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 [한] 敎育學 [영] pedagogy

이 용어는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지만, 우선 정규적 가르침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함이 옳다. 넓게는 교수의 방법과 이론들의 수세기에 걸치는 범위, 그리고 한 문명이 다른 문명으로 바뀌어 가는 변천과 진보의 역사를 포용할 정도이며, 좁게는 특수한 원리들의 체계화와 이런 체계화에 대한 연구, 다시 말해서 사고(thought)가 과학적인 정신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는 경우를 말한다. 완전한 교육학적 이론은, 위와 같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 가치에 대한 철학이 대부분을 포함하는 것이어서, 미국 등 영어사용권의 여러 나라에서는 교육학이란 용어를, 보다 포괄적인 말인 ‘교육’(education)이란 말로 대치하여, 금세기에 크게 증가된 여러 대학들의 교육학부의 관심이 교과과정 계획, 학생지도와 각 단계별 학교들의 조직과 운영, 제반 분야에까지 파급되고 있다. 그러나 이 항목에서는 인습적이고 제한된 뜻으로서의 교수방법을 뜻하는 교육학 발전의 역사를, 그것도 가톨릭적인 교육학에 국한해서 다음에 간추렸다.

예언자들과 서기관들은 이스라엘의 교사들이며, 구약은 그들이 쓴 글을 집대성한 것이므로, 의식적이건 암시적이건 간에 자연히 교육이론과 교육학적인 견해를 드러냈다. 교육은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사명으로 여겨졌고(비교, 신명 4:7), 모든 교사들의 원형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가르친 거룩한 스승 곧 야훼 그 자신이었다(출애 4:12). 즉 모세는 “이스라엘은 들어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를 듣고 지켜라. 야훼께서 나에게 내리신 법규와 규정들을 그대로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다”(신명 4:5)라고 하였다. 이렇듯 교육과정은 하느님의 허락과 권위를 소유하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도교적 교육학의 중심문제였던 그리스도교의 교육사상이 고대문명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뒤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내놓은 원리 “은총은 자연을 전체로 삼으며 이를 파괴하지 않는다”(Gratia supponit naturam, non tollit)에 좇아서 해결되자 고대문화의 연속성이 확보됨으로써 광대한 범위에 걸친 사업이 이룩되었다. 교육에 흥미를 지녔던 철학자들은 기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교수방법을 지시해 줄 보편적인 학습 패턴을 발견하려는 꿈을 때때로 지녀왔다. 듀이(John Dewey, 1859~1952)는 결실이 있게 하는 모든 사고는 많은 선택의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문제상황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믿었다. 듀이보다 1세기 이전 사람인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는 행위학습(learning by doing)이 강제적이기보다는 흥미를 통해 동기를 유발시키는 듀이와 비슷한 교육학을 주장하였다. 루소의 《에밀》(Emile, ou Traite de I’Education)에서 전형적인 예를 든다면, 말치레(verbalism)와 책을 통한 학습을 배격하는 가정교사는 에밀에게 그로 하여금 숲에서 길을 잃게 하고, 그런 다음, 나무 그림자의 방향을 관찰하여 길을 찾아내도록 하게 하는 방법을 통해 천문학의 원리들 가운데 그 일부를 가르친다.

가톨릭적인 교육학은 19, 20세기에 와서도 그 주요임무로 맡은 것이, 교육에 있어서 교회가 지닌 독자적인 여러 가치와 그때그때의 문화의 근본적 요구와를 잘 결합 · 조화시키는 일이었다. 그 주요 사상의 골자를 보면, 교육의 궁극 목적은 인간이 천주님 속에 자리 잡는다는 것, 이 목적은 성총의 힘을 빌어서만이 달성되며, 지상에는 인간이 소유하는 불멸의 영혼보다 더 높은 가치는 존재하지 않고, 영혼은 그 구령(救靈)과 완성을 위하여, 영혼의 본질에 필연적인 공동체 즉 가족 · 단체 · 국가 및 교회에 관계하며 이 공동체의식과 영혼의 내적인 만남은, 영혼의 가장 깊은 중핵에 접근했을 때만이 그 기초를 갖게 된다는 것, 이리하여 구세주는 역사의 중점(中點)에 섬과 동시에, 모든 교육자의 절대적인 모범이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20세기 과학기술은 전통적인 학습방법들을 본질적으로 변형시킴이 없이 학습방법의 기교들의 다양화를 이루어 놓았고, 또 교육학의 개척자들은 대부분 어린이들에 대한 교수에 주력을 기울여왔다. 왜냐하면 이들 어린이에 대한 교수가 그 자체로서 더욱 어려움은 물론, 몰지각하고 또는 화석화된 교육절차에 예속될 위험이 더 크기 때문이었다. 16, 17세기에 예수회 회원들이나 모라비아파 감독 코메니우스(Comenius, 1592~1670)와 같은 교육개혁자들은 통속적이고 야만적인 교육학을 개탄하여 호레이스(Horace)의 교사인 절굿공이 오르빌리우스(Orbilius)의 가장 매력없는 특질들만 골라서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당시의 라틴어 문법학교를 ‘정신적인 살인집단’이라고 불렀지만, 매질하지 않고 가르치는 것이 일반화되기는 그보다 수세기가 더 지난 뒤였다.

가톨릭적인 교육학과 직접 관련되는 윤리교육 문제, 성교육학 문제에 대하여는 주로 프랑스에서 강조되고 있으며, 종교교육학 문제는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각기 연구되고 있다. 특히 교육학에 관련된 흥미 있는 새 경향은 의학과 교육과의 협동인데, 이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이론적인 성과를 거두어 교육학 및 의학의 한계문제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에까지 발전되어 왔다. 이에 대한 논문에, 미뇽(A. Mignon)의 , 봉(H. Bon)의 , (Lyon 1936)등이 있다. 가톨릭적인 교육학 이외의 학계에서 이따금 파생되는 현상의 하나로서, 교육심리학적인 연구의 발달로 말미암아 교육학 전체를 아무 연관이 없는 세부적인 교육생활의 심리학, 예컨대 아동학(兒童學, Paedologie)으로 몰고 갈 염려가 많다.

그러나 오늘날의 가톨릭 교육학은, 교육에 객관적인 가치와 표준을 부여하지 못하는 심리주의에 대하여, 모든 교육의 궁극적인 통일과 확실성을 줄 수 있는 규범에 대한 믿음을 수립해 나가므로, 이 교육학의 참된 의의는 학적 업적에서 찾기보다는 이 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오이켄(Rudolf Eucken)의 말처럼 “그리스도교는 위대한 과거뿐만이 아니라, 또한 위대한 미래를 갖는 것이다.”

[참고문헌] Comepius, The school of Infancy / Rousseau, Emile / Herbert, The science of Education / Dewey, The Child and Curriculum; The School and Society / Fr. Schneider, Bildungskrafte im Katholizismus der Welt, Freiburg 1936 / Gottler, Geschichte der Padagogik Grundlinien, 1935 / Philippe Aries, Centuries of Childhood: A Social History of Family life,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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