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어그램의 ( ENNEAGRAM )의 限界

 

에니어그램의 ( ENNEAGRAM )의 限界




이상의 작업은 우리에게 에니어그램이 인간을 아는 좋은 자료를 제공함을 보여준다. 에니어그램은 인간을 아홉으로 나누고, 아홉의 각 유형이 가지는 독특한 성향들을 제시한다. 이 성향들은 한 개인이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본능적으로 발휘하는 강박관념의 형태로 숨겨지며, 각 사람 안에서 근원적인 죄를 형성한다. 우리는 이러한 기본 사실을 토대로 사람들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죄로 얼룩진 모습에서 회개의 가능성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모범 안에서 다루었다. 하지만 이러한 에니어그램의 작업에는 誤解의 여지가 있다. 우리는 결론에서 에니어그램의 한계점 몇 가지를 살펴봄으로써 에니어그램의 이용에 오해가 없도록 하고자 한다.


먼저, 에니어그램은 인간을 정확히 아홉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각 개인은 반드시 하나의 유형에만 오롯이 속한다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자칫 사람을 일종의 유형이라는 ‘틀’ 안으로 고정시키려는 잘못을 범할 위험을 안고 있다. 개인을 하나의 유형에 고정시켜 파악하는 것은 타인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오류로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니어그램을 이용함에 있어 에니어그램이 말하는 각 유형의 모습은 한 개인을 형성하는 근본적인 힘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그 사람의 인격 전부와 동일하다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어떤 유형이론이나 취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개인의 독창성, 독자성 및 특별한 속성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과 타인들을 한 특수한 ‘표지’의 분류용 칸막이로 밀어 넣는, 그리하여 개인을 딱 잘라서 최종적으로 고정시켜 버리는 위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행동에 대한 표준적 전형을 발견하는 것은, 변화의 가능성이 나타나고 그와 동시에 확실한 압박으로부터 해방이 이루어질 때만 그 의미를 갖는다.”1)


두 번째로 주의 할 것은, 에니어그램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지금 자기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이해하였을 경우, 거기에서 멈추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식으로 포기하는 태도는 인간을 원 안에서 이해하려는 에니어그램의 본 목적을 위배하는 것이다. 에니어그램은 단순히 자기를 이해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숨겨진 잘못된 의도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다른 유형과의 관계를 통해 회개와 구원에로 이끄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는 에니어그램을 통해서 회개와 인간 성숙의 가능성을 살펴보았는데, 인간은 근원적인 죄를 가지고 살아가며 이것을 알아내는 작업과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통해서 회개와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완전한 성숙이 단순히 기술적인 노력으로 이룩될 수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니어그램을 영적성숙의 길로 제시함에 있어 ‘기도’를 통한 성령의 은사를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그 출발인 미성숙한 죄의 상태에서부터 이미 하느님의 은총으로 시작된 것이기에 그 구원 또한 하느님의 은총의 협력이 있어야지 그 완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각 유형의 강박적인 문제점들은 그것에 고정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죄가 되지만 각 사람이 가진 독특함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하느님 선물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각자가 가진 죄의 모습을 하느님과 세상을 위해 주어진 선물임을 알고 그 선물들을 자신을 벗어나 이웃과 세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에니어그램은 인간을 이해하는 깊은 통찰을 제시한다. 우리는 에니어그램을 통해서 자신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할 뿐 아니라 타인들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행해 왔던 강박적인 죄의 행동 양식은 더 이상 자기를 가로막는 벽이 아니라 앞으로는 타인과 세상을 향해 열린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 될 것이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일의 결과는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1고린 12, 4-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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