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2월 11일 바티칸시의 라테란궁에서 조인된 교황청과 이탈리아 왕국 사이의 조약과 재정적 협의 및 종교협약을 말한다. 1870년 이탈리아에 의해 교황령이 장악되자 교황들은 잇달아 그것을 부당한 것으로 규정하고 항의 하였으나 이탈리아 정부 또한 한 치도 양보함이 없이 이에 팽팽히 맞섰다. 그러던 중 1922년, 교황 비오(Pius) 11세는 교황위에 오르자 즉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사를 표시했고, 때마침 파시즘의 승리로 부상한 무솔리니(Mussolini)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 후 교회법을 개정시키려는 정부측의 움직임에 대해 교황은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간의 협의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천명하였으며, 이로써 교황 주재 하의 이탈리아와 교황청 사이의 회합이 1929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① 조약 : 전문(前文)과 27개 항목으로 구성. 바티칸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사이의 오랜 문제들에 대해 최종 해결책을 제시. 이탈리아는 바티칸시가 일정한 영토와 국민 및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임을 인정하였으며, 이로써 바티칸 교황청은 화폐와 우표를 발행하고 국민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외교사절을 파견 · 접수하는 등 국제관계에서까지도 교황청이 스스로 절대 독립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탈리아는 다른 종교에 대하여 제재를 가하지는 않지만 가톨릭을 이탈리아의 국교로 인정하였으며, 108.7에이커의 이 작은 국가에 상수도 시설과 이탈리아 철도와의 연결점, 방송국 등을 설치하고, 외부와 전보 · 전화 · 우편시설을 연결시키는 혜택을 베풀기로 하는 등 이탈리아와 바티칸시 사이의 여러 가지 세부적 관계 사항들을 정하였다. 이 조약에 따르면, 교황의 존엄은 신성불가침으로 언행에 있어서의 교황에 대한 모독은 국왕에 대한 것과 같은 비중으로 이탈리아 법에 의해 처벌받으며 교회의 주요 법인 조직체는 정부의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다. 또한 성 요한 라테란 성전과 성 마리아 대성전과 성 바울로 성전 등의 주교좌 성당들과 로마 내의 다른 교회 및 건축물과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의 교황 별장에 대한 교황청의 소유권을 인정하였다. 반면 교황청은 로마를 수도로 한 사보이(Savoy) 왕조하의 이탈리아 왕국을 정식으로 인정하였으며 양편은 모두 이전의 보호법을 폐기하였다.
② 재정적 타결 : 이탈리아 정부는 조약의 중요부분을 이루는 특별한 규약에 의해 교황령과 그 안의 소유물의 손실에 대하여 보상하기로 하였다. 교황은 이탈리아의 경제사정을 감안하여 보상금을 줄여서 현금 7억 5,000만 리라(lire)와 1억 리라에 상당하는 정부의 유통성 있는 채권의 5퍼센트로 책정하였다.
③ 종교협약 : 전문과 45개 항목으로 구성. 앞의 조약과 더불어 이탈리아에서의 종교와 가톨릭 교회의 위치를 자세히 규정하고 있다. 이 협약에 따르면 교회는 이탈리아에서 자유로이 정신적 지도력을 행사하고 공적인 예배를 드리며 종교적 기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정부는 신성한 로마시에서 그 성격에 위배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것도 약속하였다. 교황청은 가톨릭 세계와 자유로이 서신을 교환하고 어떤 언어로든 훈령을 출판할 수 있다. 교황청은 그 이름을 정부에 제출한 후에는 이탈리아에서 대주교와 주교를 선발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 임명된 주교는 국가에 대해 충성을 서약해야 한다. 이탈리아의 성직은 이탈리아의 시민에게만 주어질 수 있으며 신부와 수도사는 병역과 배심원의 의무에서 면제된다. 이탈리아는 혼인성사에 공적 효력을 부여하며 공립 국민학교와 신부, 수사, 평신도에 의해 인가된 중학교에서 종교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가톨릭 활동 보조단체와 같이 종교단체나 자선사업체들은 국가의 인가를 받는다. 그러나 수사나 성직자들의 정당 가입은 다시금 금지되었다.
전 과정을 통해 비오 11세는 시종일관 종교적인 견지에서 영토에 관한 교황권의 우월성을 주장한 데에 반하여 무솔리니의 동기는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이 법안은 이탈리아와 그 외의 국가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회합은 때때로 결렬될 뻔하였으나 조정을 통해 계속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창건 이후 계속 이탈리아에 불명예가 되어 오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으며 교황은 “이탈리아는 신에게 다시 돌아왔고 신도 이탈리아에게 되돌아왔다”고 말할 정도로 이 조약의 결과에 대해 만족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파시스트의 집권 당시에도 이 조약을 둘러싼 충돌이 종종 발생하였는데, 교황은 가톨릭 청년이 정치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비판함으로써 이탈리아 청년들을 완전 장악하려는 파시스트의 저의를 간파한 바 있으며 1937년의 히틀러의 것을 모방한 인종법을 이 조약에 대한 위반으로 규탄하였다. 라테란 조약은 파시스트당과 왕국이 물러나고 1944년 이탈리아가 공화국이 된 후에도 새로운 헌법에 의해 채택되었는데, 이것은 기독교 민주당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의 지지에도 힘입은 것이었다.
[참고문헌] B. Mussolini, Gli accordi del Laterano, Roma 1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