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바즈의 둘째 담론 (욥기 15장)

 

I. 엘리바즈의 둘째 담론 (15장)


1. 구 조


①2 – 16절 :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어떤 것을 상기시키는 내용


2-6절 / 7-10절 / 11-16절(11-13절, 14-16절)


②17- 35절


17-18절 : 뒷부분의 고유한 서론


20-35절 : 악인들의 운명에 대해 엘리바즈가 가르쳐주는 모범답안


20-24절 / 25- 28절 / 29-35절


※ 30절a와 31절은 후대첨가로 많이 본다.




2. 특징


점잖던 논쟁이 이제 감정적으로 바뀌는 것, 그리고 앞에 4장 5장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훨씬 강도 있게 몰아 붙이는 것이 나타난다. 그것은 나중에 뒷부분에서 악인의 운명이 어떤가 하는 것을 통해서 더 확실히 드러난다. 욥을 그런 식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반부에서는 질책을 하고 있는데 질책을 하는 내용이 계속 이어진다.


13, 7-12절이 바로 그런 비슷한 형식인데 여기 전부분의 특성이 논쟁 또는 다툼, 그래서 막해 붙이는 그런 것이 특성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나중에는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죄가 있다고 단정하는 단죄 쪽으로 또는 고소하는 쪽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4장 5장에서 보여주었던 억제 같은 것을 다 풀어 버린다. 그 악인에 대해서도 막연하게 얘기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얘기한다. 악인의 모습에 대해서도 물론 15장은 그 앞에 나온 소바르나 빌닷의 그런 것도 감안을 해서 생각해야 한다.




3. 주 석


① 1-6절


우선 2-6절은 1절에서 ‘데만 사람 엘리바즈가 말을 받았다’해서 욥의 얘기를 듣고 이를 전제로 하고 엘리바즈가 말을 받았다고 보면 좋다.


일종의 지혜문학에 토대를 둔 논쟁이다. 질문을 하고 그 다음 거기에 대해서 질문을 2번씩 한다. 4절에 가서는 ‘왜 그렇게 되는가?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서의 자질이 없는가? 근본이 왜 흐트러졌는가?’ 라는 얘기를 한다. 그리고 5절-6절에서 결론 비슷하게 이런 얘기를 한다.


▶ 현인은 지혜문학에서 나오는 대표적인 현인인데 창조 때부터 하느님이 세상에 감추어 심어준 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현인이다. 즉 실제 생활에 있어서는 경험에 토대를 두어서 사는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한 사람이다. 그래서 일종의 영어로 art 라틴어로 ars 기술의 일종이다. 그래서 여기는 경험에 토대를 두어서 발전을 하는 experientia 어간에 peritus 전문가를 현인이라할 것 같으면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것에 그런 삶의 기술, 창조 때에 감추어 심어준 하느님의 목적을 깨닫는데 필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다. 이것은 현인의 특성이다. 나중에 나올 악인이 지니는 그러한 두려움이 아니고 좁아지는 의미에서의 두려움이 오히려 하느님의 길을 따라서 자신을 넘어서는 뛰어넘는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순명하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순명은 듣는 것, 즉 audire 에서  순종하는 것, 즉 obaudire가 나온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지혜라고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듣는 것이다. 그리고 듣는 것에 따라 순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인간은 듣는 것하고 순명하는 것, 즉 audire와 obaudire 사이에 단절이 생기는 것이다. 들으면 들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현인이다. 


그런데 이 단어의 문제가 아니고 여기서는 질문을 할 때는 너도 현인 축에 끼지 않느냐는 것이다. ‘현인이 바람같은 지식으로 대답하고 제 배를 샛바람으로 채우리요?’ 네가 그러고 있는 것이다. 너도 옛날에 현인이었는데.  처음에 나오는 4장, 5장에서도 비슷한 논제로 볼 수 있다.




【2-3절】 ‘현인이 바람(같은) 지식으로 대답하고 제 배를 샛바람으로 채우리요? 쓸데없는 이야기와 소용없는 말로 논쟁하리요?’ 이래서 현인이 어떤 것인가를 욥으로 하여금 생각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둘이 공유하고 있는 지혜에대한 전통적인 지식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것은 4절의 ‘자네야 말로’해서 2-3절에 나타나는 현인에 반대되는 사람이 바로 너다라고 하는 것이다. 바람 같은 것이 쓸데없는 얘기, 소용없는 말, 여기에 반대되는 것이 경외심, 하느님에 대한 묵상, 여기서 묵상은 깊이 생각하는 것, 우리가 말하는 단순한 묵상이 아니다. 그리고 경외심 그러면 지혜문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내용.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기초라는 이야기이다.


샛바람은 더 구체적인 얘기인데 팔레스티나쪽에서 동쪽에서 부는 바람이 건강에도 안좋고 아마 생활에도어려운 것인가 보다. 여기서는 샛바람을 그런 것으로본다. 그래서 이런 애기는 현인에 대한 얘기일 뿐 아니라 그 밑에 벌써 네가 한 얘기가 다 그런 미련한 사람의 현인과반대되는 거스른 얘기를 한 것이다로 단죄하고 고소하는 것이 들어 있다. 그리고 굉장히 무시하는 또 사람에게 해롭게 하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 3절 : 3절도 같은 얘기이다. 욥이 현인이라고 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점점 내려가는 것이 그전에는 그런지 모르지만 지금 네 잘못이란 네 말에서 드러난다고 논거를 펼쳐 나가는 것이다. 현인으로서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그리고 샛바람은 동쪽에서 불어오는 상당히 해로운 바람. 자연적인 것을 가지고 일러주고 있다. 쓸데없고 소용없다는 것은 그 위에 나온 욥의 주장을 일컫고 있는 것이다.




【4절】경외심은 지혜문학에 있어서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것. 그리고 여기에 ‘면전의 묵상’ 이는 특별히 ‘씻카’라고 하는데, ‘생각한다’ 이런 얘기인데 7장 13절, 9장 27절, 10장 1절, 21장 4절 이런데는 씻카해서 남성으로 쓰인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성으로쓰이고 있다. 헤가 붙으면 여성이다. 여성으로 붙으면 삐에따스 무슨 영심하고 하느님을 생각하는 마음 이런 등등으로 얘기하고 남성으로 붙으면 탄원, 기도로 본다. 여기서는 탄원보다 하느님 대전에서 무엇을 반성하는 것, 특별히 하느님이 가르쳐 주신 길 이런 것을 깊이 반성하는 태도. 시편 119장 97절. 99절을 참조. 그래서 경외심과 묵상하고 이렇게 되면 두가지로 얘기할 수 있다. 하느님께 대해서 두가지 태도를 인간이 가져야 한다는 것을 지혜문학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경외심하면 하느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하는 의미에서 다라 악티바, 액티브 라이프, 묵상, 이런 깊이 생각하는 측면에서는 비따 콘텐프라티바 명상하는 애기. 이 두가지를 포함한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점에서 욥이 잘못한 것이라고 단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욥과 엘리바즈가 점점 벌어지는 것이다. 똑같은 하느님을 놓고 점점 벌어지는 것이다.


2절 3절과 연결시켜서 네가 현자로서의 기본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현자의 기본은 앞에서 언급한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5절】그리고 무너진 근거를 어디서 볼 수 있는가? ‘진정, 자네는 자네 죄가 가르치는 대로 말하고 교활한 자들의 언어를 골라내는 구려’ 여기서 교활하다는 것은 창세기 3장 1절의 뱀이 교활하다는 것과 연결된다. 사람에게 해롭게 하는 그것은 깨뜨리고 방해나는 것을 부연하는 것으로 보면된다.




【6절】6절이 마지막 결론인데 내가 얘기 안해도 네가 하는 말 자체가 벌써 너를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2절에 던진 ‘현자로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를 다시 언급하면서 이것은 현자의 도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또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서의 자격도 상실한 것이다. 이것은 6, 7장에 나오는 욥의 하느님께 대한 원망과 노래가 엘리바즈가 볼 때는 또하나의 죄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하느님께 탄원한다는 것 자체가 엘리바즈의 눈에는 오히려 현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엘리바즈가 욥을 몰아 세우는가? 그런 것에 대한 여러 설명이 있는데


– Weiser는 “욥의 말은 결과적으로는 하느님의 정의를 의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엘       리바즈가 이렇게 욥을 무섭게 몰아 치는 것이다.”


– 비슷한 얘기로 Lamperter는 “욥이 그려낸 신의 모습은 예수님에 대해서 하느님을        모욕했다는 식으로 하느님께 죄송스러운, 모욕되는, 하느님을 훼손시키는 그런 하느       님의 모습을 그려 냈기 때문에이라고 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엘리바즈가 생각하       던 모습과 맞지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몰아세우는 것이다.


– H. Richter는 하느님이 욥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욥이 의로울 수 있다는 것을 도       외시 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호르스트는 세명 모두 맞을 수 있고 정확히는 모르는 것으       로 열려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의 얘기는 다만 욥같이 얘기할 경우에는 죄의 본질       혹은 자기의 잘못을 적당히 얼버무리는 결과를 낳는다.


프레딕 호르스트는 위의 세 주장이 모두 옳을 수 있음에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한다. 그는 다만, 욥이 하느님께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경우 죄의 본질 혹은 자신의 잘못을 적당히 얼버무리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하면서, 그래서 엘리바즈가 욥을 몰아세운다고 호르스트는 말한다.


《6절의 결론》


7장에서 욥은 죄, 잘못에 대해서 하느님께 불평하고 하느님을 원망하는데, 엘리바즈에 의하면 사실은 이것이 욥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고 결론짓는다. “욥 자네의 혀가, 특별히 욥 자네의 말이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자네를 거스르고 있는 것이네” 라고 하면서 결론을 짓는 것이다.




② 7-10절


【7절】신화적인 의미가 있다. 즉, 땅에서 조성된 인간이나 아담과 같이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가리키기보다는 태초부터 아무런 도움이 필요치 않는 독립된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자네가 첫째로 태어난 인간이기라도 하며”(7b절) 는 아담과 같은 인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8절】“자네가 하느님의 회의를 엿듣기라도 했으며”라는 내용 역시 신화적 성격을 띄고 있다. 〈1열왕 22, 19-23〉에 보면 미가야 예언자가 신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엿들었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 역시 신화적 성격을 띄고 있다. 이는 이민족이 지니는 신관, 즉 으뜸신과 그 외의 다른 신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는 상징적인 표현을 썼는데 이는 8절과 비슷한 이야기이다.


8b절은 엘리바즈가 욥이 이야기한 것을 몰아세우는 글이다. 즉 ‘지혜를 그렇게 독차지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구절은 2-3절과 연결시켜서 보아야 한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라는 뜻이다.




【9-10절】지혜문학적 틀에 의하면 바로 이러한 연륜을 통해서 쌓이는 것이 경험이고 이 경험을 통해서 쌓이는 것이 지혜이다. 여기서 엘리바즈는 이러한 지혜문학적 틀을 바탕으로 욥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욥 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우리 사이에는 연로한 분들도 계신데 그러한 지혜를 뛰어넘는 척 만용을 부리는 것이 아니냐.’


¶이처럼 6절의 내용을 7-10절에서 풀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③ 11-16절


【11절】여기서 엘리바즈는 “자네에게는 하느님의 위로와 부드러운 말만으로는 모자라단 말인가?”라고 말하는 데 그렇다면 언제 하느님의 위로와 부드러운 말이 있었는가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이 말의 뜻은 엘리바즈 자신이 욥에게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했으면 욥이 깨우칠 만도 한데 그렇지 못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언어가 내 입을 통해서 나온, 그 이야기로 인해서 네가 하느님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게 끔 됨직도 한데 그렇지 못하다.’ 이것은 엘리바즈가 이미 이야기한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지금까지 네가 알아듣도록 위로와 부드러운 말을 했는데 그래도 깨닫지 못함은 너의 고집 때문이데, 어찌하여 그 고집을 꺾지 않는가?’  이런 답답한 마음 때문에 11-13절에서 엘리바즈는 욥에게 반대로 되물어 보는 것이다.




【12b절】“어찌하여 자네는 눈을 치켜 뜨고 있는가?” 이는 일반적으로 하느님께 역정을 내는 태도, 하느님을 원수로 생각하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본다.


7-10절이 친구에 대한 욥의 교만성이라 한다면 11-12절은 하느님께 대한 욥의 잘못된 태도를 일반적으로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은 6절에 “자네 입술이 자네를 거슬러 증언하고 있다네.” 즉 ‘네 말이 그것은 증명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12b-13절의 내용이 6절로 되돌아간다.


4, 17 이하에서는 욥의 피조물성, 욥이 창조된 것, 인간의 역약함 등의 이유 때문에 잘못될 수 있다고 보지만 여기서는 욥이 말을 잘못해서 단죄를 받게 되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래서 첫째 cycle에 비해서 이 둘째 cycle에서 엘리바즈가 욥을 더욱 신랄하게 비판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15장의 이 구절들을 6-7장과 연결하여 본다면, 욥이 하느님께 잔원하는 것을 엘리바즈는 하느님께 원수짓는 태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엘리바즈와 욥의 다른 神觀을 볼 수 있는데 욥과 엘리바즈가 친구 사이인데도 신관 때문에 고통에 대한 참다운 소통이 안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간 소통에 있어 신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부차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4절】인간의 한계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욥 자네는 최초로 태어난 인간이 아닌, 우리가 다 알다시피 한계성을 지닌 인간이 아닌가’ 라는 의미.




【15-16절】여기서의 논리는 큰 데에서부터 작은 데에로 흘러가는 논리이다. 또한 ‘인간이 얼마나 타락한 존재인가 하면 죄를 짓는 것을 물먹는 것과 비슷하게 한다’ 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인간이, 욥 네가 어떻게 결백할 수 있느냐?’ 즉 태생적으로도 결백하지 못하고 후천적으로도 결백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나중에도 정당화되는 것이지만 인간이 이러이러한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탄원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며, 이런 길을 열어 놓은 것이 바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자비이다. (그것이 바로 시나이에 내려오는 하느님의 특성이며, 또한 예수님을 통해 세사에 강생한 하느님의 특성인 것이다.)


▶15절‘거룩한 자들’ 이란 천사들을 지칭.




¶여기까지 나타난 엘리바즈가 보는 욥관은 욥이 지니고 있는 신관에 근거해서 욥을 엘리바즈가 평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엘리바즈가 보는 욥은 현자 현인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 대한 욥의 고백이 현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또 그 자격이 없는 것은 그 말 때문인데, 그 말은 친구들(엘리바즈 등등) 또 그 사람들과 동격이라고 해도 그 사람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있는데, 경험을 토대로 해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을 눈까는(?) 듯한 태도는 엘리바즈가 볼 때는 현자로서의 자격은 틀린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같은 것을 지니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적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엘리바즈는 욥에게서 본 것이다. 또 그렇게 밖에 볼 수 없는 이유는 엘리바즈가 지니고 있는 고정된 신관에 있다. 엘리바즈의 신관은 인간의 고통에 대해서 전혀 훈련이 안되어 있는 일방적인 해답밖에 없는 신관이다. 그래서 욥을 자기의 관점에서 보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서 어떤 과오를 범하느냐면 하느님을 자기의 사고의 틀에 넣는  우를 범한다. 그렇기 때문에 욥을 보는 엘리바즈의 관은 “욥 너도 그렇다.”라는 것이다. 즉 엘리바즈의 신학에 의하면 하느님께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자의 전통을 봐서는 그렇다. 그런데 욥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뒤에는 고통에 대해서 신관의 고정화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욥은 고정이 되었든 안되었든 괴로우니까 미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해석(반성)은 엘리바즈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욥에 대한 평가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친구나 하느님께 대한 잘못, 즉 하느님을 적으로 생각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께 대해서 생각을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즉 지혜를 지닌 사람으로서는 전혀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4장에서 처음 욥에 대해서 판단할 때에도 지혜 문학적인 논법을 쓴다. “자네가 정말 옛날에는 남의 불행에 대해서는 이러이러하게 얘기하지만 이것이 뭔가”라고 얘기하는데 이런 비슷한 식의 얘기를 한다.




¶신학적 반성


그렇다면 이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뛰쳐나가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거룩한 자들도 믿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이 순결치 못하고, 또 인간은 물먹듯이 죄를 범하고, 그래도 하느님께 탄원할 수 있다는 것이 모순적인 사이클을 뛰쳐나갈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렇게 해서 죄를 물먹듯이 범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하느님께 탄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현자의 개념을 바꿔야 되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 대한 개념을 바꿔야 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과 같이 외치고 있다”고 바꾸면 간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일러주는 작업이 이제 출애굽의 신이다. 즉 근본적으로 출애굽의 신이 그러한 신이다. 함께 하는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 출애굽의 신이고 이를 체험적으로 일러주는 사람이 욥이다. 그래서 근래까지 우리 교회 생활에서 “신비 생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옛날에는 주술적인 시대였고 그 다음에는 신화적인 시대(이것은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전체성을 띌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인식론적인 분석적인 차원으로 넘어갔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떠할 것인가? 앞으로는 신화적인 요소를 수용해야 할 것이다. 즉 인간이 지니며 살고 있는 모든 순간 이것이 하느님이 나타나는 계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여기서 엘리바즈는 이런 고통에 있어서는 하느님이 나타나는 순간이 아니다라고 보는 것이고 욥은 하느님이 나중에 인정하므로 추후에 하느님이 고통 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신비적인 차원에서 보면 모든 인간 생활의 순간 순간이 하느님의 계시의 순간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요한 복음에 수차례 나타나듯이 “성부와 나는 하나이다”라는 것이 비록 나타나지는 않지만 우리가 여기서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은(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흔히 우리가 십자가의 고통이나 부활에 참여한다라는 것은 “예수님이 성부와 일치한다는 것과 성부와 나는 하나다”라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열어 놓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출애굽에 나타나듯이 하느님이 인간과 함께 있는 것이 단절되어서는 안되고 모든 분야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욥과 엘리바즈는 바로 이 점에서 충돌을 일으킴을 볼 수 있다.




⑤ 17-19절


17절부터 19절은 커다란 서론이다. 그런데 이것은 첫 번 그런 것, 즉 자기가 경험한 바와 같은 것이다.(그런데 16장 2절에 가면, 서로 본 것과 경험한 것에 근거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네가 이야기한 것은 다 들었네”라는 식이다).


본문 해석입니다.


(엘리바즈의 말)


“현인들이 선포한 바, 그들 조상들로부터(받아) 숨기지 않은 것일세.(내가 하는 말은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것이며 인정을 받은 것이니 잘 들어야 한다)


땅은 오로지 그들에게만 주어지고, 낯선 자는 그 가운데를 지나간 적이 없었지” (조상들이 지혜롭게 살았기 때문에, 내가 이 지혜를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땅에 살 수 있는 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것이 왜 확실한가? – 지혜롭게 살았기 때문에 거기에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너(욥)는 지금 그렇지 않지 않느냐? 그러니까 내(엘리바즈)가 말하는 지혜가 너(욥)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다. 즉 나는 축복 받은 조상들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이고 “너는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네가 잘못을 했으니까 하느님이 복을 안 주신다”라는 공식이 대 전제가 되는 것이다.


엘리바즈는 이렇게 서론으로 얘기하고 구체적으로 내가 본 바가 무엇인지 말한다.    


▶19b의 “낯선 자는 그 가운데를 지나간 적이 없었지.“는 지혜가 순수하게 보전되어 왔다는 것이다. 〈요엘서 4, 17〉의 표현을 보면 ”그제야 너희는 알리라. 내가 야훼 너희 하느님으로서 거룩한 산 시온에 머무는 줄을. 예루살렘은 성소가 되어 다른 나라 사람이 아무나 지나가지 못하리라.“ 즉 성소의 순수성과 마찬가지로 이 땅을 조상들이 순수하게 보전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말하는 지혜의 권위는 굉장한 것이다라는 서론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첫째로 20-22절에는 악인들이 당하는 내적인 고통이 있다.


악인과 압제자, 악인(히브리어)은 다른 사람을 형이상학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관계에서 괴롭히는 사람을 지칭한다. 압제자, 폭군(히브리어)은 폭력을 생각하면 된다. 또한 악인, 압제자가 이런 맥락에서 쓰일 때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떤 폭력을 쓰는 사람으로 인간관계를 혼란시키는 사람을 나타내며 그런 사람들을 병행구로써 20f는 설명하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은 계속 공포에 시달리는 것이다.


”공포에 시달린다“고 할 때 주로 쓰이는 상징적 표현은 〈이사 13, 8〉의 해산하는 연인, 〈예레 50, 43〉에 나타난다.


34절에 가서는 하느님과 소외된 사람들, 25절의 하느님을 거슬러 일어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공포에 떨면서 산다는 것이다. 즉 인간관계에 혼란을 일으킬 만큼 자기의 힘으로써 폭력을 일으키는 사람은 바로 일생 동안 고통을 겪으며 거기에 대한 댓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⑥ 20-35절


【20-22절】악인들이 당하는 내적 고통


▶21절 : “무서운 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리고, 태평스러울 때도 폭력배가 글 덮친다네”는 갑자기 닥치는 불행을 공포의 내용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닥칠까봐 늘 괴로워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볼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그런 위협은 하바꾹 2, 9-11 을 참고할 수 있다.


“태평스러울 때도 폭력배가 그를 덮친다네”도 갑작스런 평화가 방해된 상태를 나타낸다.


▶22절 : “그는 어둠에서 벗어나리라. 바랄 수도 없는 칼에 맞을 운명이라네.”는 악인이 어떤 쪽으로 이끌려 가는 그들의 운명을 나타내고,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런 죽음을 당하도록 이미 점쳐져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창조의 선택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폭력을 쓰는 사람은 생각지도 못한 어둠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폭력을 쓰는 사람의 말로가 어떤 것이냐, 그 방향이 어디냐, 그 목적이 어디냐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칼’이라는 것은 전쟁, 위험 등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둠’이라는 것도 ‘칼’과 병행되는 것으로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23-25절】악인이 당하는 외적인 고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3절 : “그는 ‘어디 있나?’하면서 빵을 찾아 헤매며 어둠의 날이 이미 그의 곁에 마련됐음을 안다네”


“빵을 찾아 헤매며”에서 폭력자들은 삶에 관계되는 본질적인 것을 자기가 누리고 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죽음이 가까이 있는 것으로 칼에 맞을 운명이라는 것과 비슷한 의미이다.


▶24절의 불안, 초조는 병행구로 특별히 무엇에 걸려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태, 좁아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태, 어디에 쫒기는것 등을 전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공포는 적이 나를 쫓아올 대 내가 당하는 압박감을 표현하며, 악인은 외적으로 그런 고통을 당할 것이다.


압제자, 폭력군, 권력자는 힘이 많이 있을 것 같으나, 사실은 오히려 외부로부터도 쫓기는 신세이다. 그것이 내가 본 바에 의하면 악인의 운명이더라.


그 이유는 25절에 나타난다. 즉 하느님을 거스르고, 전능하신 분께 으시댔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분”은 제관기 시대에 나오는 ‘엘 싸다이’이며, 그런 하느님께 대해 신이 없는 것 같은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악인의 운명이 고통 중에 있는 것이다.




【26절】“그는 목을 세우고 그분께 달려들었지. 돌기가 단단한 방패를 들고서.”는 하느님과 싸우는 모습을 나타낸다. 즉 공격과 방어의 표현을 통해서 하느님과 싸우는 모습이 나타나다.




【27절】“제 얼굴을 기름기로 뒤덮고 허리를 비곗살로 둘러쳤지.”는 고집을 피울 수밖에 없는 모습을 나타낸다. 즉 목덜미가 뻣뻣한 것, 심장이 막혀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 드리지 못하는 상태이다.




【28절】“그는 폐허가 된 도시들에, 사람이 거주할 수 없어 돌무더기의 차지가 된 집들에 살았지.”는 폭군이 살아야 될 곳은 궁전과 같은 곳이지만, 폐허가 된 도시에 살았다는 것을 드러내며, 그 폐허로 만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런 도시는 인간적으로 보면 다 떠나야 하는 곳이며 살 수 없는 곳임은 상식인데, 그런데서 산다는 것은 악한 행실의 결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 자체로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동인 것이다.




【29-32절】악인 최후의 첫째 형태로 볼 수 있다.


▶29절 “그는 부자가 되지도 못하고 그의 재산은 일어서지도, 그의 소유는 땅에 불어나지도 못한다네.”는 엘리바즈가 본 하느님께 강복을 받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특징을 들어 말하고 있다.


▶30절의 ‘어둠’은 출애굽의 어둠, 카오스의 어둠을 모두 지칭하는 것이다.


“그의 새싹은 불길에 타 버리며”는 심판 혹은 단죄를 받는 것을 나타낸다.


“그분의 입김으로 쓸려 가 버린다네”는 하느님이 벌을 내리심, 천재지변 등을 일반적으로 나타낸다.


▶31절 “그는 헛 것을 믿어 스스로에게 속지 말지니, 그에 대한 보상이 헛되기 때문이라.”에서 믿는다는 것은 안정되고 견고해야 하는데, 잘못된 것이나 헛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안정이 안되는 것이다. “헛 것을 믿어”에서 페베르는 전도서에서 나오는 것으로 “헛되고 헛됨”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표현으로 덧없이 지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반대적 개념은 “남는 것”이다. 전도서에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밖에 남는 것이 없음을 알려주며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헛것을 믿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페베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페베르와 비슷한 샤바르,(31절의 원문이 샤바르인지, 페베르인지 잘 모르겠음- 추후언급)




【33-35절】악인 최후의 둘째 형태로 볼 수 있다.


▶32-33절은 그 당시 체험, 경험에 근거를 둔 표현으로 “그는 제 때가 되기도 전에 끝나 버리고, 그의 잎사귀들은 푸르르지 못하리라”는 헛되기 때문에 융성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32-33절은 나무가 열매를 못 맺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으로 볼 수 있다.


▶34절 “불경스런 자들의 무리는 볼모가 되고, 뇌물을 좋아하는 자들이 장막은 불이 집에 삼키리라”는 악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외적으로부터 보는 벌을 언급한다. 즉 권력이 있기 때문에 뇌물을 받는다는 것은 악한 행위임을 나타내며 그들은 불로 사라지게 되고 헛것으로 될 것이다. 뇌물을 받지 않는 것은 지혜문학적 영역에서도 해석 가능하다.


▶35절 “재앙의 잉태는 불행을 낳는 것이요, 그들의 모태는 속임수만 마련할 뿐이라네.”는 잉태는 불행, 모태는 속임수, 즉 불행과 속임수를 모태하고 연결시켜서 원천적인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악인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지혜문학적 배경이다. 그리고 악인의 운명에 대한 특색은, 앞에 논쟁과 같이 질문한다든지 또는 욥에게 2인칭으로 이야기한다든지, ‘자네’로 언급하지 않고, 일반적인 진리, 제3자, ‘그는’으로 전개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것의 기능은 ‘자네, 그렇게 해서는 되나?’하는 지혜 문학의 배경으로 욥을 단죄하는 것이요, 그것의 근거로 제시해 주는 것이 악인의 운명에 관한 것으로 보면 되겠다. 다양한 악인의 특성에 대한 가장 큰 것은 하느님께 대드는 것, 하느님을 공격하는 일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느님께 대드는 것이 악인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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