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궁한 상태에 있는 사람 또는 시설에,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에 입각하여 베푸는 물질적 경제적인 원조를 가리킨다. 특히 가톨릭의 입장은, 자선을 회개의 주요한 형식의 하나라고 생각해 왔으며, 단식(斷食)에 관한 규칙의 완화가 있은 뒤부터는, 이에 버금하는 것으로서 널리 권장되고 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초자연적인 애덕(愛德) 즉 자선이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행위의 원천인 한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적인 대신애(對神愛)의 실행이요, 베품을 받는 대상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가장 광범한 의미에 있어서의 인간의 영육(靈肉)의 고뇌 모두를 모면하게 하며 또는 경감시켜 주는 봉사를 포괄한다고 보겠다.
종래의 도덕률에서는 자선을 베푸는 자선을 베푸는 자의 입장을, 자기 한 몸과 가족을 자기 처지에 알맞게 부양하고서도 여유가 있을 경우, 자선은 사랑의 의무라고 말하기보다 오히려 정의(正義)의 의무라고 여겨졌다. 이렇게 적용된 ‘자기 처지에 알맞은 필요’라는 실제적인 척도는 물론, 이에 대응한 의무적인 자선의 기반이 되는 ‘과잉’ 또는 ‘여유’의 관념도 개인주의화된 복잡한 오늘날의 사회에선 모호하기 짝없는 것이 되었다. 부유층이 사회정책 입법의 발동에 따라 부담하게 되는 ‘사회적인 부담’은 그 본성상(本性上)의 의무 충족이지, 자선이라는 ‘사랑의 의무’로 대체될 수는 없다고 본다. 사랑보다도 정의의 규범에 편중하는 데서 자선에 대한 이론이 생기는 것이므로, 그리스도교적인 자선은 덕행으로서 본래 이성적이라는 점을 어디까지나 그 본질 파악에 있어 깊이 주의하도록 해야만 한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자선사업’(corporal works of mercy)은 애덕의 7가지 실천, 곧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는 일,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일, 집 없는 자에게 머무를 곳을 제공하는 일, 병든 자를 방문하는 일, 감옥에 있는 자를 방문하는 일, 죽은 자를 묻는 일 등을 말한다. 종교개혁자, 특히 칼빈은 가톨릭적인 덕을 비판하고, 자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으나, 차차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신앙의 당연한 귀결로서 사회구제의 여러 활동을 활발히 행하여 오고 있으며, 자선이라는 용어보다 ‘봉사’(奉仕)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향이 짙다.
[참고문헌] J. Foerstl, Almosen, 1909 / F. Keller, Caritaswissenschaft, 1925 / G.J. Budde, Christian Charity, Now and Always: The Fathers of the Church and Almsgiving, 1931 / L. Bouvier, Le Precepte de l’aumone chez saint Thomas d’Aquin, Montreal 19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