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지.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 주로 주교와 신부들이 처형되었다. 한양성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일명 ‘노들’ 혹은 ‘사남기'(沙南基)라고도 불리던 곳으로 조선초부터 군사들의 연무장(演武場)으로 사용되었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버) 신부가 이곳에서 처형당한 뒤 새남터는 수많은 신앙의 증거자들이 순교의 성혈을 뿌린 영광의 땅이 되었다. 그 후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Imbert, 范)과 샤스탕(Chastan, 鄭) 신부, 1846년 기해박해 때 김대건 신부,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1886년 병인박해 때 베르뇌(Berneux, 張) 주교, 브르트니에르(Breteniere, 白), 볼리외(Beaulieu, 徐), 도리(Dorie, 金), 푸르티에(Pourthie, 申),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등 5명의 신부와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의 평신도 교우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새남터의 정확한 위치는 오늘날 확인하기 어려우나 현재 철도청이 기관고로 사용하는 부지일 것이라는 것이 한국 교회의 오랜 주장이다. 그러나 원효로 4가 부근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어쨌든 고증이 어려운 데다가 그 부지의 확보마저 어려워 새남터 근방으로 추정되는 현재의 용산구 서부이촌동 199번지의 땅을 확보하고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하였다. 1956년 이 곳에 ‘가톨릭순교성지’라는 기념탑이 세워졌고, 1981년 한강본당에서 새남터본당이 분리, 독립되기도 하였다. 1983년 한국 복자수도회에서는 새남터에 대성전을 건립하기로 하여 공사에 착공, 그 이듬해 완공하였다. 이 성전은 지하 1층, 지상 3층, 종탑 3층의 순 한국식 건물로 기념관과 전시관, 기념성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