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부르심에 응답하는 리더: 아브라함

 

부르심에 응답하는 리더: 아브라함

1. 부르심을 받은 아브람(창세 12,1-9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1)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우르에 살던 아브람은 75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정든 고향을 떠나 하느님께서 일러 주시는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마음대로 아브람을 선택하셔서 당신이 세우실 새로운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십니다. 사실 아브람은 세계사에 이름도 없던 일개 유목민 족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많은 유능한 사람들을 제쳐 놓으시고 그를 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구원이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술가의 손에서 보잘것없는 돌이 아름다운 조각으로 새로 나듯이, 그렇게 하느님의 손안에서 인간은 구원 역사의 아름다운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르심을 받고 떠날 아브람에게 4가지를 약속하십니다.



① 땅을 얻을 것이다.

지금 아브람 손에 쥐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시며 땅을 약속하십니다. 땅문서를 주신 것도 아니고, 어떤  계약서를 써 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② 큰 민족을 되게 하겠다.

 그런데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고, 그의 아내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아들 하나 없는 아브람에게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말씀을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③ 아브람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믿는 이들 안에서 그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명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 당시에 부모와 고향을 떠나 전혀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는 곳으로 향한다는 것은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희생을 감수 인내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축복받은 조상이 될 수 있었고, 신앙인들에게 믿음의 조상으로서 길이 칭송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④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복을 내리며, 아브람에게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라고 말씀하시면서 4가지를 약속하시지만 어느 것 하나 현실성 있는 것이 없습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서 떠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것인가? 이것은 전적으로 아브람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떠납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서 떠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신앙은 믿음을 가지고 행하는 것입니다. 낙하산을 메고서 비행기에서 뛰어 내리는 것이 신앙이라고 합니다. 낙하산이 펴진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는 사람은 뛰어 내립니다. 믿고 뛰어 내립니다. 신앙인들도 그렇게 믿고서,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75세의 나이에 아브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하고 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가 완벽한 사람이라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부르십니다. 차이가 있다면 아브라함은 “예”하고 즉시 응답을 한 것이고, 나는 대답을 하긴 했지만 머뭇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미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응할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추호의 의심도 없이 곧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순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과 불신,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인간이 내려야 하는 결단입니다.



2. 아브라함의 나약함

 아브라함은 영웅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에 연연하는 나약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당신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가톨릭 리더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자신이 훌륭해서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부르셨고 축복을 주셨기에 이끌어 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려고 하면 그 순간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일을 하는 것이 되고, 내 일을 하다보면 결국 지치게 되고, 나중에는 뒤로 물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영웅이 아닙니다. 겸손하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하느님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일을 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①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아브람

 아브람이 기근이 들어 이집트로 가서 나그네 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는 고민이 있었고, 그 고민을 아내에게 말하였습니다. “여보,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여인임을 알고 있소.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면, ‘이 여자는 저자의 아내다.’하면서,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려 둘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내 누이라고 하시오.”(창세기 13,11-13) 그리고 이집트에 들어갔을 때, 결국 사라는 파라오의 궁전으로 불려갔습니다. 그 일로 하느님의 재앙을 받은 파라오는 다시 사라를 돌려주었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 한 행동은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이 너무도 나약해 보입니다.



② 네겝 땅에서 또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하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또 네겝 땅에서 아내 사라를 자기 아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또 사라를 데려가게 되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찾게 됩니다. 두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소개하는 아브라함. 그는 아내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신앙인들에게 두려움은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신앙인들은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투신하는 이들이 바로 가톨릭 리더입니다.



3. 아브라함의 의로움

아브라함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나보다도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신앙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고, 나보다 하느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힘들지만 그것을 아브라함이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할 차례입니다.



① 조카 롯과의 분쟁에서 롯에게 먼저 선택의 기회를 줌

 아브람과 롯의 재산이 불어나자 둘은 분가를 하게 됩니다. 아브람은 자신이 먼저 땅을 차지하지 않고 롯에게 먼저 선택의 기회를 줍니다. “네가 왼쪽을 차지하면 나는 오른쪽을 가지겠고, 네가 오른쪽을 원하면 나는 왼쪽을 택하겠다.”(창세13,9).

 롯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도시 국가들이 위치한 지방을 선택합니다. 이렇게 롯은 백성을 착취하고 억압함으로써 유지되는 사회 구조와 분위기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와 반대로, 아브람은 오로지 하느님의 약속과 계획에 기초한 새로운 역사에 자기 자신을 열어 놓습니다. 아브람은 자기 마음대로 나아갈 길을 택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내 맡기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릅니다. 그리고 축복을 받게 됩니다. “나는 네 자손을 땅의 티끌만큼 불어나게 하리라. 땅의 티끌을 셀 수 없듯이, 네 자손도 셀 수 없게 될 것이다.”(창세13,16)



 의로움의 삶은 하느님께서 축복해 주십니다. 비록 지금 손해를 보는 것 같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손해를 백배 천배 이상으로 갚아 주십니다.



② 손님 접대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나무 곁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손님으로 아브라함을 찾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맞아들이고 하느님께 극진한 정성을 다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내리십니다.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 내가 틀림없이 너를 찾아오리라. 그 때 네 아내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창세18,10)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나도 일상 삶 안에서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일상 삶 안에서 나에게 다가오셔서 당신 선물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선물은 많은 경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인간이 수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을 통하여 당신 계획을 실현하십니다.



③ 소돔과 고모라 때문에 하느님께 간청하는 아브라함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시려는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저 아우성을 나는 차마 들을 수가 없다. 너무나 엄청난 죄를 짓고들 있다.”(창세18,20)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하느님께 청을 드립니다. “저 도시 안에 죄 없는 사람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 곳을 쓸어버리시렵니까?”….“주님!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열 사람밖에 안 되어도 되겠습니까?”(창세 18,23-33절 )

 누군가를 위해서 이렇게 간절한 청을 드린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며, 용기 있는 일입니다. 내가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을 하지 못하고 살 때가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감히 협상을 벌이는 장면에서 신앙인들은 귀중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나에게 해당사항이 없다고 눈을 감아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사람은, 그래서 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청을 드립니다. 의인만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모습이 내 모습이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기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알고 있는 사람, 미리 세례를 받은 사람, 교회 내에서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다시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개인을 위해서는 참 많은 기도를 합니다. 가족을 위해서도 참 많은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공동체를 위해서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함께 하는 형제자매가 축일을 맞이해도, 어려움에 처해도 기도해 주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하는 이들도 많지 않습니다. 아마 이것은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습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이 신자 중에 모르는 사람이 상을 당해도 가서 연도하고, 부조금도 내고, 장례미사도 참례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기도는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의로움은 사소한 습관 안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④ 탄식속의 순명: 이사악을 바치려하는 아브라함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새로운 믿음 행위를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렵게 얻은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눈물로 길을 적시며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사흘을 걸어서 하느님이 일러 주신 곳에 가까이 온 그들 부자의 대화는 그때의 처절한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창세 22,7-9). 아브라함이 아들을 쳐 죽이려 칼을 높이 든 순간 그의 굳은 믿음을 보신 하느님은 이사악을 구출하시고 대신 양을 바치도록 하셨습니다(창세 22,10-13).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원하신 것은 아들 이사악의 목숨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탄식속에서도 하느님께 순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야훼이레 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만일 아브라함이었다면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하였을까요? 아내를 누이로 소개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며, 만일 내가 사라였다면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말 했을까요? 아들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가톨릭 리더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예”하고 응답하는 사람들, 탄식 속에서도 순명하는 사람들, 그가 바로 의로운 신앙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응답에 큰 축복을 주십니다. 굳게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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