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넷째 담론 ( 욥기 16 – 17장 )

 

I. 욥의 넷째 담론 ( 16 – 17장 )


16장은 욥의 반론으로 17장까지 이어진다. 이 장의 특징으로는 ‘자네’ 대신에 ‘나’ 자신이 주인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17장의 욥의 엘리바즈에 대한 대답은 하느님을 향한 성격을 지닌다.


1. 전 체 구 조


1) 16장의 구성


1~5(6)절, 7~8절, 15~17절 그 사이에 9~14절이 들어간다고 본다.


2-6절 : 서론


4-5절 : 엘리바즈의 설명은 욥에게는 현실성이 부족한 지극히 원론적인 충고일 뿐인데 반해 7절이하의 욥의 탄원은 매우 구체적인 성격을 띤다.  따라서 엘리바즈가 전하는 옛 지혜, 공식이 무너지는 욥의 현실은 또다른 특성을 지닌다.  즉 엘리바즈의 설명은 욥의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기에 결국 욥은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고통의 구체적 관계를 엘리바즈에게 설명한다.


7-8절 : 1인칭 ‘나’를 주인공으로 한 하느님께 대한 탄원


9-14절 : 욥이 느낀 고통을 허락하신 하느님, 즉 고통앞에서 하느님께 마음을 닫은 욥이 느끼는 하느님의 모습이 묘사된다.


¶1~6절까지는 대체로 서론 구실을 한다. 17절 이하(?)는 1인칭을 주인공으로 하는 하느님께 대한 탄원이다. 그 사이에 욥이 보는 하느님, 고통을 허락하시는 여러 모습의 하느님을 그리고 있다. 즉 욥의 신관이 나타난다. 설명하자면 성서에서의 기적은 주관적인 이야기다. 남들 눈에는 우습게 보이지만 개인에게는 굉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다마스커스의 바울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며 검증할 수는 없지만 본인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며 그것이 기적인 것이다.


반대로 욥은 괴로운 쪽에서 하느님께 마음을 닫게 되는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즉 기적의 반대 의미에서의 충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17절까지 나오는 욥의 신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욥을 괴롭게 하는 하느님으로 나타난다.




2) 17장의 구성


1-5,10절 – 친구들에 대한 실망, 친구들의 지혜가 별 도움이 안되는 현실.


1-3절 -친구들의 태도에 대한 탄원.


4,5-10절- 하느님께 대한 간청.


6-9절- 탄원의 내용.


11-16절- 1인칭을 주인공으로 한 탄원이 제시되며 백성, 친구들에 대한 실망, 탄원에서 하느님께 대한 간청으로 발전된다.  또한 16,17장의 내용을 종합하고 클라이막스로 이끌어가는 성격을 지니며 엘리바즈에 대한 대답과 함께 하느님과의 대화를 엿볼 수 있다.




2. 주 석


1) 16장의 내용


【2-3절】앞서 15, 2에서 사용된 엘리바즈의 말에 대해 욥이 동일한 형태로 반박하고 있다.


* 16,17을 보면 엘리바즈에 대한 대답으로 시작해 하느님과의 다툼, 하느님께 대한 탄원을 거쳐 결국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전체적으로 보아 욥이, 인간이 고통앞에서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매우 좁기에 그러한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묘사된다. 


【4절】말을 늘어놓고 머리를 젓는 것은 부정적인, 비웃는 의미를 지닌다.(애가 2,15참조)


욥은 친구들에게 말한다.  나도 너의 입장이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이것을 보아 욥과 엘리바즈의 차이는 고통에 대한 물리적인, 실제적인 참여의 유무에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엘리바즈의 이야기는 공허한, 욥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일 뿐이다.




【5절】이어지는 5절은 그런 의미에서 나도 엘리바즈 너의 입장이라면 (슬픔을) 줄여 줄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엘리바즈의 위로는 욥 자신에게 쓸모없는 것임을 지적한다.




【6절】2,3,4,5절의 결론으로서 욥은 아무리 말을 해도 자신에 대한 해답을 갖지 못한다.  그 이유는 엘리바즈의 충고가 욥자신에 대해 무의미한 것처럼 욥자신도 스스로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 이유가 7절 이하에 나타난다.




《7절 이하》


하느님께 대한 탄원부분으로 문법적으로 보아 7a,8b는 3인칭,7b,8a는 2인칭 단수로 나타난다.  여기서 ‘온 집안’을 파멸시킴은 욥의 삶의 가능성, 공동체와의 관계 가능성을 없애셨음을 의미한다.  또한 ‘탈진시키셨다. 파멸시키셨다는 것은 재생할 수 없는, 자기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태로 만드셨음을 뜻하며 하느님의 부정적 개입을 통해 고통의 원인이 하느님임을 말하고 있다.




【8절】8a : 약자의 편을 들고 보호해 주는 시편의 전통적인 하느님상과는 반대되는 하느님의 모습이 제시된다.  즉 ‘저를 움켜쥐시니’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기에 어쩔 수 없음을 의미하며 ‘그분께서는’ 이라는 표현을 통해 욥이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암시된다.


▶8b : 7a를 받아서 하느님이 그렇게 나오시기에 육신적인 파멸까지도 자신에 반대하는 하나의 증인으로 묘사된다.




【9절】욥은 자신의 고통속에서 하느님아닌 원수의 모습을 발견하며 고통을 통해 하느님과 더욱 까와 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느님과 멀어지는 모순적 상황이 6-9절을 통해 체험적으로 묘사된다.




【10절】10절은 친구에 대한 실망을 나타내며, 11절에 연결되고  테마상으로 1-5절과도 연결된다.  입을 벌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 불리한 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며 공격하는 의미이며 시편 22장, 애가 2,16에도 나타난다.  뺨을 치는 것은 마태 26,27에도 나온다.


‘나를 거슬러 떼지어 모인다’는 그 앞의 ‘나의 온 집안’과 상응하고 있다.


* 온 집안- 에다(단체의 의미)


살릴 수 있는 단체는 없애시고 반대로 나를 공격하는 무리들은 떼지어 모이는 대조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1-5절과 10절을 연결시키면 1-5절은 친구들이 아무런 도움을 못주고 오히려 빈소리만 할뿐 자기를 위로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자기를 공격하는 결과만을 야기하기에 그로인한 고통은 많은 무리와 대칭되는 욥의 고독을 보여준다.




【11절】10절의 상황을 중단시키셔야 할 분이 오히려 똑같이 자신을 공격하고 내치시기에 그들과 다를바 없는 분으로 하느님이 묘사된다. (시편31,9/140,9 참조)




【12절】8절과 같은 맥락하에 있으며 이것은 불의의 공격을 당하는 것,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전쟁, 공격등과 연결된 이미지이다.  애가 3,12절에 보면, 인간은 하느님의 과녘이 되기에 그 위험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13절】쓸개, 간장에 대해서는 레위기 안에서 제사를 바치는데 있어서 특별히 취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기관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따라서 하느님께서 화살로 쏘아 간장을 꿰뚫고 쓸개를 땅에 내동댕이 친다 함은 불의의 공격으로 더 이상 살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킨다.




【14절】하느님과 욥이 완전히 대치되는 상황이 나타나며 하느님은 욥으로부터 희망, 생명을 빼앗는 분으로 묘사된다.




【15-17절】7-8절,11-14절에서 취급된 테마가 이어지고 있으며 슬플 때(특별히 재를 지킬 때)입는 자루 옷을 맨살 위에 꼬맸다는 것은 철저한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서 다시 벗거나 시간의 경과후 회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닌 맨 살처럼 똑같이 되어버린 고통의 현실을 표현한다.


‘뿔’은 긍정적 이미지를 지닌 것인데 고통을 통해 쇠잔해지고 결국에는 모든 힘, 생명력을 상실함을 의미하며 17절까지의 흐름안에서는 테마가 점진적으로 나선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욥의 대답가운데 나타나는 특징은 자신의 죄없음의 주장이라 할 수 있는데 특별히 이사야 53,9절에서도 야훼의 종은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당한다. (시편17,1참조)




【18절】하느님과 원수된 상황안에서 하느님과 구별된 다른 증인을 상정하고 있으며, 무죄한 피에 대해 보상하시는 하느님의 관여가 제시된다.  (창세 4,10; 사무20,26참조)


‘땅이여 내 피를 덮지 말아다오’는 땅으로 하여금 자신의 무죄함을 울부짖어 달라는 의미이며 땅은 생명을 낳을 뿐만 아니라 불의한 폭력에 대해서도 증인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19절】하늘 저 높은 곳에, 자기 힘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어떤 증인, 자기의 옳음을 밝혀 줄 증인과 한편으로 땅과 대조해서 한계가 땅이 아닌  한게가 없는 하늘을 제시한다.




2) 17장의 내용




*15,31 원문에는 ארשׁ(헛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לבה(덧없이 지나가는것) 와 같은 뜻이다.




【2절】친구들의 반응이 나타나며 친구들의 공격과 수동적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욥자신의 무너지는 모습-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더 고통스러운-이 제시된다.




【3절】구약안에서‘ 친구’의 의미는 고통중에 있는 동료에 대한 위로와 보탬, 더 나아가 법적인 의미에서의 대행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욥의 고통을 결코 제거해 주지 않는 친구들의 비정함이 나타난다.


¶1-3절은 16,1-5절의 상황이 더욱 확산, 상승된 양상으로 나타나며 2절의 적대행위와 하느님의 원수가 되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친구들과의 공동체의 파멸을 의미한다. 


(한 여학생의 경우처럼 죽음, 고통과 같은 물리적인 한계 앞에서 인간은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없는 또 다른 영역을 자신안에 형성시키게 되고 그 부분은 결코 다른이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기에 욥 역시 그것을 친구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하지만 결코 그들을 이해시키지 못한다.




【4-5절】친구들의 욥 자신에 대한 헛된 위로와 몰이해가 어떤 인간적인 현실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영향으로 인해 즉, 하느님이 저들의 마음을 깨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러한 상황에 처해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그러한 하느님의 작용으로 깨우치지 못한 상황에 있는 친구들이 오히려 지헤문학적인 배경을 갖고 욥에 대해 교훈을 주려하는 다소 역설적인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와같이 깨우치지 못하게 만드시는 하느님의 작용은 단죄의 의미가 아닌 하느님 당신의 능력의 위대함을 후대에까지 지속시키는 의미가 있으며 그 구체적인 역사의 사례는 출애급의 열 가지 재앙이며 파라오로 하여금 계속 완고하게 만드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나타난다.


▶5절 : 일종의 격언




【6-9절】16,17-19절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으며 6-7절에서는 일인칭 중심의 ‘나’라는 형태로 자신과 공동체와의 관계안에서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


▶7절 : 욥 자신의 물리적인 쇠잔, 즉 6절에 나타나는 백성들의 공격에 대해 몸으로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이 묘사된다.


▶8절 : 백로가 까마귀를 피하듯 고통당하는 이를 멀리하는 잘못된 결백함이 나타난다.


▶9절 : 주위의 그 무엇으로부터도 도움을 얻을 수 없는 욥의 모습이 나타난다.




【10절】6-9절까지의 일반적인 얘기를 제시하고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규정한다. 1-5절과 10절을 연결해서 볼 수 있다.




【11-16절】자기의 생애, 삶안에서의 행복의 관점에서의 탄원이 나타난다.  앞에서 나타나듯이 하느님의 공격, 친구들의 위로 없음, 앞에서 욥이 주도권을 지닌, 계획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음을 말해준다. 잠언 16장에 나타나는 Homo proponi(인간은 제시하고),Deus disponi(하느님은 결정하시는)의 지혜문학적 사상에 의거해서 볼때 욥의 경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즉, 무가치한 생애를 산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12,13절에 가서는 생애는 단지 암흑일 뿐이기에 죽음, 무덤이 자신과 가장 친숙한 대상으로, 오히려 해방으로 제시된다.


▶16절 : 이러한 실망은 결정적인 것이며, 희망이 없는 것이기에 취소될 수 없는 것이다.




¶6-9절과 11절은 연결된 흐름을 지니는데 6-9절을 아직 살아있음 안에서 어떤 상호관계성을 보여준다면 11절 이하는 끝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10절은 욥자신안에 나타나는 그러한 흐름에 대해서 친구들이 아무런 작용도 할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욥 자신은 고통안에서 하느님을 찾아가는 과정안에서 삶과 죽음의 단계를 거듭하지만 친구들은 고정된 동작, 고정된 개념만으로 접근하기에 아무런 반전을시도하지 못하며 욥의 고통을 더욱 더 커진다.




3. 16,17장의 전체적 요약


엘리바즈의 공격에 대해서 욥은 비슷한 표현으로 대답한다.  욥은 자신을 이해할 때에는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로부터 시작한다.  고통과 현실적 체험, 이러한 현실적 체험으로부터 아무런 출구가 없으니까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은 신학적인 반성으로‘ 이것은 하느님의 분노에 의해서 이렇게 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피할 수 없고 꼼짝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상태의 심각함은 하느님에 대한 어떤 적대적인 표현까지도 가능하게 하고 그러한 표현들-맹수, 적대행위-안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백성을 공격하는 악신과 일맥상통하는 그런 개념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인과응보를 떠나서 이제는 하느님에 대한 이해자체가 어려운 것이다.  이것이 수수께끼다.  고통을 당할때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하느님이 가장 멀리 있는 분으로, 원수로 드러나는 것이 문제이다.  그 은총을 베풀 하느님이 체험되지 않는 거기서 한편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해야 겠다는 열정이 나타나고 그런 의미에서 어떤 증인을 언급하게 된다.  그러한 실망 가운데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하느님께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느님과 멀어진 관계를 적대행위로, 원수관계로 얘기하면서도 결국은 자기가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해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암암리에 암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고통, 실망으로  되어있고 이제 고통이라는 현실과 해결해야 되는 어떤 희망, 반성을 통해서 -고통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고 했기에-하느님이 어떻게 해주실 수 없을까 하는, 실망의 현실과 희망사이에서 욥자신이 더 고통을 당한다고 볼 수 있다.


친구에 대한 욥의 평가


친구들은 고통의 출발 상태에서는 원수같고 무능력하지만 하느님께로 옮겨가면서 친구에 대한 이해도 새롭게 조명된다.  앞의 15,2절에서 “현인이 바람같은 지식으로 대답하고”라고 표현된 것이 17,10절에서는 “자네들 가운데 현인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네” 라는 변화된 표현을 통해 친구들이 참된 지혜를 갖지 못한 친구들로 새롭게 이해된다.  그 이유는 이전 텍스트에서 나타난대로 고통을 당하는 욥의 반려자라기 보다는 고정적인 개념으로 접근하는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며 그런 의미에서 친구들은 참된 현인이 아니다.



결국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그 고통을 그대로 통과하는 길밖에는 없으며 그 길은 무덤, 실망, 좌절과 같은 데까지 이르는 것이고 이것이 해방이라 함은 그러한 관점에 동참하지 못한 사람들인 친구들로 부터의 해방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마지막에 가서는 오히려 친구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질책을 당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하느님과 친구들의 차이가 있다면 하느님은 그 고통을 당하는 욥으로 부터 맹수, 원수등과 같이 표현되어 나타나지만 같이 하는 고통을 해결할 때 어떤 모양으로든지 결말이 지어져야 하는 그런 분으로서 같이 나타나는 반면에 친구들은 고통당하는 욥에게 참된 위로를 주지 못하고 거꾸로 원론적인 얘기를 함으로써 그통당하지 않는 친구에게 대하는 듯한 얘기만 한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멀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욥과 엘리바즈의 두번째 대화를 통해서 우리가 체계적으로 반성해 보아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


1. 고통에 대해서 너무 가볍게 접근하지 말것.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 흔히 하는 말대로 ‘다 이해해’라는 등의 표현을 쉽게 사용해서는 안된다.  잘못 접근하면 오히려 가까이에 있는 고통받는 사람으로부터오히려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2. 함께 있다는 개념을 남이 당하는 고통속에서 잘 나타내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함께 하시는 분으로 규정짓듯이 이러한 함께 있음을 잘 나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key point인 것이다.  지금 여기서는 욥이 이해하기로는 하느님이 고통가운데서 함께 하시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기에 욥의 고통은 가중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목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반성을 할때 그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느냐? 하는 점에서 ‘함께 있음’의 개념을 잘 규정해야 한다.


끝으로 하나 더 말한다면 고통은 고정적인 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고 삶의 과정으로 체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삶의 과정으로 체험되어야 하기에 인간이 고통앞에서 무능해 지는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가 성사를 통해서 그런 고통을 과정으로 체험하는 그 안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참여하도록 구조적으로 열어주셨다는 점에서 그것이 우리에게 은혜라고 할까?, 하나의 길이라고 할까? 그런 것이다.


지난번에 예수님이 성부와 하나다 라는 그것도 말하자면 우리에게 열어 주셨다는 말이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도 성부와 하나다 그 표현을 할 수 있또록 당신이 아주 원형으로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에 대해서도 구조적으로 열어 주신 것이 하나의 은혜이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에도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욥과 같이 하느님께 대해서 탄원할 수 있고, 하느님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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