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결단을 내릴 때, 십계명과 같은 보편적 도덕률을 염두에 두고 그 정신을 구현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법적 상황을 앞세워 도덕률을 글자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주장과, 한 개인이 처한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상황을 강조하여 도덕률을 무시하는 입장을 말한다. 전자는 율법제일주의의 형태(legalistic style)이고, 후자는 반율법주의, 즉 무법주의 형태(antinomistic style)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윤리를 위협하고 자연법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장애요소로 등장한 것은 바로 후자의 형태로서의 상황윤리이다. 교황 비오 12세는 1952년 가톨릭 청년여성 세계연합회 (Federation Mondiale des Jeunesses Feminines Catholiques)에 보낸 훈시에서 이를 비난하였다.
개신교 신학자 요셉 플레처(Joseph Flecher)가 ‘새 도덕'(The new Morality)을 설명하면서 처음으로 내 놓은 이 윤리사상이 성가(聲價)를 얻은 것은, 체계적인 철학적 관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청년운동에 의해서 또 상황윤리와 죄 신비설간의 관계를 다루는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등 소설가들의 작품에 대한 대중적인 반응을 통해서였다.
윤리의 절대성은 사랑뿐이며 사랑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절대적인 가치나 절대적인 구속력을 갖는 법이 되지 못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상황윤리는 가톨릭 교회의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사랑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방법은 현저히 다르다.
율법제일주의의 상황윤리는 “법을 따르라, 그것이 곧 사랑이다.”고 하면서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고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양심이 명하는 바에 의거하고 사랑을 따르는 의향만 가지면 보편적인 도덕률이나 가치의 적용을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윤리는 이 입장을 비판하고 있다.
도덕생활을 영위하는 데는 보편적인 원리나 가치를 구체적인 경우에 적용시켜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개인이 처한 개별적이고 비 대체적인 경우의 구체화가 보편적인 도덕률의 역할을 정지시킨다는 것은 잘못이며 일반적인 원리의 성격을 무효화시키지 않으면서 특수한 경우에 비추어 응용을 해야 할 것이다.
상황윤리는 양심을 가치와 분리시키나, 도덕적인 결단은 도덕과 관련되는 가치가 인식되고 난 뒤에 비로소 가능하며 이 가치는 구체적인 상황을 초월하여 두루 유효하므로 일반적인 가치이고, 양심은 이런 가치를 전제하여 발로되므로 양심을 가치와 분리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상황윤리는 도덕적인 중요 가치를 행위자의 선한 의향에 둔다. 그러나 사람이 선한 의향을 갖는다는 것은 도덕률을 기꺼이 성취하겠다는 목적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 하겠으므로 선한 의향을 내세워 일반적인 원리를 배척함은 타당하다 할 수 없는 것이다.
상황윤리는 개인주의에 입각하여 한 인간이 ‘지금 여기서’ 자기 결단을 내리는 상황만을 고려하므로 사랑과 정의의 관계 속에서 인격들의 모임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요구를 무시하는 수가 많게 된다.
성황윤리의 죄 신비설 또한 위험하다. 이 설은 죄를 범함은 필연적으로 죄인을 겸손하게 만든다는 믿음으로 오도(誤導)한다. 그러나 범죄는 독선에 빠지지 않도록 보증하는 것이 될 수 없으며 한 범죄인이 다른 범죄인을 비난하고 우월감을 갖는 수가 적지 않은 것이다. 상황윤리의 근저에는 도덕적 의무의 멍에를 흔들어 보고자 하는 저의가 있다. 이 윤리의 옹호자들은 또한 인간의 지위가 피조물임을 거부한다. 은연중에 인간을 하느님과 동등한 평면에 두고 그래서 인간의 영광이 하느님께 복종하는 데 있음을 무시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