야훼 현존의 대명사이다. 이스라엘 신관의 두 가지 딜레마인 하느님의 초월성(하늘에만 있어서는 안됨)과 역사성(세상에 있어서만도 안됨)을 하느님의 이름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현존을 인정하는 것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공동번역 ;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 새 번역 : 어머니 태중(몸)으로부터 벌거벗고 태어난 몸.(어머니의 몸(태중)을 첨가할 것).


여기서는 어머니의 몸을 강조한다.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公手來公手去)하는 감추어진 사실을 인간은 모른다는 의미이다.


시편 139편, 13편15절) 땅과 어머니의 태중을 연결시킨다.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


벌거벗고 왔다 – 소유없이 왔다 소유없이 돌아감. 즉 원상태로 돌려준다는 의미이다.


cf) 가톨릭의 제사 개념은 내가 이룬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것을 돌려준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본질적인 제사의 의미이다.


동양학의 기(氣)의 개념에서도 원상태로 돌려주는 것을 안한다든지, 마치 안 받은 것처럼 한다든지, 또는 갖고서도 원상태로 안 돌려주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氣가 안 통한다는 것으로 본다. (우주적인 氣).


서양철학에서, Materia는 세상 속에 계속 존재하고 Forma만 변한다는 개념과도 유사하다.




◉특성 : 야훼의 이름의 반복되고 있다. 그전에 하느님을 “엘로힘”으로 쭉 이야기하는데, 테두리 이야기(가장 오래된 이야기) 속에는 “야훼”를 통해 역사의 반전을 시도하는 것이 엿보인다. 야훼는 삶과 죽음의 신이다. 이는 초창기에는 생명의 하느님, 살아있는 사람만 생각했는 데, 이제 죽음과 같은 부정적인 것도 하느님 영역에 있음을 전제한 신학인 것이다. 욥의 찬양으로 사탄이 진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테두리 이야기에서 욥의 자세는 선한 일, 업적, 호의가 하느님의 은혜와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알고 있다.


4. 1장의 목적(신학적 의미)


인간에 있어서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 사회의 명망이 정말 값이 있는가? 또는 제가치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그 가치의 판단 기준은 사회적으로, 일반적으로 그야말로 엘로힘의 세계-일반적인 신의 세계-에서는 그것은 자기가 심은 데로 거두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그 원칙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테두리에서 나타나는 욥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다 자기 이득이 되기 때문에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윤리의 유명한 법칙“네가 널 주기 위해서, 나도 널 준다”라는 상호협력이 안 통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안 통한다는 것은 우선 하느님이 욥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신다. 욥은 그런 맥락에 상통하는 사람이 아니다. 거기에 상응하게 욥도 그런 신뢰를 보인다. 참된 신뢰(신심), 옳은 태도는 선과 상과 관계없는 그런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 있는 것이다. 공과에 따라 하시는 하느님이시라면 오늘날 우리는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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