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us 5세(1504∼1572). 교황(재위 : 1566-1572). 성인. 원명 Michele Ghislieri. 14세 때 도미니코회에 입회, 24세 때 사제로 서품(敍品)된 후 철학 · 신학교사, 도미니코회 수도원장을 거쳐 이단심문소 재판장이 되었다(1551년). 그 후 네피 및 스토리의 주교, 이어서 유럽 전체를 통괄하는 이단 심문소장을 거쳐 비오 4세의 후계자로 교황이 되었다. 교회 개혁을 위해 금욕생활을 장려,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규(敎規)를 엄밀히 시행, 프로테스탄트와의 투쟁을 계속하면서 교황수위권 확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재위 중에 영국의 엘리자베드 1세를 파문했는데, 이것은 커다란 실패였다.
Pius 6세(1717-1799). 교황(재위 : 1775-1799). 원명 Giovanni Angelo Braschi. 이탈리아의 체세나 태생. 신성 로마황제 요제프 2세의 페브로니우스주의(Febronianism)에 의한 교회개혁에 강경히 반대하였다. 프랑스혁명 때는 교황 권한 억제 정책을 거부했기 때문에 아비뇽, 베나이싱 등의 영지를 접수당했고, 또한 나폴레옹 1세에게도 저항했다가 많은 교황령을 양도당한 후 체포되어(1798년) 프랑스의 발랑스에서 죽었다. 교황권이 가장 쇠미하고 무신론과 세속주의가 강했던 시대에 교회를 위한 투쟁으로 일평생을 마쳤다.
Pius 7세(1740-1823). 교황(재위 : 1800-1823). 원명 Luigi Barnaba Chiaramonti. 이탈리아의 체제나 태생. 프랑스와의 절충이 생애를 통해 중요과제였다. 정교(政敎)조약을 체결(1801년), 초청을 받아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주재했으나(1804년), 프랑스와의 관계는 호전되지 않고 교황령은 프랑스에 병합당하였다(1809년). 그는 나폴레옹 1세를 파문에 처하고, 자신은 사보나에 감금된 후 퐁텐블로로 옮겨졌다(1812년). 나폴레옹의 퇴위와 함께 로마로 귀환(1814년), 같은 해에 예수회를 재건하였다. 이어서 교황령의 회복, 이단심문의 부활, 교회정치의 쇄신 등에 진력함으로써 교황의 지위를 강화하였다. 일반 문화 방면에 대해서도 그 진흥을 위해 힘쓰는 등 혁명 후의 질서회복에 노력하였다.
Pius 9세(1792-1878). 교황(재위 : 1846-1878). 1792년 이탈리아에서 출생. 1819년 서품, 교황청 해외 주재 사절로 칠레에서 근무(1823∼1825년), 1827년 대주교, 1840년 추기경을 거쳐 1846년 자유사상가로서의 명성과 더불어 압제적이었던 그레고리오 16세에 이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민족적 단합을 지지하였으나 1848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거부하자 이탈리아 혁명군에게 쫓겨 교황청을 떠났으며 프랑스군이 로마를 함락했을 때 교황청에 다시 돌아왔다. 그 후 정치에 있어서 자유주의를 포기, 1859년 로마냐(Romagna)를, 1860년에는 움브리아(Umbria)와 마르체스(Marches)를 잃고 1870년 로마가 함락된 후 구아란티법에 의해 교황의 모든 세속 주권을 빼앗겼다. 정치적으로는 실패하였지만 영성 및 교회문제에 있어서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가장 큰 성과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에서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 밖에 영국과 네덜란드의 교계제도를 회복시키고(1850, 1851년), 유럽과 아메리카의 제(諸) 정부들과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많은 새로운 교구 및 선교 중심지를 탄생시켰다. 또한 성모의 무염시태 교리를 정의하고(1854년), 현대의 합리주의, 범신론, 종교적 자유주의 및 반가톨릭적 형태의 현대철학들을 단죄하여 가톨리시즘을 수호하는 데 노력하였다(1864년).
Pius 10세(1835-1914). 교황(재위: 1903-1914). 성인. 원명은 사르토(Giuseppe Melchior Sarto). 이탈리아의 리세(Riese)에서 태어나 특히 어머니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서품(1858년) 후 톰볼로(Tombolo)에서 9년간 보좌신부를, 살자노(Salzano)에서 8년간 주임신부를 하고 만투아(Mantua)의 주교(1884년), 베네치아의 총대주교, 추기경 등을 거쳐 1903년의 콘클라베에서 레오 13세를 계승하였다. 그는 청빈, 사도적 사명감, 하느님에 대한 흠숭, 지도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사회 각 방면에 깊은 관심을 지닌 교황이었다. 그는 재임기간의 지도 방침을 첫 교서 (1903. 10)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사회에 해(害)가 되고 있는,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원(疏遠)과 배교(背敎)에 대항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는 정치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하느님의 권위, 하느님의 교회에 대한 순명, 교황권의 확장 등이 달성되어야 함을 확신하였으며, 새로운 과학사조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진리와 법칙을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신학이나 철학 및 해석의 영역에서 지식층에 깊숙이 침투하여 있던 모더니즘에 대항하는 일은 그의 커다란 과제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교황의 강경한 태도는 프랑스 및 구미제국에서 성장하고 있던 반(反)성직주의와 때를 같이 하였으므로 프랑스의 교회재산의 세속화나 이탈리아정부와 교황청 사이의 오랜 문제에서 교황청 측의 양보, 영국 · 러시아 · 미국 · 에콰도르와의 불화 등을 낳았으나 미국의 국제평화와 라틴아메리카의 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케 한 점 등은 교황의 위신을 높였다. 교황은 또한 교회의 내적 쇄신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레고리오 성가를 비롯한 성음악(聖音樂)에 대한 규정을 발표하고, 광대한 교회법을 현대화하고 일관성 있게 정리하기 위해 교회법전의 성문화에 착수하였으며, 1908년에는 교회헌장 을 통해 교회의 중앙정부를 간소화시키고 강화시켰다. 또한 성서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교황의 성서연구소도 설립하였으며 많은 순교자와 수도단체의 창립자들을 성인품에 올리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돈독한 신앙과 겸손을 갖춘 이 교황을 깊이 기억하였으며 1923년부터 시성운동이 추진되어 1951년 시복되고 1954년 시성되었다. 축일은 9월 3일이다.
PIus 11세(1857-1939). 교황(재위 : 1922-1939). 1857년 출생. 1879년 서품. 밀라노 대신학원에서 교의학(敎義學)을 교수(1883∼1888년), 암브로시오 도서관의 관장(1907년)과 바티칸 도서관의 부관장(1912년), 추기경 및 밀라노의 대주교(1912년)를 거쳐 교황으로 피선(1922년). ‘그리스도 안의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것을 자신의 주임무로 생각,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제정하였다(1925년). 그의 위대한 교서들은 모두 같은 목적으로 쓰여졌는데 (1929)는 교육을, (1930)는 결혼 생활에서의 존경의 회복을, 그리고 가장 유명한 (1931)는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재위 기간 중 가장 큰 정치적 사건은 라테란 조약(1929년)의 체결이며 교회의 영성생활은 성녀 소화 테레사와 성 베드로 가니시오 등 많은 성인들의 시성이 있었던 1925년의 성년(聖年)의 해, 그리고 가톨릭 액션에서의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그의 지지, 그리고 종교적 봉헌을 증가시킬 것을 권하는 그의 교서들로 인해 고양되었다.
Pius 12세(1876∼1958). 교황(재위 : 1939∼1958). 1876년 로마 출생. 1899년 서품. 1901년부터 바티칸 국무성에서 근무, 여러 요직을 거쳐 1930년 비오 11세에 의해 추기경 및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교황 사절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미국 및 유럽의 성체대회에 참가. 국무장관의 해외여행이라는 전례를 남기기도 하였다. 선임 비오 11세의 비공식적 요망이 실현되어 1939년의 콘클라베에세 교황으로 선출되어 2차 대전과 격동의 시기에 재위했는데 초기에는 교회의 내적 문제에서 쇄신의 요구에 응하여 그리스도의 신비적 육체인 교회 안에서의 일치를 강조하는 교서 (1943), 가톨릭 교회 내의 성서 연구의 열을 높인 교서 (1943), 전례 운동에 지지를 보내는 (1947) 등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계의 새로운 경향을 비난한 (1950) 등 보수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또한 성모몽소승천(聖母蒙召昇天)의 교리 발표(1950년), 바티칸 지하의 베드로 사도의 묘 발굴, 선임 교황들을 비롯한 33명의 시성, 성주간의 전례 개혁, 세계 각처의 많은 수의 추기경 증원(1946년 32명, 1953년 24명) 등 많은 일을 하였다. 2차대전 때 나치의 잔학 행위에 대한 그의 ‘침묵’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전쟁의 종결, 그리고 특히 난민과 죄수를 위해 노력, 교황청 원조위원회(P.C.A.) 등을 통해 많은 구호사업을 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