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교구 [한] 延吉敎區

만주 봉천(奉天) 대교구에 속하는 교구의 하나. 교구 관할지역인 북간도(北間島) 지방은 원래 1920년 서울대목구에서 원산대목구가 분리되자 원산대목구에 속했었다. 간도는 지형상 한국의 함경도지방과 접경한 고원지대로, 산악이 드문 평야에 지질이 비옥하여 농사에 적당하였으므로, 일찍부터 국경지방의 많은 농민들이 이주하여 조선의 영토나 별로 다름이 없는 곳이었다.

이곳에 1895년에 김이기(金以器)라는 석학(碩學)이 이주하여, 많은 제자를 모아 진리를 탐구하던 중, 그 진리를 찾아 고국에 들어왔으나 회령(會零)에서 사학괴수로 몰려 죽음을 당하였고, 이에 수제자인 김영렬(金英烈)이 스승의 뜻을 이어 혼자 원산으로 나와, 원산본당의 브레(Bret, 白類斯) 신부를 찾아 갔다. 신부로부터 복음의 말을 들은 그는 천주교야말로 진리임을 깨닫고 세례를 받아, 간도교회의 첫 신자가 되었다. 간도로 돌아간 그는 김이기의 제자들에게 천주교의 진리를 설명하고, 15명의 제자들과 함께 다시 원산으로 나와, 교리를 배워 그 중 12명이 1897년에 세례를 받고 간도에 돌아가 전교에 힘쓰니, 후에 그들을 북관의 12종도라 일컫는다. 간도지방에 천주교가 급속히 전파되자, 원산본당의 브레 신부는 1898년부터 매년 간도지방을 순회하여 그들을 사목했고, 1909년에 이르러서는 용정(龍井)과 영암촌(英岩村)에 본당이 신설되어 퀴를리에(Curlier, 南良) 남 신부와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신부가 각각 부임 하였다. 이어 팔도구(八道溝)에도 본당이 신설되고,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순찰하는 등 간도지방의 교세는 날로 더해 갔다. 이에 1920년에 원산대목구가 서울대목구에서 분리되어, 1909년에 서울에 진출한 독일의 성 오틸리엔의 베네딕토회도 진출하여 더욱 발전을 보게 되었다. 7월 19일 연길지목구를 독립, 초대 지목(知牧)에 독일사람 브레허(Breher, 白) 신부가 취임하였다. 1937년 4월 13일 대목구로 승격되는 동시에 지목으로 있던 브레허 신부가 주교로 성성(成聖)되어 초대 대목(代牧)이 되었다. 그 동안 연길교구는 수도원의 건립과 교회 · 학교 · 병원 등을 증설하여 각종 문화사업과 자선사업을 폈고, 신자수가 날로 증가하여 앞날이 크게 촉망되었으나, 1945년 소련군의 진주로 교회와 수도원은 폐쇄되고,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투옥되었거나 추방되었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젠 중공(中共) 영토가 된 땅에서 목자 없이 남아있는 실정이다. 브레허 주교는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나 1950년 11월 2일 서거하고, 몇몇 성직자들이 왜관 수도원지구에서 포교에 종사하고 있다.

연길대목구는 1946년 4월 11일 중국에 교계제도가 설정됨에 따라 교구로 승격되어 봉천교구에 속하게 됨으로써 한국 교회 관할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는 브레허 주교의 사망 후, 비테를리(Bitterli, 李) 신부가 최근까지 교구장 서리로 연길 교구를 관리하였다.

[참고문헌] 교회와 역사, 合本 제2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한국 천주교 주소록,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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