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을 절대악이라 하여 세상의 악과 불의와 폭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데 있어서도 폭력의 사용을 부정하는 사상과 실천을 가리키는 말. 영어의 nonviolent resistance를 무저항주의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이는 타당하지 않다. 비록 폭력은 사용하지 않지만, 악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는 투항주의나 패배주의가 아니라, 악을 종국에는 퇴치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폭력의 사용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비폭력주의라고 번역함이 타당하다.
비폭력주의를 내세운 사람들이나 집단들은 많지만 실제로 악의 세계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채택하여 실천한 사람으로는 간디, 마르틴 루터 킹, 돔 헬더 카마라 등이 대표적이다. 간디는 자신의 비폭력주의가 예수의 가르침과 이 가르침을 실천하려 했던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에게서 사상적인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특히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태 26:2), “바른 뺨을 치면 왼편 뺨을 돌려대라”(마태 5:39), “원수를 사랑하라”(마태 5:44), “악한나무에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마태 7:18),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루가 6:27) 등에 사상적인 원천을 두고 있다. 간디는 악의 세력들은 언제나 사실을 왜곡시키면서 자기들에게만 유익한 신화를 만들어 민중을 기만하고 착취하는데, 이러한 악의 세력들의 허위를 꿰뚫어볼 수 있는 참된 진리를 깨달아 악의 세력들이 구축해 놓은 불의한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방법은 비폭력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비폭력이라는 것이 수동적이거나 무행동적인 현실순응주의나 현실도피주의여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러한 경향은 오히려 악의 세력들의 불의한 제도에 동참하여 협조해 주는 데 지나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그 근거로서 악한 제도를 통하여 군림하고 있는 악의 세력들이란 민중의 맹목적인 순종 속에서 그들의 존립기반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비폭력적인 항거가 확대되면 될수록 그 제도는 무력해지고 악의 세력들도 힘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마르틴 루터 킹 목사도 이 비폭력주의를 도입하여 흑인해방운동을 전개하였고, 라틴아메리카의 돔 헬더 카마라 대주교도 폭력을 퇴치하기 위하여 폭력을 사용한다면 폭력의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면서 ‘정의 · 평화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비폭력주의에 대해 “여유 있는 자들이 희롱하는 사치품”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바야흐로 악이 온 인류에게 커다란 재앙을 내려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고 가려는 악한 제도에서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방법의 도덕성만을 논하고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 폭력 불가지론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있느냐”는 물음은 잘못된 질문이며 오히려 “그 방법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느냐”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정상시의 도덕률을 비상시에도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도 역시 지배자의 불의에 공범자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2차 대전 때 나치학정에서의 본 회퍼나, 알제리 혁명전선에서의 프란츠 파농이나 미국의 흑인 해방신학자인 제임스 콘이나 제3세계의 많은 혁명가들의 반론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비폭력주의의 한계는 명백하게 구획지어진다고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