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를 통해 본 신념과 선입견, 갈등의 영향
사람들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대상 자극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신념을 적용시켜, 대상 자극을 파악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이 선입견과 신념은 때로는 갈등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이것을 루가 복음 10, 29-37절의 나타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를 통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 율법학자가 스스로 의로운 체하려고 예수께 묻는다.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 물음은 예수와 율법학자, 예수와 소위 지식층, 예수와 유대인들 사이에 내포된 갈등(대립)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그러한 질문을 통해 자신이 더 의롭다는 것을 나타냄으로서 예수 추방을 위한 하나의 시도를 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의 질문은 하나의 갈등을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갈등은 다양한 이유에서 발생하지만 대체로 두 가지 경우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두 사람간의 양립할 수 없는 이해의 충돌로 발생한다. 둘째, 당사자간의 상호 관계에 대한 수용시각이 일치하지 않거나 적절한 행위가 나오지 않을 경우에 발생한다. 대체적으로 이러한 갈등의 발생은 한 인간으로 하여금 위기 의식을 유발하게 된다. 즉, 그러한 갈등의 상황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안은 무엇인지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성서는 이러한 갈등의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예수의 언어 행위를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 말을 받아 말씀하셨다’ 즉, 율법의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된다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율법학자들의 모습과는 달리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대변하시는 예수의 대립 갈등을 묘사하는 ‘받아’라는 말을 통해 율법학자의 질문으로 야기된 갈등의 상황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예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이야기 안에는 예수와 지배계층의 갈등과 대립의 구도가 잘 나타나고 있다. 예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공격하고 있다. 즉 제관과 레위인 사제들을, 그러면서 직접적으로 그 율법학자를 향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난다. 강도들은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매질을 한다. 그리고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 그리고 그 사람은 길가에 버려진다. 얼마 후 버려진 그 사람의 주위로 한 사람의 제관이 지난 간다. 그 제관은 길가에 버려진 사람을 본다. 그는 그 사람을 그냥 피해서 지나쳐 버린다. 얼마 뒤 또 한 사람이 다가온다. 그는 레위 사람이다. 그도 그 사람을 보고는 역시 피해서 지나가 버린다. 또 시간이 지난다. ‘그러나’라는 말을 통해 이야기의 반전이 시작된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길을 가던 중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다가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그의 상처를 싸매 준다. 그리고 그 사람을 자신의 나귀에 태워 여인숙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다. 다음 날 그는 여인숙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꺼내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당신에게 갚아 드리겠소’하고 말한다.
여기서 ‘사마리아 사람’에게 주목하여 보자. 사마리아인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선입견에 의해 덜 의로운 자로 배척되는 자들이다. 여기서 예수와 율법학자 간의 대립 구조는 절정에 달한다. 유대인 율법학자가 배척하는 대상인 사마리아 사람을 이 이야기 안에 둠으로서 레위인도 제관도 율법학자도 그 사마리아인의 행위보다 못한 행위를 한 존재로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선입견에 의해 구원에서 먼 인간, 율법도 모르는 인간으로 천대받는 사마리아인을 언급함으로서 이제 예수는 율법만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며 그것의 일점일획도 변화될 수 없는 것임을 말하는 지배계층의 사람들을 향해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야기는 새로운 갈등의 단계에로 접어들게 된다.
이제 이 갈등은 예수의 새로운 반문으로 승기를 잡고자 했던 율법학자의 의도를 물리치는 장면으로 전개된다. 예수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맞은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합니까?”
율법학자는 고뇌에 빠진다. 그 질문의 답은 너무나도 명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 앞에서 단정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는 대답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을 해 버리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무리 전체가 의롭지 못하다는 말로 치부 될 염려가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생각한다. 반전된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리고 궁리한다. 그리고 그는 다음의 대답을 위해 그가 그의 삶 전체에서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돌이켜 본다. 곧 사마리아인은 의롭지 못한 자이며 하느님의 구원에서 멀리 떨어진 자라는 선입견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그리고 유대인은 자기들만이 또한 하느님의 백성인 그들만이 구원에 가깝고 하느님의 계명에 가깝다는 신념을 일관해 나가야 할 의무가 자신에게 있음을 잊을 수도 없게된다.
그는 갈등한다. 그리고 그는 대답한다.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이 말은 그가 직접적으로는 사마리아인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그 대답을 통해 모든 이는 그 대답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율법학자의 그 대답에 다음과 같은 말로서 모든 갈등을 해소시키고 계신다. ‘가서 당신도 그렇게 하시오’
위에서 살펴본 루가 10, 29-37절은 선입견과 갈등의 구조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또한 현대인들에게도 나타난다. 즉 내가 내 형제를 판단하는 잣대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잣대로 그 형제의 점수를 메긴다. 점수의 정도가 높은 친구는 나에게 아무리 상처를 주는 일을 하여도 나의 넓은 마음으로 그러한 상처가 받아들여지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너무도 많다.
또한 나는 나보다 못한 자로 여기는 자에게는 우월감을 드러내려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위축되는 모습을 본의 아니게 하는 경우들도 있다. 율법학자와 예수의 대화에서와 같은 모습들은 공평하지 못한 우리의 선입견과 신념을 통해 쉽게 우리의 대화와 삶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모습일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나의 선입견과 신념을 시기 적절하게 조정하는 능력을 자기 안에서 키울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것은 때때로 나와 만나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 대한 좋은 선입견은 가지되 그렇지 못한 것이라면 다시 한 번 그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일이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