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생활에 있어서 시간의 구조화
“어떻게 하면 나와 이웃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창조적이며 성취적 친밀감을 찾고 또 그것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까? 사람이 어떻게 해서 다른 사람과 결실을 맺는 친밀감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까? 묵묵히 기도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서 하느님과 친밀해질 수 있을까?”1) 이러한 물음에 TA의 시간의 구조화 이론은 하나의 가능성을 던져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얘기하며 함께 있는 방법을 본능과 경향으로부터 쉽게 시작할 수 있고, 체험을 통해 그 기능을 키워나간다.2) 그런데 여기서 대인관계에 적용되는 진리는 하느님과의 관계에도 역시 적용된다고 본다면 TA에서 말하는 시간의 구조화를 타인이 아닌 하느님을 대상으로 해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허물없는 대화나 마음속의 모든 비밀을 서로 거리낌없이 말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도 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할 때도 이와 비슷한 현상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3)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인과 하느님과의 관계성을 자기 스스로 찾도록 하는 바람과 확신을 TA가 가져다 줄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영성생활 구조를 이해한 신앙인이 하느님과의 관계에 새로운 방법들을 도입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은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한 방법일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 논문이 지향하는 영적 지도와 접목시켜 보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장을 이루고자 하는 특수한 목적을 바탕으로 형성된 관계인 영적 지도에서 영적 지도자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사람이 기도생활을 하고 있는가이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기도를 어떻게 하고, 어떻게 꾸준히 계속하며, 그 안에서 어떻게 성장하는가라고 물어오는 사람과 도움을 주는 자와의 관계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자 한다.4) 영적 지도자는 전체적인 한 인간, 그리고 그의 영성생활에 관심을 두지만, 그 관심의 초점은 우선적으로 피지도자의 기도 체험에 있는 것이다.5)
기도는 확실히 하느님과의 친교이다. 더우기 하느님은 순수한 영적 존재로서 어디에나 계시고, 사람의 마음속에 현존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여러 가지 내면적 방법으로 하느님과 어울릴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대화는 우리가 늘 하게 되는 인간과의 대화와는 다르다. 하느님과의 대화는 내면의 빛이라든가 마음의 통교가 낳는 친밀함, 거기에 수반되는 감사, 찬미, 겸손, 통회, 결심의 모양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란 ‘마음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다마스커스의 요한이 정의한 것도 이런 의미였다.6)
신앙인은 기도중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 찬양, 감사, 예배 등의 심정을 말없이 표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음의 심오한 곳에서, 침묵속에 하느님의 존엄성, 사랑, 자비, 용서 등을 느끼고 감격할 수 있다. 혹은 하느님의 현존을 내적으로 의식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내적인 귀를 기울일 수도 있으며, 또 하느님의 현존 안에 조용히 머물어 그분의 사랑 안에 고요히 잠길 수도 있다.”7)
신앙인은 이렇게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점차적으로 ‘의식’함으로서 기도 안에 성장할 수 있다. 이러한 성장은 성사들과 공동체적인 예배와 교회 신자로서의 여러 가지 의무와 그리스도교 영성의 여러 가지 수련들에 의해서 키워진다.8) 그리고 만약 신앙인이 진실한 기도를 인식하고 배우기를 원하는 영혼의 간절한 열망을 간직한다면 기도는 이미 그 신앙인의 삶 안에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도를 결코 바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기도는 이미 우리의 삶 안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종교적 모험심이나 기도하지 않는 데에 대한 죄책감을 갖는 것보다, 기도하고 인식하고자 노력할 때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기도가 되어진다는 것을 신앙인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9)
이러한 의미에서, 영성생활에 있어서 시간의 구조화가 갖는 본질적인 요소는 점차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자각을 일으키게 하는 데 있다. 우리가 자각하는 데 요구되는 모든 의지와 노력과 함께 하느님과의 관계를 자각하도록 배움으로써 최종적으로 삶과 기도에 대한 앎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사이를 사랑의 관계(the love-relationship)로 더욱 더 자유롭게, 기꺼이 그리고 응답적으로 나누게 한다.10)
그러므로 여기서는 신비적 기도나 높은 단계에 이르는 기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오직 그리스도인들이 생활 안에서 하느님과의 친교를 나누고, 그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은 영적 지도가 피지도자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이끌고, 보다 생기 있고 올바른 영성생활에로 이끄는데 도움을 제공할 것이다.
1) 폐쇄
기도는 하느님과의 친교이며 대화이므로, 우선 친교와 대화의 상대자인 하느님의 현존을 생생하게 의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 앞에, 우리 안에 현존하시지만,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앞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창세 28,16 참조). 하느님께서는 만물 안에 창조주로서, 인간 안에 아버지로서 현존하신다. 그러므로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려고 할 때 하느님을 살아 있는 위격적 현존으로서, 사랑스럽고 친밀한 현존으로서 의식해야 한다. 이러한 현존의 의식은 그대로 하느님과의 생생하고 다정한 친교로 이어질 것이며, 그로인해 신앙인은 더욱 더 성숙한 영성생활에로 나아가게 된다.11)
이렇게 볼 때 신앙인이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 교류도 하지 않는 것을 폐쇄라 한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의 삶을 나누는 관계이다. 우리가 기도를 자각하지 못할 때나 일부러 기도를 피할 때도 많이 있지만 이러한 상태가 계속될 때,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밖에 있는 것이다.
성세라는 관문을 통함으로써 영세한 사람은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수행할 수 있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참된 자녀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하느님과 아무런 교류도 하지 않는 것은 폐쇄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쉬는 교우들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기도와 활동이 서로 부딪치고 대립하지 않더라도 이 두 가지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분리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있다. 기도할 때는 기도하지만 기도가 끝나 실생활에서 활동할 때는 완전히 다른 세계인 것이다. 기도와 활동간에 아무 관련도 없다. 이것을 범위를 넓혀 말한다면 자기 인격과 생활 안에 신앙의 세계와 인간적 세계를 따로 분리시켜 놓고 사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신앙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함으로서, 하느님과 아무런 교류도 하지 않는 것도 또한 폐쇄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러한 폐쇄는 이중적 행동, 이중적 인격 또는 위선적 생활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경우에라도 신앙인임과 동시에 인간으로서 일관성있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격과 생활 안에 신앙의 차원과 인간적 차원을 점차 접근시킴으로서, 단 하나의 차원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12)
신앙인이 갈구해야할 기도가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는 훌륭한 복음의 이야기 중 하나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함께 동행한 사실에 관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볼 때 하느님은 우리의 동반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고 언제나 기도의 여정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13)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배척하고 있는 때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여 하느님과의 끊임없는 교류를 가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2) 의례
“가톨릭의 기도는 내용이 정해진 기도문과 형식이 정해져 있는 전례 예식을 중요시한다. 이것은 올바른 기도의 자세와 내용을 가르치고, 보다 좋은 기도를 바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외면적 형식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내면적 마음가짐을 소홀히 할 위험이 있다. 매일, 매주, 같은 기도문과 예식을 반복하다 보면 마음도 정성도 없이 그냥 기계와 같이 기도문을 외우고 예식에 참여하게 될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14)
예수께서는 기도할 때 빈말만을 하지 않도록 가르치셨고, 이 빈말에 대해 단죄하셨다(마태 6,7 참조).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식의 기도를 많이 드리고 있다. 아무렇게나 드리는 묵주기도, 기계적인 보편지향기도, 습관화된 영성체와 고해성사, 이러한 모든 것이 너무 많이 만연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전 생애 동안 이런 식의 기도에 갇혀서 살고 있다.
성직자나 수도자의 성무일도와 공동 기도도 외면과 형식에서는 질서있고 아름답지만, 내적으로 얼마나 잘 바치는지는 각 개인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기도는 외관상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각 개인이 기도를 잘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또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형식과 외관에 그치는 기도는 마음과 정성이 없으므로 비인격적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15) 자신이 병자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병에서 치유될 수 없듯이, 자신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의례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신앙인은 이러한 기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16)
성 아오스딩은 크리스챤이 기도할 때 시편을 앵무새처럼 사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앵무새와 언치새는 때때로 그들이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사람들로부터 말하는 법을 배운다. 이와 달리 우리 인간은 유일하게 지성을 가지는 특은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노래하는 시편에 맛들이도록 해야 한다. 만일에 이렇게 한다면 노래가 참기도가 되고 우리들의 기도가 들어 허락될 것이다.”17)
기도할 때 우리가 기도의 맛을 느껴야만 우리들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게 된다. 그리고 기도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만 그 맛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가 시편에 대해 무지하고 전례에서도 시편들이 남용되기에, 시편에 맛들여야 하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거의 모든 교회의 기도에 우리는 올바로 참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속에 흐르는 사고방식과, 표현법들, 개념들, 비유들, 어휘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에 시편의 기도가 우리에게 그 영양을 공급시켜 줄 수 있다.18)
이밖에도 우리는 의례적, 습관적으로 하는 기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공허감이라도 느낄 수 있겠지만 생명력 없는 기도는 오히려 우리를 기도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19)
묵주기도가 정통적인 빈말만의 기도는 아닐까?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마리아께 대한 신심」이란 교서에서 아주 훌륭하게 이 면에 대해 말씀하셨다. 로사리오 기도가 관상적인 기도가 못될 때 ‘영혼 없는 육신’ 즉, 시체와도 같다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로사리오 기도를 관상기도가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로사리오 기도의 양을 줄이든지, 혹은 분명히 더욱더 많은 정성을 담아 기도 드려야 할 것이다. 각 단의 신비를 깊이 숙고하고 관상하도록 하지 않으면 여러 신비로 나누어 놓은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게된다. 병든 묵주기도를 대중의 관상적인 기도가 되게 하는 것은 신앙인이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에로 나아가는데 훌륭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20)
기도가 이렇게 습관적인 행동으로 될 때 신앙인과 하느님과의 살아 있고 사랑스러운 관계를 좀먹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기도 습관은 하느님께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전에 대한 욕구, 조정하고 싶은 욕구, 자신을 정당화시키고 싶어하는 욕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구도 중에서도 꼭 바쳐야 할 기본적 기도, 예를 들면 주일 미사, 아침·저녁 기도, 삼종 기도 등을 최우선적으로 잘 바쳐야 한다. 기본적 기도를 소홀히 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기도에만 열중하는 것은 건강한 영성생활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영성과 기도생활의 한 원칙은 기본적이고 일상적인 일을 특수적이고 예외적인 일보다 더 소중히 받아들이고 행하는 데에 있다.22) 바로 이러한 사실에 의례의 긍정성과 중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3) 소일
소일은 저녁식사 시간에 한자리에 모인 가족이 하루일과를 나누듯이 하느님과 담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일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구조화하는 이는 의례와 같이 정형화된 교류를 나누는 것은 아니다. 의례보다는 교류가 한층 더 진척되었지만, 아직도 피상적인 교류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시간의 구조화에서 소일은 주로 C 자아상태에서 일어나는 활동으로 여기서의 하느님과의 담화는 소위 말하는 기복적인 기도, 청원기도의 성향이 강하다. 이같은 시각에서 올포트의 종교성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영성생활의 시간 구조화에서 소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올포트의 이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숙한 종교심에 대한 서술이다. 즉 본능적이고 유아적인 종교심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격적으로 통합된 종교심에로의 통과에 대한 기술이다.23) 그는 여기서 종교성의 단일차원의 특성을 측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종교성의 전형적인 양상을 범주화하여 비교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즉 올포트는 종교를 갖게 된 동기, 종교를 통해 지향하는 가치, 종교를 통해 나타나는 결과 등을 근거로 하여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종교성을 내재적(intrinsic) 종교성향과 외재적(extrinsic) 종교성향으로 구분하였다(Allport, 1960). 여기에서 내재적 종교성향이란 신앙을 그 자체 최상의 가치로 보는 종교성을 말한다. 자아중심적인 요구를 초월하고 형제애의 계명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종교성을 가진 사람은 신앙의 전체적인 신조를 내면화하는 삶을 살며, 종교가 그에게 봉사하도록 하기보다는 그가 종교에 봉사하려고 한다. 반면에 외재적 종교성향은 공리적이고 자기방어적인 종교성으로서, 이러한 종교성을 가진 사람은 안전, 사회적 지위, 위안 등을 종교에서 기대한다. 종교성의 두 양상에 대한 올포트의 이러한 구분은 종교를 목적으로 보는 종교성과 그것을 수단으로 보는 종교성이라는 대조적인 종교성의 특성을 질적인 측면에서 비교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24)
이러한 측면에서 현대인의 기도는 신앙화되기 보다는 인간화되어 가고, 때로는 그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러한 기도의 현상은 무위, 나태, 인간 중심적, 신뢰의 결핍, 안이함을 낳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한 마디로 실용주의적인 도구가 되었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즉 삶 자체가 기도화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인간 생활의 도구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도는 정신 요법도 실용적인 도구도 아니다. 또한 어려운 생활을 해결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서도 안된다. 기도는 사랑을 창조하여 탄생시키는 방법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비크리스챤화, 사회화, 정치화되어 가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자기 자신의 목적(심리적 안정이나 정신 통일을 위함, 고독을 이겨내기 위함 등)을 위해 기도가 이루어지고 필요시 되며 이용되지는 않은지,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방편이 되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25)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우리에게는 모두 자기에 대한 숨은 자기 만족이 있으나 이것은 극히 은밀한 것이어서 자기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26)
“기도란 우리들의 청원을 하느님이 들어주신다는 데에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원의를 우리의 것으로 하여 청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기도가 우리들이 하는 기도의 얼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의 귀는 멀고 눈은 어두워 때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하느님을 잃고 헤매는 양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원의를 알고, 그 바람을 바랄 수 있는 힘까지도 청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느님의 뜻에 답하는 마음, 하느님의 기도로 살려지는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27) 이렇게 할 때 소일은 더욱 가치있는 하느님과의 시간의 구조화가 될 수 있다.
한편, 어린이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열심히 아빠에게 하고 아빠의 대답을 귀담아 듣는다. 보다 가까운 사이에서는 대화의 내용이 어떤 것이라도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말을 주고받는 것 자체를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다. 이처럼 특정한 내용이 아니라도 그냥 아무 것이나 말하고 듣는 것도 친교가 되고 기도가 된다고 하겠다. ‘아빠, 비가 왔어요!’, ‘예수님, 오늘 학교에서 이런 일, 저런 일들이 있었어요!’ 등등.28) 이처럼 피상적이지만 하느님 앞에 자녀로서 이야기하는 것은 소일의 긍정적 측면이다.
4) 활동
하느님과의 시간의 구조화에서 활동은 단지 소일과 같은 피상적인 교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해 하느님을 뜻을 발견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청원하는 신앙인이 하느님의 뜻을 생활로서 실천하는 것이 바로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 생애를 걸고 수행해야할 과제이다. “기도와 활동 사이에 대립과 갈등과 분열이 있음은 그리스도 신자라면 누구나 체험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대립을 극복하여 기도와 활동간의 조화를 이루면 이룰수록 사람은 내면적으로 통일되고 심리적으로 안정된다. 한편 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못할수록 내면이 갈라져 이중적 행동을 취하게 되고 심리적으로도 불안해진다. 그래서 갈등이 심할수록 신앙생활은 어려워지고, 갈등이 해소되어 조화를 이룰수록 신앙생활은 원만하고 복된 생활이 된다.”29)
이렇게 볼 때 고백성사는 원만하고 복된 신앙생활을 위해, 기도와 활동의 부조화를 최소화시키는 노력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고백성사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벗어날 수 있고, 없어질 수 있고, 죽을 수 있다. 죄의 고백은 죽음과 부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도 역시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죽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소생하는 것이 될 때 참 기도가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 생활 속에 강생하실 때 참기도는 성취된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우리 생활이 새롭게 태어날 때 참 기도가 되는 것이다.30)
한편,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활동과 기도를 통하여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통해서 다른 이들을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생활하시며,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를 움직이신다. 따라서 기도와 활동 사이에는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갈림이 없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하시고 고무하시는 때다. 그리고 활동은 이 사랑의 정상적 표현이다.”31)
이러한 활동의 중요성을 야고보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시오. 사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본래의 모습을 거울에 쳐다본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본 다음에 나가서 즉시 그 생김새를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자유의 완전한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무는 사람, 곧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은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행복할 것입니다.”(야고보 1, 22-25)
5) 게임
영성생활에 있어서의 게임은 세례를 통해 신앙인이 되었고, 나름대로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교회의 가르침에 변명을 하고, 신앙에 맞갖는 생활을 기피하는 것이다. TA에서 게임이 두 사람 사이의 일련의 교류가 한 사람 또는 두 사람 모두에게 불쾌한 감정을 남기는 특징이 있듯이, 영성생활에 있어서도 게임은 올바른 하느님과의 관계를 형성하는데 방해가 된다.
성서에서 대표적인 게임으로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들은 갑자기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다리는 떨리고 두려움과 불신으로 가득 찼다. 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이다. 꼭 자신이 폭풍우 부는 바다에 던져진 사람 같았다.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 주기에 먹었을 따름입니다.”(창세 3,12)
하느님이 다가 오셔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실 때 아담은 하와를 비난했고 하와는 뱀을 비난했다. 이것이 게임이다. 이 게임은 ‘만일 당신만 아니었다면’(If it weren’t for you)라는 게임이다. 아담은 하느님이 자기를 위해 하와를 만들지 않았다면 과일 먹는 유혹은 없었을 것이라고 하느님에게 책임을 돌렸다.32)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큰성 니느웨로 가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요나는 야훼의 명을 어기고 다시스로 갔다. 요나는 ‘술래잡기’(Copsand Robbers) 게임을 벌렸다. 번에 의하면 이 게임의 논리는 ‘나를 잡는가 보자’(See if you can catch me)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술래잡기 놀이와 같은 것이다. 그는 Not-OK 위치에서 하느님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 요나는 스스로 자신을 망명자로 만들고, 두려움과 절망의 느낌을 감출 수 없어 하느님으로부터 숨기 위해 어두운 배 밑으로 숨었다. 또 태풍이 바다 위에 내리자 나를 바닥에 던지라 하는 ‘나를 차라’(Kick me)게임도 벌렸다.33)
하느님과 신앙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게임은 신앙인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영성생활에 있어서 게임은 신앙의 유아기에 결정했던 그릇된 신앙생활의 신념을 고수함으로써, 유아기적 신앙에 머물게 한다. 그러므로 성숙한 영성생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게임으로부터 자유로와 지는 것이 필수적이다.
6) 친밀
마음이 순진한 어린이가 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아 다정하게 바라보며 그저 ‘아빠’라고 부르듯이, 그리스도인도 하느님과의 친밀한 친교 속에 그냥 ‘압바’라고 부르며 기도한다. 어린이는 아빠라고 불러야 할 아무런 의무나 이유가 없는데도 그냥 아빠라고 부르기를 좋아하고, 그렇게 부르는 데 행복을 느낀다. 아빠란 한 마디에 어린이의 여러 심정과 감정이 담겨 있다. 가끔 이 심정과 감정을 직접 드러내기도 한다.
‘아빠, 아빠가 좋아요!’-사랑, ‘아빠는 최고야!’-찬양, ‘아빠, 고마와요!’-감사, ‘아빠가 있으니까, 무섭지 않아요!’-신뢰, 의탁, ‘아빠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께!’-복종, ‘아빠를 믿어요!’-믿음, ‘아빠, 미안해요!’-통회, ‘아빠, 장난감 사줘요!’-간청 등등. 이러한 모든 심정과 감정의 표현은 그대로 기도의 내용이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심정과 감정으로 압바를 부르면서 기도함으로써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34)
이처럼 하느님과 함께 대화를 할 때 진정한 감정(Authentic feeling)을 드러내는 것을 영성생활에 있어서의 친밀이라 할 수 있고, 보다 더 성숙한 기도의 길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이 들으시고, 우리를 보시고, 사랑하시며, 답하시는 살아있는 한 인격체로 받아들여질 때(그분께서는 항상 이러한 분이시지만 우리의 경솔함 때문에 이를 깨닫지를 못한다) 참된 기도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이때에야 우리 또한 그분 앞에 비로소 존재하게 되고 그분과 참으로 통교하며 그분께서도 우리와 참으로 통교하실 수 있다.”35)
수난 전날 예수께서는 게쎄마니 동산에서 성부를 향하여 ‘압바’(abba)라고 부르며 기도하셨다(마르 14,36 참조). 압바는 아람어로 가정에서 자녀가 아버지를 친밀하게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다. 한국어의 ‘아빠’와 비슷한 어감을 지닌다. 아직 어리기만 한 아이가 아버지께 완전히 의탁하고, 아버지를 진정 사랑하고 존경하며 아버지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빠!’하고 부르듯이, 외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진실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아버지와 전적으로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압바!’하고 부르신다. 이것이 원래의 기도이다.36)
이와 같이 하느님과의 대화에 있어서 피상적인 교류를 하는 소일과는 달리 하느님 앞에 진정한 감정을 드러내며,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는 것은 친밀의 대표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고 무언으로 심정을 표명하고 친교를 나누면서 계속적 기도를 할 수도 있다.
이로서 TA의 시간의 구조화이론을 적용한 영성생활에 있어서의 시간이 구조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영적 지도자는 이 이론을 통해 피지도자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친밀’에로 나아가기를 희망하지만, 여기서 제시한 6개의 범주가 거쳐 넘어가야 할 단계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을 염도와 구도의 상호관련성과 비교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염도(염경)처럼 구도(구경)도 점차 계속화되고 영구화되면서 보다 내면화되고, 단순화되고, 순수화되는 법이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어서 서로를 쉽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생활 속에서 늘 기도하는 형태는 차차 소리내어 외우는 기도문에서 입 속에서 외우는 기도문으로, 그리고 마음속에서 외우는 짧은 화살기도로 옮아간다. 또한 일정한 형태의 화살기도에서 자유로운 형태의 대화로, 그리고 말로 나누는 대화에서 말없이 나누는 친교나, 심정의 표명으로 옮아간다.”37) 이와 같이 시간의 구조화를 대표하는 6가지 개념들은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각기 친밀에로 개방되고, 방향지워지고, 내면화되어갈 때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또한 정화되고 깊어진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기도란, 하느님과의 친밀하고 살아있고 진실하며 깊은 통교의 관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관계이고 말없이 마음과 생각으로 표현되는 침묵의 관계이기도 하다.
영적 지도자는 피지도자가 하느님과 어떠한 형식으로 자주 교류하고 있는지를 대화로서 파악하고, 그것이 영성생활의 시간의 구조화에 있어서 어떠한 상태인지를 가르쳐 줌으로서 더욱더 성숙한 영성생활로 이끌어 줄 수 있다. 즉 ‘친밀’을 제외한 각 단계의 긍정·부정적인 면을 설명하여 내담자가 의식하게 하고, ‘친밀’에로 방향지워 줌으로서 영성적인 성숙을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