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윤리 [한] 勞動倫理 [영] labor ethics

1. 의미와 특징 : 인간이 목적의식적으로 자연에 작용하여 인간생활에 필요한 사용대상을 얻는 과정을 일반적으로 노동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노동은 어떠한 인간사회에 있어서도 인간생존에 불가결한 조건이며, 자본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고, 그 자본에 구체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 즉 생산형태를 갖추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노동은 그 목적의식성(目的意識性)과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다는 점에서 자연적 본능에 의해서만 행동하고 타고난 신체적 기능에만 의존하는 동물과 구별된다. 인간은 자신의 개인적 직접적 욕망을 초월하는 목적을 세울수 있고, 자신의 신체적 제한을 도구 등 생산수단의 사용으로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여건이 허락하는 한 목적의식성과 도구의 사용으로 모든 사용대상을 생산할 수 있다는 인간노동의 특성이 생기게 된다.

노동과정은 노동 그 자체가 자연이나 원료 등 노동대상에 직접 작용하거나 또는 도구, 기계 등의 노동수단을 사용하여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일련의 합목적적(合目的的) 행위를 말한다. 노동과정은 그 결과인 생산물을 기준으로 볼 때 생산과정이 되고,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은 생산수단이 되며, 노동 그 자체는 생산적 노동이 된다. 자본제 생산의 발전과 더불어 노동의 숙련은 개인적 기능에서 과학적 기술로 전환되어 오랜 기간의 경험과 재능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훈련과정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바뀌어 간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연을 쓸모있는 것으로 바꾸며, 동시에 이 과정을 거치면서 노동의 주체인 인간의 여러 가지 능력을 변화 발전시킨다. 그러나 자본제 경영 하에서 생산수단의 소유와 노동의 분리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기업들은 기계제에 의한 생산으로 바뀌었고, 거기에 경영조직의 대규모화가 진행됨에 따라 노동자는 인간 고유의 가치 및 존엄성을 상실하게 되어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노동의 인간소외 현상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생산수단의 소유와 노동의 분리에 따라 노동자가 사용하는 생산수단과 노동의 성과인 생산물은 이미 노동자 자신의 것이 아니고 노동자 자신의 ‘인격적 표현’도 아니라는 데서 오는 노동의 소유소외(所有疎外). 둘째,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결정한 작업의 목표와 작업방법에 노동자는 임금만을 받고 타율적으로 따라야 하므로 노동의 자율성이 상실된 데서 오는 소외. 셋째, 컨베이어 시스템 등 대량생산 체제의 발달로 노동자의 작업은 세분화되고 단순화하며 작업의 진도(進度) 역시 기계에 의해 타율적으로 정해지므로 노동자는 기계에 예속되어 여기서 생기는 소외. 넷째, 경영조직의 대규모화는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 인격적 관계를 불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자기가 담당한 부분의 일과 전체와의 유기적 관계를 모르게 되어 조직으로부터 소외감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소외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종업원의 경영 참가, 직무 확대, 자주관리(自主管理) 작업집단 등의 방법이 시도되고 있다.

윤리란 사회적 역할 간의 관계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원칙의 체계적 틀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의 노동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 올바른 양식과 당위성을 다루는 사회윤리의 한 부분이 노동윤리임을 알 수 있겠다. 또한 생산은 자연과 노동이라는 두 요소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생산과정을 통해 인간은 경제와 직결된다. 생산과정에서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 생산할 것인가의 문제는 경제의 다른 구성부분인 분배 및 소비기능에 의해 결정되므로 결국 노동은 경제의 핵심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경제윤리의 주요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노동윤리이다. 신학적 노동윤리의 특징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올바르게 노동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노동에 참여하는데 있으므로 노동윤리의 과제는 어떻게 노동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인간이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가, 그리고 노동을 함에 있어 어떤 조건이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인가로 요약된다.

2. 가톨릭 입장 : 성서에 나타나 있는 노동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목자나 농부와 같이 독립적으로 자영(自營)에 종사하는 노동으로서 직업의 의미, 둘째, 기능공, 장인 등의 노동으로서 기술의 의미, 셋째, 품삯을 받고 일하는 고용된 노동으로서 임금노동의 의미, 넷째, 원주민 노예 또는 외국인 노예들의 노동으로서 노예노동의 의미로 분류될 수 있다. 창조과정에서 하느님께서는 일하셨고, 계속 일하고 계신다. 요셉 성인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목수의 일을 하셨고, 모든 사도들도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노동자였으며, 특히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노동은 육체적 정신적 수고를 의미하며 땀 흘려 노력하는 수고는 존중되어 부인이나 기술자의 힘든 일은 칭찬받았다. 1주일 중 엿새 동안 일을 하는 것은 하루 동안 휴식하라는 계명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게으름이야말로 저주를 받을 것이고, 노동은 언제나 축복받아 하느님은 정직한 노동자에게 상을 베푸신다. 노동자들은 법에 의해 보호를 받고 주인은 노동자가 노예이건 자유인이건 자비로서 대해야 하며, 일하는 자는 정당한 품삯을 받는 것이 당연하였다. 성별에 따라 노동의 면제는 일을 수 없고 남녀가 똑같이 일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이 구약성서에 기록된 내용들이다.

초대 교부들과 중세 신학자들이 선언한 바 있고, 급속한 기술 발전에 의해 새로이 확대된 원리에 다르면, 우선적으로 인정되어야 할 사실은 절대적 주체인 인간과 상대적 객체인 자연의 정적인 병존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동적인 관계이다. 넓게는 인간도 자연 안에 속해 있는 하나의 피조물이므로 비록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본성과 완전성이자연과 분리되어 독립 설정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과 만날 때 노동은 정당한 행위이며, 노동은 인간의 본질적 조건이며, 동시에 인간존재의 체현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노동을 통해 자연에 투영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을 지배하게 되므로 노동에 의해서만 인간의 존재는 규정된다.

노동은 ‘인격의 표현’이다. 인간은 사고능력뿐만 아니라 행위에 있어서도 자연과 구별된다. 비록 인간이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만 그 자연법칙을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율적이며 자유롭다. 인간의 완전성은 자유와 자율성에 바탕을 둔 행동을 통하여 자연에 의해 규정된 테두리를 초월한 존재가 되는데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인간은 자연 속에 매몰되어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각인이 새겨진 새로운 세계를 자연 안에서 만들어 낸다. 즉 자유의지(自由意志)에 바탕을 둔 창조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을 완성시키며 노동의 문명은 바로 이러한 인간 본성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노동은 단순한 기술 도구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표현이며 인간 가치의 구현이다. 노동은 노동하는 사람을 완전하게 하며 동시에 사물들을 변화시킨다. 따라서 노동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객관적 세계는 노동의 완전성을 투영한다. 현대 기술 사회에서는 노동의 결과인 객체가 점점 더 강하고 명백하게 부각되고 있다. 노동수단으로서 완벽한 기계가 수공구(手工具)를 대체함으로써 노동자의 개인적 의도나 행위, 계획으로부터 벗어나 점점 더 독자적 생산형태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기술과 자연의 관계를 분명히 인식함으로써 자연을 이성의 지배 아래 복종하게 만드는 기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확립해야 한다. 노동은 수고로써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습이기도 하다. 이 사실은 노동이 단순히 생존을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것만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성숙된 발전을 위해서도 부과된 것임을 뜻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뜻에 따른 세상 건설의 임무를 노동을 통하여 이룩함으로써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한다. 하느님은 인간이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을 완성된 형태로 창조하시지 않았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발전과정에 있어 함께 일할 협조자로서 인간을 부르셨으므로 인간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형상이요 재능 있는 노동인이며 하느님의 대리자이다. 인간이 창조주와 협동함으로써 자연의 지배자와 건설자가 된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인 것이다. 인간이 자연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정확하게 인식하면 할수록 인간은 자신이 원인이며 동기라는 사실을 더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노동의 문명은 세속적인 문명이다. 그러나 이 문명을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만드는 것도 바로 노동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인간을 하느님의 모습대로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동의 자율성과 자유를 통하여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확인하게 되고, 두렵고 불확실한 자연에 대해 가지게 되는 무력감과 신비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신앙적으로 미숙한 단계를 포용할 수 있고 세속성에 대한 의심을 버릴 수 있을 때 참된 의미에서 하느님의 협조자가 될 수 있다. 산업사회는 교회의 선교형태를 바꾸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세계의 봉헌이라는 의미도 이에 따라 적절하게 바뀌어져야 한다.

자연의 운행에 대한 기술적 지배과정에서 인간 본성의 또 다른 측면이 나타난다. 세상의 변형을 가져오는 노동은 기술적 구체적 형태인 기계와 결합하여 새로운 체제를 이룩하였다. 이 새로운 체제는 재화의 생산과 분배과정에서 처음에는 조잡하고 물질적 수준에서 시작하였지만, 갈수록 심화하는 복잡한 관계 속에서 점차 인간화되어 왔다. 인간은 본성에서부터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교환과 계약을 통해서도 사회화(社會化)되어 왔지만 사회조직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더욱 사회화를 촉진시켜 왔다. 그 결과 사회조직의 차원에서 사회정의 및 공동체 윤리를 둘러싸고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이와 더불어 인간사회의 규모는 갈수록 확대되어 이웃의 개념도 넓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사회관습에 따라 노동자의 이웃은 동료기능인 정도로 국한되던 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과학기술과 통신수단의 급속한 발달로 말미암아 과학언어와 기술문명의 표준화를 초래하였고, 이에 따라 노동자의 이웃도 전 세계를 포괄할 만큼 확장되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도 세계 공동체를 대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개인간의 주고받는 사랑, 가까운 이웃에게만 향해진 사랑의 한계를 넘어서 전체 인류를 감지하고 포용하는 사랑의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이때에 비로소 사회조직의 익명성, 인간사회의 비인간화, 기술사회의 경직성은 극복될 수 있다.

1927년의 <가톨릭대학 연맹에 보내는 교서>에서 교황 비오 11세는 사랑은 정치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한 바 있다. 즉 사랑은 공동선의 증진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도달되어야 하며, 특히 노동의 결과로 이룩된 현대 사회의 한 부문인 정치 분야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인간노동의 사회화를 통하여 인류 공동체는 스스로의 역사를 엮어 간다. 이 역사 안에서 기술의 진보는 공동체 의식을 강력하게 요구하지만, 진정한 발전의 필수적 요소는 어디까지나 그러한 상황을 인정하고 그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이다. 그리스도의 모범은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을 건설하고, 사회화를 통해 자신의 완전한 계발을 이룩함에 있어 훌륭하고도 가장 확실한 길잡이이다. 즉 노동윤리의 진정한 의미와 열쇠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 친히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보여주신 찬미, 봉헌, 자유의 의미이다. 찬미, 봉헌, 자유는 천주의 어린 양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십자가 의미의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이다. 이 그리스도론적 계속성은 노동으로 하여금 자연법칙에 따른 세속사업에의 참여를 인정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의 자율성을 인정해야 한다. 구세주에 대한 믿음은 종말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생활과의 단절을 주장하지는 않고 있음이 성서의 내용을 통해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인간 공동체가 정의와 사랑에 의해 지배되는 정도에 따라 복음의 목적과 효력은 측정된다.

이처럼 가톨릭 교회의 인간관과 사회관에 바탕을 둔 노동윤리의 핵심은 노동이 결코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형벌로서 보속적인 의미의 고통만은 아니며 오히려 하느님의 안배하심 속에서 인간이 하느님의 조력자로서 창조사업에 참여하는 길이기도 하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것처럼 하느님은 자신의 일을 만들어 냄으로써 스스로 노동하시며, 신약성서에 기록된 것처럼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요셉 성인과 함께 목수로서 노동하신다. 인간노동의 영성은 매우 확고하며 분명한 바탕 위에 확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사회의 제도나 조직의 원인과 목적은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사회가 부여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는 가톨릭 사회윤리에 입각하여 바로 잡아져야 한다.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노동헌장>(1891)에서 구체적으로 시정방안을 제시하였다. 노동의 존엄성, 노동자의 권리, 적절한 작업시간, 적정임금, 부녀 및 연소노동의 보호를 역설하고 이에 대한 실천적 방안으로 노동조합의 결성과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구미(歐美) 각국은 가톨릭 교회의 이러한 훌륭한 가르침과 강력한 권고를 길잡이로 하여 노동법의 제정과 함께 각종 노동보호정책을 채택 시행하고 있다. 노동윤리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이러한 전통은 현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회칙 <노동하는 인간>(1981)에서 더욱 밀도 짙게 압축되고 있다. (金漁相)

[참고문헌] Pope Leo XIII, Rerum Novarum, 1891 / Pope Pius XI, Quadragesimo Anno, 1927 / I. Haessle, Das Arbeitsethosder Kirche nach Thomas von Aquin und Leo XIII, 1923 / M. Scheler, Arbeit und Ethik, 1924 / Pope Johannes Paulus, Laborem Exercens,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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